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의 주요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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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벨물리학상 수상자'''
[image]
1920년

1921년

1922년
샤를 기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닐스 보어









'''타임지 선정 20세기의 인물'''
''Time Person of the Century''
[image]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Albert Einstein
'''[1]
'''출생'''
1879년 3월 14일
독일 제국 뷔르템베르크 왕국 울름
'''사망'''
1955년 4월 18일 (향년 76세)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
'''국적'''
, [2]
'''학력'''
아라우 아르고비안 주립학교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 (졸업) (1896년-1900년)
취리히 대학교 물리학 (박사)[3] (-1905년)
'''직업'''
물리학자
'''배우자'''
밀레바 마리치 (1903년~1919년)
엘자 아인슈타인 (1919년~1936년)
'''자녀'''
리제를 아인슈타인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에두아르트 아인슈타인
'''신체'''
175cm
'''종교'''
무종교[4]
'''서명'''
[image]
1. 개요
2. 생애
2.1. 어린 시절
2.2. 대학 시절
2.3. 초기 직장 생활
2.4. 특허청 시절
2.5. 연애와 결혼
2.6. 망명
2.7. 죽음
3. 업적
3.5.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3.6. 아인슈타인 고체 모델
3.9. 우주 상수
3.10. 유도방출
3.12. 반핵 운동
4. 일화
4.1. 아인슈타인과 수학
4.2. 개인적 일화와 인간성
5. 그 외
5.1. 양자역학에 대한 반감
6. 어록
7. 대중매체에서
8. 논란
8.1. 밀레바 마리치의 기여 논란
8.2. 중국인·아랍인·스리랑카인 비하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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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에서 태어난 유대계 스위스-미국[5] 물리학자로 20세기 물리학 발달에 일대 충격이라고 할만한 혁신적인 발견들을 이루었다. 흔히 '''아이작 뉴턴 이후 가장 중요한 물리학자'''라고 불릴 정도. 아인슈타인으로 불리는 사람 중 가장 유명한, 흔히 아인슈타인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이 사람이다.
아인슈타인의 연구들은 산업 전반(특히 전자공학과 반도체)과 병기공학, 광학, 군사전술, 원자력 발전과 같은 현대인의 삶과 밀접한 분야들의 핵심이 되었고 그의 이론으로 탄생한 핵무기를 포함한 다양한 발명품들은 국가간의 외교전략을 완전히 바꾸어버렸으며 인류의 삶을 변화시켰다.
아인슈타인은 물리학자나 연구원, 과학 뿐만 아니라 전 세계 일반인의 사고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의 헤어스타일, 표정, 얼굴 주름, 패션, 눈빛 등 개인의 이미지들이 '''천재의 상징, 대명사와도 같은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879년 3월 14일 오전 11시 30분 독일 울름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부터 천재성을 보이는데 12~16살에는 미적분을 혼자서 공부했다고 하며, 특히 유클리드 기하학을 보고 그 논리성에 감탄했다고 한다.[6] 이후 김나지움에 진학했는데 수학, 물리학에 심취하여 당시 교육과정을 뛰어넘어 교사들도 쩔쩔매는 질문을 해 유명한 학생이 된다. 이런 아인슈타인의 초월질문에 교사들은 "너의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겠다."라고 대꾸했는데, 이게 와전되어 아인슈타인이 공부 못하는 아이였다는 식으로 떠돌게 된 것이란 얘기도 있다.
당시 독일의 주입식 교육[7]에 굉장한 반감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것은 훗날 학풍이 보다 자유로운 스위스로 유학을 떠나는 계기가 되기도 한다. 여튼 1894년 말에는 의사에게 진단서를 받아서 휴학을 하고 가족을 찾아 떠나는데, 이 시기에 쓴 첫 번째 논문이 'On the Investigation of the State of the Aether in a Magnetic Field'(자기장에서의 에테르의 상태)이다. 참고로 이때가 한국 기준 고등학교 1학년(...)..[8]
1895년 중순 취리히 공과대학 시험을 쳤으나 떨어졌다. 하지만 남달리 뛰어난 수학 실력과 물리학 실력을 인정받아서, 학장이 고등학교 졸업장을 따오면 입학시켜주겠다고 해서 배려로 1년 후에 입학하게 된다.
17세 때 스위스 아라우의 아르고비안 주립학교에 다녔다. 당시 교수의 집에서 하숙하고 있었는데, 교수의 딸이었던 첫사랑인 마리 빈텔러(Marie Winteler)를 만났다.[9] 이후 아인슈타인은 연애편지를 자주 썼는데, 1896년 아인슈타인이 대학에 진학을 하고, 마리가 교사가 되고, 이사를 가면서 사이가 멀어졌다. 둘은 계속 연락을 했지만 아인슈타인이 먼저 연락을 끊고 싶다고 했고, 마리는 그런 아인슈타인을 잔인하다고 비난했다. 그래서인지 아직도 남아있는 편지들 중에는 찢어진 것도 있다고(...). 아인슈타인은 1903년에 밀레바와 결혼하고도 사이가 좋지 않아서 마리에게 계속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신문기사.
1896년 9월 스위스 고등학교 졸업 시험을 통과했다. 스위스에서는 졸업 시험을 1~6으로 평가하는데 6이 최고점이다. 아인슈타인은 대수학, 기하학, 물리학에서 6을 받았다. 지리학 등 세 과목에서 4점, 프랑스어에서 3점을 받아서 한국 인터넷에서는 '아인슈타인은 낙제생이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한다. 이는 아인슈타인이 다닌 스위스 학교인 아르가우 칸톤이 이전 학기는 등급제로 수학, 물리학을 등급제로 표기하여 1로 적었으나 다음 학기부터 점수제로 표기하여 6을 적어 생긴 오해이다. 당시 독일이 등급제였기 때문에 그의 성적을 본 이들이 그가 이론 물리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낙제점을 받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낙제한 것은 대입 시험 시의 수학과 물리학 외의 지리, 프랑스어 등의 과목에서와 대학시절 '장 페르네의 기초 물리학 실험' 수업에 자주 출석을 하지 않아 화난 교수가 1점을 부여하여 그 수업에 낙제한 것이 전부였다.
물론, 별로 흥미가 없었던 어학 관련 과목은 실제로 성적이 나빴고, 어쨌든 낙제를 하기는 했다.. 현대 한국의 상황으로 굳이 비유하자면, 수학과 과탐은 1등급이 나오는데, 언어와 영어는 5~6등급대에서 노는 극단적인 이과 덕후라고 보면 된다. 그리고, 날이 갈수록 수학마저도 흥미를 갖지 못하고 게을리해서 캠퍼스 커플이었던 밀레바의 수학 노트를 빌려보면서 도움을 받기도 했다.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수업을 자주 빼먹고도 무사히 졸업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작 아인슈타인에게 노트를 빌려 준 밀레바는 수학 시험 성적이 좋지 않아 졸업에 실패했다.

2.2. 대학 시절


취리히 연방 공대(ETH Zurich)에서 '수학 물리 교육과정'을 전공했다. 후술되어 있지만 졸업할 때 교원 자격을 땄으며, 이 자격증을 광고하며 개인 과외를 구하려 한 적도 있다. 참고로 아인슈타인의 아버지는 전기 공학자였고, 아인슈타인도 자연스레 전기 기술자의 길을 걸으려 했다고 한다.
잘하던 물리학과 수학 중에서, 대학 진학 후에는 물리학에 더 큰 관심을 가지게 된다. 그 이유는 수학에는 흥미로운 문제가 너무 많아서 무엇을 풀어야 할지 모르겠는데, 물리학에는 그러한 문제가 수학보다는 덜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절대 아인슈타인의 수학 실력이 평범했다는 것은 아니다. 일반 상대론에서 쓰는 리만기하학은 당시 수학의 최전방 분야의 하나였고, 논문을 찾아서 봐야했으니 관심있는 수학 전공 학부생이나 그 상위의 코스를 밟고 있는 자가 아닌 이상 알기 힘들던 시대였다.
사실 그가 대학에 와서 수학을 등한시하고 물리학에 심취한 배경엔 대학 시절 교수였던 저명 수학자 민코프스키와의 트러블도 원인이 되었다고 여겨지는데, 민코프스키는 아인슈타인이 너무 불성실한 학생이라 졸업한 것이 놀랍다고 말하기도 했다. 교수와의 트러블은 아인슈타인이 대학을 졸업하고도 교수 추천서를 받아내지 못해 취직에 어려움을 겪게 된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는데, 그 외에도 시민권이나 여러가지 복합적인 사유가 있었다.
하여튼 아인슈타인은 대학 시절에 자신이 좋아하는 과목을 제외하고는 출석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시험이 다가오면 친구들의 노트를 빌려서 벼락치기나 하고 (아내 밀레바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시험만 겨우 통과하는 식이었다. 이런 일은 그의 경력에도 문제였지만, 결론적으로 그를 도와주는 사람은 친구들 이외에 별로 없게 된다. 그래도 완전히 논 건 아닌지 1899년에는 물리학에서 5.5점을 받는 등 평균평점 5.7/6점을 받아서 6명 중 1등을 하기도 했다. 1900년 졸업시험 때는 평균평점 4.91/6을 받아 6명 중 4등을 했다. 그리고 밀레바를 제외한 5명은 졸업을 한다. 하지만, 위에서도 서술되어있듯이 아인슈타인은 밀레바의 수학 노트를 빌려서 공부하기도 했었다.

2.3. 초기 직장 생활


아인슈타인은 대학전공과는 무관한 다소 엉뚱한 곳에서 첫 직장생활을 시작한다. 왜냐하면 상술했듯 아인슈타인의 지도교수가 그의 자만심과 불성실한 자세를 싫어하여 추천서를 써주지 않아 전공인 물리학 쪽으로 마땅한 취직자리를 얻지 못했기 때문. 물론 이 이유뿐인 건 아니고 유대인이라는 데서 온 인종차별과 시민권 문제 등이 겹친 것으로 보인다. 결국 보험회사에 취직한 뒤, 월급만으론 생활이 어려워 과외알바를 시작한다. 이때가 1902년 봄. 아인슈타인은 베른 신문에 다음과 같은 광고문을 내었다. (아래 절반)
[image]

Privatstunden in

☞ '''Mathematik u(nd) Physik'''

für studierende und Schüler erteilt gründlichst

'''Albert Einstein''', Inhaber des eidgen(össischen)

polyt(echnikum) Fachlehrerdiploms,

Gerechtigkeitsgasse 32, 1. Stock.

Probestunden gratis.

개인 교습

☞ '''수학과 물리학'''

전 학년 학생 대상으로 철저한 지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스위스) 연방 이공학 교사 자격증 소지.

게레히티크카이츠 가(街) 32번지, 1층.

시범 강의 무료.[10]

참고로, 이 광고를 보고 오라는 학생은 오지 않고, 아인슈타인과 비슷한 나이의 '학생' 2명이 이 광고를 보고 물리학을 배우겠다면서 아인슈타인을 찾아와 친구가 되었다. 이 모리스 솔로빈, 콘라트 하비히트 2명은 아인슈타인의 결혼식에 들러리로 참석했다.
허나 이 아르바이트 문제로 상사와 싸운 뒤 해고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 무렵 딸 리제를의 탄생, 아버지의 사망이라는 사건까지 함께 겪게 되며 우울한 시기를 보내게 되었다.

