스카티 피펜
1. 개요
스카티 피펜은 전 NBA 농구 선수이다. 현대 스몰 포워드의 표본과도 같은 선수로 '''역대 최고의 스몰 포워드 수비수 중 하나이자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서도 역대 최고 수비수 중 하나이며, 90년대 최고의 스몰 포워드.''' 시카고 불스에서 마이클 조던과 함께 6번의 우승을 이뤘고 올림픽에서 드림팀의 멤버로 2개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 커리어
2.1. 유년기에서 고교 졸업 전까지
스카티 피펜은 아칸소 햄버그 출생으로 12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집은 말 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했다. 그의 아버지는 가족을 먹여살리려고 불철주야 쉼없이 일했다. 피펜은 농구선수로서의 성공을 꿈꿨지만...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절 그의 키는 겨우 5피트 9인치(약 175cm). 그러다보니 운동부에서는 퇴짜맞기 일쑤. 간신히 들어간 농구부에서도 별반 두각을 나타내지도 못했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들겠지만, 당시에는 키도 작은데 몸무게 또한 아주 적게 나가서 거의 연필같았다고 하며 뚜렷하게 재능도 보이지를 못했다고 한다. 졸업이 다가오고 대학에서 스카웃 제의가 와야 했지만 디비전1 대학은 고사하고 디비전2, 디비전3 대학도 이런 피펜을 눈여겨보는 곳이 없었다. 아웃 오브 안중.. 지못미.
고등학교 코치는 급기야 자신의 대학 은사에게 피펜을 받아달라고 하소연하기에 이르렀다. 그 대학은 바로 센트럴 아칸소 대학으로, NCAA가 아닌 NAIA라는, 당시에도 지금도 존재감은 엄청나게 안습인 대학리그 팀이었다.[6][7] 사실 센트럴 아칸소는 NAIA에서도 존재감이 안습인 대학이었는데, 역사상 이 대학을 졸업하고 NBA에 간 선수는 '''단 한명''', 피펜 뿐이었다. 게다가 NBA 2K20에 등장해 피펜 본인 입으로 썰을 푼 바에 따르면, 선수로 간 것도 아니고 팀 매니저로 합류했다고 한다.
2.2. 반전의 대학시절. 그리고 NBA 입단
하지만 1학년 때도 별 두각을 나타낸 것도 아니었다. 1학년때 성적이 4.3점 3.0 리바운드가 고작이었으니 말이다. 키도 6피트 1인치까지 밖에 자라지 않았다. 이대로 피펜은 대학시절도 그저 그렇고 그런 선수가 될 뻔 했으나... 기가막힌 반전이 찾아왔다.
2학년때 몸무게가 8파운드나 늘어나고, 키는 6인치(약 15cm)나 자란 것이다.[8] 이 때부터 피펜은 자신감이 생기기 시작했다. 2학년때 18.5점 9.2 리바운드. 3학년때 19.2점 9.2 리바운드. 졸업반인 4학년 시즌에는 23.6점 10.0 리바운드 4.3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하지만 자신이 속한 대학농구팀이 안습의 대학리그 소속이었기 때문에 큰 관심을 받지는 못했다. 스승인 돈 다이어 감독은 NBA 단장들에게 피펜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그를 발견한 이는 마티 블레이크(1927~2013) NBA 스카우트부장이었다.
그는 친분이 깊은 제리 크라우스 시카고 불스 단장에게 피펜의 포츠머스 토너먼트(대학 졸업반 농구대회)를 보여줬고, 경기를 본 크라우스 단장은 에이전트 지미 섹튼에게 "제발 다른 팀에게 피펜을 보여주지 마라"고 부탁하는 한편, "필요하다면 팀이 비용을 전액부담할 테니 드래프트 사전 캠프에 참석하지 말고 하와이로 2주간 휴가를 가라"고 제안했다. 심지어 새크라멘토 킹스가 피펜을 알아채면 어떻게 될까라고 밤잠을 설쳤다는 일화도 있었다. 당시 불스는 8위, 킹스는 6위 지명권을 지녔기 때문이다.
참고로 크라우스는 좀 특이하게 사고를 하는 사람이라 이런 씨알도 안 먹히는 제안을 다른 선수에게 한 적도 있는데, 피펜을 뽑은 다음 해인 88년 드래프트를 앞두고 1라운드 지명이 확실시되는 댄 멀리(썬더 댄이란 별명을 가진 백인 선수로 외곽슛과 운동능력이 뛰어났으며, 올스타에도 세번 뽑혔다)에게 "우리가 2라운드에서 지명해줄테니 다른 팀과 워크아웃을 거부하게"란 택도 없는 제안을 했다. 말리는 너무 당연하게도 "거부하겠습니다. 1라운드에 뽑혀야 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는데요"라고 답했다. 돈 문제를 떠나 한 팀의 지킨다는 확신도 없는 말만 믿고 워크아웃 거부란 무리수를 두는 건 바보짓이다. 보통 워크아웃 거부는 해당 팀에 대한 지명 거부로 해석된다.(물론 지명이 확실시되는 초대형 유망주의 경우 아예 일괄적으로 워크아웃 자체를 안하는 경우는 있다) 대놓고 "난 당신 팀 가기 싫다"고 하진 않는게 예의이자 불문율. 실제로 멀리가 이렇게 했다가 시카고가 쌩깠다면, 멀리 정도의 대형 유망주가 안 뽑힐리는 없겠지만 지명된 팀과 좀 서먹했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이 때문에 싫어하는 팀에 뽑혀서 트레이드를 추진해도 겉으로는 일단 기쁜 척을 한다. 실제로 공개적으로 밴쿠버 그리즐리스 행을 거부했던 99년 2번 지명자 스티브 프랜시스는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근데 크라우스는 다른팀이 피펜을 가로챌까봐 두려워했고, 피펜은 워크아웃을 통해 자신이 NBA 레벨의 선수임을 확인시켰다. 크라우스는 불안감이 증폭되었고, 결국 시애틀 슈퍼소닉스와 협상을 하게 되고, 피펜은 전체 5순위로 시애틀에 지명되고 바로 그날 전체 8순위로 지명된 올덴 폴리니스[9] 와 트레이드 되어 불스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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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덴 폴리니스와 스카티 피펜의 모자 교환. 당시에는 별것 아닌 광경이지만 이것이 불스왕조의 초석임을 아무도 알지 못했다.
당시 드래프트 데이 광경을 보면 피펜의 이름이 불리는 순간 관중석에서 터져나오던 야유들은... 당시 팬들 대부분의 반응을 딱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저 듣보잡은 뭐임???" 여담이지만 이 해도 그렇고 전통적으로 드래프트가 열리는 현장은 뉴욕이다. 그렇기 때문에 뉴욕 닉스가 뻘픽을 하면 드래프트장이 떠나가라 야유를 하는데, 희한하게 뉴욕팬들은 자기와 상관없는 팀들이 뻘픽을 해도 야유를 보내곤 한다. 1984년 드래프트에서 듣보잡이었던 존 스탁턴이 16번이란 의외로 높은 순위로 뽑히자 팬들이 야유를 퍼부었는데 (스탁턴은 당시만 해도 무명이었던 곤자가 대학 출신이었고, 이 때만 해도 당연히 NBA에 못 갈 거라 생각해 유럽으로 가서 선수생활을 계속할 생각이었다) 이때 스탁턴과 전화통화를 하던 드래프트 해설자는 "팬들이 야유한 게 아니에요. 누구냐고 물은거지"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누구?(Who?)"라고 물어보는 것과 길게 "우우우우(Boooooo~)"라고 야유를 하는 건 비슷하게 들릴리가 없고, 실제로 들어봐도 야유를 하는 게 분명했기 때문에 그냥 조크성 위로다. 둘의 표정이 상반되어 있는걸 볼수있는데, 그당시만 해도 시카고 불스는 꽤나 약체였기 때문에 당시만 해도 만감이 교차 했을 상황이었다.
2.3. 시카고 불스 시절
2.3.1. 초반 3연패의 주역 그리고 올림픽 금메달
시카고에 입단한 후 그는 조던과의 연습을 통해 성장해 갔다. NBA를 소개하는 루키잡지에 피펜 관련 칼럼을 보면, 둘의 초창기의 관계는 스승과 제자. 조던은 당시 피펜을 그 특유의 제왕적 기질로 갈궜다고 한다. 하지만 피펜은 불만을 터트렸다거나 했다는 이야기는 없다. 오히려 필사적으로 덤볐다고. 이유는 바로 자신이 농구선수로서 성공해서 집안을 일으켜야 했기 때문. 하지만 루키시즌과 1990년 플레이오프때는 나약한 모습을 많이 보여서 비판받기도 했다. 1990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 7차전때 알 수 없는 두통에 의해 10개의 슛 중 9개를 놓치게 된다. 그리고 피펜 본인도 이때부터 디트로이트 배드 보이스라면 이를 갈았을듯. 당시 디트로이트의 육탄전에 가까운 수비 에 시달렸고 데니스 로드먼에 의해 턱에 흉터가 생기기도 했다.
사실 1990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배드 보이스는 지독하도록 피펜을 괴롭혔는데 사실상 조던 룰을 피펜에게도 어느 정도[10] 적용했다고 보면 된다. 그 전까지는 조던 한 명만 잡으면 되기 때문에 조던룰 [11] 로 조던만 막는데 주력했다. 그러나 피펜이 점점 성장하면서 위협으로 작용하자 무지막지한 구타를 피펜에게도 적용한 것이다.
1991년 플레이오프에서는 그 원한이라도 되돌려주려는듯 시카고는 디트로이트를 4전전승으로 처바르고 파이널에 오르게 된다. 상대는 매직 존슨이 이끄는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 1차전을 패한 후 내리 4연승을 하며 우승을 하게 된다. 원래 불스는 조던에게 매직 존슨의 수비를 전담시켰으나 당시 불스 공격까지 거의 전담해야 했던 조던에게 지나친 짐이라 여겨 2차전부터 조던과 피펜이 번갈아가며 매직을 막게 된다.[12] 피펜은 이때 매직을 끈질기게 괴롭히면서, 공수양면에서 대활약하게 된다. 1993년까지 3개의 우승반지를 끼우게 된다. 그리고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에서 미국 농구 국가대표팀(드림팀1)에 선발되어 금메달도 목에 걸게 된다.
