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꺽정
'''林巨正''' 혹은 '''林巪正''' (임걱정)
(1504년? ~ 음력 1562년 1월 3일)
1. 개요
조선 시대를 대표하는 도적. 조선 시대에도 도적은 많았으나[1] 임꺽정처럼 수차례 관군과 맞붙어 싸워 이겼을뿐만 아니라 거의 한 나라를 뒤집어 엎을만큼 활약했던 도적은 전무후무하다.
한글로는 임'꺽'정이라 불리지만 한자 표기는 林'巨'正이라 표기한다. 巨(거) 밑에 'ㄱ'을 붙여 巪(걱)이라고 쓰기도 한다.[2] 조선왕조실록에서는 '林巨叱正(임거질정)'으로 나타나는데 叱(질)은 사이시옷을 나타내는 표기로 이를 적용하면 '임것정' 또는 '임껏정'이 된다. 실제로 조선왕조실록의 원문을 보면 '林 巨叱 正'과 같은 식으로 巨叱을 일부러 붙여 쓴 표기가 상당수 발견되는데 '㖚(붓[3] )', '唟(것[4] )' 등과 동일한 방식을 적용해서 읽으라는 뜻인 듯하다. 조선왕조실록은 세로쓰기로 편찬되었으므로 巨叱 역시 㖚, 唟과 마찬가지 방식으로 읽힐 수 있다.
2. 초기 생애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출신이었으며 백정의 신분으로 태어났다. 임꺽정이 도적이 된 명확한 계기나 시기는 알기 힘들지만 아마도 백정으로서 겪어야 할 신분적 차별과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임꺽정이 도적으로 활동하던 무대가 되었던 명종 대에는 명종의 나이가 아직 어린 탓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와 동생인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하고 부정부패와 전횡을 일삼아 나라가 안팎으로 어지러웠으며 관리들이 부패하여 민생이 어려웠던 시기였다.
임꺽정은 민심이 흉흉해지자 그 틈을 타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불평 분자들을 선동하여 황해도 및 함경도를 중심으로 각지의 관아와 민가의 재물을 훔치며 종횡무진하였다. 이때 악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임꺽정이 한 고을에 나타났다 하면 짐을 나르던 사람들이 길을 나서기를 두려워하여 교통이 끊어질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세간에는 을묘왜변 당시에 군공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백정 신분 때문에 차별당한 일을 계기로 임꺽정이 도적질을 하게 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이는 홍명희의 소설 《임꺽정》에서 창작된 이야기일 뿐 사실이 아니다.
3. 전성기
임꺽정이 거느린 도적패는 1559년 이후로 제법 세력이 커져서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여 관리를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5] 관아나 양반들을 습격해 약탈한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줬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어떠한 기록에도 임꺽정이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이른바 의적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홍길동보다는 악행을 덜했는데 홍길동은 만난 사람들마다 입을 막기 위해서 족족 살해하고는 했지만 임꺽정은 자신의 위치나 자신이 왔다 간 것을 알려준 이들만 손을 보았다.
임꺽정 무리는 점차 대담해져서 여러 지역에 신출귀몰 출몰하여 조선 전역을 무법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들은 세력 범위를 넓혀 개성에 나타나는가 하면 1560년 한성에까지 출몰하였다. 게다가 일당들이나 가족들이 행여 잡히기라도 할 경우에는 관아로 쳐들어가서 건물을 때려 부수고 붙잡힌 일당들을 구출해가기도 하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임꺽정 이하 도적떼는 더이상 일개 도적떼가 아닌 '국적(國賊)'[6] 및 반체제적 세력(반란군)으로 간주되었으며 조정에서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명을 보내 평산에 집결한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꺽정은 되려 관군을 무찌르고 군관을 살해하였으며 군마를 약탈해갔다.
결국은 명종이 직접 어명을 내려서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의 5도[7] 에 대장을 정하여 임꺽정을 잡도록 하였다. 또한 모든 관청에 명을 내려 자잘한 업무는 쉬게 하고 임꺽정을 잡는데에 주력하라고 명할 정도로 임꺽정의 악명은 자자했다.