2.4. 특허청 시절


실업자가 된 아인슈타인은 대학 동창으로 절친한 친구였던 마르첼 그로스만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로스만의 아버지[11]특허청 고위공무원에게 부정청탁해서 아인슈타인은 간신히 위기를 탈출했다. 1902년 아인슈타인은 스위스 베른으로 이주했다.
특허청 심사관은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출원된 특허 서류를 검토하면서 이게 특허 등록이 가능한 건지 아닌지 판정하고 허가를 내리는 일을 한다. 심사관 한 사람이 연간 300여 건[12]의 특허를 처리하는 데다 심사관 한 사람이 다양한 분야의 특허를 처리해야 하므로 심사관으로 근무하면서 자투리 시간에 연구를 해서 연구자로서 성과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은 그걸 해내서[13] 1905년에 5편의 논문을 독일의 물리학 연보(Annalen der Physik)에 연속으로 발표했다. 5월에 '브라운 운동', 3월에 '광양자 가설', 6월에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을 연달아 발표했고 7월에는 '고체를 이루는 분자의 운동과 에너지'에 대한 주제로 취리히대학교[14]의 박사 학위 논문을 발표했다. 9월에는 'E=mc2'로 잘 알려진 질량-에너지 등가원리에 대한 유명한 논문을 발표한다.
5편의 논문 중 5월에 발표된 세편의 논문은 엄청난 것으로 3가지 논문 모두 이후 물리학의 세부 학문을 만들어내면서 이중 광양자 가설으로 노벨상[15]을 수상하게 되었다. [16] 이 외에도 아보가드로수 관련 논문을 썼다고 한다.
이럴 수 있었던 이유는 아인슈타인이 당시 심사관으로서 시계들의 동기화(synchronisation)를 하는 기계에 대한 특허를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은 현대화가 가속되는 시점이었기 때문에 여러 시계들(이를테면 전국의 기차역들에 있는 시계들)을 동기화하는 것은 사업가들에게 중요한 문제였다. 또, 19세기 말은 제국주의의 시대였고 본국과 점령지들 사이의 시계를 동기화 시키는 것(시간을 지배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도 의미가 있었다. 이런 시대적 배경이 있었기에 시계들을 동기화하는 것에 당시 사람들의 관심은 컸다. 당연히 그 중에는 전자기현상(빛)을 이용해 시계를 동기화하겠다는 아이디어도 있었고,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서 일하면서 이런 아이디어들을 자연스럽게 접하였다. 때문에 아인슈타인에게 절대 시간, 여러 관찰자들 사이의 변환 등의 개념은 단순히 추상적 사고 대상이 아니라, 여러 특허들을 보며 현실적으로 풀어야 할 과제였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특허 서류들을 보면서 전자기학에 대한 사고 실험을 많이 했고, 시간이 남을 때마다 도서관에 갔으며 그것이 굉장히 즐거웠다고 한다. 오늘날 GPS 등에서 시계를 동기화 하는데 상대성 이론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당시 아인슈타인이 특허청에서 일했던 경험의 영향은 결코 적지 않았을 것이다.
1909년 아인슈타인은 특허청에 사표를 냈다.

2.5. 연애와 결혼


다음 사항들을 철저히 준수하시오.
* 내 옷과 빨랫거리를 잘 관리하시오.
* 세 끼 식사를 제시간에 내 방으로 가져오시오.
* 내 침실과 서재를 깨끗하게 정돈하고, 특히 내 책상은 나만이 사용하는 것임을 명심하시오.
* 사회적으로 필수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나와의 모든 개인적인 관계를 포기하시오. 구체적인 예를 들어,
* 집에서 당신과 함께 앉아 있는 일
* 당신과 함께 외출하거나 여행을 하는 일
나와 당신 간의 관계에 있어, 다음 사항들을 준수하시오.
* 나에게서 어떠한 친밀한 관계도 기대하지 말 것이며, 나를 어떤 식으로든 비난하지 마시오.
* 내가 요구할 경우 즉각 침묵하시오.
* 내가 요구할 경우 일체의 항의 없이 즉시 내 침실이나 서재에서 나가시오.
* 우리 자녀들의 앞에서 나를 깎아내리는 말이나 행동을 하지 마시오.

― 아인슈타인이 결혼한 후 사이가 나빠진 뒤 그의 부인 밀레바에게 제시한 요구서[17]
그의 과학적 업적과는 별개로, 한 인간으로서 가장 크게 비판받는 부분이라면 아무래도 결혼 생활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결혼을 두 번 했는데, 우선 첫 번째 부인 밀레바는 결혼하기 전부터 아인슈타인의 집안 쪽에서 그녀에 대한 반대가 있었다고 한다. 가장 큰 이유는 밀레바가 아인슈타인보다 나이가 많고, 아인슈타인과 동시에 물리학을 전공했으며, 세르비아계 외국인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설에 의하면 아인슈타인의 어머니가 밀레바를 '늙은 마녀'(...)라고 불렀다는 기록도 있다. 밀레바는 1900년 대학 졸업 시험에서 떨어져 다시 졸업장을 따려고 시험 준비를 할 생각이었는데, 1901년 아인슈타인과의 사이에서 원하지 않는 임신으로 인해 시험 준비가 좌절되었으며, 1903년 둘은 결혼했다.
아인슈타인은 일반적으로 너무 연구에만 매달려 부인이나 가정에 소홀했다는 식으로 알려져 있는데, 연구도 연구지만 아인슈타인은 유대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도중 중립국으로 피신했고, 첫 아내 밀레바와 떨어져 있는 시기 동안 친척 누나이자 당시 과부였던 엘자와 친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18] 그리고 엘자와 결혼하기로 결정하면서 밀레바를 저버리게 된다. 그렇게 1919년 밀레바와 이혼한 후 같은 해 엘자와 결혼했다. 물론 위인전 같은 책에서는 이런 일을 상세히 기술하기 곤란하므로, 대부분 연구에 몰두하다 보니 가정에 소홀해 사이가 멀어져 이혼했다는 정도로만 기재하는 편이다.
문제는 이혼 후 밀레바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에게 신경을 써 주지 않아 밀레바를 고생시켰다는 것. 그녀는 아인슈타인과 이혼한 이후 피아노 가정 교사로 활동하며 두 아들을 홀몸으로 키웠는데, 밀레바와 이혼할 당시 아인슈타인이 이후 노벨상을 받게 되면 그 상금을 모두 밀레바에게 양도하기로 계약했기 때문인지[19] 이후 그녀가 경제적인 지원을 요청해도 들어 준 적이 별로 없다고 한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아인슈타인과 밀레바 사이의 차남이었던 에두하르트는 지적장애를 앓고 있었는데, 어느 날 느닷없이 발작을 일으켜 어머니를 목 졸라 죽이려 했던 일 때문에 잡혀가서 평생 정신병원에 수감된 채 살다가 죽었다. 그 일이 있은 뒤 큰 충격을 받았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밀레바 또한 사망했다.
밀레바의 장남은 아버지의 머리를 닮아 총명하여서 버클리 주립 대학에서 수력학 교수를 역임하고 있었는데, 아인슈타인의 부고를 듣고도 신문에 짤막한 애도문을 몇 줄 낸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아버지의 무책임한 도피 이후 일련의 불행을 겪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 밑의 죽음을 보면 알 수 있듯 아인슈타인 본인도 여생에 큰 미련은 없었던 것 같지만... 어쨌든 자식에게 좋은 아버지였다고는 할 수 없었던 인물.

2.6. 망명


1930년대가 되자 독일은 아돌프 히틀러가 집권하면서 유대인 탄압이 시작되었다. 상대성 이론을 비롯한 그의 연구, 책들도 유대인의 연구라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불태워지는 수모를 당했다. 여기에 필립 레나르트, 요하네스 슈타르크 등을[20] 필두로 한 저명 과학자들마저 '독일 물리학'이라는 명목 아래 아인슈타인 등 유대인 과학자들의 연구 업적을 부정, 배척하는 주장을 공공연히 내세웠다.
이에 아인슈타인은 1933년에 유대인을 탄압하는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했다. 당시 이렇게 미주지역으로 도망친 유태인은 꽤나 많았는데 볼펜을 발명한 헝가리 국적의 유태인인 비로 라슬로 역시 비슷한 시기에 아르헨티나로 망명했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해 프로이트 등 몇몇 유명인사들 역시 나치를 피해 망명했다. 아인슈타인은 미국으로 도망친 이후 프린스턴 대학교의 교수가 되었다. 아인슈타인은 나치를 피해 망명하면서 "권위에 대한 맹목적인 복종이 진실의 가장 큰 적"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 반작용으로 유대인만의 국가를 만들자는 시오니즘 운동에 기여했다는 말도 있는데, 열성 지지자는 아니고 '이름만 빌려준' 정도에 그쳤다고 한다.[21]
이렇게 망명한 덕분에 아인슈타인은 나치의 박해로부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2.7. 죽음


아인슈타인의 공식적인 사인은 복부 대동맥류 파열로 인한 내출혈이다. 이스라엘 건국 7주년 기념행사의 연설을 준비하다가 쓰러졌는데, 병원으로 실려갔을 당시

'''"I want to go when I want. It is tasteless to prolong life artificially. I have done my share, it is time to go. I will do it elegantly."'''

"나는 내가 떠나고 싶을 때 떠나고 싶소. 인간의 기술로 삶을 늘리는 건 '''천박한 짓'''인 거 같소. 내 사명은 이제 끝냈으니, 우아하게 갈 때라오."

이 말을 하며 수술을 거부하였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까지 연구를 계속하다가 결국 사망했다.'''
유명인물 치고는 유언이 알려져 있지 않은데, 죽을 당시 미국에 있어서 주위에 찾아와 있던 '미국' 지인들이 '''그가 죽기 직전 내뱉은 독일어를 알아들을 수 없었기 때문이라고.'''[22]
아인슈타인의 사후는 상당히 쇼킹하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을 화장하길 원했고, 실제로 화장되긴 했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사체 부검을 맡았던 프린스턴 병원의 병리학자 토머스 스톨츠 하비(Thomas Stoltz Harvey) 박사는, 아인슈타인이 죽기 전에 미리 동의를 구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뇌를 무단으로 적출한 뒤 240조각으로 잘라내어 보관해 두었다. 관련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죽은 지 하루도 안 되어서 화장되었고, 그의 뇌는 하비 박사가 적출해서 포르말린 용액에 보관했다고 한다. 최초 적출 상태에서는 조각내지 않고 보관했었고, 주기적으로 관리되었다고 한다. 그 후 비밀로 붙이는 가운데, 아인슈타인의 손녀를 만나기도 하고, 뇌 연구가들에게 일부분이 제공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의 뇌는 그 이후 흑백으로 전후좌우 사진을 찍은 후 조각내졌다. 현재는 뇌의 일부분만 제한적으로 공개되고 있으며, 전체적인 조각은 다큐 방송 이후로 비공개 상태로 보관 중이다.
당연히 이 사실이 알려지자, 하비는 학자로서 윤리 의식이 결여되어 있다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에 하비 박사는 과학의 발전을 위한 것이었다는 주장을 하며 뻔뻔하게 맞섰다. 웃긴 사실은 아인슈타인의 뇌가 보관되고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수많은 과학자들이 같이 연구하자는 진풍경이 펼쳐졌다고. 이후 아인슈타인의 뇌는 박물관에 보관된다. 이 부분은 2015년 6월 28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하비 박사의 실책과는 별개로, 아인슈타인의 뇌는 생각보다 크기가 크지 않고 일반인과 비슷하여 머리의 크기와 지능 지수는 비례하지 않는다는 반론의 산 증거가 되었다.[23][24][25] 다만 공간 지각 능력, 수학, 사물에 대한 이름짓기, 복잡한 문법, 운동 명령을 담당하는 두정엽은 일반인보다 15~30%가량 컸다고 한다. 또한 뇌의 전체적인 무게는 오히려 일반인의 것보다 가벼웠다고 한다. 이는 뉴런의 양이 많아진 것이 아니라 특정 뉴런이 발달한 것이라고 학자들은 설명한다.