2.3.2. 구단과의 불화, 그리고 돌아온 조던, 또 한번의 3연패
그런데 피펜에게는 한가지 걸림돌이 있었다. 바로 슈퍼스타인 그에게 걸맞지 않은 형편없이 낮은 연봉 때문이었다. 그가 신인시절 맺은 계약은 7년간 2천 2백만 달러. 언뜻보면 당시에 연간 약 300만달러를 받는것 같아 보였지만, 첫해 그의 연봉은 약 72만달러 정도였다. 그의 연봉지급은 인상과 삭감폭이 너무 심했다. 그리고 1994년에 입단한 토니 쿠코치가 자신보다 더 높은 연봉을 받는다는 사실에 그는 팀에 섭섭함과 실망감을 드러냈다. 하지만 다큐멘터리 The Last Dance에서는 제리 라인스도프 시카고 불스 구단주가 피펜에게 더 좋은 계약을 앞으로 따낼 수 있는 상태에서 이런 장기 계약을 받아들이면 후회하게 될거라고 자신이 경고했다고 말했으며, 피펜 또한 앞으로 부상 등의 이유로 농구를 할 수 없는 상황때문에 가족을 먹여살릴 수 없는 상황을 걱정했기 때문에 당시에 덥썩 계약을 맺은거라고 씁쓸하게 말했다. 그리고 같은 다큐멘터리 같은 회차에서 필 잭슨의 증언에 따르면 피펜이 올스타로 성장한 이후 계약 협상을 원했지만 구단주인 제리 라인스도프는 나랑 협상할 생각 하지 말라며 냉정하게 내쳤다고...
실제로 피펜이 루키시즌 장기계약을 맺은 다음 제대로 된 계약을 맺을 기회가 있었는데, 문제의 (97-98시즌까지 이어지는) 장기계약은 그의 계약기간이 남은 90-91시즌에 이뤄졌다. 당시 불스는 61승을 거뒀지만 초반까지만 해도 별다른 전력보강이 없어 확실한 우승후보로까지는 여겨지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또 조던과 아이들이 될게 유력했기 때문. 피펜은 90시즌 올스타에 선정됐지만 확실한 올스타는 아닌데다가(실제로 91시즌엔 올스타 선정 실패) 피펜 본인이 예전에 등 통증으로 고생한 적이 있어 본인의 커리어에 대한 의구심이 강했다. [13] 그러던 와중에 시즌 내내 제리 크라우스와 구단주 제리 라인스도프는 유러피언 센세이션 토니 쿠코치에게 꽂혀있었고, 심지어 시즌 도중 그를 보러 유고슬라비아를 방문하기까지 한다. 당시 이들은 가드를 주로 보던 쿠코치를 주전 PG로 쓰겠다고 공언했지만[14] 그의 포지션과 키를 보면 당시 NBA에서 가드는 무리였고 실질적으로 스몰포워드를 볼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에 피펜은 이에 불안해하게 된다. 이 때문에 피펜은 시즌 내내 연장계약을 요구했고, 두 제리가 유고에 가 있는 동안 언론에 불만을 토로하는 사고를 친다. 결국 구단주 라인스도프가 돌아와 한바탕 노발대발을 한 이후 '''피펜의 소원대로 연장계약을 한 것'''. 당시 기준으로 피펜의 연봉은 그의 리그 내 입지를 고려했을때 오히려 후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훗날 피펜이 91-92시즌을 기점으로 슈퍼스타가 되고, 리그 평균 연봉이 큰 폭으로 오르면서 노예계약이 된 것. 이는 마이클 조던도 마찬가지로, 80년대 후반에 계약을 할때는 리그에서 가장 많은 수준이었지만 이후 90년대부터 95-96시즌에 계약이 만료될때까지 그는 노예계약 수준이었다. 후술되는 론 하퍼와 토니 쿠코치는 샐러리캡이 증가한 이후 계약한 것.
사실 따지고보면 구단 입장에서는 최대한 피펜의 편의를 봐준 것이다. 피펜은 연장계약을 절실히 원했고 당시 그의 입지로서는 상당히 고액이었기 때문. 때문에 피펜이 슈퍼스타로 성장한 이후 본인은 환장할 노릇이었겠지만 이와 관련해서는 본인밖에 탓할 사람이 없다. 라인스도프가 보너스를 준다던지 하면 대인배였겠지만 원래 돈 쓰기 싫어하는 그가 그 정도까지 편의를 봐줄 이유는 엄밀히 따지면 없다.
그 전부터 제리 크라우스 단장은 계속해서 쿠코치를 찬양하고 영입의 의지를 보이는 등 많은 관심을 보내왔다. 그것을 빌미로 쿠코치는 올림픽에서 성질이 있는대로 난 피펜과 조던에게 정말 안습하게 쳐발리게 된다. 실제로 피펜은 시카고를 떠날 때까지 쿠코치보다 적은 연봉을 받았다. 심지어는 2차 3핏때 영입했던 론 하퍼[15] 는 영입 당시 31세로 클리퍼스에서 평균 20득점대를 올리던 선수긴 했지만 무릎 부상 후유증으로 기량은 계속 쇠퇴중이었고 불스에선 토니 쿠코치에도 밀리는 3~4옵션에 불과한 수준이었음에도 피펜보다 연봉을 많이 받았다. 불만이 안 쌓일래야 안 쌓일 수 없다. 1994년 플레이오프 3차전에서는 박빙의 경기에서 종료시간이 1.8초가 남은 상황에서 필 잭슨 감독이 마지막 슛을 피펜이 아닌 쿠코치에게 맡기자, 그는 코트에 나가기를 거부하고 그대로 벤치 의자에 앉기도 했다.
결국 쿠코치가 그 슛을 성공시키면서 피펜은 전국구적인 비난을 받게된다. 93-94시즌동안 조던 없이 안된다며, 피펜과 불스에 대한 비관적인 시선을 그때 피펜은 올스타전 MVP와 시카고 불스 55승이라는 성적표로 조던 없이도 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었기 때문에, 그의 이런 행동은 더 비난받았다. 게다가 냉정하게 판단하면 잭슨의 결정이 백번 옳았다. 피펜은 좋은 득점력의 소유자고 슛거리도 길었지만 안정적으로 슛을 넣는 선수는 아니었다. 파이널 한 경기에 3점슛 7개를 넣는 등 터질 때는 터지지만 슛 한방이 필요할 때 맡길만한 선수는 아니란 말. 99년에 시카고를 떠난 이후에 포틀랜드에서 리더 역할을 맡을 때도 마지막 슛을 전담하는 선수는 아니었다. 반대로 쿠코치는 피펜보다 훨씬 뛰어난 슈터였으며 NBA 기준으로는 루키였지만 이미 유럽에서 8년이나 (17세에 데뷔) 뛴 베테랑이었다. 게다가 오랫동안 에이스로 뛰어왔기 때문에 스스로 득점기회를 만들거나, 승부가 걸린 상황에서 해결하는 것에도 익숙했다. 오히려 피펜의 자존심을 세워주려고 그에게 마지막 슛을 맡기는게 적절치 못한 처사였을 것이다.
슈팅력이 불안정한 에이스가 자기보다 실력이 훨씬 떨어지는 벤치멤버에게 클러치슛을 넘기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실력이 좋다고 다른 모든 부분에서 앞서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심지어 피펜과 비교도 안되게 중거리 슈팅력이 앞서며 역대 최고의 클러치 플레이어 준 하나인 조던조차 97파이널 5차전에서 쿠코치보다 훨씬 떨어지는 스티브 커에게 패스해준 적이 있다. 당연히 조던은 클러치슛을 터뜨릴 능력이 있었으나 상대가 이중삼중 마크를 할 경우 더블팀을 뚫고 득점하는 것보단 오픈 상태의 커가 쏘는게 훨씬 성공률이 높기 때문. 피펜은 더블팀당할 선수는 아니었으나 슈팅 자체가 쿠코치보다 훨씬 못했다.
어이없는 건 그가 경기 투입 자체를 거부했다는 것. 당시 시카고 최고의 패서이자 베테랑인 그가 안정적으로 인바운드 패스를 해주는 것 역시 중요했다. 인바운드 패스의 중요성은 NBA 역사에서 무수히 많이 증명되었는데 당시 기준으로 봐도 87년 동부 결승에서 래리버드가 해낸 전설적인 클러치 역전 스틸&어시스트 역시 아이재아 토마스의 인바운드 패스를 스틸한 것이다[16] . 또한 빌 러셀과 윌트 체임벌린의 마지막 동부 컨퍼런스 대결인 68년 동부 파이널에서도 1점 앞서고 있던 셀틱스에서 리더인 빌 러셀이 "인바운드 내가 할게! 아무한테도 못 맡긴다!"라며 나설 정도였다. [17] 보면 알겠지만 인바운드 하나로 팀들의 운명이 바뀌었다. 이렇게 중책을 맡겼는데 이를 내팽겨친것. 이 때문에 피트 마이어스가 인바운드 패스를 했는데 약간 불안정하게 주어서 쿠코치는 22피트짜리 (3점슛라인 한발짝 안) 턴어라운드 점퍼를 던져야 했다. 들어갔으니 망정이지...
당시 피펜이 기회를 받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해당 경기 영상을 보면 불스가 4쿼터에 101-94로 앞서고 있는 상황에서 닉스의 에이스 패트릭 유잉이 연달아 슛을 성공시키며 무려 8연속 득점했고, 그 사이 불스의 피트 마이어스가 자유투 한 점을 성공시키면서 점수가 동점이 된 것이다. 게다가 불스가 4점차로 앞서는 상황에서 '''피펜이''' 포스트업 페이더웨이를 던진 것이 빗나가고, 이후 2점차로 앞서고 있을때 17.9초, 샷클락엔 13초가 남은 상황에서 불스가 타임아웃을 부르고, 불스는 '''피펜의''' 아이솔레이션 플레이를 주문했다. 그런데 하프코트 부근에서 볼을 잡아서 1대1 상황이 된 '''피펜이''' 수비수 한명(앤써니 메이슨)을 제껴내지 못하고 13초를 혼자 드리블하며 허비하곤 택도 없는 3점슛을 던져(림에도 안 맞고 백보드 '''위쪽'''을 맞고 튕겨나갔다) 공격권을 날려버린 상황이었다. 물론 조던도 클러치샷을 놓칠 수 있다. 그러나 다 제끼고 아깝게 빗나가거나 간발의 차이로 실패하는 조던과 달리 피펜의 샷은 누가봐도 막무가내로 무리하게 던진 샷이었다. 피펜은 괴물같은 운동능력을 이용한 속공이나 포스트업 이후 훅슛, 가속이 붙은 상황에서 스피드를 이용한 돌파로 주로 득점하는 선수였지, 조던처럼 아이솔레이션에서 수비를 제껴내는 드리블 실력을 지닌 선수도, 안정적인 슈팅 터치를 지닌 선수도 아니었다. 13초나 남은 상황에서 대놓고 1대1 상황을 만들어줘도 못 넣는 선수에게 1.8초 남겨두고 원샷 플레이를 맡긴다는게 말도 안되는 상황. 피펜의 이름값 때문에 논란이 됐을 뿐 애초에 과한 욕심이었던 것이다. 당시 유튜브 동영상 결국 시카고는 컨퍼런스 세미 파이널에서 뉴욕 닉스에게 7차전까지 가는 접전을 펼쳤으나 결국 탈락하고 말았다.