4. 최후
그러나 임꺽정은 체포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국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3년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개성부의 포도관 이억근이 추적 도중 살해 당하거나[8] 봉산 군수 이흠례를 살해하기로 계획하는 등 임꺽정 일당의 위세는 더해졌고, 반대로 장수들과 수령들이 포상과 독촉 때문에 마음이 급한 나머지 엉뚱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 임꺽정과 한패라 하여 벌주고 고문하다가 사람 잡는 일도 여럿 있었다. 또한 이렇게 허위 사실로 함부로 백성을 죽이거나 허위 보고를 올리는 이들도 파직당하거나 유배당하는 등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이런 난리통 중에 1560년 음력 11월 24일 경, 임꺽정의 참모였던 도적 서림이 붙잡혔다. 임꺽정과 도적떼의 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었던 서림은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임꺽정을 추격하였고 임꺽정의 형 가도치와 김세준 등 임꺽정 일당들이 체포되었다. 임꺽정은 이후로도 잡히지 않고 1년간 도피 생활을 하였으나, 1562년 1월 3일 경 황해도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 홍언성 등에게 사로잡힌 뒤 처형 당한다. 이후 명종은 1월 8일에 토벌군들을 치하 했고, 그 뒤로도 임꺽정의 잔당들은 남아 저항했지만 대부분 처단된다.
임꺽정의 처형 과정이 어땠는지 실록에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다만 이전에 가짜 임꺽정 체포로 여러 번 곤란을 겪었던 점과 명종이 임꺽정의 범죄를 역모 행위로 간주하여 좌, 우의정에게 임꺽정이 잡히면 궁궐에서 심문을 지시했던 점(명종 16년 9월 7일), 임꺽정을 체포한 후 13일에 내통자 서림의 처형을 논의한 점, 같은 달 17일 형조에서 "도적의 괴수는 이미 처단하였습니다..."라고 아뢴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임꺽정은 1월 3일 쯤에 체포되어 한양으로 압송되어 1월 8일 쯤에 임꺽정의 신분을 확인하고 13일 쯤에 일당들과 같이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도 추측일 뿐이라 설이 무성하긴 하다. 애초에 '도적의 괴수를 이미 처단하였다'는 저 말부터가 한양에 압송되기 전 즉결처분 했다는 뉘앙스로 읽힐 수도 있을 뿐더러, 그렇게 전국을 뒤흔든 도적이면 참수 한 후 저잣거리에 머리를 효수할 법도 한데 기록엔 그런 행적도 없다.
한편, 야사인 기재잡기에 따르면 임꺽정은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 등의 토벌군들에게 포위 당하여 탈출할 길이 없어지자, 토벌군 복색으로 변장한 후 꾀병을 부리면서 은근슬쩍 뒤로 빠지려고 했는데 토벌군 병졸들이 이를 수상히 여겼고, 마침 서림이 임꺽정을 알아보고 토벌군에게 알리는 바람에 들켜 급히 도주하였고 추격하는 토벌대가 화살을 난사하였다. 임꺽정은 결국 여러 대의 화살에 맞은 후 "내가 이렇게 된 건 모두 서림 때문이다. 서림아! 서림아! 네가 어찌 관군에 투항할 수 있느냐?"라고 서림을 질책한 후 사망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다만 실록에 임꺽정을 사로잡았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신빙성이 떨어진다.
5. 평가
도적 두목 치고는 용맹함이 상당해서 추격해온 관군과 직접 맞부딪혀서 무찌른 일도 있었고, 계략을 짜내 관군을 골탕먹인 일도 있었다. 이를테면 눈덮인 산에서 관군들에게 쫓기게 되자 일부러 신발을 거꾸로 신어서 발자국을 남겨 되려 도적떼를 쫓던 관군들이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처럼 임꺽정은 전투력과 교활함을 두루 갖추었고, 리더쉽과 카리스마도 상당했는지 상인이나 농민, 백정 등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임꺽정의 휘하로 몰려들어 도적이 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적을 고변하는 자는 잡아서 '''배를 갈라''' 버리는 무시무시한 협박도 했다고 하니 역시 도적은 도적.