3. 업적


우선 원자폭탄을 만든 사람으로 잘못 알려져 있기도 하나, 원자폭탄은 그가 '''제작'''한 것이 아니다. 그가 이뤄낸 '물리학'적 쾌거가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도움이 된 것일 뿐, 실제로 맨해튼 계획에서 가장 큰 기여를 한 사람은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이다. 맨해튼 계획 실행을 촉구한 편지에 서명을 한 건 맞으나, 오히려 아인슈타인은 후술하듯 이후 반핵 운동에 앞장선다.[26]

3.1. 광전효과


[image]
1902년 광전효과라는 독특한 현상이 보고된다. 이 효과는 기존의 빛에 대한 개념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래전부터 빛의 본성에 대한 논의와 연구가 꾸준히 있어 왔으며, 파동설과 입자설이 서로 경쟁해왔다. 근대에는 빛이 슬릿을 통과하여 보이는 회절-간섭 무늬 패턴이 빛이 파동이라는 확실한 증거로 나타남으로써, 빛은 파동이라는 것이 정설로 자리잡게 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의 실험데이터를 기존의 빛에 대한 이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광양자라는 개념을 도입한다.
광양자 가설은 의 에너지가 양자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현재는 광자(Photon)라고 명명되었다. 이것은 이후 양자역학을 이뤄내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정확히 말하자면, 플랑크의 양자가설을 바탕으로 해, 빛에는 일정한 에너지 단위, 양자화 된 무언가가 있는데, 그것이 빛에게 입자적 성질을 가지게 한다고 했다.(E= n hf, n= 정수배) 양자화 된 그 무언가를 그는 '광양자'라고 불렀으며 빛은 광양자들의 모임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광전효과로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다.
이는 빛이 파동이라고 생각했던 기존의 학설을 반박함과 동시에, 이 가설에 사용되었던 플랑크 양자가설을 더 굳건하게 하였다. 빛이 가지고 있는 이중성을 거의 못박은 셈. 이 이론은 많은 물리학자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했다. 대표적으로 드브로이가 있는데, 그는 빛이 가진 파동과 입자의 "이중성"에 자극받아 "혹시 우리가 입자라고 생각했던 전자가 파동이 아닐까?"라는 것을 느끼고 나온 것이 물질파다. 또 슈뢰딩거 역시 그의 물질파 개념에 영향을 받아 전자를 파동함수로 기술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을 제안하게 된다. 플랑크의 흑체복사이론과 함께 양자역학 태동의 도화선으로 작용한 셈. 흔히 상대성 이론만을 알고 있는 일반 대중에게는 익숙하지 않지만, 물리학이나 전자공학 등에 조금만 손 대기 시작하면 정말로 중요한 개념임을 알 수 있다. 양자역학뿐 아니라 LCD, LED 등 디스플레이 소재 등의 발광소자 등의 기본원리이며, 이미 20세기 초반에 현대 물리의 가장 중요한 개념인 '''기본 입자'''중 하나인 광자라는 입자를 규명했다는 것에서 그 중요성은 절대로 상대성 이론에 뒤지지 않는다.

3.2. 브라운 운동


브라운 운동이란 1827년 영국의 생물학자 브라운이 발견한 현상으로, 물에 작은 입자를 집어넣었을 때 외부의 특별한 간섭이 없어도 여기저기로 움직이는 현상이다.
브라운은 꽃가루로 실험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당시에 유행하던 학설이던 생기(생명체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기운)를 발견했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아무 입자든지 작기만 하면 같은 행태를 보인다는 것이 관찰돼서 물리학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아인슈타인의 업적은 이것이 물 분자의 열운동에 의해 그 입자의 통계 역학적 임의 보행(Random walk) 운동하는 현상이라고 설명한 것이다. 예를 들어, 물통에 아주 아주 아주 작은 입자를 하나 넣었다고 해보자(물통은 정지해 있다). 그런데 그 입자는 물 속에서 물분자들과 충돌하게 되고 결국 스스로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 입자가 앞으로 어떻게 움직일지는 거의 랜덤이라서 랜덤워크운동한다고 하는 것이다. 물통에 들어간 입자가 충분히 크다면 역학적 평형관계를 이루게 되지만, 입자가 너무너무 작으면 이리저리 움직인다는 것. 아인슈타인은 이런 가설로부터 미소입자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식을 만들었는데, 이는 추후에 프랑스 물리학자 바티스트 페렝이 실험으로 검증해냈다.[27]
이 업적의 중요한 부분은 당시에는 생소했던 확산(Diffusion)이나 임의보행과 같은 개념을 도입하고 이론화 한 것이다. 즉, 무작위과정(stochastic process)이 물리학에서 중요개념으로 데뷔한 사건으로 그 중요성이 같은 해에 발표된 광양자가설이나 특수상대론에 비해 결코 처진다고 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그 이전까지 원자는 자연현상을 편리하게 설명하기 위한 가상의 개념이란 견해가 많았는데, 이는 원자의 존재가 실험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루트비히 볼츠만 등의 물리학자는 원자론의 개념으로 기체를 연구하는 과정에서 원자론을 받아들이지 않는 진영의 맹비난을 받고 조롱거리가 되기도 한다. 아인슈타인은 원자개념이 없이는 브라운 운동을 절대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해냈고 이후 원자가 실재하는 개념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아인슈타인이 만든 확산-임의보행모델은 통계역학에서 중점적으로 연구되었고, 수학에서도 확률미적분학 등으로 발전했다. 그 영향력은 오늘날에는 '''경제학'''의 경제예측 및 시계열분야, 주식/채권을 분석하는 금융경제학에서도 연구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 (이래서 경제학계에서 순수 수학 / 이론 물리학자들을 대거 채용한 적이 있었는데[28] 이들을 통칭 '로켓과학자'라고 불렀다.)
대표적인 예로, 이 브라운 운동은 파생상품인 옵션의 가격을 계산하는데 쓰인다. 시카고 대학 경제학과의 Fischer Black과 Myron Scholes는 주식 가격이 로그 정규분포를 따른다고 가정하고[29] 주식과 옵션과의 관계를 수식으로 만들어 보았더니 옵션 가격에 대한 편미분 방정식을 얻었다. 이것의 해를 구해야 옵션 가격을 계산하는데, 편미분 방정식에 대해 조금이라도 안다면 이해하겠지만, 편미분 방정식의 해를 구하는 건 도통 어려운게 아니다. 블랙과 숄즈 두사람이 GG치고 자기들보다 수학 잘하는 물리학과에 가서 도움을 요청했는데... 이거 브라운 운동 아님? 아인슈타인 등등 물리학자들이 이미 다 풀었는데? 하고 해를 구해주었다고... 이 해가 블랙-숄즈 옵션 가격 계산식(Black-Scholes Option Pricing Model) 으로, 옵션 매매에 필수로 사용되는 계산식이다. 블랙과 숄즈는 이 계산식으로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다.

3.3. 상대성 이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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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C²를 칠판으로 최초로 공개했을 때 찍은 유일한 사진이라고 알려져 있다.
아인슈타인의 가장 유명한 상대성 이론은 1905년에 발표한 '''특수 상대성 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과 이후 1916(혹은 1915)년에 발표한 '''일반 상대성 이론'''(General Theory of Relativity)으로 나뉜다. 다만 여담으로 본인은 '상대성'이라는 표현을 극도로 싫어했다고 한다. 그의 중심생각은 모든 좌표계에 같은 법칙이 적용된다는 것이고 '상대성'이라는 이름이 그것을 잘 표현해주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의 생각은 적중하여 철학자들은 '과학조차 모든 것이 상대적임을 인정했다'라며 떠들어댔고 이를 파인만이 엄청나게 깠다.
아인슈타인은 상대성 이론 발표 이후 1922년에 1921년분 노벨물리학상을 받는다. 참고로 노벨물리학상은 '광전효과'(광양자 가설)로 받은 것으로, 상대성 이론으로 받은 것이 아니다. 상대성 이론은 여러모로 말이 많았고 노벨상감은 확실하니 상을 주긴 줘야겠고...해서 나온 궁여지책으로 이 광전효과는 이전까지의 빛의 입자설을 종합한 정도이며 분량도 '''A4 한 페이지 정도'''였다고 한다.[30]
유명해진 뒤로는 그가 일했던 스위스 특허국에 수많은 물리학자들이 그를 찾아오고는 했다. 어느 물리학자를 만난 후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물리학자를 보는 것은 처음입니다."라고 하자 '''"당신은 매일 거울도 안 보십니까."'''라고 받아쳤다는 일화도 있다.
세 논문으로 아인슈타인은 유명해져 1908년에는 베른 대학에서 강의를 맡게 되고, 이듬해에는 취리히 대학 교수, 1911년에는 프라하 Karl-Ferdinand 대학 교수, 1914년에는 카이저 빌헬름 연구소 소장과 베를린 대학교 교수직을 맡는 등 출세길에 오른다.
중요성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자면 우리가 쓰고 있는 GPS장치는 상대성 이론이 없으면 작동이 불가능한 기술이다.[31] GPS가 없다면 자동항법장치도 나올 수 없고 스마트폰에 있는 지도 앱이나 운동 앱들은 탄생조차 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미 실생활에 너무 많이 적용되어 설명하기가 어려울 정도.

3.4. 중력파


1916년에 그는 일반 상대성 이론에서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발생하는 파동, 즉 중력파의 존재를 제시하였다. 당시 과학기술로는 이 존재를 확인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조차 중력파에 대한 논문을 중력파는 자신의 실수라는 것을 인정하는 쪽으로 수정하려 했지만 논문을 검토하는 한 교수가 말리고 나서 흐지부지되는 듯 하였다. 그런데 '''딱 100년 뒤'''에 중력파의 존재가 확인되면서 이는 21세기 물리학 분야 최고 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자세한 것은 연구가 진행되면서 밝혀지겠지만, 우주에 대한 신비를 밝혀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3.5. 보스-아인슈타인 통계


세상을 이루는 입자들 중 보즈 입자들의 분포에 관한 함수식이다. 물리학자 보즈는 광자의 분포에 대해서 통계식을 만들어냈는데 이를 아인슈타인이 보손 전체로 일반화시켰다. 통계역학 참조.
맥스웰-볼츠만 통계는 고전적인 '근사식'이 되고 보즈-아인슈타인 통계는 페르미-디랙 통계와 함께 현대 통계역학의 기본 개념으로서 자리잡게 된다.

3.6. 아인슈타인 고체 모델


[image] [image]
고체의 열용량은 상온 근처에서는 크게 변하지 않지만, 극저온에서는 온도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변한다. 아인슈타인은 고체 원자들이 Phonon(간단히 말하면 용수철과 같다.)으로 연결된 조화진동자(Harmonic Oscillator)로 되어 있다는 간단한 착상으로 통계역학적인 방법으로 고체의 열용량에 대한 일반식을 유도해냈다. 이 식은 간단한 발상에도 불구하고 실제 고체의 열용량 거동과 거의 일치한다. 물론 완벽히 일치하진 않는다. 후에 Debye에 의해 양자역학적으로 수정되면서 고체의 열용량을 매우 정교하게 계산해낼 수 있게 된다.[32]

3.7. EPR 역설


Einstein과 Podolsky, Rosen 이렇게 세 사람의 앞머리를 따서 이름 붙여진 양자역학의 역설이다.[33]
양자얽힘에 관한 역설을 말하고 있는데 다들 한 번씩 비문학 지문에서 읽어봤음직한 내용일 것이다. 얽혀있는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입자의 상호작용이 즉시 전달되는가 아니면 상대론에 따라 빛보다 느리게 전달되는가를 말하고 있다. 국소성의 원리에 대한 문제로, 아인슈타인의 주장에 따르면, 태양이 사라져도 곧바로 지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처럼, 양자적인 규모에서도 어떤 현상이 다른 곳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즉각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아야 한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한 소수의 이론 물리학자들은 양자계의 상태에 대한 서술이 근본적으로 확률적이라는 코펜하겐 해석을 인정하지 못했다. 양자적인 규모에서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모든 것이 확률적이며, 심지어는 관측이 거기에 영향을 미친다는 코펜하겐 해석은 라플라스의 악마로 대표되던 고전적인 세계관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은 주사위 놀음을 하지 않는다."'''는 유명한 말도 코펜하겐 해석에 대한 이야기.
상대론의 확실함을 알고 있었던 아인슈타인은 이를 통해 양자역학이 불완전하다는 것을 지적하였으며, 확률적인 코펜하겐 해석 대신에 국소성의 원리에 맞는 숨은 변수 이론을 주장했다.
다만 존 벨(John Bell)이 벨의 부등식을 발견했는데, 이는 어떤 형태로든 국소적 숨은 변수가 존재한다면 그 이론이 반드시 만족해야 할 부등식이다. 만약 이 부등식이 참이라면 양자역학은 완전히 틀린 이론이 된다. 실험 결과 벨의 부등식은 거짓으로 밝혀졌고, 물리학자들은 국소적 숨은 변수는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 아인슈타인이 틀린 것으로 밝혀진 것들 중 한 사례.