이 때를 기점으로 94-95시즌이 시작되면서 불스도 흔들리고 피펜도 흔들렸다. 시즌 시작전 절친이자 팀 동료들이었던 호레이스 그렌트와 빌 카트라이트, 스캇 윌리엄스는 다른 팀으로 이적했고, 존 팩슨은 은퇴하여 전력이 약화되었다. 또한 피펜은 구단이 연장계약이라든지 계약갱신을 해주길 원했지만, 구단은 "당신이 그런 낮은 연봉을 받을선수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돈이 없다."이라고 무시했고, 오히려 그를 트레이드 하려고 했었다. 한국에 발간된 필 잭슨의 저서 NBA 신화에 따르면, 당시 시애틀 슈퍼소닉스가 숀 캠프와 리키 피어스를 매물로 트레이드를 요청해왔었다고 한다.
사실 팬들 사이에서 이 부분은 "짠돌이 크라우스가 돈 몇푼 아끼려고 피펜을 헌신짝 버리듯 했다"라는 평이 지배적이지만, 따지고 보면 다른 이유도 있다. 바로 피펜은 1인자로서 어느 정도 한계가 있는 선수라는 점이다. 피펜은 전성기 당시 평균 22점을 득점하던 수준급 득점원이었지만 소위 말하는 go-to move(에이스로서 안정적으로 득점해줄 수 있는 확실한 공격옵션)가 없었다. 체격과 힘이 괜찮아 작은 상대를 포스트업해서 밀어낼 수도 있었지만 조던이나 매직 존슨같은 마무리 능력은 없었으며, 슛거리는 길었지만 기복이 심하고 자유투성공률이 말년 전까지는 6할대에 그칠 정도로 슈팅력도 별로였다. 이로 인해 닉스와의 플레이오프에서는 피펜을 제치고 루키 토니 쿠코치에게 결승슛을 맡겨야 했던 것이다. 공격에서 피펜의 가장 큰 강점은 속공에서 마무리하는 능력이었는데, 하프코트 오펜스에서는 한계가 있었다. 반면 숀 켐프는 96파이널에서 로드맨이 그에게 달라붙었음에도 오히려 시즌/플옵보다 높은 평균득점을 기록할 정도로 좋은 득점력을 갖고 있었다. 또한 켐프가 피펜보다 네살이나 어린 점도 컸다. 물론 전체적인 기량에서는 피펜이 켐프보다 나으면 나았지 결코 못하지 않다. 커리어 자체를 보면 당연히 피펜이 월등하다. 그러나 당시 시카고 불스는 속공도 가능했지만 기본적으로 트라이앵글 오펜스를 주축으로 한 하프코트 오펜스 팀이었는데, 이런 팀에서는 켐프처럼 확실한 공격옵션이 있는 편이 유리했다. 반면 시애틀은 리그 최고의 속공 팀이자 최고의 PG수비수인 게리 페이튼이 버티고 있는 강력한 수비팀이었기 때문에 피펜이 2옵션으로 페이튼을 받쳐준다면 활개를 칠 수 있었다. 결국 두 팀다 윈윈 트레이드가 될 수 있었다는 말. 물론 조던이 복귀하면서 피펜은 "리그 최고의 2인자" 자리로 복귀하고 불스는 다시 역사를 만든다.
결국 피펜과 시카고 불스 구단은 돌이킬 수 없는 관계까지 가벼렀다. 다음 94-95 시즌 시카고 불스의 성적도 승률 5할에서 왔다갔다 하는 등 기복이 심했다. 시즌 60경기까지 치른 시점에서도 30승 30패로 간신히 5할을 맞췄을 정도. 결국 "날 보내달라. 시카고 불스만큼 형편없는 구단이 또 있는가? 시카고 구단에게 말한다. 날 보내달라"라며 트레이드 요청을 하기에 이른다. 필 잭슨이 자서전에 언급한 내용에 따르면, 자신에게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곳이라면 아무데나 갈 모양이었던 것 같다. 로스엔젤레스 클리퍼스도 마다하지 않겠다고 했으니... 그리고 시즌기간인 1995년 1월에 샌안토니오와의 경기도중 심판판정에 항의하면서 의자를 코트에 집어던지는 등 그야말로 막 나가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마이클 조던이 '''"I'm Back"'''을 외치며 돌아왔다. 조던이 돌아오면서 피펜도 잠시 구단에 대한 불만을 참았다. 조던이 피펜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주면서 불스도 함부로 피펜을 어쩌지 못하게 되었다. 94-95시즌은 조던과 다른 불스 팀원간의 호흡이 완성되지 못하면서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 올랜도 매직에 패해 탈락했지만, 95년 오프시즌동안 데니스 로드먼을 받아오면서, 전력을 강화했다. 최강의 트리오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당시 NBA최다승인 72승 기록과 두번째 3연패를 달성했다. 이 72승 기록은 쉽게 깨지지 않을 것이라 여겨졌으나 20년만인 2015-16 시즌에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에 의해 73승으로 경신되게 된다.[18]
피펜도 조던이 돌아오면서 좀 더 편한 마음으로 경기에 임했고,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에 다시 국가대표로 출전하여 금메달을 목에 건다. 하지만 여전히 구단과의 갈등은 임시봉합에 불과했다. 특히 마지막 시즌이였던 97-98같은 경우 스카티 피펜은 시즌이 끝나자 마자 수술을 받은뒤 재활을 거쳐 바로 시즌시작에 맞춰 컴백할수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수슬을 받는 대신 여름내내 버티다 시즌 시작 직전에 수술을 마쳤는데 이는 피펜이 자신의 낮은 연봉에 대한 대놓고 직접적인 태업으로 보기도 한다.[19] 마이클 조던도 이에관해 실망했지만 스카티 피펜이 팀에서 받는 대우가 워낙에 개차반이였기 때문에 이해한다고 말했을 정도. 그렇게 시카고 불스 구단과의 관계도 1998년. 시카고가 여섯번째 우승을 차지하면서, 끝나가고 있었다.
2.4. 불스를 떠난 후
1997-98시즌이 종료되고 피펜은 사인 앤 트레이드 방식을 통해서 휴스턴 로케츠로 이적하게 된다. 계약조건은 5년간 6천7백만 달러. 드디어 원하던 천만달러의 사나이가 되었다. 그리고 팀도 나쁘지 않았다. 비록 클라이드 드렉슬러가 은퇴했지만, 하킴 올라주원이나 찰스 바클리가 건재했고, 여기에 피펜이 왔으니 이 멤버면 우승못하는게 이상한 정도의 사기 라인업이었다.
그러나 사실 이것도 네임밸류만 보면 그런거지 실질적으론 빛 좋은 개살구에 가까웠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먼저 이들의 조합은 좋지 않았다. 하킴과 바클리가 공격범위가 빅맨치곤 넓지만 이들은 어디까지나 로우포스트 기반 빅맨들이었다. 안 그래도 이들의 활동반경이 겹치는데 심지어 이들은 수비범위도 당시 기준으로 그렇게 넓지 않았다(바클리는 원래 수비범위가 좁고 올라주원은 역대 최고의 수비수중 하나였지만 만 36세의 느린 발로는 한계가 있었다). 물론 수비에서 바클리의 구멍은 피펜이 메워줄 수 있긴 했다. 문제는 공격, 피펜은 슛을 안정적으로 넣어주는 선수가 아니다. 결국 포스트업이나 돌파로 해야되는데 로우포스트에 둘이 버티는 팀에서 피펜은 조던 옆에 있을때보다 더한 (공격 한정) 들러리가 되어야했다. 게다가 샘 카셀의 이적 이후 고질적인 문제가 된 포인트 가드 문제를 결국 해결하지 못해 슈팅 가드 두 명을 주전가드로 세워야했을 정도였다. 피펜이 트라이앵글 하에서 포인트 가드 역할을 한 건 사실이지만, 애초에 PG의 리딩력이 거의 필요없는 트라이앵글 오펜스와 포스트맨 두명을 위주로 짜여진 휴스턴은 천지차이였다. 게다가 피펜은 뛰어난 빅맨공격수와 뛰어본 적이 없는 선수여서 게임리딩으로 둘을 살려주는데도 한계가 있었다. 결국 시너지는 커녕 1+1은 2가 되기도 힘든 라인업.
두번째로 가장 큰 문제는 이들이 '''늙었다'''는 점이었다. 올라주원은 써드팀에 오르긴 했지만 예전의 그 드림이 아니었다. 34세가 가까워지던 피펜은 득점원으로선 올스타급이라고 부르기 민망한 수준이 되어갔다. 바클리는 골밑득점과 리바운드(12.3개)에선 좋은 모습을 보였지만, 갈수록 저질이 되어가는 수비, 떨어지는 기동력으로 더 이상 엘리트 선수가 아니었다. 게다가 그는 그 시진은 단축 시즌으로 팀당 50경기밖에 치르지 않았음에도 10경기나 결장할 정도로 부상이 잦았다. 게다가 30대 중반의 늙은 골밑은 기동력이 심하게 떨어졌고, 각각 평균 10득점 정도 넣던 마이클 디커슨이나 쿠티노 모블리의 득점력에만 의존해 속공 득점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즉, 같이 뛰면 시너지가 안 나는 선수들끼리 모였다는 점과 네임밸류에 비해 노장들이라 실제 실력이 훨씬 떨어졌다는 점 때문에 애초에 그렇게까지 대단한 라인업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딱 5할이었던 전 시즌에 비해 6할까지 성적이 올랐으니 마냥 못했다고만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해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로스엔젤레스 레이커스에게 1승3패로 탈락(...). 피펜은 비난의 화살을 찰스 바클리에게 돌렸다. "그는 열심히 뛰지 않는다. 그는 정말로 우승할 마음이 있었는가? 조던의 말을 들었어야 했다. 휴스턴으로 가는게 아닌데...바클리 때문에 졌다."라고.[20]
사실 피펜이 저런 투정을 할만도 했던 것이 바클리는 나이가 들면서 운동능력과 기동력이 점점 떨어졌음에도 체중부터 시작해 몸관리에 소홀했다. 오프시즌 때면 공을 손에서 놓고 놀기로 유명했는데 젊은 시절에는 충만한 재능으로 커버가 됐지만, 관리가 필요한 말년에 와서도 몸만들기에 힘을 쏟지 않았다. 툭하면 부상으로 결장할 정도로 시즌 내내 몸상태가 안좋았는데, 본인은 물론이고 말년에도 몸관리에 철저했던 조던을 봐왔던 피펜 입장에서는 바클리가 못마땅해 보이는게 당연지사. 실제로 바클리와 피펜은 사이가 매우 안 좋기로 유명했다.[21] 결국 이게 시발점이 되어 둘의 관계는 험악해졌고, 결국 휴스턴은 그를 다시 포틀랜드 트레일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시켰다. 당시 피펜의 네임드가 워낙 높았기 때문에 그의 샐러리를 맞추기 위해 포틀랜드는 무려 여섯명의 선수를 휴스턴에 퍼줬다.[22]
당시 포틀랜드는 명문팀으로 가기 위해 아낌없이 현질중이었다. 포틀랜드의 구단주가 바로 빌 게이츠의 동업자이자 친구인 폴 앨런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멤버가 라쉬드 월라스, 스티브 스미스, 브라리언 그랜트, 데이먼 스타더마이어, 아르비다스 사보니스, 데틀레프 슈램프, 본지 웰스, 저메인 오닐 등등의 후덜덜한 라인업이었다. 여기에 피펜까지 가세했으니 포틀랜드는 단숨에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 거듭났다. 비록 피펜은 나이와 부상 덕택에 기량은 다소 저하되었으나 그 특유의 센스와 강력한 수비력은 변함없었다. 정규시즌에서 무려 59승을 거두며 2번 시드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컨퍼런스 파이널에서는 레이커스와 7차전까지 가는 대접전을 벌였다. 그러나 최종 7차전에서 믿기지 않는 역전패를 당하며 아쉽게 탈락하고 말았다.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이 당시 상대팀 감독이 그와 고락을 함께 했던 필 잭슨이었다는 점이다. 피펜은 후에 이때가 자신의 농구경력에서 제일 아쉬운 한해였다고.[23]
적이 별로 없다는 생각 탓인지 시카고 불스를 떠난 이후로 그후 그는 수 년간 포틀랜드의 정신적 지주로써 활약했지만, 시카고 불스만한 포스가 없었다. 더군다나 포틀랜드가 Jail Blazers[24] 라는 조롱과 비판을 받았을때, 팀을 바로 잡아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포틀랜드에서 다사다난한 4년의 시간을 보낸후 피펜은 자신의 커리어를 시작한 시카고 불스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2.5. 친정팀으로의 복귀. 은퇴 그리고 그 후
전과 달리 구단은 그를 환영했고, 팬들도 다시 돌아온 그를 열렬히 환영했다. 시카고는 당시 리빌딩 중이었는데, 피펜은 젊은 선수들을 이끌어 줄 베테랑이자 멘토로서 필요한 존재였다. 피펜도 경력을 시카고에서 마무리짓는것 외에도 불스의 구단임원으로의 진출도 꿈꾸고 있었지만,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를 결장하면서 실질적으로 전력상엔 별 도움이 되지 못했고 결국 피펜은 03-04시즌이 끝난 후 은퇴를 선언했다.
