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독립전쟁

 

1. 개요
2. 전쟁의 발발 원인
3. 독립군의 봉기
4. 아타튀르크의 등장
5. 지중해로의 진격
5.1. 안텝 전쟁
5.2. 동부전선의 상황
6. 전황의 변화
7. 사카리야 전투의 기적
8. 종전 후
9. 전쟁이 남긴 영향
9.1. 알려지지 않은 사실: 아나톨리아 내 그리스계 터키인들의 행보


1. 개요


  • 터키어: Kurutuluş Savaşı (해방전쟁), Türk İstiklâl Harbi(터키 독립 전쟁), Millî Mücadele (인민투쟁)
  • 영어: "Turkish War of Independence"
1919년 5월 19일부터 1923년 7월 24일까지 터키 대국민회의군(Türkiye Büyük Millet Meclisi)과 그리스 왕국, 프랑스, 영국, 아르메니아 민주 공화국을 주축으로 한 협상국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 제1차 세계 대전의 패망 속에서 오스만 제국을 끝내고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터키를 구해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을 만든 전쟁이다.

2. 전쟁의 발발 원인


1918년 10월 30일, 오스만 제국과 협상국이 무드로스 정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오스만 제국이 통치하던 중동 지역 내 전선들이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협상국은 이 협정을 통해 다르다넬스 해협을 통제할 권리와 더불어 '''오스만 제국 영토 내에서 발생할 소요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국 내의 영토를 점유할 권리를 갖게 되었다.'''
결국 같은 해 11월 12일, 협상국이스탄불에 입항해 도시 점령을 선언했으며, 영국군은 터키 동부의 일부 도시를, 프랑스군은 시리아에서부터 올라와 서부 아나톨리아일대의 도시들을, 그리스군동로마 제국 회복인 대그리스주의(통칭 메갈리 이데아)을 명분으로 유럽에서는 트라키아 동부에서 이스탄불까지, 바다를 건너와 소아시아에서는 이즈미르트라브존 일대의 룸(rum)[1]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영역들을 점차 점령해나가기 시작했다.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이후 협상국은 1915년부터 1917년 사이에 비밀리에 체결된 오스만 제국 영토 분할안에 따라 계획을 차곡차곡 실행해 왔으며, 이는 1920년 8월 10일에 체결된 세브르 조약을 통해 굳어진다. 이 조약에 따르면 옛 오스만 제국의 속령 중 튀르크인들에게 남는 건 중앙 아나톨리아 일부 뿐으로 나머지는 협상국들이 나눠 가지는, 사실상 오스만 제국의 해체나 다름없는 조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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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브르 조약으로 결정된 오스만 제국 분할안. 제1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오스만 제국령이었지만 전쟁 중 프랑스와 영국이 점거한 오늘날의 이라크, 시리아, 요르단, 레바논, 팔레스타인, 이스라엘은 논의 대상에서 빠져 있다.