3.8. 통일장 이론


아인슈타인에게는 꿈으로 남은 이론. 그는 1929년 10월에 첫 통일장 이론의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원자 내부의 전자에 적용되는 법칙으로 행성 궤도의 움직임까지 하나의 공식으로 설명하려 했는데 이건 당연히 작용하는 힘이 다르기 때문에 불가능한 시도였다.[34][35] 그 결과 말년까지 이 이론으로 씨름했는데, 동료들에게도 무시당했지만 완성을 못한 채 작고하게 된다. 그는 73세가 된 52년에 자신이 아무것도 이루지 못했음을 인정했다고 한다.[36] 하지만 그럼에도 그의 유산은 남아 자연계의 기본 힘을 모두 통일하여 설명하는 통일장 이론의 꿈은 후대 물리학자들인 와인버그와 살람의 표준모형과 같은 명맥을 만들기에 이른다. 혹자는 아인슈타인이 조금만 더 살았다면 통일장 이론을 완성했을지도 모른다는 아쉬움 섞인 이야기를 종종 하기도 한다.
다만 많은 물리학자들은 아인슈타인이 말년에 남긴 통일장 이론에 대한 수식들만큼은 혹평에 가까운 수준으로 평가절하했다. 오죽하면 어떤 물리학자가 아인슈타인을 만나러 왔다가 통일장 이론에 관련해 아인슈타인이 써놓은 수식들을 보고 "대학자 아인슈타인 앞에서 차마 이걸 엉터리라고 할 수도 없고...그렇다고 명색이 물리학자가 이 정도밖에 안되는 걸 멀쩡하다고 할 수도 없고..."라며 고민하다가 그냥 도망나오기도 했다고. 다른 물리학자들은 통일장 이론 때문에 아인슈타인을 보려고 하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 때문에 다른 물리학자들을 만나려고 하지 않아, 말년에 아인슈타인이 고립된 원인이기도 했다.

3.9. 우주 상수


1917년, 아인슈타인은 일반상대성이론에서 파생된 중력방정식을 우주 전체에 적용시켜 보려고 했다. 그런데 바로 문제가 생겼다. 우주에 균일하게 퍼져 있는 은하들의 중력이 우주 공간 전체를 휘게 만들었다. 여기에 따르면 우주는 끝이 없지만 크기는 유한한 '닫힌 우주'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닫힌 우주는 자체적으로 구조를 유지하는 것이 불가능했는데, 시간이 지나면 자체 중력으로 은하들이 한 점으로 뭉쳐 빅 크런치[37]가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이 아인슈타인은 우주가 균형을 유지하도록 중력방정식에 우주상수라는 추가항을 포함시켰다.[38]
그러나 세월이 흘러 에드윈 허블이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모든 은하들이 한 지점에 멈춰 있다고 생각되어 왔던 우주의 패러다임이 한꺼번에 뒤집히자 아인슈타인도 더이상 우주 상수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졌다.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면 앞서 말했던 우주 붕괴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결되기 때문. 아인슈타인은 곧장 우주상수를 폐기하면서 팽창우주론의 손을 들어줬다. 이후 아인슈타인은 "나의 일생일대의 실수는 우주 상수를 방정식에 집어넣은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이 실제로 우주상수를 인생 최대의 실수라 말했는지는 불분명하다. 아인슈타인이 남긴 어떠한 발언에서도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말을 한 적이 없으며 아인슈타인이 그렇게 말했다는 모든 기록은 조지 가모프가 쓴 1956년 사이언티픽 아메리칸 기사와 1970년에 나온 그의 자서전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인생 최대의 실수라는 표현은 가모프가 아인슈타인과의 대화에 살을 덧붙이는 과정에서 생겨난 표현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아인슈타인이 죽은 뒤 한참 후인 현대에 들어와 우주상수는 아이러니하게도 재조명을 받게 되었다. 브라이언 슈밋, 애덤 리스, 그리고 솔 펄머터의 연구를 통해 초신성의 폭발로 우주가 가속 팽창을 하고 있다는 것이 밝혀졌는데, 우주상수야말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는 데 부합하는 요소였기 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의 우주상수는 이제 우주를 유지시키던 힘에서 더 빨리 팽창시키는 힘, 즉 암흑에너지로 변모하여 현대 우주론에 돌아왔다. 물론 암흑 에너지가 무엇인지 아직 알려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에 정말로 '상수'의 형태를 취할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일단 가장 간단한 형태이기 때문에 사용되고 있다. 비록 아인슈타인 스스로가 폐기하긴 했어도 현대 들어 다시 재조명되어 실제로도 설득력을 갖춘 개념이라는 데서 그의 천재성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이렇게 아인슈타인의 우주 상수와 암흑 물질을 포함하는 우주 모형을 람다시디엠(ΛCDM) 모형이라고 부르는데 표준 우주모형이라고도 불린다. 이유는 현재까지 관측되어온 전반적인 우주 관련 데이터가 이 모형과 부합하기 때문. 예를 들면 우주배경복사초신성, 은하단 등의 정밀한 관측을 통해 우주에 존재하는 물질과 암흑에너지의 비율과 함께 암흑에너지의 상태방정식을 결정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의 결과에 따르면 암흑에너지는 신기하게도 음의 압력을 가진 유체, 즉 우주상수의 특성을 가졌을 것이 유력시되고 있다.

3.10. 유도방출


1917년 'On the quantum theory of radiation' 이라는 논문을 통해서 유도방출의 개념을 제시했다. 아인슈타인은 들뜬 상태가 광자를 내고 흡수하는 과정을 연립 방정식을 통해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광자의 방출이 다른 광자로 자극받아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다. 이를 응용하여 많은 원자를 들뜬 상태로 두면 알맞은 에너지의 광자가 연쇄반응을 일으켜 결맞은 빛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알려지고는 유도방출을 구현하려는 여러 시도가 이루어졌다. 1950년대에는 유도방출을 실제로 응용한 레이저가 개발되기에 이르른다.
또한 1917년의 이 논문은 이차양자화를 도입하였다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3.11. 아인슈타인-로젠 다리


아인슈타인은 1935년 네이선 로젠과 함께 아인슈타인-로젠 다리를 고안하였다. 블랙홀을 나타내는 슈바르츠실트 해는 특이점을 가진다는 문제가 있다. 슈바르츠실트 해에서 특이점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아인슈타인과 로젠은 시공간을 다리처럼 이어주는 해를 찾아낸다. 아인슈타인-로젠 다리는 중력에 대한 연구를 촉발시켰으며 중력을 양자역학적으로 다루는 도구로써도 응용되고 있다.

3.12. 반핵 운동


"If I had foreseen Hiroshima and Nagasaki, '''I would have torn up my formula in 1905."'''

"내가 만약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일을 예견했었다면, '''1905년에 쓴 공식을 찢어버렸을 것이다."'''

-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맨해튼 계획을 실시하도록 편지를 보낸 것에 후회하며.

과학계에서가 일이 아닌 아인슈타인의 또다른 업적 중 하나는 독실한 평화주의자이자 세계 최초로 '''핵무기 반대운동을 시작한''' 인물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1939년 8월에 나치 독일에서 진행되고 있던 핵무기 연구에 위험성을 느꼈다. 여기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첫번째는 엔리코 페르미와 실라르드 레오 등의 저명한 과학자들이 아인슈타인에게 독일 핵무기 연구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그를 설득했던 것이고, 둘째는 나치 독일에서 체코 등지에 우라늄의 판매를 중단시킨 것이였다.
또한 결정적으로 과학계에서 독일의 과학자[39]인 오토 한과 프리츠 슈트라스만이 우라늄을 쪼개는 데 성공한 것도 당시 아인슈타인의 생각에 영향을 주었다. 이는 당시에는 "우라늄은 쪼갤 수 없다"는 반응이 대세였기 때문이였다. 쉽게 설명하자면 큰 원자핵에 작은 방사능을 쏘니까 못 쪼개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었는데, 문제는 이 쪼개는 과정에서 생기는 에너지가 굉장히 막대하다는 것이였다. 핵분열에서 원자량의 일부가 에너지로 변환되는데, 그가 고안한 상대성 이론에 의하면 이 에너지는 다이너마이트 수백~천 톤의 폭발량으로 전환된다.
이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당시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에게 나치 독일의 원자폭탄 보유에 대응하기 위해 연구를 진행할 것을 권유하는 실라드의 서한에 서명을 하였는데, 그렇게 시작된 것이 바로 맨해튼 프로젝트였다. 그런데 정작 나치 독일은 핵무기 개발을 제대로 진척시키지 못한 채 연합국에 항복했고, 그제야 마음이 놓인 아인슈타인은 "원자폭탄 개발을 더 이상 안해도 괜찮겠습니다"라는 편지를 다시 보냈다.[40]
그러나 '''이미 루스벨트 대통령은 사망한 후'''였으며 결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가 이루어졌다.
이 사건에 충격을 먹은 아인슈타인은 이후 당시 서한에 서명한 것을 평생 후회하며 핵무기 폐지에 지지했다. 그는 1955년, 영국의 철학자인 버트런드 러셀[41]과 함께 대대적인 핵군축과 평화를 촉구하는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이 성명이 계기가 되어 전세계 과학자들이 과학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핵무기 사용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군축과 세계평화를 논의하는 퍼그워시 회의(Pugwash Conference)가 개최되었다. 이 모임은 21세기 현재까지도 지속되고 있다.[42]
한편 아인슈타인의 반전 운동을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이에 대해 그와 같이 러셀-아인슈타인 성명을 발표했던 버트런드 러셀은 "아인슈타인이 이해하지 못할 얘기할 때는 그를 현명하다고 하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를 하는 순간 그 사람에게서 지혜가 떠나버렸다고 생각한다."라고 평하기도 했다.
히로시마·나가사키 사건 이후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이 핵개발에 후회하고 반대했다는 점에 들어 아인슈타인이 일본을 편드는 일빠가 되었다는 망언이 퍼진 경우도 있는데, '''아인슈타인은 반민족주의자였기 때문에 그런 생각이 전혀 없었다.''' 아인슈타인은 독일과 일본의 전쟁 범죄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고 애초에 이를 막기 위해 핵개발 서한에 찬성한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핵개발을 반대하게 된 것은 전쟁을 일으킨 일본의 지도층들은 멀쩡히 살고, 무고한 일본의 민간인들만 잔인하게 학살당한 것 때문이다.''' 일부 저서에서는 아인슈타인을 포함한 핵개발 과학자들이 일빠가 되었다는 등의 기가막힌 정보가 실려있기도 하지만, 실제로 일본 문화 같은 것에 심취했다고 한들, 군국주의나 전체주의를 옹호한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런 것들을 혐오했던 아인슈타인에게는 딱히 문제될 것도 없다.
참고로 당시 일본의 어느 반핵 운동가가 말년의 아인슈타인에게 핵개발의 책임을 따지는 편지를 보내 고뇌하게 만들었던 적이 있는데, 나중에 NHK 다큐멘터리 팀이 아인슈타인 등신대 인형[43]과 함께 늙어버린 그 운동가를 찾아갔더니 인형을 보자마자 내가 그때 너무 심한 짓을 한 것 같다며 울었다고 한다.
냉전 체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무렵인 1949년 Liberal Judaism의 알프레드 배너[44] 기자가 제3차 세계 대전에 사용될 무기가 무엇이냐고 물어보자 아인슈타인은 이렇게 대답했다.