그러나 은퇴 후 피펜의 행보는 거의 안습할 정도이다. 뒤늦게 번 큰 돈을 바탕으로 자가용 비행기 임대업를 시작한 것. 비행기 구입비용도 그렇지만, 인건비와 보험료, 여기에 비행기 유지비용까지 돈이 엄청나게 깨질수밖에 없었다. 결국 사업은 한큐에 말아먹고 오히려 수백만달러의 빚만 지게 되었다. 얼마나 빚독촉에 시달렸는지 43세의 나이에 코트 복귀를 선언했을때만해도, '빚 갚으려고 복귀하는거 아니냐'라는 말이 나왔고, 팬들사이에는 거의 정설로 받아들여졌다. 본인은 부정했지만. 하지만 NBA 구단은 아무도 그에게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결국 스웨덴 리그에서 한게임 뛰다 오는 알바를 하는걸로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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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리그에서 알바뛰는 피펜(2008년)
그래도 2010년 1992년 미국 올림픽 국가대표농구팀 자격과 개인자격으로 미국농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는 감격을 누리기도 했다. 이때 한해 먼저 헌액된 조던의 축하를 받기도 했다. 그리고 2010년 현재 시카고 불스의 홍보대사로 재직 중이다. 드웨인 웨이드에게 팀 레전드에 대한 예우가 없다며 디스를 당한 것이 이런 결과를 이끌어냈다는 말도 있지만, 그래도 현역 시절 구단과 그렇게 치고박고 싸웠으면서도 팀의 한 자리를 내어준 것에 대해 팬들은 긍정적인 반응이다.
그리고 2010년에 시카고 불스측에서 드디어 피펜의 동상까지 만들어주었다.# 비록 반신상이고, 유나이티드 센터 정면에 있는 조던의 동상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피펜에 대한 예우로서는 충분한 보답이 된 듯. 그리고 지금은 홍보대사라는 이름에 걸 맞게 팀의 행사나 경기에 얼굴을 비추며 홍보 에 열을 올리고 있다. 시카고 불스 홈경기에서 자주 얼굴을 비춰주니 올드팬들은 찾아 보시길.
3. 플레이 스타일
현대농구에 포인트 포워드라는 개념을 창립한 선수로 평가되기도 한다.[25] 사실 반 세대 위에 래리 버드라는 20-10-5를 밥먹듯이 찍은 대괴수가 존재했지만 버드는 어시스트보다는 득점과 리바운드에 강점을 보이는 선수였으며 패싱센스가 좋은 선수였지 리딩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었고, 스타일상 전형적인 코너맨에 스트레치 포워드로 활동했기 때문. 실제로 피펜은 트라이앵글에서는 꼭지점을 맡아 주로 하이포스트(자유투 라인 주변)에 자리잡고 공을 돌리는 역할을 주로 했다. 이 때문에 불스에서 1차, 2차 쓰리핏 당시 볼 소유시간이 가장 길고 어시스트가 가장 많은 선수는 피펜이었다. 피펜과 함께했던 존 팩슨, BJ 암스트롱, 론 하퍼 등의 포인트 가드들은 모두 탑에서 공격을 주도할 능력이 되는 전형적인 포인트 가드라고 보기 힘든 선수이다. 팩슨과 암스트롱은 3점슛 스페셜리스트이고 하퍼는 스윙맨이 원래 포지션이었다. 트라이앵글 시스템 특성상 1번이 탑에서 경기를 주도하지 않는 것도 있지만 그만큼 피펜의 시야와 패스웍이 출중했기 때문에 실질적인 경기 조율을 전담했다고 할 수 있다. 특이한 점은 볼핸들링이 포인트 가드 역할을 볼 정도로 매우 뛰어나지만 드리블할 때 공의 위치가 매우 높다. 장신 PG들이 공통적으로 그렇긴 하지만 피펜은 그 정도가 더 심해서 속공할때는 종종 머리까지 공이 올라온다. 그럼에도 실책은 많지 않으니 신기한 노릇...
아마도 피펜의 신장은 2미터 초반이지만 워낙 팔, 다리가 길어서 드리블시 약간 허우적 하는 느낌이 들어서 인듯. 그러나 돌파나 볼 운반시 실책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도 피펜, 그랜트 힐, 르브론 제임스 같은 포인트 포워드류의 선수는 정말 찾기 힘든데 피펜이 커리어를 보낸 기간에는 전무했다. 당시 스몰 포워드의 역할은 득점과 중거리에 중점을 둔 스타일로 크리스 멀린, 슈렘프, 클리포드 로빈슨, 글렌 라이스, 션 엘리엇 등의 선수가 대표적인 선수들. 피펜은 중거리의 효율과 정확성은 다소 떨어저도 저 선수들을 압도하는 스피드와 파워, 조던만큼 뛰어난 운동능력과 농구센스로 최고의 스몰 포워드로 성장했다.
수많은 후배들이 존경하는 농구선수중 하나로 그를 꼽을 정도. 피펜은 공격뿐만 아니라 수비, 게임리딩과 볼배급 등 스몰 포워드가 갖춰야 할 대부분의 스킬을 다 보유했다. 평균 이상의 리바운드 능력은 보너스. 다만 3점슛과 자유투가 약한 건 약점이었다. 이것까지 좋았으면 그야말로 우주굇수였을지도... 다만, 이런 특징때문에 그는 명백히 2인자여야 빛나는 선수중 하나이기도 하다.
앞 문단에서 언급했듯이 중장거리 슛과 자유투는 피펜의 약점이었다. 피펜은 커리어동안 32.6%의 3점 슛 성공률과 70.4%의 자유투 성공률로 스윙맨 기준으로는 2016년 현재는 물론이고, 당시 기준으로도 중장거리 슛이 나쁜 선수이다.[26] 정확히 말하자면 들어갈 때는 괜찮게 들어가는데 안 풀리는 날은 슛이 림을 빗나가기 일수였다. 스티브 커에 의하면 필 잭슨 감독이 피펜의 이런 모습을 두고 "sometimes a shooter"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사실 이 수치도 약간 거품이 섞여있는데, 피펜은 전성기 때 1시즌반을 빼놓고 무려 '''마이클 조던'''과 함께 했다. 조던에게 수비가 몰리는 와중에 비교적 헐거운 수비를 상대로 저 수치를 낸 것. 전성기 (92~96) 때는 돌파능력과 포스트업에 이은 골밑 마무리 능력이 좋아 높은 필드골 수치를 기록했지만 97-98시즌, 특히 플레이오프에서는 중거리 비중이 커지면서 효율이 굉장히 떨어졌다. [27] 다만 피펜의 슛거리 자체는 길었기 때문에 한번 삘받으면 슛이 족족 들어가는 모습을 보였다.이 때문에 그는 파이널에서 한 경기 최다 3점슛 기록 (7개)를 10년 넘게 보유했었다. (케니 스미스와 타이) 문제는 안정적이지 않았다는 것.
바로 이런 점 때문에 그가 1옵션이 되어서 공격을 주도하는데 한계가 있던 것이다. 슛 시도가 많으면 많을수록 상대팀 입장에선 땡큐이니까.[28] 실제로 2차 쓰리핏 당시에 피펜이 컨디션이 좋지 않을때는 안정적인 공격력을 가진 토니 쿠코치가 때때로 (사실은 꽤 자주) 제 2옵션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조던이 있던 시기 피펜은 확실한 찬스가 아니면 슛을 던지는걸 자제했고 패스를 돌리고 팀플레이에 주력했다. 그덕에 낮은 슈팅능력에도 효율을 극대화하고 다재다능함을 갖출 수 있었다.