3. 독립군의 봉기


한편 이러한 꼴을 보다 못한 터키 민중들은 사소한 방법으로든 무장봉기로든 점령군에 저항하기 시작했다. 그리스군이 이즈미르에 상륙한 1919년 5월 15일, 젊은 기자인 하산 타흐신(Hasan Tahsin)은 점령군의 기수에게 기습적으로 총알을 발사했고, 그리스군의 즉각적인 대응에 따라 즉시 사살되면서 독립전쟁의 첫번째 전사자가 되었다. 이 총알은 곧 이즈미르에 남아있던 전직 병사들과 민간인들을 자극했으며 그 날 하루 시내 곳곳에서 무력충돌이 벌어져 3,500여명의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러한 움직임은 즉각 터키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점령군에 의해 무력화된 이스탄불에서도 점령군에 대항하는 시위대가 조직되어 투쟁에 나섰으며, 오스만 제국의 많은 공무원들도 파수대(Karakol Cemiyeti)라는 이름의 조직을 구성해 점령군으로 하여금 독립운동의 상황이나 행정상태파악 등을 방해하거나 숨기는 등의 소극적인 저항과 함께 연합군에 의해 압수된 제국의 병기나 물자들을 몰래 빼돌려서 독립운동단체에 넘기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산발적인 민간인과 해산된 군인들의 저항 끝에 1919년 5월 즈음에는 크게 두 개의 저항조직이 생겨나는데, 하나는 아나톨리아 동부의 에르주룸(Erzurum)을 본거지로 하는 캬즘 카라베키르(Kâzım Karabekir)의 군대와 또 하나는 앙카라를 본거지로 하는 알리 푸아트 제베소이(Ali Fuat Cebesoy)의 군대가 그것이었다. 이스탄불에서 사실상 열강의 볼모 신세가 된 술탄 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VI Mehmet Vahidettin)은 아직 오스만에 충성하는 장군들을 구슬리고자 오스만의 행정력이 남아 있는 아나톨리아 내부 요충지의 태수로 임명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행동은 메흐메트의 입장에서 독립군이 자신을 옭아매는 열강들을 몰아내는데 유용할 수도 있지만, 이들이 자신에게 총칼을 되돌릴 수도 있으므로 양다리를 걸친 것으로 해석된다.

4. 아타튀르크의 등장


한편 갈리폴리 전투의 영웅이자, 1차 세계대전 내내 혁혁한 전공을 세우며 오스만 제국의 영웅으로 부상하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오스만 술탄 메흐메트 6세의 명을 받아 오스만 제국의 남은 군대의 해산을 감찰하는 직책을 수행하고, 독립운동을 무마시키기 위한 임무를 띄고 1919년 5월 16일 이스탄불을 떠나 4일 뒤 흑해연안의 도시 삼순(Samsun)에 도착했다. 터키 역사교과서에는 이날 아타튀르크가 영국 국기를 달고 출발한 증기선 반드르마호가 항구를 벗어나자 공해상에서 월성기를 게양하게 했다는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삼순에서 캬즘 카라베키르와 알리 푸아트 등의 인사들과 대면한 이후 아타튀르크는 '''혁명'''을 선언한다. 하지만 남부 아나톨리아는 이미 영국 해군이 전부 장악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이스탄불의 술탄 정부는 아타튀르크의 배신을 파악하고는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때린 상태였기 때문에 결국 이들은 보다 안전한 시바스(Sivas)로 이동해 최초의 의회를 개최했다. 이때가 1919년 9월 4일의 일이다. 이후 보다 많은 독립 군벌들을 규합한 의회는 1920년 4월 23일에 앙카라에서 대국민회의(Büyük Millet Meclisi)로 개칭하면서 오늘날 터키국회의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대국민의회에서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선출했다.

5. 지중해로의 진격


Ordular! İlk hedefiniz akdenizdir. İleri!

제군! 그대들의 첫 목표는 지중해다. 앞으로!

- 아타튀르크가 사령관으로 취임하고 나서 제일 먼저 내린 명령

하지만 터키 대국민의회로 명명된 독립군은 사방이 적에 둘러싸인 채 고립된 무척 좋지 않은 상황이었다. 당장 동부에서 아르메니아가 고토수복을 명분으로 진군해 들어오고 있었으며, 남부에서는 프랑스군이 약속받은 땅을 받기 위해 북진하고 있었으며 서부에서는 그리스군과 터키군의 치열한 대치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대국민의회의 병력으로는 사방의 적을 상대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우선 가장 세력이 크고, 아나톨리아의 곡창지대를 장악하고 있는 그리스군을 상대로 병력을 집중시킨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들의 빈자리는 결국 민병대가 맡게 되었다.