당대의 명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일단 임꺽정을 가리켜 희대의 흉악범 정도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임꺽정과 같은 도적이 나타나 날뛸 수 있었던 것도 다 나라가 혼란하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9]
간단히 말해서 '윗놈들이 잘만 했으면 이런 난리도 나지 않을 것이다.' 정도로, 당시 문정왕후와 윤원형의 손아귀에 놀아나던 조정이 얼마나 막장스러웠는지 가히 짐작할 만 하다.[14]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10]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 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11]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랴?[12]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탐하지 않고 어진 이를 수령으로 가려 뽑는다면 칼을 든 도적들이 송아지를 사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13]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려 추적하여 붙잡으려고만 한다면 붙잡은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엔 다 붙잡지 못할 것이다.
또한 흉악범이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천민치고는 나름대로 능력도 꽤 있었던 것 같다. 오합지졸 도적 무리를 이끌면서도 관군을 발라 버렸고, 몇 년 동안 잡히지도 않으면서 전국을 휘저으며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만 봐도 범상치 않은 도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민간 설화에서는 의적으로 많이 묘사되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비록 당대에 일부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기도 했다지만 이는 그저 임꺽정이 평소에 꼴보기 싫던 탐관오리와 부자들을 박살내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랬을 뿐이다. 실제로는 도적들이 다 그렇듯이 백성들이나 행인들도 약탈 대상이었다. 더욱이 자신을 밀고한 백성들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들을 학살하는 등의 처참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백정을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로 나누면서 임꺽정의 문제가 조선 전기 백정의 문제점을 확대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조선 전기 백정은 유목집단이 농경집단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마적단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데 비해서, 임꺽정 집단의 모습은 보다 전형적인 도적 떼에 가깝다. 조선시대 백정묘사와 수호지 양산박 도적떼를 두고 비교하면, 임꺽정의 모습은 차라리 후자에 가깝다. 그리고 임꺽정의 문제를 일반 백정의 문제로 해석하면, 일반 백성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아전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는 뒷날 서북지방과 관련된 홍경래의 난과 같은 반관투쟁 문제와 더 연결고리가 강하다.
황해도에서 갈대에마저 세금을 거두니, 서북지방 차별과 백정 문제가 더해져서 임꺽정 집단에게 지방민들의 호응이 있었다 쪽이 더 이해하기 쉽다.
6. 그 외
먼 후대에도 그 악명이 높아서 이익이 홍길동, 장길산과 함께 서도(황해도와 평안도를 부르는 말)를 대표하는 도적으로 꼽았으며[15] 임꺽정 설화를 기초로 해서 벽초 홍명희 씨가 지은 대하장편 역사소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임꺽정의 가족의 기록은 거의 없지만, 그의 아내가 붙잡혀 관아의 노비가 되는 일도 있었다. 임꺽정은 아내가 노비로 일하고 있는 곳을 습격하여 구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결국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또한 임꺽정에게는 가도치라는 형이 있어 함께 도적질을 하고 다녔는데, 관리들은 임꺽정을 잡아 포상을 받고 싶었던 욕심이 컸던 나머지 가도치를 사로잡은 후에 고문을 가해서 스스로를 임꺽정이라고 자백하게 만들고는 '임꺽정을 잡았다'라며 그를 한양으로 압송하였다. 이때 가도치는 고문의 후유증을 이기지 못하고 상경하자마자 죽는 바람에 정말 모두가 속아넘어갈 뻔했지만 가도치와 대질한 서림의 증언으로 인해 속임수였음이 탄로나면서 파직당하였다.
기록은 별 것 없는데, 외부 시선 변화에 따라서 영향을 많이 받는다. 조선전기 백정의 조선왕조실록 기사가 언급되기 시작하면서 그냥 백정이네 라는 식의 평가도 돌았고, 이전에도 홍명회의 임꺽정 소설 때문에 대중의 임꺽정 상이 완성되기도 하였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의 임꺽정 민담만 해도 3갈래로 언급이 나온다. 임꺽정을 의적 혹은 그나마 민간의 도움을 받았던 인물로 보는 것, 흉악한 도적으로 보는 것, 마지막으로 홍명희의 소설.