I know not with what weapons World War III will be fought, but World War IV will be fought with sticks and stones

저는 세계3차대전 때 뭘로 싸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세계4차대전 때 나뭇가지와 돌맹이로 싸울 것이란 건 알 것 같군요.[45]

출처 Liberal Judaism 16호 기사 중


4. 일화



4.1. 아인슈타인과 수학


물리학자치곤 수학이 꽤나 약해 주변 연구자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거나, 그가 초기에 내놓은 이론에 나오는 공식 계산은 전부 아내인 밀레바가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46] 상술했듯 그녀와 아인슈타인은 같은 대학에서 수학과 물리학을 전공했다. 이 때문인지 광양자 이론은 둘이 공동 연구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실제로 스위스 베른 소재 아인슈타인 박물관의 전시물 중에는 아인슈타인이 그녀의 공적을 훔친 거 아니냐는 주장도 있다는 언급이 소개되어 있으나, 초기 논문의 아인슈타인-마리치는 공동 저자를 표시한 게 아니라 스위스의 관습적인 서명 방식(아내의 성을 뒤에 붙임)을 사용한 것이며 밀레바가 어떤 도움을 줬을 거라는 증거나 증언이 하나도 없어 없다고 결론 지은 바 있다. 애당초 밀레바는 독자적으로 학문적인 활동을 한 이력이 없다. 자세한 논박 내용은 한국어 위키피디아의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밀레바 마리치 문서에 출처와 함께 상세히 기술되어 있으니 참고하도록 하자. 여튼 이후 아인슈타인은 노벨상을 받은 후, 그 상금을 이혼한 밀레바에게 준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세계적인 이론 물리학자'''치고는''' 수학의 최신 분야를 못했다는 거지, '''이미 중학교 때 미적분학 교재 풀던 사람이었다'''(...). 이 부분은 2015년 5월 17일자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 다루었다. 거기다 '수학 및 물리학의 교사 과정' 졸업시험을 통과하고 학사 학위를 받았으니 수학교육과 전공자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이 아니다.[47] 대학교 시절엔 미적분학은 물론 대수학, 편미분방정식 등 10여 개의 수학 과목을 수강하기도 하였다.
상대론에 대한 연구를 할 때 그는 중력으로 휘어진 공간을 표현하지 못해 친구 수학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는 소위 말하는 비(非)유클리드 공간에 대한 것이었다. 그런데 비유클리드 기하학은 19세기 중반 베른하르트 리만이 제창하고 난 후 19세기 말에나 가야 연구가 제대로 이루어졌고, 중력을 기술하는 데 필수적인 미분기하학과 텐서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가 진행된 것은 1900년 전후로,[48] 당시만 해도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닌 이상 쉽게 배울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아인슈타인이 1916년에 일반상대론을 설명하기 위해 쓴 논문에는 기하학에 익숙하지 않은 물리학자들을 위해 미분기하학을 설명하는 데 전체의 반 이상을 할애하고 있다. 참고로 일반 상대성이론에서 매우 잘 사용되는 '''텐서'''는 1900년에 발표된 개념이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은 수학의 최첨단 분야가 발표된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능수능란하게 다룰 수 있을 정도로 수학에 조예가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 된다. 게다가 아인슈타인은 텐서 표기법중 하나인 아인슈타인 표기법을 일반상대성이론과 동시에 세상에 발표한 사람이기도 하여, 수학에도 이름을 남겼다.
상대성 이론도 수학은 부인 밀레바의 도움을 받은 거 아니냐는 설이 있는데, 상술했듯이 이 역시 가능성이 낮다. 광양자 이론 이후 아인슈타인은 그녀보다는 다른 동료들에게서 도움을 받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래서 상대성 이론을 내놓을 즈음엔 밀레바는 그의 연구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밀레바는 졸업 시험의 수학 과목을 재수까지 하였으나 결국 통과하지 못해서 졸업하지 못했다. 아인슈타인과 관련된 일화에 대해서는 Abraham Pais가 쓴 Einstein Lived Here(Oxford University Press, 1994)를 참고하기 바란다. 국내에도 번역서가 출판되었으나 역자가 비전공자인 관계로 과학 용어가 오역된 것이 많으니 주의할 것.
상술했듯 그의 대학 시절 수학 교수였던 헤르만 민코프스키는 수업을 자주 빼먹던 아인슈타인과 사이가 좋지 않아 "아인슈타인은 게으른 개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다만, 진심으로 싫어했던 건 아닌지 특수 상대론에도 기여를 했고 일반 상대론의 수학 파트는 민코프스키가 상당 부분을 담당했다.

4.2. 개인적 일화와 인간성


  • 양말의 효용성 낮음에 대해 불평하였는데, 아마도 아인슈타인이 발톱을 깎지 않아서 양말에 구멍이 자주 나서로 추측된다.
  • 1926년 3월 15일 그에 편지에 의하면 가장 좋아하는 책은 돈키호테성경이었다고 한다.출처 가장 좋아하는 책은 항상 돈키호테였으며 잠자기 전 셔츠와 파자마도 입지 않은채 침대에서 누워서 본게 돈키호테라고 한다. 휴식을 취할때 가장 많이 보고 가장 즐겼다고 한다. 생전에 로렌스 스턴[49] , 토마스 만, 조지 버나드 쇼, 헤로도토스, 아리스토텔레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등 다양한 책을 읽었다. 또 요한 볼프강 폰 괴테를 무척이나 존경했다. 그가 쓴 책들을 다 모아 서재에 정리해 놨을 정도.출처
  • '뇌에 전화 번호를 넣을 바에야 다른 지식을 넣는 게 낫다'며 자신의 전화 번호도 적어두고 평생 기억하지 않는 일화도 있다. 전화 번호 가르쳐 달라고 할 때마다 일일이 수첩을 뒤적거렸다고 한다. 그리고 노년엔 자기 집 주소를 잊어버려서 비서격인 사람에게 주소 가르쳐달라고 전화를 했다는 말도 있다.
  • 여동생인 마야가 말하기를 마야가 태어났을 때 함께 놀 수 있는 동생이 태어났다는 말을 두 살 때 들었다고 한다.[50] 그리고 여동생을 처음 보았을 때 바퀴는 어디 있냐고 물었다고 한다. 팽이로 동생의 머리에 구멍을 내려고 한 적도 있다. 마야 曰 "천재 오빠를 둔 동생의 두개골은 단단해야 해요."
  • 한 번은 아인슈타인이 노벨상을 받고 인기가 높아지게 되자 큰 강당 같은 곳에서 대중들을 상대로 한 달 동안 강연회를 열었다. 강연회는 아인슈타인을 보기 위해 몰려든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뤘다. 그러자 아인슈타인은 자신의 운전 기사에게 자신과 비슷하게 분장을 하게 한 다음 "어차피 저 사람들은 내가 말하는 말이 뭔 뜻인지 모를 거니까 나보다 말재주 좋은 네가 강의해라"고 했고 운전 기사가 강의를 대신 하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강의를 진행하다가 물리학 전공자가 질문을 걸어오면 "이건 내 운전 기사도 풀 수 있는 문제다"면서 운전 기사 복장을 하고 있던 진짜 아인슈타인을 불러내 문제를 풀게 했다고... 다른 판본에서는 운전 기사가 강연회에 함께 참석하다 보니 강의 내용을 잘 외우고 있어서 가능했다는 설도 있다. 또한 아예 아인슈타인이 아니라 막스 플랑크가 나오는 버전도 있다.[51]
  • 예술 분야에서 상당한 수준의 바이올린 연주자였으며, 모차르트의 곡을 선호했다고 한다. 평소의 취미 활동도 바이올린 연주와 요트를 타는 것이었다. 재미있는 것은 모차르트의 곡들을 쾨헬 번호로 정리한 사람이 그의 12촌 지간인 음악학자 알프레드 아인슈타인(Alfred Einstein)이다.
  • 하루는 외출을 나갔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쓰고 있던 중절모를 벗어서 코트 안에 감추고 모자가 비에 젖지 않게 했다고 한다. 이웃 사람이 그것을 보고 비오는데 왜 모자를 벗어서 머리까지 젖게 만드냐고 하자 "머리를 감는 게 모자를 세탁하는 것보다 간단한 일이다"라고 답했다고.

  • 이 영상은 몇 안 되는 아인슈타인의 육성이 담긴 영상이자 아인슈타인이 농담을 하는 장면이다.
>기자 1: (서투른 독일어로) 교수님, 다시 미국에 오시니 기분이 좋으십니까? (Professor, Freuen Sie sich hier in Amerika wieder zu sein? )
>아인슈타인: 당신을 보니 그렇구먼![52] (Wenn ich Sie sehe, sicher!)
>(일동 웃음)
>기자 2: 교수님께선 금주법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What do you think of prohibition, Professor?)
>아인슈타인: 어차피 난 술 안 마시니 상관 안 한다네. (Ich trinke nicht also ist mir das ganz gleich!)
  • 자기 집의 식탁보로 머플러를 짰다면서 이웃집에 전화를 걸어서 자랑한 적도 있다고 한다. 천재는 곧 괴짜라는 편견에 많은 영향을 끼친 사람이다. 그래도 실제로는 이웃 초등학생의 수학 숙제를 도와주면서 소일거리를 하는 자상한 모습도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정작 그 초등학생은 아인슈타인을 저명한 물리학자가 아닌 그냥 친절한 이웃집 할아버지(...) 정도로만 알았다고 한다.
  • 아인슈타인은 정치적으로 사회주의자였다. 한국인들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진 위인들 중에 "어? 이 사람이 사회주의자였어?" 하는 반응이 나오는 두 사람이 헬렌 켈러와 아인슈타인이다. 1949년 미국의 사회주의 저널 '먼슬리 리뷰(Monthly Review)' 창간호에 유명한 글 "왜 사회주의인가?"를 기고한 적이 있다. 영어 전문, 번역문. 또 민족주의를 강하게 혐오했다. 아마도, 나치 독일 시대를 보냈던 그는 전체주의적인 사상에 극도의 거부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 바둑을 둘 줄 알았다고 한다. 미국 프린스턴대에서 일할 때 어떤 일본인에게서 배웠다고 하는데, 일본 기원에서 아인슈타인의 초단을 인정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 아인슈타인의 메롱 사진에서 전해지는 바로는, 본인이 이 사진은 반드시 유명해질 거라면서 일부러 를 내민 우스꽝스러운 포즈를 취했다고 한다. 뭔가 괴짜 같은 과학자의 인상을 잘 표현한 사진이라고 할 수 있을 듯. 후일 NHK스페셜 '아인슈타인의 세계' 제작팀이 밝혀낸 바에 따르면, 원래는 자동차 뒷좌석에 세 사람이 타고 있는 것을 아인슈타인 부분만 트리밍한 것이라고 한다. 모 행사를 마친 후 찌푸린 표정으로 차에 올라탄 아인슈타인을 보고 신문기자가 "아인슈타인 박사님, 포즈라도 취해 주십시오!" 하니까 저런 표정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image][53]

5. 그 외


상대성 이론과 뉴턴 역학과의 관계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뉴턴을 '극복'했다는 식으로 표현하는 글들도 볼 수 있다. 심지어는 다음과 같이 뉴턴을 풍자하는 시도 있다. 영국의 시인인 알렉산더 포프가 뉴턴을 찬양하면서 남긴 시에 대한 대구 겸 패러디 시이다.

“Nature and Nature's laws lay hid in night:

God said, Let Newton be!

and all was light.”

자연과 자연의 법칙은 어둠에 숨겨져 있었네.

신이 말하길, ‘뉴턴이 있으라!’

그러자 모든 것이 광명이었으니.”

알렉산더 포프의 원작 시. 흔히 뉴턴의 묘비명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묘비명은 이와는 다르다. 아이작 뉴턴 문서에 나와 있다.

It did not last: the devil, shouting "Ho."

"Let Einstein be,"

restored the status quo.

“그러나 ‘호!’하고 소리치며

악마가 말하길, ‘아인슈타인이 있으라!’

그러자 모든 것이 원래 상태로 되돌아갔으니.”

존 콜링즈 스콰이어(Sir John Collings Squire)의 패러디 시


5.1. 양자역학에 대한 반감


"아인슈타인, 난 자네가 부끄러워. 자네는 새로운 양자론에 대해 예전에 자네의 상대성 이론 반대자들처럼 반박하고 있잖아."