다재다능함, 2인자 마인드등 여러가지가 뛰어났지만 가장 뛰어났던 것은 역시 수비다. 90~91시즌 세컨드팀에 오른후, 91~92시즌부터는 8년 연속 마이클 조던과 함께 올 디펜시브 퍼스트팀에 같이 올랐다. 리그 최고의 수비수들 2명을 한꺼번에 가진 불스의 위엄(...). 거기다 2차 쓰리핏 땐 로드먼까지 세명이었다. 이건 뭐 벽이 따로 없을 정도. 개인 수비만이 아니라 팀 수비를 업그레이드 시키는 선수였는데 포틀랜드와 LA 레이커스와의 플레이오프 때 적으로 마주하게 된 피펜이 교묘하게 일리걸 디펜스를 하고 있다고 필 잭슨이 주장했던 것이 대표적. 실상 2001년까지 지역방어를 금지하던 시기에 포스트맨에게 집중수비를 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에 빅맨들이 포스트에서 패스를 아예 받지 못하도록 하는 디나이가 매우 중요했다. [29]
어쨌든 빅맨에게 집중수비를 가는게 힘들었던게 시카고에게 왜 큰 악재였냐면 불스왕조는 올스타급 이상 센터를 가져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1차 3연패 당시의 빌 카트라이트는 좋은 수비수였지만 패트릭 유잉이나 샤킬 오닐같은 파워센터들과 맞짱을 뜰만한 선수는 아니었고, 2차 당시 룩 롱리는 공수 모두 NBA주전 센터들 중 평균 이하였다. 로드맨이 아무리 뛰어나도 자기보다 몇십파운드 무거운 센터와 시리즈 내내 매치업할 수도 없고... 그렇기 때문에 피펜과 조던, 나중에 가면 론 하퍼 등의 헬프수비가 중요헀고, 이 분야 최고봉이었던 피펜의 공이 절대적이었다. 피펜은 자신의 1:1 상대를 락다운시키는 재능은 물론이거니와 디나이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조던이 맨투맨 수비의 최고봉이라면 피펜은 팀 수비의 최고봉이었다. 6-8에 긴팔을 지닌 피펜은 당시 포인트 가드부터 간헐적으로 센터까지 막아내는 수비범위의 선수였고, 이 때문에 누구와 스위치 되어도 막아낼 수 있었다. 이 능력이 부각된 것이 1998년 유타 재즈와 파이널이었는데, 당시 재즈는 스탁턴과 말론의 2대2 플레이가 최고의 무기였다. 이론적으로 말론의 스크린으로 스탁턴이 자유로워지면 그는 바로 슛이나 돌파를 할 수 있었고 이를 막기 위해선 수비 측 파워 포워드나 센터가 스탁턴에게 붙어야 했다. 물론 NBA 빅맨이라면 기동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스위치해서 커버하는데 이 경우 포인트 가드가 말론을 막게 되기 때문에 말론이 (자신을 막을 수 없는) 조그만 포인트 가드와의 미스매치를 이용해 간단히 득점하면 그만이었다. [30] 그러나 스위치되어도 변화가 없다면? 시카고 불스는 포인트 가드부터 파워 포워드들까지 전부 198~203cm 사이에 팔이 긴 선수들이었고, 이들은 포인트 가드부터 파워 포워드까지 막을 수 있는 선수들이었다. 이 때문에 때에 따라 피펜과 로드맨이 스탁턴과 말론 듀오를 막았는데, 피펜은 말론의 파워를 어느 정도 버틸 수 있었기 때문에 재즈의 공격은 시리즈 내내 삐걱거렸다.
1998년 동부 파이널 당시 잭슨은 피펜을 마크 잭슨에게 붙히는 승부수를 뒀다. 당시 페이서스 공격의 시발점이었던 잭슨은 191cm의 포인트 가드로 느리지만 강력한 포스트업과 넓은 시야로 동료선수들을 살려주는 능력이 있었다. 그러나 자기보다 훨씬 크고 팔까지 긴 피펜에게 잭슨은 거의 무력화되었고 턴오버쇼를 펼쳤다. 다만 맨투맨 수비에선 동급의 수비수였던 마이클 조던이 한 수 위였다. 피펜은 자신의 주 매치업이었던 앤퍼니 하더웨이를 96플레이오프에서 거의 날뛰게 했고, 하더웨이는 조던이 막을때 훨씬 고생을 했다.
그러나 피펜의 가장 뛰어난 점, 그리고 조던보다도 확연히 앞서는 점은 헬프수비를 포함한 팀수비였다. 피펜은 자기 매치업을 견제하면서도 필요할때마다 더블팀을 들어가 압박을 가하는 실력이 만렙이었다. 하더웨이, 그랜트 힐 등 폭발적인 공격수를 막던 피펜은 필요할때마다 중앙으로 들어가 빅맨들을 괴롭혔고[31] , 외곽에서 기습적인 더블팀으로 가드들을 압박하기도 했다. 이로 인해 그 누구보다도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했으며 팀 수비를 견고히하는 점에 있어서 그야말로 리그 최강이었다.
불스는 여기에 수비왕까지 먹었던 마이클 조던이 미친듯이 1대 1 수비로 상대 에이스를 압살했고, 피펜의 지능적인 디나이로 상대의 패스흐름을 턱턱 막아제끼고, 호레이스 그랜트, 데니스 로드맨의 강력한 대인마크로 상대 빅맨을 지치게 만들며 빌 카트라이트, 룩 롱리, 윌 퍼듀 같은 별거 아니어보이는 센터들도 인간 방패 역할 정도는 무난하게 해냈다. 그 막강한 디펜스 때문에 상대팀이 압살을 당할 수 밖에 없었을 정도.[32] 때문에 상대팀의 입장에서는 피펜의 디나이와 더블팀이 사람을 미치게 만드는 노릇인지라 천하의 개쌍놈 소리가 입에서 나올 수 밖에. 당연히 잭슨은 이걸 미치도록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사실 잭슨은 이런 식으로 심판콜에서 득을 보기 위해 언론플레이를 하는데 매우 능했다. 이런 식의 언론플레이를 하는 감독 중 대표적인 또 다른 케이스가 팻 라일리였는데, 이들이 이끄는 불스와 닉스가 92~94년 3년 연속으로 플레이오프에서 만나 혈전을 벌일때는 경기장 내에서만큼이나 경기장 밖에서 두 감독의 언플의 향연(...)이 펼쳐졌다. 잭슨이 닉스가 거칠다고 불평을 하면 라일리는 심판이 조던이 슈퍼스타라 봐준다고 응수하는 식.
또한 피펜은 정말 적극적으로 수비를 했는데 틈만 보이면 항상 스틸을 시도했다. 때론 의도적으로 포인트 가드를 막을 때도 있었는데[33] 상대를 압박해서 하프코트조차 넘기 힘들게 만들었고, 넘어와서도 손을 쉴새없이 움직여 제대로 된 패스를 하기 힘들게 할 때도 많았다. 포스트 업 수비시에도 안쪽으로 못 들어오게 막으면서 스틸을 시도하거나 턴오버를 유발했었다. 역대 플옵 통산 스틸 1위가 그러한 것을 반증하는 수치. 사실, 스틸을 노리는 수비는 실패시 대응이 어렵다는 점에서 도박수비로 불린다. 그런데 압박+스틸을 시전하면서도 수비를 철옹성같이 유지했다는 점이야 말로 피펜의 능력.
다만 엄밀히 말하면 자기보다 작은 선수에 대한 맨투맨 수비는 특급까진 아니었다. 실제로 마크 잭슨같이 느린 PG가 아니고서야 상대 팀의 PG는 론 하퍼가 주로 막았었다(90년대 극초반까진 조던이 막거나 당시 PG들이 막았다). 그랬기 때문에 2차 3연패 당시 불스를 가장 괴롭힌 건 알렌 아이버슨이나 데이먼 스타더마이어처럼 작고 재빠른 PG를 보유한 팀들이었으며, 실제로 스타더마이어를 보유한 토론토 랩터스는 리그 꼴찌수준의 약팀이었음에도 96시즌에 72승을 거둔 불스를 상대로 1승을 거둔 적이 있다! 조던과 피펜을 비교한다면 맨투맨 수비는 조던이, 팀수비는 피펜이 우세라는 평이 많다. 그래도 만약 당시 약체 필라델피아와 토론토가 플레이오프 진출했다면 불스가 기본적인 전력이 워낙 앞서기에 3-0으로 완전히 제압했을 것이다. 당연한 것이 일단 전체적인 전적 자체도 불스가 앞서고[34] , 일단 정 안되면 이들에 대한 수비는 평상시에 하는 론 하퍼 대신 조던이 직접 나서면 된다. 득점부담이 크고 도움수비를 많이 하는 조던에 대한 체력안배 때문에 부담되는 큰 단신가드 수비를, 득점에서 별 역할이 없는 하퍼에게 맡기는거지 민첩성과 수비센스, 체력 모두 조던이 압도적으로 뛰어나다. 실제로 후반 3연패 당시 조던은 이미 팀에서 피펜과 더불어 가장 중요한 수비수였으며, 하퍼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득점원이 있을때 나서서 막는 맨투맨 수비 최종병기같은 존재였다.
3.1. 역대 최고의 스몰 포워드 수비수
당연하지만, 수비력으로는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카와이 레너드와 더불어 역대 최고 중 한 명이며 모든 포지션을 포함해도 빌 러셀에 버금갈만큼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하나이다. 교묘한 일리걸 디펜스의 일화에서 보듯 당연히 역대 최고수준의 팀 디펜스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맨투맨 디펜스 능력 또한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최고수준인 동시에 역대 최고 수준이라고 할 수 있다. 91년 파이널에서의 매직 존슨을 수비한 것이 대표적인 예. 당시 매직 존슨은 31살의 최전성기였으며 서부 플옵에서 승승장구하며 파이널에 올랐는데, 피펜과 조던의 맨투맨 수비에 경기조율에 큰 어려움을 겪으며 결국 우승을 시카고 불스에 내주었다.
다만 위에 언급됐듯이 매직의 주 매치업은 엄연히 조던이었다. 그리고 매직이 피펜 때문에 많은 턴오버를 기록했다고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파이널에서 매직이 범한 턴오버는 평균 4.4개로 이때 플레이오프 전체에서 범한 4.1개와 큰 차이가 나진 않았다. 원래 매직은 커리어 평균 턴오버가 3.7개일 정도로 실책을 많이 저지르는 선수다.[35] 그리고 이때 매직은 파이널 평균 18.6점 12.4어시스트 8리바운드를 기록했는데 이때 플옵 평균 21.8점 12.6어시스트 8.1리바운드와 비교하면 득점만 3점 떨어졌을뿐 제몫을 했다. 필드골 성공률도 44%->43.6%로 크게 떨어지진 않았다. 이때 매직의 포스트업을 막기위해 조던, 피펜을 번갈아 붙여도 안되자 파워 포워드인 그랜트까지 붙였지만 매직이 포스트업으로 밀고 들어가서 득점해버리는 장면까지 나왔다. 그나마 조던이 가장 괴롭히고 효율적으로 막았지 피펜은 그냥 포스트업하다가 동작 한번에 아무것도 못해보고 뚫리는 장면을 계속해서 보여줬다.
그리고 당시 매직은 커리어 초년부터 당했던 무릎부상이 오랜기간 축적된데다가 장신 포인트 가드는 원래 무릎이 성할 수 없는 상태이며 당시는 지금처럼 선수관리가 잘되던 때도 아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최전성기가 아니었다. 당시 30세 초반은 노장이라고 할만했으면 무릎이 성하지 못한 만큼 체중이 많이 불어있었다. 무릎상태가 그나마 덜 상했던 80년대 후반의 매직이었다면 피펜이 어찌 해보지도 못했을 것이라고 올드 농구팬들은 이야기한다. 그리고 사실 그 당시 체중이 많이 불어난 매직조차도 2차전 빼고는 잘막지 못했으며 3차전에서는 그냥 수비구멍수준이었다. 다만 체력은 많이 소진시킨 것은 사실이다. 엄밀한 말해 이 시리즈에서 조던과 피펜이 번갈아 가며 매직을 수비하면서 매직의 체력을 많이 소진시켰고 그것이 크게 주효했으나 번갈아 가면서 막는동안 가장 잘 막은건 조던이었다. 공격만이 아닌 수비까지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이 조던이었다.
