젤랄 바야르
1. 개요
제랄 바야르는 터키 공화국의 제 3대 수상이자 제3대 대통령을 역임한 정치가이다.
2. 생애
1883년 오스만 제국 휘다벤디갸르 주(Hüdavendigâr Vilayeti) 겜릭(Gemlik)군, (현재의 부르사 도 겜릭 군)에서 오스만령 불가리아에서 이주해 온 종교 지도자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중등교육을 마친 뒤에 법원과 지방행정기관에서 일하다가 1900년 농업은행(Ziraat Bankası)에 입사하여 은행원으로 근무하였고 전문지식을 습득한 뒤 도이체 오리엔트 방크(Deutsche Orientbank)에 입사했다.
1907년에 청년 튀르크당에 가입해서 부르사와 이즈미르 청년 튀르크당 지부장을 맡기도 했다. 이즈미르에서는 특히 기독교인들을 제지고 무슬림들의 경제활동을 강화하는 데 기여하였다. 터키 독립전쟁이 벌어질 때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의 대국민회의에 합류하여 재무부 부장관을 역임했으며 1921년 2월에는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로잔 조약을 맺을때에 대표단의 고문으로 활약하였고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이듬해인 1924년에 터키공화국 노동은행(T.C. İş Bankası)을 서립해서 1932년까지 경영자로 일했다.
1923년부터 1950년까지 터키 대국민의회 7선 의원으로 활동하였으며 1937년 10월에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대통령으로부터 이스메트 이뇌뉘 당시 수상의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무스타파 케말 대통령이 사망하면서 이뇌뉘가 대통령으로 선출되고 수상으로 유임되었으나 1939년 1월에 대통령과의 의견차이로 수상직에서 물러났다.
1946년 공화인민당의 장기집권에 대항하여 1당 독재를 해결하고자 아드난 멘데레스, 무스타파 페브지 차크마크 등과 함께 민주당을 창당하고 1950년에 총선에서 승리하여 아드난 멘데레스가 수상으로, 제랄 바야르는 대통령으로 취임하고 이후에도 1954년,1957년에 재선출되었다. 그러나 의원내각제였던 터키에서 실권은 아드난 멘데레스가 가지고 있었다.
1960년 제말 귀르셀 장군이 주도하는 군사 쿠데타로 인해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쿠데타 당시 그는 자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고 재판끝에 1961년 9월 15일에 군사법원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종신형으로 감형되고, 1964년 11월 8일에 건강의 이유로 가석방될때까지 카이세리의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 후 쿠데타 이후 돌아온 문민정부의 대통령인 제브데트 수나이의 특별명령으로 사면되었다.
그 후 젤랄 바야르는 옛 민주당 정치인들에게 떨어진 종신정치활동 금지령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1968년에는 이를 위해 "우리집"(Bizim Ev)이라는 정치사교클럽을 창성하기도 했다. 한편 젤랄 바야르가 대통령직을 하던 시절에는 정적이었던 이스메트 이뇌뉘와 1969년 5월 14일에 오랜만에 만남을 갖고 이뇌뉘의 전폭적인 지지 아래, 공화인민당이 구 민주당 정치인들에 대한 종신정치활동 금지령의 폐지에 지지를 선언하면서, 젤랄 바야르는 그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다. 우여곡절끝에 10년만인 1970년 6월 16일에 터키 헌법재판소가 해당 금지령의 위헌성을 선언함으로써 그는 정계로 복귀할 수 있었다.
1970년대에 젤랄 바야르는 이슬람, 보수 우파의 막후 지도자로 확고하게 자리잡아 세속주의 좌파의 지도자로 자리잡은 이스메트 이뇌뉘와 양대 축을 형성했다. 구 민주당 정치인들이 합류한 정의당(Adalet Partisi)에 젤랄 바야르도 합류했으며, 1975년에 부르사에서 이루어진 정의당 집회에서도 쉴레이만 데미렐을 지지하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말년인 1980년에는 9월 12일 쿠데타를 이끈 케난 에브렌과 쿠데타 정부가 수립한 1982년 헌법을 지지했다. 이후 1986년 8월 22일에 103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사망당시 세계에서 가장 나이가 많은 현역정치인이었다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같은 해 8월 28일에 앙카라에서 당시 대통령 케난 에브렌이 참석한 가운데 국장으로 장례가 치러졌으며, 고향인 우무르베이(Umurbey) 마을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