- 파울 에렌페스트

양자역학의 한 주춧돌을 놓은 인물이면서도, 기계론적 결정론을 부정하는 양자역학에 대한 깊은 반감이 있었다. 때문에 1935년엔 이른바 EPR 역설을 꺼내서 양자역학에 대한 반론을 제기하기도 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아인슈타인은 그 당시 주류를 이루던 양자역학의 코펜하겐 해석을 싫어했다. 많은 사람들은 아인슈타인은 양자역학 자체를 부정했다고 알고있는데, 이건 사실이 아니다. 양자역학이 맞는 이론인지 아닌지에는 애초에 큰 논란이 없었다. 실험 결과들이 양자역학의 예측과 딱 맞아떨어지기 때문.
그는 양자역학에 숨은 변수(hidden variable)가 있어야 직관적이고 완전한 이론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양자역학이 확률을 통해 표현되는 것은 불완전한 중간단계의 이론이기 때문이며 완전한 이론에는 확률을 만드는 숨은 변수가 있으리라는 것이다.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는 유명한 말도 아인슈타인이 한 말이다. 정확하겐 이 내용은 아인슈타인이 막스 보른에게 보낸 편지글에서 처음 등장한다.

양자역학은 정말로 인상적이다. 하지만 나의 내면의 목소리는 내게 이것이 아직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론은 많은 것을 설명해 주지만 옛 존재(Old One)의 비밀을 밝혀주지는 않는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신이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고 확신한다.

Quantum mechanics is certainly imposing. But an inner voice tells me that it is not yet the real thing. The theory says a lot, but does not really bring us any closer to the secret of the Old One. I, at any rate, am convinced that '''He does not throw dice'''.

이후 자신이 쓴 표현이 마음에 들었는지 아인슈타인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표현을 많이 언급하고 다녔고, 때문에 이 표현이 유명해진다.
이에 대해 그의 동료 닐스 보어

"'''신이 주사위 가지고 뭘 하든 이래라 저래라 하지 마라'''"

Stop telling God what to do with his dice.

라고 말했다.[54]
뒷날 스티븐 호킹은 저기에 덧붙여

"아인슈타인의 신은 주사위를 던지지 않는다는 말은 틀렸다. 블랙홀을 생각해 보면 신이 주사위를 던질 뿐만 아니라 어쩌면 그가 가끔 우리를 혼동시키기 위해 주사위를 안 보이는 곳으로 던지는지도 모른다.

So Einstein was wrong when he said "God does not play dice". Consideration of black holes suggests, not only that God does play dice, but that He sometimes confuses us by throwing them where they can't be seen."

라고 말했다.

6. 어록


※ 출처 : 위키쿼트

'''신은 난해하지만, 심술궂진 않다. (Raffiniert ist der Herrgott, aber boshaft ist er nicht.)'''[55]

-1921년 4월, 미국의 프린스턴 대학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내 상대성 이론이 성공적으로 증명된다면, 독일은 내가 독일인이라고, 프랑스는 내가 전 세계의 시민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내 이론이 틀렸다고 증명된다면, 프랑스는 내가 독일인이라고, 독일은 내가 유대인이라고 선언할 것이다.'''

-1922년 4월 6일, 소르본 대학에 보낸 편지에서. 결국 아인슈타인은 독일을 떠나 미국으로 망명했다.

비렉(Viereck): "당신은 자신을 독일인과 유대인 중 어느 쪽으로 보십니까?(Do you look upon yourself as a German or as a Jew?)"

아인슈타인: "둘 다 입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사람'으로서 보고 있으니까요. 확실한 것은 민족주의는 소아병과도 같으며, 인류의 홍역이라는 것입니다.(It is quite possible, to be both. I look upon myself as a man. Nationalism is an infantile disease. It is the measles of mankind.)"

조지 실베스터 비렉(George Sylvester Viereck)의 1929년 10월 Saturday Evening Post에서.

'''삶은 자전거타기와 같단다. 균형을 잡으려면 계속 움직여야 하거든.'''

-1930년 2월 5일, 아들 에두아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위대한 인물들은 항상 평범한 지성에서 비롯된 폭력적인 반대에 직면했습니다. 이 평범한 지성은 상투적인 편견에 맹목적으로 굴복하길 거부하고 대신 씩씩하고 정직하게 자기 의견을 표현하는 사람을 이해할 만한 능력이 못 됩니다.

-1940년 3월 19일, 뉴욕 시티 대학의 철학과 명예교수인 모리스 라파엘 코헨에게 버트런드 러셀의 강사직 임명을 변호하며.

종교 없는 과학은 절름발이며, 과학 없는 종교는 장님이다.

-1941년에 출판된 "과학과 종교(Science and Religion)"에서.[56]

세상을 사는 자세에는 2가지가 있다. 기적 따위는 없다고 믿거나, 그 반대로 세상의 모든 것이 기적이라고 믿는 것이다.

-“There are two ways to live your life. One is as though nothing is a miracle. The other is as though everything is a miracle.”

독일군이 원자 폭탄 제작에 실패했다는 걸 알았다면, 전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을 겁니다.

-1947년(?) 3월 10일, 루스벨트 대통령(1882~1945)에게 보낸 편지에서 원자무기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하지만 너무 늦었다.'''

누구든지 자신이 진실과 지식의 심판자라고 가장하기 위해 기도하는 자는 신들의 웃음소리에 파멸했다.

-1953년에 출판된 "레오 벡 평전(Essay to Leo Baeck)"에서.

Sich verlieben ist gar nicht das Duemmste, was der Mensch tut-die Gravitation kann aber nicht dafiir verantwortlich gemacht werden.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람이 하는 가장 미련한 짓이 아니며 중력에게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57]

-1979년에 출판된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인간의 측면(Albert Einstein: The Human Side)"에서.

...Wenn aber der Gang des Alltaglichen, Erwarteten unterbrochen wird, bemerken wir, dass wir sind wie Schiffbriichige, die im offenen Meer auf einer elenden Planke balanzieren und vergessen haben, woher sie kommen, und nicht wissen, wohin sie treiben. Wenn man sich aber einmal in diese Erkenntnis wirklich hineingefunden hat, lebt sichs leichter, und es gibt keine einzige Enttauschung mehr.

(전략) 하지만 삶의 일상생활에서 예정되어 있던 순서가 방해받았을 때, 우리는 망망대해에서 어디서 왔는지도 잊어버리고,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도 모른 채 초라한 널빤지에 올라탄 조난자들처럼 됩니다. '''하지만 우리가 이걸 완전히 받아들이는 순간, 삶은 보다 쉬워지고 더 이상 실망할 게 없습니다.'''

-1945년 4월 26일, 나치를 피해서 온 피난민들을 돕던, 자녀(혹은 손주)를 잃은 의사 부부에게 보낸 위로의 편지.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 인간의 측면(Albert Einstein: The Human Side)"에서.

'''I do not know with what weapons World War III will be fought, but World War IV will be fought with sticks and stones.'''

나는 3차 세계대전이 어떤 무기로 치러질지 모르지만, 4차 세계대전은 막대기와 돌로 싸울 것이라 예상한다.

-1949년 알프레드 웨이너와의 인터뷰에서.[58]

이 시대의 중대한 문제들은 그것을 만든 사람과 비슷한 수준으로 생각해서는 풀리지 않는다.

"The signification problems of our time cannot be solved by the same level of thinking that created them."

'''평화는 힘에 의해 유지될 수 없다. 오직 이해로써 성취될 수 있다.'''[59]

"Peace cannot be kept by force. It can only be achieved by understanding."

세상은 악한 일을 행하는 자들에 의해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 악한 자들을 다만 지켜보기만 하는 사람들에 의해 멸망할 것이다.[60]

"The world will not be destroyed by those who do evil, but by those who watch them without doing anything."

조용하고 검소한 생활이 끊임없는 불안에 묶인 성공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많은 기쁨을 준다.

-1922년 일본인 배달부에게 팁 대신 작성해 건넨 메모[61]

"Weak people revenge. Strong people forgive. Intelligent people ignore."

"약자는 복수하고 강자는 용서하며 현자는 무시한다."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으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I have deep faith that the principle of the universe will be beautiful and simple.'''

'''나는 우주의 원리가 아름답고 단순할 것이라고 굳게 믿는다.'''

이론이 경험으로부터 귀납적으로 기인한다고 믿는 이론물리학자들은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62]

꿀벌이 떼로 죽는 벌집붕괴증후군(Colony Collapse Disorder)이 번지자 흔히 "꿀벌이 사라지면 4년 안에 인류도 멸종한다(또는 지구가 멸망한다)"는 말을 아인슈타인이 했다는 설이 인터넷 등에 떠돌기도 했지만, 이것은 아인슈타인의 어떤 어록에도 등장하지 않는다. 도시전설 검증 싸이트인 Snope 에서도 '''거짓'''으로 판정. 그 외 "인간이 만든 가장 위대한 발명은 복리다"라고 했다고도 알려져 있으나 아인슈타인 본인의 말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7. 대중매체에서


  • 타임머신을 이용한 시간여행, 혹은 핵무기를 소재로 하는 영상매체에서 종종 언급된다. 상대성이론과 시간여행의 상관관계, 원자폭탄 개발 당시의 일화에 따른 영향인 듯.
  • 시간여행을 다룬 대표적 영화인 백 투더 퓨처 시리즈에서도 타임머신의 발명자인 에밋 브라운 박사의 애완견 이름이 아인슈타인이다.
  • 2002년작 영화 '타임머신'에서[63] 극 도입부에 살짝 언급된다. 타임머신을 발명한 극중 주인공과 편지로 교류하는 관계인데, 극중 시점에는 특허청 직원 시절이라서 아직 주류 학계의 주목은 받지 못한 것으로 묘사된다. 그래서인지 주인공의 친구가 "왜 그런 듣보잡이랑 상대하냐?"고 나무라지만, 주인공은 "아인슈타인은 천재이며, 존중받을 자격이 있는 인물"이라며 다른 이들보다 앞서 그의 재능을 인정해준다. -
  • 미국의 현대 음악 작곡가 필립 글래스는 아인슈타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오페라 해변의 아인슈타인을 작곡했다. 현대 예술사에 길이 남을 아방가르드한 작품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 커맨드 앤 컨커 레드얼럿 시리즈에서 아인슈타인#s-1.2.1이 타임머신 개발자로 등장. 그리고 후속작인 2편에서는 93세가 되는 나이에도 크로노 기술과 프리즘 기술, 그리고 미라지 탱크 개발로 연합군을 승리로 이끈다.
  • 록맨 시리즈만악의 근원 Dr. 와일리의 풀 네임은 아인슈타인의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다만, 성향은 정 반대.[64]
  • 1994년 영화 I.Q가 있다. 과학적인 영화가 아니라 로맨스 영화인데 멕 라이언팀 로빈스가 나오며 맥 라이언이 맡은 역의 삼촌이 아인슈타인 이라는 설정이다. 아인슈타인 역은 별난 커플, 배드 뉴스 베이즈에 나온 월터 매튜가 맡았다. 하지만 영화 평은 안 좋았고, 흥행도 딱 제작비만큼 벌었다.
  • 2017년 NGC 드라마 ‘Genius’가 그의 일대기를 다루고 있다.
  • 네이버 웹툰 하우스 키퍼가 아인슈타인의 만물 이론을 기반으로 한 세계관을 지니고 있다.
  • 어덜트 스웜에서 방영하는 미국 애니메이션 릭 앤 모티에서는 릭 산체스로 착각당해서 4차원 존재들에게 두들겨 맞는다. 그리고, 시간을 가만 두지 않겠다며, 상대성 이론을 발견해낸다.
  • 허영만의 만화 에서 '지식은 갖추었어도 인덕은 갖추지 못한 경우도 허다하다.'며 아인슈타인이 무표정하게 "씨발."이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어서 짤방으로 쓰이기도 한다.