더불어 이름이 꺽정인데, 한자로 표기가 어려워 클 巨에 밑에 ㄱ을 붙여 巪 이라는 새 문자를 만들어 표기했다고도 한다. 여튼 巪은 사람 이름 걱으로 매우 잉여한 한자지만 임꺽정 덕분에 잉여한자 치곤 꽤 인지도가 있는 편. 매우 초급 한자에 조어 방식도 매우 쉬워서 외우기도 매우 쉽다.
힘이 어찌나 셌는지 체포당하기 직전 비무장 상태였는데 맨몸으로 저항하던 중 관리 한 사람의 팔을 붙잡아 훑었더니 그대로 팔이 늘어났다고 한다.
6.1. 관련 문서
7. 관련 작품
7.1. 소설류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에 대한 내용은 임꺽정(소설) 문서로.
사실 임꺽정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은 홍명희의 임꺽정 이외에도 많다. 홍명희의 작품이 금서가 된 상태였기 때문에 김용제의 임꺽정(1961년), 허문녕의 거도 임꺽정(1961년) 같은 소설이 나왔던 것이다.
최인욱[16] 의 임꺽정은 1962년에서 1965년까지 서울신문에 연재되면서 엄청난 인기를 모았다. 소설의 연재가 끝나자 서울신문의 판매부수가 2만부나 떨어졌을 정도로 당대의 인기작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명희작 임꺽정의 봉인이 해제되자 마자 이런 작품들이 모조리 '''쓸려나가서''' 지금은 흔적도 찾기 어려운 것을 생각해보면 홍명희의 임꺽정의 파괴력이 대단하다는 걸 알 수 있다.
7.2. SBS의 드라마
임꺽정(드라마) 문서로.
7.3. 고우영 임꺽정
고우영 화백의 작품 중 하나의 주인공이 되었다. 당 작품에선 임꺽정의 숙적으로 양반 출신 검의 고수 윤원빈(윤원형의 조카라는 설정)이 등장하여 춘심이란 여성을 사이에 두고 삼각관계가 형성된다. 여기서의 임꺽정은 선이 굵은 호걸이며, 아무리 사랑하는 여성이라도, 설령 그녀가 숙적의 여자라고 해도 털 끝 하나 건드리지 않는 양심적인 사람. 다만 직선적인 성격 때문에 끝내 파국을 맞이한다.
자세한 것은 해당 문서 참고.
7.4. 애니메이션
1997년, 난데없이 김청기 감독이 감독하여 개봉한 극장 애니메이션으로 그야말로 1980년대풍 김청기 애니 그림체와 효과음, 성우 연기를 보여주면서 시대착오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끝나면 안녕~~이라는 자막 까지 나온다. 결국 흥행에는 참패하였고, 이후 점차 잊혀지다가 명절때나 SBS에서 방영해주기도 하였다.
최후에 임꺽정이 사로잡혀서 처형당한다는 결말은 차마 아이들에게 그대로 보여줄 수 없었는지(...) 임꺽정은 자수하고 그전까지 임꺽정과 대립하던 양반 청년은 사실 암행어사라 탐관오리 사또를 처벌하고 임꺽정을 용서해준다는 무난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지었다.
여담으로 이 작품은 본래 천하장사 이만기를 임꺽정으로 섭외하려 하여 실사화하려 했으나 무산되었고, 동일한 각본으로 애니화되었다.
7.5. 그 외
- 1955년 연극 《협객 임꺽정》에서는 장동휘가 임꺽정 역을 맡아 연기했다.
- 1961년 영화 《임꺽정》에서는 신영균이 임꺽정 역을 맡았다.
- 1966년 영화 《천하장사 임꺽정》에서도 임꺽정이 등장하였다. 배우는 불명.[17]
- 1972년 영화 《유령 소동》에서도 임꺽정이 등장하였다. 배우는 불명.
- 1987년 《박철수의 헬로 임꺽정》에서도 임꺽정이 등장했다. 임꺽정은 조연으로 출연했으나, 임꺽정 역을 맡은 배우는 불명.
