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충
1. 개요
고려 문종 시기의 문신. 우리에게는 해동공자라는 이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노래에도 등장한다. 해주 최씨의 시조인 최온(崔溫)의 아들이다.
2. 상세
최충은 은퇴 이후 총 9곳의 학당이라는 뜻의 '9재 학당'을 세워 문관을 배출했다. 이른바 시중최공도(侍中崔公徒)인데 '최 시중의 공도들'이란 뜻으로 한국 사립학교의 원조이다. 당시 국립 교육 기관이었던 국자감이 쇠퇴하는 모습을 보이자 전직 시험관으로서 직접 돈을 들여 창설한 것. 의도는 좋았는데 문제는 학벌을 만들어 버렸다는 것. 최충의 학당에서 공부한 문하생들이 과거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후 크게 출세 가도를 달리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사학을 열어서 사학 12도가 완성된 것도 모자라 현재의 입시 위주 교육을 하는 학교처럼 되어 버렸고 뽑아준 시험관들과 성공한 사람들이 자기의 후배들을 이끌어주는 일이 발생한 것. 훗날 조선 시대에서 붕당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현된다.
최충의 9재 학당이 성공할 수 있었던 원인에는 그의 경력도 강하게 작용했다. 최충은 장원 급제를 한 뒤에 외교 문서 작성 및 서연과 과거 시험에도 관여하는 한림학사, 교육+외교+예법+제사+과거 시험을 담당하는 예부시랑, 문하시중을 지냈으며 과거 시험 문제를 출제하는 지공거는 여러 번 역임했다. 현대로 따지면 고등고시 수석 출신에 고등고시 출제 위원장, 청와대 사회수석, 교육부 차관, 국무총리를 지낸 사람이 입시 학원을 차린 셈이었다. 그야말로 인기가 없을래야 없을 수가 없었던 것. 심지어 해동의 공자라는 별칭까지 붙었으니 그의 글솜씨와 인품이 얼마나 뛰어난지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 중기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그의 시문은 별로 현존하는 것이 없다. 무신정변 이후 문신들이 대거 살해당했고 그 과정에서 그들의 문집도 함께 없어졌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에 공자에 비견되는 사람의 저술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은 매우 아쉬운 일이다.
3. 후손
최충은 최유선, 최유길 두 아들을 낳았다. 장남 최유선은 최사제(崔思齊)를, 최사제는 최용(崔湧)을, 최용은 최충의 고손자 최윤의를 낳았다.
차남 최유길은 최사추를, 최사추는 조선국대부인[1] 을, 조선국대부인은 문경태후[2] 를, 문경태후는 최충의 외고손자 인종을 낳았다. 인종 이후의 모든 고려국왕은 인종의 직계후손이므로 그들은 최충의 방계 후손이기도 하다.
여몽전쟁 당시 제1차 자모산성 전투에서 빛을 발한 최춘명(崔椿命)[3] 은 최충의 8대손이며 훈민정음 반대 상소로 유명한 최만리는 12대 후손이다.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전사한 의병장 최경회도 그의 후손이다.
4. 문하생
보한집에서는 최충 문하생의 두 부류를 소개한다. 정종 원년(1035) 진사시에 급제하고 상서 등 관직에 오른 10명은 상서방(尙書牓)이라 불렸고, 문종 37년(1083)에 급제하고 뒤에 관직을 떠나 은거한 두명은 처사방(處士牓)이라 불렸다. 처사방이 급제한 과거에서는 명망있는 관리가 된 사람이 없었는데 처사방은 관직까지 버렸으니, "모름지기 상서 합격패(尙書牓)에 이름을 올려야 하거늘, 검소하게도 처사과에 급제했구나."[4] 라고 조롱을 듣기도 했다.
상서방이 과거에 급제한 것은 아직 최충이 현역 관료로 있을 때의 일이므로 이들이 9재 학당에서 수학했을 가능성은 낮다.
5. 역임 관작
6. 기타
옛 고구려 영토인 해주 출신 최충은 옛 고구려 수도인 서경에서 관직을 시작했다. 이후 거란과의 전쟁이 시작되자 수제관으로 참전하였다.
여요전쟁으로 인해 고려 왕실이 제작한 실록이 사라졌다. 현종은 자신의 앞 7명 국왕의 기록을 다시 모으고자 했고 이에 사관[6] 을 재정비해 이른바 '칠대사적(七代史籍)'을 편찬하였다.
보한집 기록에서 최충의 집은 누각이 12개나 있고 화려한 것이 마치 옥청의 집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여기다 저자 최자는 부연설명을 덧붙였는데 웬만한 재상 집은 다 이 정도였다며 별 놀랄 일이 아니라고 했다. 당시 고려의 국력과 문벌 귀족의 사치를 엿볼 수 있다.
보한집 권상에 따르면 최충은 자신의 두 아들에게 사치를 멀리할 것을 충고하는 글을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며 후손들이 잃어버렸다고 한다. 또 언젠가 문종이 연회를 열었는데 늙은 재상 최충이 두 아들 재상에게 부축을 받으며 들어오자 사람들이 상서령이 중서령을 돕고 온다며 다들 우러러 보았다고 한다. 당시 해주 최씨 가문의 위세를 알 수 있는 부분.
[1] 조선국공 이자겸의 아내.[2] 예종 문효왕의 아내.[3] 아이러니하게도 최춘명을 구명한 것은 몽골의 다루가치였다. 살례탑과 항복을 권유하러 갔던 고려 관료이자 머저리 대집성은 명령 불복종으로 사형을 주장하여 그대로 선고되었다. 그러나 정작 몽골이 파견한 다루가치가 그는 우리에게는 적이었으나 너희에게는 충신이요, 이미 강화를 맺고 우리도 그를 죽이지 않은 마당에 너희가 스스로 끝까지 성을 지킨 충신을 죽이는 것은 어찌된 일이냐?하고 꾸짖었다고.[4] 須占尙書牓, 休登處士科.[5] 명예 품계로는 무산계, 향직 품계가 있다.[6] 지금의 국가기록원과 비슷한 부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