8. 논란



8.1. 밀레바 마리치의 기여 논란


밀레바 마리치가 아인슈타인의 초기 연구, 특히 1905년 소위 '기적의 해'에 씌여진 광양자설과 특수 상대성 이론 논문들에 관여하였다는 주장이 한 동안 논쟁거리가 된 적이 있었다. 특히 1905년에 발표된 논문의 저자에 "아인슈타인-마리치"라는 이름으로 작성된 것이 논란을 촉발시켰다. 그러나 역사가들과 물리학자들의 조사를 통해 그녀가 과학적 연구에 기여하였다는 특별한 증거는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아인슈타인의 초기 논문에 잠깐 등장한, 이름을 이어 붙인 저자 명은 밀레바가 아인슈타인과의 첫 아이 리제를(나중에 사생아 혹은 결혼 직전에 입양해버림)을 임신한 전후 시기에 힘들었을 때, 당시 스위스에서 관습적으로 서명하던 방식(뒤에 아내의 성을 붙여 적음)을 결혼 전에 미리 사용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은 마리치와 1914년 이혼한 이후에도 국제적인 명성을 얻으며 지속적으로 왕성한 과학적 활동을 하였으나 그녀는 취리히 연방 공과대학교의 졸업에 실패하였을 뿐만 아니라 독자적인 과학적 결과물을 출판했던 적이 없다. 마리치는 두 번의 도전 끝에, 특히 수학 성적의 부족으로 졸업 시험에 실패하였던 것이다. 또한 마리치 본인은 그녀의 친구와 (아인슈타인 본인이 수없이 많은 연구 아이디어를 공유했던) 그의 동료에게 그녀 본인이 그의 연구에 관여되었다는 언급을 단 한번도 한 적이 없다.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구인 헬레네 사비치(Helene Savić)에게 보낸 어떤 편지에서도 아인슈타인의 과학적 연구에 관여하였다는 힌트는 보이지 않는다. 부부의 첫 번째 아들 한스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그녀가 결혼과 동시에 과학에 대한 열의를 상실하였다고 증언하였다.

8.2. 중국인·아랍인·스리랑카인 비하 논란


아인슈타인, 日記에 동양인 비하글
아인슈타인 일기에는 인종주의적인 내용이 상당히 많다
아인슈타인 동양인 혐오
2018년 미국 프린스턴대는 아인슈타인이 1922년부터 1923년까지 중국일본, 스리랑카 등지를 여행하며 남긴 일기를 정리해 출간했다. 그런데 이에 따르면, 아인슈타인은 특히 여행 중 만난 중국인들을 폄훼하는 기록을 다수 남긴 것으로 보인다. 그는 당시 중국인들을 가리켜 “근면하지만 더럽고 우둔하다”고 평가했다. 또 “중국인들은 의자에 앉아서 식사하지 않고 유럽인들이 숲에서 용변을 보듯이 쭈그리고 앉아 매우 조용하고 얌전하게 밥을 먹는다”고 기록하기도 했다.
또 아인슈타인은 “나는 중국인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거의 모르겠다”거나 “중국 여성에게 도대체 무슨 치명적인 매력이 있길래 가공할 만큼 아이들을 많이 낳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표현도 일기에 남겼다. 아인슈타인은 스리랑카를 여행하던 중에는 현지 사람들이 “거대한 쓰레기 속에서 살아간다”며 “적게 일하고 적게 필요로 하는 것이 단순한 삶의 경제적 사이클”이라고 적었다. 서양 문물을 빠르게 수용하고 나서 근대화를 이룩해낸 일본인에 대해서는 비교적 우호적인 감정을 드러내기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자신이 만난 일본인들을 “겸손하고 품위있으며 매우 매력적”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이 나라의 지적 욕구는 예술적인 욕구에 비해서는 약한 것 같다. 타고난 기질인가?”라며 지적 욕구가 약하다는 식으로 기록하기도 했다. 아인슈타인 일기 프로젝트를 진행한 지브 로렌크란츠 캘리포니아공대 교수는 “많은 언급이 상당히 우리를 불쾌하게 했는데 특히 중국 부분이 그랬다”며 “이는 위대한 인도주의자로서의 그의 이미지와 상반되는 것”이라고 말했다.[65]
사실 기록을 더 자세히 읽어보면 동북아 민족들에 대해서만 평가를 한 것이 아니다. 유럽계 백인들과 역사적으로 교류가 많았던 이집트인들에 대해서도 "고함을 지르고 과도한 몸짓을 하는 다양한 색깔의 레반트인들이 우리 배를 향해 뛰어든다. 지옥에서 뿜어낸 인간들처럼 보인다"라고 평가한다.
아인슈타인도 19세기에 태어난 유대계 백인으로서 그 시대 보편적인 인종관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인종관을 넘진 못한 모양이다. 비슷한 시대를 살아간 소설가인 하워드 필립스 러브크래프트도 친구와 교류할 때 쓴 개인적인 편지들이 공개되어 후세대에게 비판받는 마당에 아인슈타인이 일기장에 쓴 글이라도 공개된 이상 비판을 피할 수는 없다. 물리학의 천재였던 아인슈타인이고, 독일에서 유대인으로써 차별받고[66] 독일에서 미국으로 망명 가는 삶을 살아왔는데도 이러한 글을 적은 행위에 대한 실망이 큰 것이다.
그러나 러브크래프트의 경우는 아예 타인에게 보내는 편지에 인종차별적 발언을 쓴 것이고 아인슈타인은 필자 본인만 읽기 위해 쓴 일기장에다 적은 것인데, 이 둘은 동일선상에서 비교하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있다. 러브크래프트는 남이 읽으라고 보내는 편지에 해당 발언들을 썼던 것이니 달리 말하면 굳이 얘기할 기회가 없었을 뿐 공석에서도 역시나 타인들을 상대로 인종차별 발언을 할 의지가 분명 있었다고 볼 수도 있다.[67] 반면 아인슈타인은 일기장에 작성했다가 사후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공개된 것을 제외하면 딱히 공적으로 문제되는 언행이 없어서 과도하단 것. 그러나 사적으론 나쁘게 표현했다는 점은 비판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다만 1920년대면 아인슈타인이 40대였으므로 이후 생각이 바뀌었을 수도 있다. 아인슈타인 본인은 1955년에 76세의 나이로 사망했으므로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히 장수했었다. 그러나 이는 가능성일 뿐 실제 생각이 바뀌었는지는 모를 일.


