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난 에브렌
1. 개요
터키의 군인, 정치인. 1982년부터 1989년까지 재임한 터키 공화국의 제 7대 대통령이자 독재자이다.
2. 초기 생애
1917년 오스만 제국 알라셰히르에서 알바니아계 아버지와 불가리아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1938년 포병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기도 했다. 1958년부터 1959년까지 터키 여단으로 한국에서 복무하기도 했다. 1961년에 육군참모장이 되고 1964년에는 장군으로 승진했다. 1977년에 육군참모총장으로 승진하고 이듬해인 1978년에는 터키군의 최고위직에 올랐다.
3. 1980년의 쿠데타와 집권
터키군의 최고 사령관 자리에 오른 에브렌은 1970년대 후반 터키에 만연한 극도의 정치, 사회, 경제적 불안정이라는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당시 터키는 뷜렌트 에제비트가 이끄는 중도 좌파 공화인민당(Cumhuriyet Halk Partisi,CHP)[1] 과 쉴레이만 데미렐 총리가 이끄는 정의당(AP, Adalet Partisi)을 주도로 한 우파 연합 국민전선, 네즈메틴 에르바칸을 중심으로 한 보수 성향의 이슬람계 정당 국민구제당(Millî Selamet Partisi,MSP)의 세 세력이 대립하는 가운데 수많은 정치적 암살과 테러, 범죄가 횡행했고 70년대 후반 5년 동안에만 총리직이 3번 교체되는 혼란을 겪고 있었다.
에브렌은 1979년 말 직속 부하에게 쿠데타 가능성에 대한 보고서를 작성케 함으로써 최초의 행동을 보인다. 1980년 초 두 번째 보고서가 작성되고, 점점 상황은 극을 향해 고조되고 있었다. 당시 데미렐 총리는 1979년 이미 군부의 수상한 움직임에 대해 터키 국가정보국으로부터 정보를 받은 상태였지만 강대한 터키 육군의 지휘권을 쥐고 있는 에브렌에게 내각이 대응할 수단은 현실적으로 전무했다.
1980년 9월 12일 오전 에브렌과 군부는 행동을 개시한다. 군권을 장악하고 이스탄불과 앙카라의 정부 기관들을 압박하는 그 앞에 총리와 관료들은 무력했다. 데미렐 내각을 몰아낸 그는 국가안보평의회(NSC)를 세우고, 의장으로써 2년간 국가원수 대행으로 권력을 잡는다.[2] 이 때 이전의 의회를 해산하면서 "터키에 자유는 너무 큰 사치이다"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1982년 11월 그는 국가안보평의회의 이름으로 헌법을 개정하고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여 1982년 11월 9일 7년 단임제를 임기로 한 터키 공화국의 7대 대통령에 취임하게 된다. 이전까지 터키의 정치는 의원 내각제로 돌아가고 있었으나 에브렌의 개헌은 모든 권한을 대통령에게 집중하고 내각과 총리를 대통령의 수족으로 채우는 대통령 중심제적 헌법이었다.
4. 대통령직 재임
케난 에브렌이 정권을 잡은 기간은 모든 독재정치가 그렇듯이 빛과 그림자가 극명하게 갈리는 시기이다.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그의 재임기를 터키 역사상 가장 어둡고 잔인한 역사로 정의한다. 통계에 따라 다르지만 250,000명에서 최대 650,000명까지의 민간인이 에브렌 정권 하에서 구속되었으며 이 중 14,000여 명이 시민권을 박탈당했고 50여 명이 처형되었다. 물론 공식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암살과 숙청 등은 이것의 수십 배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된다. 불법적인 민간인 사찰과 영장 없는 구속, 고문 역시 횡행했는데 수백 명에서 수천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군과 경찰에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며 일부는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또한 그는 기존 수권 정당과 정치인들[3] 의 활동을 모두 금지하고 관제야당만을 선거에 출마할 수 있게 허용했고, 초월적인 권한을 대통령에게 부여하는 신 헌법으로 터키의 민주주의를 파괴했다.
반면 에브렌에게는 터키의 경제를 강력한 리더십으로 살려낸 지도자라는 상반된 수식어 역시 붙는다. 1970년대 후반 터키의 경제는 공화인민당과 정의당, 민족주의행동당이 번갈아 가며 집권하면서도 그 어느 당도 해법을 내놓지 못해 점점 파탄의 경지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케난 에브렌은 취임 후 강력한 통화 정책을 기반으로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최소화하고 국제통화기금의 지원을 통해 터키의 경제와 산업을 세계화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중서부 지방에 비해 낙후되어 있던 동남부 아나톨리아를 개발하여 근대화시킨 것도 에브렌 집권기의 일이다.
1982년 12월 터키 대통령 최초로 방한해서 전두환 대통령과 회담을 가지기도 했다. 이후 2004년 당시 총리이자 현 대통령인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의 방한에 이어 2005년 노무현 대통령의 터키 방문으로 23년 만의 국가원수 답방이 이루어졌다. 1989년 11월 9일에 7년의 임기를 마감하고 대통령직을 퇴임한다.
5. 퇴임 이후와 말년
에브렌은 대통령직을 내려놓은 후 지중해 연안의 마을에서 아마추어 화가 생활에만 몰두한다. 그러나 수많은 사법 살인과 불법적 고문, 시찰, 숙청을 감행한 에브렌에 대해 터키 국내외에서 처벌 여론이 들끓었지만 군부의 영향을 받는 세속주의 성향의 정부 아래에서 그에 대한 처벌 여론은 흐지부지되어 있다가 이슬람주의 성향의 정의개발당(AKP)이 집권하는 문민 정부가 들어선 후 본격적으로 다시 수면으로 떠오르게 된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정부는 2000년대 초반부터 케난 에브렌에 대한 법적 처벌을 검토했지만 실제 기소는 2012년에 와서야 이루어졌고, 2014년 국가 전복 모의와 살인 및 살인교사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하지만 이때의 에브렌은 이미 96세의 노령이었고 건강도 나빠서 이듬해인 2015년 97살의 나이로 앙카라의 국군수도병원에서 파란만장한 인생을 마감했다
6. 여담
전두환 전 대통령과 정치 이력이 비슷하다. 1980년에 쿠데타를 일으켰다거나, 헌법 개정과 어용 선거로 대통령에 취임했다거나, 심지어 7년 단임이라는 임기마저 똑같다. 임기가 종료된 이후 법의 심판을 받았다는 점도. 두 사람은 직접 만난 적도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독재자끼리는 통하는 무언가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터키의 정치 환경은 한국과 다르다보니, 권위적 국민보수주의자였던 전두환과 달리 터키 정치에서 진보 포지션을 차지하는 세속적 케말주의자였던 케난 에브렌은 극우 정치인으로 분류되지 않는다.[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