- KBS 2TV에서 임하룡이 임걱정으로 나오는 코미디 코너도 나왔는데, 말 그대로 도적단 두령인 임걱정과 졸개인 심형래와 부하들이 나와 부하들 뻘짓으로 골탕먹으면서 끝난다. 끝날때마다 임걱정이 "걱정된다! 걱정돼."라면서 마무리하는데 그다지 인기가 없어서 오래가진 못했다.
- 1991년 영화 《오 내사랑 임꺽정》에서는 상일환이 임꺽정 역을 맡았다.
- 1990년대 중반 SBS의 대단한 일요일이란 프로그램 에서 남희석이 남걱정이란 인물로 나와 사소한 일에도 "근데 만~약에~..."라고 읊으며 걱정만 하다 일을 그르치는 코너도 있었는데 이 또한 얼마 가지는 못했다.
- 네이버 웹툰 입시명문 사립 정글고등학교에서는 왠지 모르게 프레데터와 임꺽정이 싸우는 내용의 영화가 나온다.
- 1993년도에 출판한 SF 임꺽정이라는 소설이 있는데, 관군의 추격에 죽을 뻔한 임꺽정이 외계인에게 납치되어 20세기 서울로 시간이동 한다는 황당무계한 내용이다.
- 1998년 가을 KBS 2TV에서 9시 주말극으로 임꺽정의 일대기를 다룬 5부작 북한 영화 <림꺽정>을 10부작으로 편집하여 방영했다. 14%대의 시청률에 머물렀지만 뉴스 시간 대에 방송된 것을 감안한다면 낮은 시청률은 아니었다는 게 방송가의 대체적 평가였는데, 북한에서 제작되었지만 정치색이 비교적 없고 극적 리얼리티가 확보된 작품이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외면하지 않았다는 분석이었다.[19] 이 작품 이후 KBS의 9시 주말극은 대가 끊겼다.
- 2013년 KBS 드라마 천명: 조선판 도망자 이야기에서는 권현상이 임꺽정 역을 맡았다.
- 임꺽정의 이름을 단 FPS 게임도 국내에 발매된 바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대만에서 제작된 게임 칠협오의의 로컬라이징. 7명의 인물이 등장한다는 데서 임꺽정 7형제를 연상했는지 모르지만 내용은 임꺽정과 전혀 관련없는 중국식 무협이라 당시 플레이했던 사람들의 반응은 이뭐병. 지금은 인지도도 거의 없다. 더 자세한 것은 칠협오의 문서 참고.
- 대체역사물인 명군이 되어보세!에서는 원역사보다 40년 늦게 태어났다는 설정으로 원 역사에서는 이미 죽었던 선조 시기(작중에서는 현대인이 빙의한 임금 '장조' 시대)에 생존하며 백정 출신이지만 겸사복에서 근무하는 군인으로 나온다. 스페인 군사고문이 준 양손검을 한손으로 휘두르는 천하장사로 작중 조선이 치룬 전쟁인 무자호란, 경인왜란, 을미동정 등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생포하는 등 공훈을 세우며 맹활약 중이다. 여기서도 서림과 붙어 다니며 원 역사와는 달리 전사와 저격수라는 환상의 콤비로 활약 중. 말년에는 내금위장에 정2품 당상관 반열에 올라 대감마님 소리를 듣고 그 명성이 건주여진과 오이라트까지 알려진다. 은퇴 후에는 소박하게 푸줏간 일을 하다가 사망 후 강무관 배향공신이라는 영예를 얻는다.
- 한편 여왕전하의 비선실세에서는 동평관에 머물고 있던 잉글랜드 사신단의 설탕을 노리고 습격한다. 이때 수십명의 군사를 홀로 이겨내는 괴력을 보이나 드레이크가 저격에 성공해 어깨에 부상을 입고 뒤를 이은 잉글랜드 사신단의 돌격에 부하들도 완전히 괴멸 된 체 체포되며 원 역사보다 2년 빠르게 토벌되어 버리는 안습한 처지에 놓이고 만다.
