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대 켈빈 남작 윌리엄 톰슨

 

1824년 6월 26일~1907년 12월 17일
영국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의 수리물리학자이자 공학자. 본명은 윌리엄 톰슨(William Thomson)이나 1892년 열역학에서의 업적으로 켈빈 남작(Baron Kelvin)이라는 작위를 얻은 뒤로는 거의 켈빈으로 통한다. 위키피디아에서는 1st Baron Kelvin로 기록되어 있는데 켈빈 남작에게 후손이나 가까운 친척이 없어서 그가 죽은 후에는 작위가 단절되어서 2대 남작 그런 거 없다. 따라서 세계적으로도 켈빈 남작보다는 켈빈 경(Lord Kelvin)으로 불리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절대온도의 단위인 '켈빈'은 그의 이름에서 따왔다.
조지프 존 톰슨과 비슷한 원자모형을 생각했다고 한다.[1]
과학자로서의 흑역사로는 지구의 나이를 잘못 계산한 사례가 있다. 그는 지구 내부의 온도와 크기를 토대로 지구가 탄생 이후 냉각되는 시간을 계산해서 지구의 나이를 추정했는데, 그는 지구의 나이가 많아도 1억년을 넘지 않으며 약 2천만년 남짓이라는 계산 결과를 얻었다. 이는 당시에는 지구 내에 있는 방사성 동위원소의 붕괴로 열이 계속해서 발생해서 지구가 빨리 식지 않는다는 사실이 증명되기 않았기 때문에 벌어진 실수였다. 여기까지라면 다른 과학자들도 가끔 저지르는 단순한 착오였을텐데, 켈빈은 이 계산을 토대로 찰스 다윈진화론은 설득력이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사실 켈빈이 지구의 나이를 계산한 이유도, 이 진화론을 반박하면서 그 근거로 '지구의 나이는 그다지 길지 않으며, 이 시간으로는 진화가 일어나기에 필요한 시간이 부족하다'라는 논거를 내세웠고 이를 증명하기 위함이었다. 켈빈으로선 나름대로 합리적인 이유를 찾기 위해 노력한 것이지만 그도 미처 알지 못한 다른 요소 때문에 잘못된 결론을 내려버린 것.
위의 지구 나이 계산보다는 덜 알려져 있고 그 정도도 심하지 않지만 다른 흑역사도 있다. 켈빈은 물리학의 발전이 사실상 끝이 났다고 단정을 내리고 다음과 같은 발언을 남기기도 했다.

"An eminent physicist remarked that the future truths of physical science are to be looked for in the sixth place of decimals."

의역: “이제 물리학에는 그저 ‘소수점 아래’를 다듬는 정도의 사소한 문제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켈빈의 이 발언에 대한 변호를 하자면, 켈빈이 활동하던 19세기 말 당시의 물리학계의 사정을 파악해야 한다. 아이작 뉴턴고전역학을 확립한 이후 열역학전자기학이라는 세부 학문이 등장했다. 하지만 이 것도 에너지란 개념이 등장하고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이 전자기학을 정립하면서 이제 물리학은 세부적인 수치 계산을 제외하면 더 이상의 발전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켈빈의 이 발언은 이러한 시대적 배경에서 기인한 것. 물론 켈빈의 예상은 흑체복사의 연구를 통해 빛의 양자성, 그리고 양자라는 개념 자체가 새로 등장하고 여기에 어느 특허청 직원이 내놓은 물리학 논문들이 등장하면서 박살난다.

[1] 에테르#s-1.1가 다른 매듭을 지어서 원자를 만들어냈다는 가설을 세웠는데 이는 이후 매듭이론으로 발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