그 외에도 파이널 및 플레이오프에서 코비 브라이언트, 레지 밀러, 클라이드 드렉슬러, 찰스 바클리, 칼 말론등 기라성같은 레전드 에이스 플레이어들을 전담마크했을뿐만 아니라 팀 디펜스로도 만능 살림꾼 역할을 했다. 화룡점정으로 선수생활 말년 포틀랜드 시절, 플레이오프에서 당시 우승팀 레이커스의 코비 브라이언트를 수비한것으로 명성을 더욱 드높였는데, 이 당시 코비를 상대로 락다운 디펜스를 시전하는 동시에 팀 수비의 앵커로서 전방위적인 수비사령관의 역할을 동시에 해냈고, 당시 천하무적 LA 레이커스에게 큰 위기를 선사한 점에서 피펜을 중심으로 한 포틀랜드 팀 디펜스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맨투맨 및 팀 디펜스의 핵으로서 최강팀을 상대로 업셋의 순간까지 간 것은, 비록 연이은 부상으로 운동능력을 상실했음에도, 피지컬에 의존하지 않는 노련한 수비만으로 천하무적 레이커스를 몰아붙일 정도인 그의 수비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한동안 그의 수비력은 동 포지션에서 비교할 만한 선수조차 없었으며, 포워드 가운데서 찾자면 바비 존스[36] 정도. 모든 포지션을 통틀어 최고의 수비수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피펜이기에 다른 선수들과 비교하기 어렵다. 피펜은 팀 디펜스로는 현존하는 모든 수비기술에 능했고 맨투맨 수비역시 완벽했으며 빠른 손놀림으로 스틸역시 플레이오프 통산 1위에 올라와있을 만큼 가로수비 세로수비 모두 통달했다. 무엇보다 그의 진가는 큰 경기에서의 클러치 디펜스가 완벽했는데, 앞서 언급한 커리어 말기 포틀랜드 시절 레이커스를 상대로 한 디펜스뿐만 아니라, 전성기 시절의 클러치 디펜스는 상대적으로 스몰마켓이자 짠돌이 구단주를 보유했던 시카고 불스를 조던과 함께 6번 우승시킨 원동력이었다. 그나마 2014년 이후 스몰 포워드 포지션에서 2연속 DPOY를 받은 카와이 레너드가 등장해서 피펜과 비교할만한 만능 수비수로 평가받고 있다.
다만 이는 2014년부터 바뀐 디펜시브팀 및 수비왕 선정방식의 변경에 따른 것이 크다. 이전에는 수비왕을 기자단및 언론에서, 디펜시브팀을 감독들이 선정했지만 위에언급된 2014시즌부터는 기존의 수비왕및 디펜시브팀도 전부 기자및 언론에서 투표하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어떤 방식이 더 객관적이고 검증되었는지는 논란이 될 수 있지만, 4번이나 수비왕을 받았던 디켐베 무톰보나 수비왕을 각각 1번, 2번씩 수상했던 데이비드 로빈슨, 하킴 올라주원 중 누가 더 뛰어났는지 단정적으로 말하긴 어렵다. 수비 왕이 전부라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 또한 어느 정도 객관적인 수치가 있는 공격과 달리 수비력은 주관적이기 때문에 어떤 선수가 특급수비수다,라고 할 순 있어도 특급수비수 A와 B 중 누가 더 뛰어나다고 하기는 매우 힘들다. 농구는 공격수가 절대적으로 유리한 경기라 특급 수비수라도 대량 실점을 할 수도 있고, 스틸/블럭으로 드러나지 않는 좋은 수비도 있고 (대표적으로 역대급 수비수인 데니스 로드맨의 스틸/블럭은 각각 1개 수준이다) 팀동료들의 영향도 받기 때문에 +/- 수치만으로 판단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때문에 피펜이 래리 버드보다 훨씬 뛰어난 수비수라고 하는 건 쉽지만, 똑같이 역대급인 피펜과 레너드 중 누가 더 뛰어나다고 하는 건 매우 힘들다.
4. 말말말
'''나는 득점만 하면 된다. 나머지 모든 것은 피펜이 다 알아서 하기 때문이다.'''
마이클 조던[37]
'''그가 도와준 덕에 시합에 잘 임할 수 있었고 좋은 경기를 뛸 수 있었어요. 마이클 조던을 논할 때 스카티 피펜이 빠지면 안 되죠.'''
마이클 조던[38]
'''마이클 조던과 스카티 피펜은 아마도 농구 역사상 최고의 원투펀치일 것이다.'''
5. 기타
- ESPN 해설가이자 전 NBA 감독이었던 제프 반 건디가 2010-2011년도에 마이애미가 72승을 깰것이라고 한것에 대해, "제프 밴 건디는 얼간이다. 마이애미는 불스의 기록을 절대 깰 수 없다"라고 하기도 했다. #
- 리즈시절인 90년대 중반
이라는 게임의 최종 보스로 등장하기도 했다. 실사 FMV 인터렉티브 게임으로 1대1 길거리 농구의 주인공이 최종보스인 스카티 피펜과 붙어서 이기는 스토리다. 중독성 있는 힙합 음악과 함께 한판 승부가 펼쳐진다. 나이키 농구화 박스를 가득 트렁크에 싣고 나타난(...) 피펜의 어색한 연기를 감상할 수 있는 진귀한 영상인데 당시 그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또한 아케이드성 성격이 짙은 게임을 잘 만들었던 Midway에서 내놓은 2대2게임인 NBA JAM이란 게임에서 끝판왕은 당연히 당대 최강 시카고 불스였는데, 라이센스 상 조던이 못 나오다보니 불스의 멤버는 피펜과 로드맨이었다. 그 중 피펜의 능력치는 그야말로 사기급이었다.[39] - 2011년 동부 결승에서 마이애미 히트의 르브론 제임스가 맹활약하면서 시카고 불스를 격파하자 이에 감명(?)을 받았는지 중계 도중 자신의 옛 동료 마이클 조던을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라고 한 반면에 제임스를 "아마도 역대 최고의 선수"(!)라고 크게 치켜세우면서 파문(?)이 일기도 했다.[40] 이 발언으로 인해 피펜은 전방위로 까이게 되었고, 급기야 본인은 르브론의 실력을 존중해주려다 일으킨 실수였다고 해명했다. 그 후 르브론 제임스가 결승전에서 졸전을 펼쳐 흑역사가 되는 분위기다(…) 웃긴건 훗날 2017년 파이널을 앞두고는 "르브론이 아직 코비를 제쳤다고 보기 힘들다"는 상반된 평을 내리게 된다. Scottie Pippen: LeBron hasn't surpassed Kobe at all[41]
- 은퇴 후에서는 슬쩍 독설가의 이미지도 있는듯 보인다. 은퇴 후 근황을 묻는 중 골프에 대한 얘기를 했는데 "아직은 서툴지만 찰스 바클리보단 잘 친다."고 해서 대놓고 찰스경을 씹기도 했다(...). 또한 한 언론 인터뷰에서 케빈 가넷은 과대평가되었다고 평가절하했다. 팬들의 반응은 대다수가 피펜에 대해 이해할수 없다와 소수의 피펜이 옮은 말 했다로 나뉘기도 했다. 아무래도 조던이 시카고의 레전드를 넘어서 농구의 아이콘으로 자리매김한지라 언사에 신중해야 하기에 자신과 시카고 불스가 보여줬던 실력이나 업적에 대한 후배들의 도전을 직접적으로 평가하기보다는 상투적인 답변으로 칭찬 하는 반면, 피펜은 뭐 딱히 그럴 게 없다보니 대놓고 평가해서 이래저래 어그로끄는 일도 종종 있는 편. 함께 했던 동료와 팀의 업적에 대해선 자부심과 애착을 보여주고 있다.
-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때 조던과 함께 드림팀의 일원으로 올림픽에 참가하였는데 크로아티아 전에서 훗날 자신의 동료가 되는 토니 쿠코치를 만나게 된다. 이 당시에 제리 크라우스 단장은 쿠코치 영입을 위해 그에게 피펜보다 더 많은 연봉을 제시했는데(전술했듯 피펜은 연 200만불 수준, 그시절 실력대비로 노예계약 수준의 적은 연봉을 받고 있었다.) 그것에 잔뜩 불만을 가지고 있었던 피펜은 조던과 합작해 쿠코치를 묵사발 만들기로 계획한다. 매직 존슨의 이야기에 따르면 그 당시 조던과 피펜은 서로 쿠코치를 맡겠다고 이야기를 나눴다고 한다. 그래서 전반은 피펜이 후반은 조던이 쿠코치를 전담마크했는데, 당연히 결과는 쿠코치 안습(...). 쿠코치의 회상으로는 그 당시 크로아티아 동료들이 쿠코치에게 "쟤네 너한테 왜 저럼?" 하고 물어볼 정도로 정말 철저하게 박살냈다고 한다. 하지만, 예선에서 철저하게 밟힌 쿠코치는 절차부심, 결승전에서 좀더 나은 활약을 하여 조던에게 "NBA에서 뛸 수 있는 선수"란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카고 불스로 이적한 후, 마이클 조던이 1차 은퇴를 하는 바람에 피펜과 쿠코치의 관계는 초반에는 그리 좋지 못했다. 물론 그후에는 사이가 원만해졌고, 쿠코치에게 제일 많은 도움을 준 선수도 피펜이었다.
- 1994년생 딸인 테일러 피펜은 서던일리노이대학교 시절까지 배구선수로 활약하였다. 키가 183cm 밖에 되지 않아 은퇴한 후 회계사로 활동하고 있다. 2000년생 아들 스코티 피펜 주니어는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농구를 하고 있는데 아들 역시 185cm 77kg의 비교적 왜소한 체구로 아버지의 피지컬을 물려받지 못했다.
- 2016 NLCS 6차전에서 시카고 컵스가 월드 시리즈 진출을 확정짓는 자리에 참석했다. 7회 공수교대 때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을 가사도 박자도 음정도 다 틀렸지만(...) 리글리 필드의 컶빠들이 일제히 피펜을 연호하는 장관을 연출했다.
- 1996년 플레이오프와 96애틀란타 올림픽에서 신은 피펜 첫 시그니처 모델인 에어 모어 업템포가 몇 년간 꾸준히 레트로 되면서 완전히 패션화로 인식되는듯. 사실 1990년대 나온 모델 전부가 그렇다.
- 그를 주인공으로 한 게임도 있다. 1994년에 SEGA CD와 MS-DOS용으로 출시한 게임이다. : Slam City With Scottie Pippen
- 2019년 PO에서 C.J. 맥컬럼와 데미안 릴라드과 인터뷰하면서 현역 시절 가장 막기 힘든 상대로 마이클 조던을 꼽았지만 이는 팀내 연습때 얘기고, 실전에서는 도미니크 윌킨스였다고 한다. 왜냐하면 자신의 매치업 상대 중 윌킨스가 3점슛이 가장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 현역시절보다 방송출연을 많이 하는 은퇴 후에 부각되는 부분이지만 목소리가 엄청나게 낮고 굵다. 디켐베 무톰보처럼 거친 목소리나 특이한 것도 아니고, 이선균처럼 울림이 깊은 것도 아니고 톤 자체가 그냥 엄청나게 낮다. 톤이 낮은 샤킬 오닐 같은 선수들과 차별화되는건 (톤 자체도 피펜이 더 낮긴 하지만) 굵기까지 하다는 것.