- Europa Universalis IV에서는 조선 이벤트로 등장하는데, '농민들의 고투' 이벤트를 해결하지 못했을 경우 해주 지역에서 대략 18연대 규모의 반란군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는 것으로 구현되었다.
8. 같이보기
[1] 소위 조선시대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이 거론되기도 한다.[2] 이 글자는 우리나라에서만 쓰이는 한자인 국자.[3] 付(부)+叱(질)[4] 去(거)+叱(질)[5] 2018년 방영된 '역사저널 그날' 171회에서 임꺽정 관련해 도적 활동은 했지만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 같은 의적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나온다. 일부 백성들이 임꺽정에게 호응한 것도 임꺽정의 보복을 두려워했고 자신들을 괴롭히던 관리들을 임꺽정 무리가 대신 처치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6] 나라를 어지럽히는 역적이라는 의미이다.[7]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을 제외한 북부와 중부 전 지방.[8] 이에 대해 소수 병력만 이끌고 무리하게 갔다고 웃기다는 사람도 있고,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임꺽정의 부하 하나가 "웃기네 우릴 뭘로 보고" 라고 디스하기도 하는데, 실상 이억근은 실록에도 이미 도적 수십명을 잡았다고 기록된 경험 많은 포도관이었다. 명종 14년 3월 27일의 실록 기록을 보면, 정작 이억근은 소수 병력만 끌고 들어가는걸 반대했는데 개성부 도사가 20명만 주고 억지로 보냈다고 나와있다.[9] 이러한 평가를 두고 사관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대단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의무다. 거기에 사초는 아무도 볼 수 없고 누설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다. 사실 이러한 문화는 실록을 열람했던 연산군이 이후 폭군으로 흑화하면서, 이후에도 실록을 국왕이 열람하려고 하면 신하들은 '그것은 폭군 연산이나 하는 악행입니다'라고 뜯어말릴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10] 윗물이 더러운데 어찌 아랫물이 깨끗할 수 있냐는 뜻.[11] 실제로 수령을 고소할 수도 없었다.[12] 실제로 유교에서는 성선설을 내세우니 "도적들이 태어날 때부터 도적이고 싶어서 태어났냐?"라고 한 것에 가깝다.[13] 도적이라고 도적질이 마냥 좋겠냐는 뜻.[14] 그런데 이것도 조심해서 보긴 해야 한다. 문정왕후를 향한 사관들의 비판은 다른 이유에서 날카로웠던 것도 있기 때문이다. 사실 저 내용은 조선왕조실록의 재해나 난리 기사에 다 집어넣을 수 있을 정도이다. 반면 세도정치 전성기 철종실록에는 해당 발언들은커녕 실록 기사 자체를 찾기 어려운데 왜냐하면 사관도 같은 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단 사관들이 대체로 없는 말은 지어내지 않으므로(문정왕후에게 그렇게나 비판적이면서도 섭정을 거둔 후 정사에 관여했다는 얘기가 없다.) 일단 '''문정왕후와 그 측근에게 책임이 돌아감은 부정할 수 없다.''' 적어도 그들이 당대 권력을 쥐고 있던 것부터가 책임을 져야 할 이유다. 큰 힘에는 큰 책임이 뒤따르기 때문[15] 이익, 성호사설 14권. 인사문(人事門)[16] 지금은 존재가 거의 잊혀진 소설가인데, 그나마 유명한 소설은 '자규야 알라마는'으로, 천추태후를 다룬 거의 유일한 소설로 해당인물의 이름을 딴 드라마의 원작이 되었다.[17] 신영균으로 추정.[18] 태조왕건에서 강장자 역을 맡은 것으로 유명하고, 손숙의 남편.[19] 참고로 림꺽정은 몇년전부터 북한에서 금지 당했다고 한다. 영화(+주제가까지)가 조선시대의 탐관오리들에게 고통을 받는 백성들의 고난과 그를 물리치자는 내용인데 김정일 및 김정은 시대에 들어서서 고통 받아온 북한 주민들의 마음을 딱 대변하기 좋은 작품이기에 분명 순수 북한의 작품인데 북한에서 금지 당하는 아이러니한 일이 생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