[1] '아인'과 '슈타인'으로 나눠 해석하면 '돌 하나'라는 뜻이지만, 독일어 ein은 영어의 하나(one) 또는 부정관사(a/an) 중의적 의미가 있다. stein은 stone이라는 뜻. 따라서 einstein은 one stone(돌 하나)라기보다는, a stone 즉 '돌'이라는 뜻. 근데 독어는 애매하지만 영어로 따져보면 부정관사 'a'는 단수에 붙기 때문에 돌 하나란 뜻도 맞다. 성씨 문서에서도 보이듯 유럽 성씨 중에는 조상의 직업이 많다. 즉 적절히 의역하면 그냥 석공.[2] 사망 당시에는 스위스와 미국의 국적을 동시에 가진 이중국적자였다.[3] 그가 학부를 다녔던 취리히 공대에는 당시 박사 학위 과정이 없어서 바로 옆에 있는 취리히 대학교 물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지금은 물론 취리히 공대가 이공계열에서는 전세계 에서도 손꼽힐 정도로 유명한 학교이지만, 당시만 해도 자연과학을 포함한 순수학문으로 따지면 종합대학인 취리히 대학교의 위상이 높았다. 지금도 취리히 대학교 물리학과 복도에 가면 아인슈타인의 박사 학위 논문을 전시해 놓고있다.[4] 아인슈타인의 종교에 대해선 종교적 불신자, 불가지론자 범신론, 스피노자의 신을 긍정하는 자 등 다양한 개념이 나온다. 아인슈타인의 종교관을 서술한 장문의 위키문서가 있을 정도."스피노자의 신" 개념설명은 여기 참조.[5] 정작 아인슈타인 본인은 후술된 어록에 나온 말처럼 유대-독일계 등의 인종적 구분에 연연하지 않았다. 이것은 아인슈타인이 민족주의를 거부하는 탈민족주의 혹은 반민족주의자였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소아병적인 인류의 홍역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었을 정도.[6] 아인슈타인도 어렸을 때 공부를 못 했다고 알고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건 토머스 에디슨윈스턴 처칠의 이야기다. 아인슈타인은 단지 권위적인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 했을 뿐이었다. 또한 이후 첫 대입 시험에서 낙방했던 것도 이런 풍문을 뒷받침했다.[7] 현재 독일은 과거의 이런 주입식 교육이 결국 전쟁을 불러일으켰다고 생각하여 전쟁이 끝난 후 대대적인 교육 개편을 진행한다.[8] 근데 18~19세기만 해도 천재들이 이런 경우는 많다. 카를 마르크스는 이 나이에 '어느 젊은이의 직업선택에 대한 고찰'이라는 '''고등학교''' 졸업 논문을 썼다. 내용은 직업선택이 개인의 소명뿐만 아니라 인류의 미래에 끼치는 도움까지 고찰해서 결정되어야 한다는 대규모 관점의 논문이다. 당시 유럽 고등학생은 사실상 지금 대학생급 사회적 교육지위를 갖던 시대라, 퀄리티 자체야 천재와 평범한 사람들이 차이는 나지만 일단 고등학교 들어간 이상 어른 취급을 하며 논문 정도는 누구나 다 기본으로 써야 했다. 사실 이런 문화가 이어지기 때문에, 유럽의 전체적 분위기는 한국과 달리 지금도 웬만하면 선생님 등 성인들이 고등학생들에게 공식적으로 말할 때 "당신", "해 주세요" 등에 해당하는 성인 대우 존중표현을 쓰는 분위기다. 반대로 미국에서 고등학생을 바라보는 시선은 한국과 비슷한 고삐리(...) 정도이다. 유럽과 북미의 사회가 얼마나 다른지 보여주는 일례.[9] 1877년생으로 아인슈타인보다 두 살 연상인데, 이 뒤로도 아인슈타인은 이상할 정도로 연상인 여자들과만 엮였다고 한다. 한편 아인슈타인의 여동생 마야는 그 교수의 아들 폴 빈텔러와 결혼했다.[10] 이 짤방은 '''세계 최강의 과외 알바'''로 유명하다.[11] 유서깊은 가문 출신이자 방직 공장을 운영하고 있었다.[12] 1997년 한국 기준. 공휴일 빼고 일 1개의 특허를 처리하는 꼴이다.[13] 한 위인전 만화에는 오전에 이미 일을 다 해버려서 상사의 배려로 직장에서도 연구를 한다는 콩트적 대목이 나온다.[14] ETH 취리히는 당시 박사 학위를 수여할 수 없는 기술 교육기관이었다. 오늘날은 ETH 취리히에서 박사를 받을 수 있다.[15] 사실 상대론이 더 위대한 업적이라 볼 수 있겠으나 1921년 수상 당시 상대론은 물리학자 사이에서 아직도 논란이 있었기에 이 부분은 물리학의 이론적인 발전에 대한 기여라고 표현을 바꿨다.[16] 때문에 오늘날 과학계는 아인슈타인이 이들 3개 논문을 발표한 1905년을, 뉴턴이 만유인력을 발견한 1666년과 함께 '기적의 해'라고 부른다. 이에 따라 100주년인 2005년에는 전세계적으로 각종 기념 행사가 열렸었다.[17] 물론 결혼 초기부터 대뜸 이런 통보를 한 것은 아니였고, 관계가 나빠진 후에 보낸 메모라고 한다.[18] 1876년생. 아인슈타인의 아버지의 사촌의 딸이자, 아인슈타인의 어머니의 언니의 딸이다. 따라서 이종사촌 누나 겸 6촌 누나가 된다.[19] 출처.[20] 이들 두 사람은 각각 1905년과 1919년에 노벨물리학상을 받았다.[21] 아인슈타인은 이스라엘이 건국된 후에는 대통령(내각제 정부에서의 상징적 지위)직을 제의받기도 했지만, 이미 고령이어서 사양했다.[22] 원인은 살짝 다르지만 장제스의 유언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해서 알려지지 못한 것과 비슷한 사례. 아인슈타인은 이민 사회라는 미국의 특수성과 이민 1세인 아인슈타인의 개인적 상황 때문이라면, 장제스의 경우는 중국어에서 '방언'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한국의 제주어마냥) 사실상 서로 외국어 수준이나 다름 없기 때문에 벌어진 현상이다.[23] 뇌 크기와 지능이 아주 비례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오스트랄로피테쿠스호모 사피엔스 정도의 차이가 있지 않은 한 그렇게까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다.[24] 한국에서도 국립서울과학관에서 열린 인체의 신비전을 통해 일부가 전시된 바 있다.[25] 그러나 아인슈타인이 죽은 나이가 나이인만큼 늙으면서 뇌의 부피가 줄어들었기에 지능에 비해 뇌의 크기가 작게 측정됐다는 의견도 있다. 일반적으로 우리가 아인슈타인의 지능을 이야기할때는 40대 정도까지의 업적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의 리즈시절에는 뇌가 훨씬 컸을 수 있다는 것.[26] 그러나 나가사키 원폭 자료관에선 오펜하이머 등과 함께 맨해튼 계획에 참여한 원폭 제작자로 대문짝만한 크기의 사진으로 전시되어 은근한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27] 참고로 이 현상은 분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 중 하나다.[28] 그래서 대학원을 경제학으로 가기 위해 노리고 수학과를 지망하는 사람들도 꽤 있는 편이다.[29] 이 가정을 쓰면 주식 가격이 일종의 확산-임의보행모델이 된다.[30] 1919년 이혼소송 당시 만일 노벨상을 받으면 상금을 자녀 양육비로 첫 번째 부인 밀레바 아인슈타인에게 주기로 돼 있었기 때문에 상금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그래서인지는 모르지만, 미리 수상 가능성을 암시하는 말을 들었음에도 이를 무시하고 극동 여행을 떠나 있어서 수상식에는 참석하지 못했다.[31] 위성이 수신기에 신호를 보냈을 때 그 신호가 가는 시간를 이용, 위성을 중심으로 걸린 시간을 통해 구한 거리만큼의 구를 구하고 그 구의 접점들의 위치로 현 위치를 알아내는 GPS의 원리상, GPS에 탑재된 원자시계는 지상의 수신기에 있는 시계와 동기화 되어야 하는데, 위성과 지상의 중력 차이와 위성과 지상의 속도 차이로 인해 두 시간은 지속적으로 어긋나게 되어 있다. 중력에 의한 시간차를 상대성이론으로 보정해주지 않는다면, 도저히 사용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오차가 생긴다. 간단히 말해서 상대성 이론이 없다면 위성과 지상의 거리 오차는 매일 약 12km씩 차이나게 된다.[32] 통계물리나 열역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이게 얼마나 간단한 착상과 쉬운 계산으로 되어있으면서 실제와 거의 정확히 맞아 떨어지는지 알고 있을것이다. 보통 물리 계산식은 여러가지 치환 공식과 복잡한 계산 절차를 거쳐야 하지만 아인슈타인 고체 모델은 식 자체도 짧고 간결하며 단독으로도 완벽하지 않지만 거의 근접하게 계산 된다.[33] 기존에 아인슈타인은 숟가락만 얹었다고 되어있었는데, 논문 쓰기 전 토론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논문 발표 후, 슈뢰딩거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이 생각한 핵심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고 안타까워 하기까지 했다. "...언어의 이유 때문에 이는 토론을 거친 후 포돌스키에 의해 쓰여졌다. 그러나 이 논문은 내가 본래 원했던 대로 잘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말하자면 박식함 때문에 핵심이 질식되었다..." Fine, A.,1986, The Shaky Game: Einstein, Realism and Quantum Theory[34] 전자에 적용되는 힘은 약한 핵력(약력, 약한 상호장용)[35] 아인슈타인 A to Z p.430[36] 말년의 아인슈타인은 고등연구소에서 매주 화요일에 하는 무도회에 나가는 것이 자신의 유일한 역할이라고 회고하기도 했다.[37] 물론 이 당시는 빅뱅이라는 용어가 나오기 한참 전이라 이런 용어는 없었다.[38] 말하자면 은하들 사이에 존재하는 만유인력에 반발하는 '''만유척력'''을 고의적으로 집어넣은 것이다.[39] 나치 소속 과학자라는 의미가 아님.[40] 이 편지도 본래는 맨해튼 프로젝트의 착수를 권유한 실라드가 주도적으로 쓰고, 인지도에서 보다 앞선 아인슈타인이 서명하는 형식을 취했다. 말하자면 원자폭탄이 개발된 전후 과정에서 아인슈타인의 역할은 어디까지나 그의 명성, 권위를 빌려주는 것에 국한되었을 뿐이었다.[41] 러셀의 찻주전자로 유명한 철학자이다.[42] 1회 회의는 1957년 7월 캐나다 퍼그워시에 10개국 22명이 참여하였다. 당시 방사능의 위험성을 경고하면서 핵실험 중지를 요구하였고, 매년 전 세계를 순회하면서 계속되고 있다. 과학적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핵과 각종 대량살상무기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안전책을 요구하고 있다. 따로 사무국은 없으며 개인참가형식이고 1995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다.[43] 이 인형은 다큐멘터리 시리즈 내내 등장한다.[44] Alfred Werner[45] 3차대전에서 문명은 다 망할 테니 4차대전은 석기시대로 돌아가 저런 걸로 싸우게 된다는 의미[46] 실제로는, 이런 신빙성 없는 썰과는 반대로 밀레바는 아인슈타인보다 '''더''' 수학을 못했다. 일례로 밀레바는 졸업 시험의 수학 과목을 재수까지 하였으나 결국 통과하지 못해서 졸업조차 하지 못했다.[47] 시험이 쉬운 것도 아니었다. 가령, 부인 밀레바의 경우 두 번이나 졸업시험에서 떨어져 학위를 받지 못했다.[48] 지금은 미분기하학은 수학과 3학년에서 배운다.[49] 대표작 트리스트럼 섄디[50] 근데 아인슈타인은 4~5살 되기 전까지 말을 거의 못했다. 한국나이 6살쯤에 말을 뗐다고 한다. 그리고 나서도 말을 더듬거려서 부모가 "얘는 안 되겠구나" 하고 포기했었다.[51] 롤프 도벨리의 「스마트한 생각들」에서 인용한 찰리 멍거의 "운전사의 지식"에 관한 이야기도 이 버전(플랑크, 강연 외운 운전사)을 따르고 있다. 어쨌든 여기서 유래한 "운전사의 지식"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아는 척만 하는 지식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52] 누가 봐도 독일어를 못 하는 기자가 독일어로 질문을 하니 아인슈타인이 답변을 하기도 전에 조금씩 웃는 사람들이 보인다. 아인슈타인은 '당신의 서투른 독일어를 보니 웃겨서 기분이 좋다'라는 뜻으로 기자를 가볍게 놀렸다.[53] 이 사진에 대해 학교대사전은 "천재들은 왜 일찍 죽을까? 안 죽고 오래 살면 노인 때 이런 사진이 남기 때문이리라"라고 평한 바 있다(...). 그 예로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도 추가해야 할 것 같다.[54] 보어와 아인슈타인 모두 특정 종교에서 말하는 인격적인 차원에서의 신을 지칭하는 건 아니고 과학법칙을 주관하는 선에서 설계자로서의 신이라고 보면 적절하다. 즉, "과학법칙이 이렇게 생겨먹었고 실험적으로도 증명했으니, 우리 우주가 이렇게 생겨먹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정도로 이해하면 쉽다. 과학자들이 신이라는 단어를 쓸 수밖에 없을 정도(물론, 신의 존재를 믿고 안 믿고를 떠나서)로 양자역학의 탄생은 당시 과학자들의 기계론적 세계관의 충격을 주었다.[55] 이후 말년에 통일장 이론을 연구할 때 신은 심술궂은 것 같기도 하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56] 아인슈타인의 종교적 관점에 대한 연구는 활발히 있어왔는데, 대체로 특정 종교의 신이나 인격적인 형태의 신을 믿지는 않지만, 범신론이나 다신론 혹은 영적인 비종교인(religious non-believer)정도로 구분할 수 있다. 어쨌거나 확실한 반종교인이나 무신론자는 아니었다. 그리고 이 어록에서 종교는 과학적 탐구를 위한 열망이나 열정을 나타냈다. 아인슈타인이 쓴 "Science and Religion"을 보면, 위의 어록 바로 앞에 "But science can only be created by those who are thoroughly imbued with the aspiration towards truth and understanding. This source of feeling, however, springs from the sphere of religion."라고 쓰여있다. 해석하면 "그러나 과학은 진리와 이해를 향한 열망에 완전히 빠져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만들어 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느낌의 원천은 종교의 영역에서 시작된다."인데, 즉 종교적 열망이 과학적 탐구의 토대가 된다는 소리다. 반종교 성향이 강한 무신론자들은 아인슈타인 같은 위대한 과학자가 이런 종교 관련 발언을 했다는게 못마땅했는지 이 문구를 자의적으로 곡해하여 아인슈타인이 무신론자였다고 우긴다.[57] 다른 표현으로 "사랑에 빠지는 것은 사람이 하는 가장 미련한 짓이 아니라, 마치 중력처럼 책임을 물을 수 없는 것이다."가 있다. [58] 3차 세계대전에서 문명은 다 망할 테니 4차대전은 석기시대로 돌아가 저런 걸로 싸우게 된다는 의미(...). 유명한 어록인 만큼 변형이 많다. [59] 참고로 정면으로 대치되는 말로 군사학 논고의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가 있다. 다만 군사학 논고가 로마 제국 시절에 나왔다는 것을 감안할 것. 대군을 유지하는 것이 핵심인 고대와 핵무기 하나로 세상을 쑥밭으로 만들 수 있는 현대를 같은 선상에 놓을 수는 없다.[60]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에드먼드 버크도 비슷한 취지의 말을 한 적이 있다.[61] 배달원에게 팁을 줄 현금이 없자 쪽지에 적어서 건네주며 "아마 당신이 운이 좋으면 이 메모가 보통의 팁보다 훨씬 더 가치가 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62] 과학이론이란 단순히 관찰결과를 요약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관찰로 보이는 것들이 '무엇'인지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사고하는 방식을 만들어가는 아주 복잡하고 창의적이며 독창적인 과정이라는 뜻[63] H.G 웰스가 쓴 동명의 고전 SF 소설을 영상화했다.[64] 아인슈타인 본인은 전쟁을 싫어하는 평화주의자였지만 Dr. 와일리는 세계 정복을 꿈꾸는 매드 사이언티스트.[65] 중국인에 대해 "더럽고 우둔하다"고 한 것은 옳지 못한 부적절한 표현이지만 당시 중국의 경제 상황을 생각하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으나 "남녀 구별이 잘 안 된다"고 한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66] 아인슈타인 본인은 어린 시절,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사회에서 혐오와 멸시를 여러 번 받았다. 한 예로 아인슈타인이 독일 학교에 다니던 어린 시절, 그가 운동장에서 낡은 못을 발견하고 혹시 누가 이걸 밟고 다치지나 않을까 걱정되어 담임교사에게 못을 가져오자, 그 교사는 아인슈타인을 칭찬하기는커녕 오히려 다른 학생들 앞에서 그 못을 들어 보이며 "유대인들은 이런 못으로 예수를 못박아 죽였단다."라고 말하며 아인슈타인을 놀렸고, 그 말을 듣고 아인슈타인은 마음이 아팠다고 고백했다.[67] 하지만 한편으로는 러브크래프트 또한 사적인 목적으로 쓴 편지가 사후에 퍼블릭 도메인 마냥 공개된 것은 본인 입장에서 충분히 억울할 만 하다. 게다가 러브크래프트 본인은 감정표현에 서투르고 말년에는 극히 빈곤한 생활을 하여 문학가로서의 명성과는 달리 실생활에서는 자신의 생각을 공개적으로 피력하는 데 상당히 어려움을 겪던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