[1] 전세계적으로 이 유명한 이 이름 표기는 '''사실 잘못되었다.''' 피펜이 지난 2011년 에스콰이어 잡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밝혀진 사실인데, 이 원흉은 데이비드 스턴 전 NBA 총재이다.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NBA 드래프트는 총재가 드래프트된 선수들을 하나하나 호명하면 그 선수가 나와 총재와 악수하는 식으로 이뤄진다. 그래서 top 10이 확실한 선수면 드래프트장에 나오고, 아니면 집에서 전화받고 지명발표된다. 근데 그 운명의 순간 전체 5위라는 높은 순위에 스턴은 피펜의 정식 이름인 '''Scotty Pippen'''을 보고 이게 Scott의 애칭이라고 생각했는지 '''Scott Pippen'''이라고 똑똑히 발음해버린다. 당시 피펜은 명백히 듣보잡 선수였고, 거기 나와서 스턴과 악수하고 사진찍을 top 10급 유망주가 전혀 아니었다. 이에 따라 당시 생방송을 진행하던 방송인들도 얜 대체 누구야라며 프로필만 받고 Scott Pippen이라고 지칭했다. 정작 그가 화면에 나오자 자막으론 오기인 Scottie Pippen이 뜨는 등 혼돈의 카오스를 연출했다(...). 방송을 보면 더 가관인데 진행자가 지명 직후 "스캇 피펜, 아마 시청자들 대부분이 모르실 이름일 겁니다."라고 출신대학과 기본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화면에 Scottie Pippen"이라고 뜨자 말하던 도중에 슬그머니 "스카티 피펜은 말이죠"라고 말을 바꾼다.[2] 피펜은 인터뷰에서 "사실 scotty인데, 사람들은 y가 붙은 걸 보면 무슨 이유인지 항상 scott이라고 하더라고요. 그렇게 제 이름을 드래프트에서 호명한 겁니다. 스콧 피펜이라고요. 제가 어쩌겠어요, 총재한테 따지겠습니까?"(It's really Scotty. But for some reason, when people see it with a y, they shorten it to Scott. That's how they announced me at the NBA draft. Scott Pippen. What was I going to do, argue with the commissioner?)라고 말했다. 기사 전문 [3] 1987년 드래프트 측정 결과 맨발 신장 6' 7.5" = 202cm. 착화 신장은 203cm (6' 8")는 훌쩍 넘고 206cm (6' 9")로 표기 될 수도 있음에도 선수소개 땐 늘 201cm (6' 7")로 불렸다. 착화 신장 206cm인 매직 존슨과 같이 서있는 사진을 보면 차이가 거의 없이 비슷하다.[4] 팔이 길다는 카와이 레너드와 윙스팬이 같으며, 팀 동료인 조던만큼 손이 커 긴 팔과 큰 손에서 파생된 수비는 그가 왜 '''역대 최고의 수비수''' 중 한명인지 알려주고 있다. [5] 드래프트 당일 8순위로 지명된 덴 폴리니스와 트레이드 되어 시카고 불스에서 커리어를 시작한다[6] 재밌는 것은 수년이 지나 함께 트리오를 결성했던 데니스 로드먼 또한 NAIA 출신이라는 점. 더불어 피펜은 드래프트 시절에 Comparison이 로드먼이었다. 로드먼과는 재밌는 공통점이 또 하나 있는데, 로드먼 역시 피펜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한 이후에 8인치(20.3cm)가 자라서 농구선수가 되었다는 거다.(#) 이들은 현역시절 키와 덩치도 비슷했으며, 둘 다 엄청나게 뛰어난 운동능력을 갖고 있었다.[7] 해당 농구팀은 1993년 NCAA 디비전 2 승격 후 걸프 사우스 컨퍼런스에 소속됐다가 2006년 디비전 1 승격 후 사우스랜드 컨퍼런스에 소속중이다.[8] 재밌게도 96~98시즌까지 3연패의 주역 3인방은 모두 농구 관련해 좌절 후 급성장을 겪었다. 일단 조던은 고등학교에서 그 유명한 농구부 탈락 사건 이후 여름동안 6인치가 자랐으며, 원래 농구부도 아니었던 로드맨은 고등학교 졸업 이후 20cm나 자랐다.[9] 피펜과 드래프트 동기로 지명되었지만, 공격력에 문제를 드러내며 93~98년 새크라멘토 킹스 주전 센터 시절을 제외하면 저니맨으로 이팀저팀 다니다가 2004년 은퇴했다. 물론 그렇다고 드래프트 당시 그의 기대치가 높았던 것은 아니고 그냥 평범한 롤플레이어 수준이었다. 즉, 당시 기준으론 롤플레이어감인 두 신인이 서로 팀을 바꾼 거였는데 피펜이 예상을 뛰어넘어 레전드로 성장한 것. 실제로 피펜은 루키시즌에 후보선수로 20분 정도 출장했다.[10] 물론 피펜도 견제했지만 주된 수비 대상은 조던이었다. 당시 영상을 보면 조던이 받는 압박과 피펜이 받는 압박은 비교조차 되지 않는다. 사실 피펜은 캐치 앤 슛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에 돌파만 견제하면 된다. 그러나 조던은 공을 잡기 전부터 찰거머리같이 따라붙는 수비로 괴롭히고 (조던은 캐치앤슛도 특급이기 때문), 잡으면 슛하지 못하도록 또 집중견제, 마지막으로 골밑으로 돌파하면 둘러싸서 두들겨 패는 것이다. 영상을 한번 보자. "두들겨 팬다"가 전혀 과장이 아니다.[11] 맨투맨을 가장한 사실상의 지역방어로, 역사상 가장 더티하고 악명이 높은 수비전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전술은 조던을 맨투맨으로 막는 선수가 조던이 공을 잡고 중앙으로 돌파해오도록 유도하면, 주변의 수비수들이 조던을 둘러싸면서 거칠게 막는 것을 중심으로 하고 있다. 비슷한 전술로는 슬램덩크에서 북산이 이정환을 상대로 한 4대1 전술, 그리고 2000년대에 보스턴 셀틱스가 르브론 제임스를 상대로 한 걸 들 수 있는데, 이 전술들보다 조던룰이 더 극악했던 것은 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NBA는 신체접촉에 관대했기 때문이다. 당시 영상을 보면 수비수가 핸드체크 (손으로 밀고 당기면서 공격수를 견제하는 것)을 자유롭게 하는 것과, 2000년대 농구 같으면 플래그런트 파울(상대에게 부상을 입힐 수도 있는 도를 지나친 신체접촉에 주는 파울로 플래그런트 1을 두번 받으면 퇴장, 2를 받으면 즉시 퇴장이다. 90년대에 도입)을 받을 만한 것도 그냥 파울로 넘어가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즉, 한 팀이 작정하고 한 명을 거의 두들겨 패다시피 막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면 다른 선수들은 프리가 된다. 그렇지만 1989년까지의 불스의 안습한 선수진으론 어차피 도움이 안됐기 때문에 조던만 막은 것.[12] 피펜이 매직을 전담마크했다고 아는 사람들도 있는데, 2차전 이후에도 매직의 주 매치업은 조던이었고 피펜의 주 매치업은 제임스 워디였다. 그러나 2차전 초반에 매직을 막던 조던이 파울을 두개 범하자 기습적으로 피펜을 붙였는데, 이때 피펜이 매직을 풀코트 프레스로 막으면서 고생시키자 이 장면이 인상이 깊어 이렇게 와전된 것. 자세히 보면 피펜이 매직을 마크하는 하이라이트 장면의 절대다수에서 그가 하얀색 홈 유니폼을 입고 있는걸 볼 수 있는데, 이때 불스는 홈에서 1, 2차전만 치뤘고 1차전에서는 피펜이 매직을 마크하지 않았다. 즉, 피펜이 매직을 막는 장면 대부분은 2차전에서 나온 것. 이 영상에서는 당시 피펜이 매직에게 붙은 경위가 나온다. 그리고 5차전 하일라이트인 이 영상을 보면 이때도 매직을 주로 막는 건 조던이란 걸 확인할 수 있다.[13] 완전 듣보잡인 센트럴 아칸서 출신은 스스로에 대한 확신이 없었다. 전체 5순위로 뽑히고도 루키 시즌 도중 에이전트에게 "루키시즌에 방출되면 돈을 얼마나 받을 수 있죠?"라고 물어봤다고 하니...[14] 이 때문에 당시 주전 PG였고 마찬가지로 입지가 불안한데다 만기계약자였던 존 팩슨의 어그로를 끌었다. 팩슨이 당시 시즌 도중 잠깐 BJ 암스트롱에게 주전자리를 내준 적이 있었는데, 이때 팩슨 부부는 진지하게 다른 자리를 알아봤을 정도. 팩슨의 친구인 에드 닐리가 피닉스와 70만 달러 계약을 했을때 크라우스는 내놓고 "자네는 저런 계약 기대하지 말게"라고 해 어그로를 끌 정도였다. 물론 팩슨은 파이널에서 대활약 이후 우승팀의 주축멤버로서 시즌 이후 백만달러 이상 계약을 끌어내게 된다.[15] 94시즌을 피트 마이어스란 평범한 SG로 떼워야했던 불스가 94-95시즌을 앞두고 야심차게 단행한 영입이었다. 실제로 하퍼는 당시 클리퍼스에서 에이스 대니 매닝에 이은 2옵션이었음에도 평균 20점을 올릴 정도였고, 비록 올스타에는 선정된 적이 없지만 올스타급 실력을 가진 선수로 널리 인정받고 있었다. 94시즌에는 4백만 달러를 받으며 “리그에서 가장 돈을 많이 받는 슈팅 가드”였던 적도 있다. 그러나 부상 후유증과 트라이앵글 오펜스 적응 실패로 인해 주득점원으로 활약하진 못했고, 불스 이적 직후부터 득점이 거의 반토막난 9점 수준이 된다. 또한 마이클 조던이 복귀하면서 조던과 공격범위가 겹치면서 외곽슛도 없는 하퍼는 더욱 설 자리를 잃게 된다. 이후 하퍼는 득점력을 거의 포기하고 수비 스페셜리스트로 변신하게 된다. 하퍼는 원래부터 긴 팔과 탁월한 운동능력으로 맨투맨 매치업에서 제법 실력을 발휘하긴 했지만 (클리블랜드 시절에는 크렉 일로와 번갈아가며 조던을 막았는데 전체적인 수비력은 일로가 위였지만, 조던과 거의 대등한 운동능력을 가졌던 하퍼의 수비를 조던이 더 힘들어했다. 물론 둘 다 털렸지만…) 본격적으로 수비가 부각된 건 불스 시절부터였다.[16] 여기서도 피스톤즈 최고 패서였던 토마스에게 인바운드 패스를 맡긴걸 볼 수 있다[17] 웃픈 사건은 결국 스틸당해(...) 러셀이 "얘들아 어쩌지"라고 했는데 (본인 회고니 웃기게 셀프비하일 수도 있다) 당시 젊은 선수였던 존 하블리첵이 상대팀 식서스의 인바운드 패스를 스틸해버려 (그 유명한 "Havelicek stole the ball!") 경기가 그대로 끝났다. [18] 그러나 이 시즌 워리어스는 정작 파이널에서 클리블랜드에 3승 4패로 우승을 못하는 바람에 여러모로 불스와 비교되고 있다.[19] 다큐 시리즈 라스트 댄스에 출연한 피펜 본인이 "난 내 여름을 재활하느라 날리고 싶지 않았다(fuck up my summer)"이라고 함으로서 간접적으로 인정했다.[20] ESPN Sports Century에서 바클리가 한 말에 따르면 인터뷰 직후 조던이 전화해 "그런말 한적 없어. 스카티가 한 말은 bs(bullshit:x소리)야"라고 했다고 한다. 진실이야 당사자들만 알겠지만 조던이 사적으로는 그리 친하지도 않은 피펜에게 형제처럼 친하게 지내는 바클리를 욕했을까? 조던과 바클리는 지금도 친하게 지내지만 피펜과는 둘다 사적인 교류가 없다.[21] 정작 바클리는 휴스턴을 떠나서 은퇴를 하려다 피펜과 계약한다는 소식을 듣고, "피펜이 온다면야"하면서 연봉 150만 달러의 헐값에 휴스턴과의 계약을 갱신했다. 특히 바클리는 "나에게 피펜같은 동료가 있었다면 조던이 가지고 있는 트로피중 절반은 내것이었을 것이다." 라는 발언까지 하며 피펜을 선수로서 대단히 높이 평가하고 존중해줬었다. 바클리가 우승에 얼마나 목이 말라있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22] 다만 6명의 선수 중 휴스턴에서 터진 선수는 아무도 없다.[23] 아무래도 시카고 시절에는 조던의 사이드킥이었기 때문에 자신만의 가치를 인정받기가 힘들었고, 때문에 피펜은 신진강호의 기둥으로 활약해서 팀을 정상으로 이끌어 자신만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었던 시기에 대한 아쉬움이 컸다. 당시 레이커스를 상대로 1승 3패로 뒤진 상황에서 5, 6차전을 잇달아 잡아내 동률을 만들었고, 최종 7차전 또한 4쿼터 한때 15점차의 리드로 파이널 진출을 목전에 두고 있었으나 정말 귀신에 홀린듯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으니 아쉬움이 클 수밖에 없을 듯.[24] 당시 포틀랜드는 워낙 주축선수들이 막장짓을 해대는 바람에 홈관중들마저도 팀을 외면하는 상태였다. 보이콧 움직임까지 보였으니...[25] 다만 그가 르브론과 더불어 가장 유명한 포인트 포워드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개념을 만들어낸 선수는 아니다. 이 용어가 등장한 것은 스몰 포워드였음에도 포인트 가드 역할을 했던 80년대 밀워키 벅스의 포워드 폴 프레시의 플레이를 언론에서 묘사하면서였다. 보통 포인트 포워드의 창시자라고 하면 프레시를 얘기한다.[26] 해당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3점 슛은 35%, 자유투는 75%가 효율성의 마지노선이다. 오죽하면 자유투로 이런 굴욕 영상도...[27] 98 파이널 당시 시카고의 박스 스코어를 보자. 피펜과 쿠코치가 15점, 나머지 선수는 5점 (...)이하인데, 그나마 피펜은 집중마크에 시달려 커리어 최악급의 야투율을 기록한 조던보다도 야투율이 낮다.[28] 앙숙인 아이재아 토마스도 드림팀 다큐에서 피펜이 합류하는 거를 거부한 걸 보고 조던이나 버드가 그러면 납득을 할텐데 너 따위가? 라는 반응을 보면...[29] 외곽선수들은 빠른 발을 이용해서 수비를 떼어내도록 돌아다니고 NBA수준의 선수들은 운동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에 지역방어의 영향을 크게 받지 않았다. 오히려 핸드체킹룰이 2004년에 개정되면서 외곽수비수 시 손으로 견제하는게 불가능해져 외곽선수들이 전성기를 맞았다. 단신에 돌파위주며 외곽슛이 그리 뛰어나지 않은 알렌 아이버슨이 지역방어 도입 이후에 나이가 30대에 접어들었음에도 오히려 커리어하이를 맞은게 그 증거. 그러나 발이 늦은 빅맨들은 상대적으로 영향을 많이 받았다. 이 때문에 90년대 득점순위를 보면 조던과 미치 리치몬드 정도만 제외하고 전부 4,5번으로 채워져있었지만 (레지 밀러는 고득점을 올리는 선수는 아니었다) 2010년대는 오히려 빅맨이 한두명 정도에 나머지는 전부 1~3번으로 외곽위주 선수들이다. [30] 여기에 거의 불쌍할 정도로 당한게 당시 데릭 피셔-샤킬 오닐이 이 듀오를 막아야했던 LA 레이커스. 오닐은 발이 느려 스탁턴을 결코 따라갈 수 없었고 185cm인 피셔는 슛과 돌파 둘 다 뛰어난 206cm의 탱크같은 말론에 손도 못 댔다. 이때문에 이들은 60승 팀임에도 무력하게 스윕당했다. 여담이지만 레이커스는 수비력이 좋고 키가 큰 론 하퍼를 영입해 피셔 대신 주전에 세움으로서 수비문제를 해결했고, 이로 인한 외곽능력 저하를 당시 리그 최고의 슈터 중 하나였던 글렌 라이스를 릭 팍스 대신 영입해 주전으로 세워 문제를 해결했다. 이때 라이스를 받는 대가로 샬럿 호네츠에 보낸 게 에디 존스.[31] 특히 2차 3연패 당시 시카고 불스는 타 팀의 후보센터급들로 센터진을 꾸려야했고, 파워 포워드 데니스 로드맨은 단신이었다. 이 때문에 패트릭 유잉이나 샤킬 오닐같은 특급 센터들을 막는 걸 특히 어려워했다.[32] 다만, 2차 스리핏 시절부터는 조던의 나이와 체력을 고려해 최대한 부담을 줄여주기 위해서 상대방 스윙맨 에이스에 대한 마크는 주로 피펜이 담당하게 되었다.[33] 6피트 8인치의 신장으로 스몰 포워드로서는 평균 이상의 신장인데도 자기보다 훨씬 작고 빠른 포인트 가드들을 수비할 때 별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 것도 피펜의 위엄을 보여주는 한 단면. 사진과 같이 비슷한 시기 활동했던 NBA 최단신 먹시 보그스도 마크한 적이 있었는데 해설자가 2미터가 넘는 피펜이 170도 안되는 보그스보다도 자세가 낮다며 감탄했던 적도 있다.[34] 워낙 강팀이라 어쩌다 한번 진게 충격적인 거지 호구잡히거나 그런건 전혀 아니다[35] 원래 메인 볼 핸들러로 볼을 쥐는 시간이 김과 동시에 도전적인 패스를 넣어줘야하는 포인트 가드 포지션에서 일정 수준의 턴오버는 숙명과 같다.[36] 바비 존스는 역대급 파워 포워드 수비수로 자주 거론되는 선수이다. 6-9의 3번으로는 큰 키를 바탕으로 한 파워 포워드였는데, 트랜지션 디펜스에 탁월하여 별명이 '국방장관'이었다. 선수 시절 열 번이나 디펜시브 퍼스트 팀에 선정되었다.[37] 어느 정도 팀 동료를 띄우기 위한 립서비스가 섞인 발언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마이클 조던은 스카티 피펜에 이은 팀의 제2볼핸들러였다. 보조리딩을 했으며 팀내, 그리고 리그 최고의 맨투맨 수비수이자 가드로선 최상급의 리바운더였다. 89시즌에는 시즌 중반부터 포인트 가드를 맡으면서 2010년 전후의 르브론이 보여준 것 이상의 1차스탯인 32점 8리바운드 8어시스트를 기록하고 피펜도 타지 못했던 올해의 수비수(DPOY)를 타는 등 기본적으로는 피펜 이상으로 다재다능한 선수였다. 2차 3연패 당시에 불스엔 리딩이 좋은 포인트 가드가 없었기 때문에 필 잭슨은 사실상 승부가 갈린 경기가 아니면 거의 항상 조던이나 피펜 중 한 명을 뛰게 했다. 그래야 경기조립이 되기 때문.[38] 마이클 조던 - 더 라스트 댄스 2화에서[39] 능력치가 10점이 만점인데 스피드는 10점 만점의 8점, 파워는 6점, 슈팅력은 8점 덩크 9점, 스틸 9점 블럭 8점으로 블럭은 빅맨 포지션인 로드맨보다 높고 슛은 스티브 커와 동급이며, 스피드는 작은 가드들 빼곤 거의 최상급이다. 파워가 낮아보여도 실제 게임플레이에서 센터들에게 쉽게 밀리지 않는 파워인데다가 모든 스킬이 골고루 발달되어 있어 실제 플레이에선 사기캐였다.[40] 사실 피펜은 조던을 찬양하는 다른 불스 동료들과는 달리 조던을 칭송하는 걸 다소 꺼리는 모습도 보인다. 한 방송에서 케니 스미스가 조던이 은퇴를 안 했어도 94 휴스턴 로켓츠가 불스를 이겼을 것이라고 하자 다른 패널인 폴 피어스와 빈스 카터는 조던의 존재를 계속 언급했으나 피펜은 불스가 이길것이라고 하면서 조던은 크게 언급하지 않았다. 매치업상 절대우위(vs 버논 맥스웰)인 포지션임에도. 또한 골든스테이트와 불스의 비교에서 조던이 매치업 상대인 클레이 톰슨에게 "우위를 점할 확률이 높다 (probably)"라고 해서, 다른 패널들이 "확률이 높다고요?? (Probably??)"라고 반문하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역대최고 선수인 조던이라면 톰슨을 박살낸다고 보는게 일반적. 그래놓고 자기랑 듀란트는 서로를 지울 거라고 했는데, 까놓고 말해 피펜의 득점력은 더 크고 수비가 좋은 듀란트에 지워지는게 당연하니만, 아무리 수비왕급 선수라도 득점왕급의 공격수를 지우는 건 불가능하다. (조던을 역대 가장 잘 막은 듀마스가 그에게 허용한 평균 점수가 30점이다) 아무래도 다들 조던만 칭송하고 자기는 들러리 취급하니 진절머리가 난듯).[41] 저 발언이 나오기 불과 하루 전에 찰스 바클리가 "르브론이 코비와 대등한 위상을 자랑하려면 다시 한 번 골든스테이트를 파이널에서 꺾어야 한다"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피펜이 이에 대한 연장선상에서 의견을 밝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