5.1. 안텝 전쟁


터키 남동부의 요충지 가지안텝(Gaziantep)는 아이은탑(Ayıntap) 혹은 안텝(Antep)이라는 이름으로 제1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오늘날 시리아알레포(Halep) 도에 속해 있었으며, 튀르크, 튀르크멘인, 아랍인, 아르메니아인, 쿠르드족 등 다양한 민족들이 함께 거주하고 있는 곳이었다. 19세기 말, 가지안텝은 프랑스와 미국의 선교사의 활동과, 도시의 주생산품인 동과 밀, 카페트, 그리고 목화무역으로 유럽과의 교류도 활발했다. 때문에 남동부 아나톨리아에서는 '''동방의 파리'''라는 별명도 붙을만큼 드물게 서구식 교육시설과 병원을 갖추고 있었으며 주민들의 근대교육 수준도 높았다. 문제는 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오스만 제국이라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자 주민들간에 민족 갈등이 일어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1차 세계대전 후, 1918년 12월 17일에 영국군은 가지안텝에 진입해 대략 1년동안 군정통치를 벌였다. 하지만 1919년, 영국과 프랑스는 협약을 체결해 시리아와 남동 아나톨리아의 위임통치권을 프랑스에게 넘겼고 같은 해 11월 5일에 프랑스군이 진입했다. 한편 1919년 초부터 도시의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인근의 마라쉬(Maraş, 오늘날의 카흐라만마라쉬), 킬리스의 아르메니아 주민들과 더불어 독립을 꿈꾸기 시작했다. 아르메니아 대학살 항목에도 설명되어 있지만, 전쟁 시기 이 지역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의 강제 이주지로 설정된 곳이었기 때문에 전쟁 중에 이곳으로 이주한 '''반 오스만''' 성향이 배가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갑자기 늘자 원래 가지안텝에 거주하던 튀르크멘, 아랍, 쿠르드계 주민들과 충돌이 벌어지게 되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프랑스군과 연합해 독립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당시 프랑스군에 합류해 튀르크 민병대와 대치했던 아르메니아계 민병대의 구호는 "아르메니아가 아니면 무덤을!"(Ya Ermenistan, ya mecaristan!)이었다. 프랑스군은 오늘날 가지안텝 시립 박물관 및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는 베야즈한(Beyazhan)에 사령부를 마련했고, 그 지역은 대체로 부유한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으며 근처에 미국 선교사가 세운 아메리카 병원과 아르메니아인을 위한 여학교가 있었다. 프랑스군을 등에 업은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은 튀르크인들을 학대했다. 프랑스군의 행동도 오스만계 주민들의 분노를 샀는데, 결정적으로 이들이 봉기하게 된 계기는 이 베야즈한에 위치한 사령부 근처에서 벌어졌다.
1920년 1월 21일 금요일 저녁, 당시 14세였던 메흐메트 캬밀(Mehmet Kâmil)은 어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베야즈한 앞을 걷고 있었다. 그때 근처를 순찰하던 프랑스군은 그들의 길을 막으며 캬밀의 어머니의 히잡차림을 조롱하기 시작했고, 그 중 한 군인이 그녀의 히잡을 잡아채 떨어뜨렸다. 그러자 화가 치민 캬밀은 돌을 집어들어 그 군인에게 던져서 맞추었고,[2] 그러자 군인들은 캬밀을 총검으로 찔러 살해했다. 다음날 캬밀의 장례식에는 모스크를 가득 채우고도 남을만큼 많은 분노한 안텝의 주민들이 참석했고, 이들은 집에 가지고 있던 고물 엽총과 칼을 긁어모아 오스만 군대의 옛 무기고를 털어 무장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차 세계대전 당시 예멘 전선에서 싸운 참전용사 샤힌 베이(Şahin bey)와 마라쉬 출신의 카라 이을란(Kara Yılan)이 이들을 이끌었다.[3] 1920년 4월 1일부터 1921년 2월 9일까지 샤힌베이가 이끄는 300여 민병대는 그보다 10배는 되는 도시내에 주둔한 많은 프랑스군과 프랑스군에 합류한 아르메니아계 민병대를 상대로 농성전을 벌인끝에 이들을 저지시켰고, 인근 도시인 카흐라만마라슈와 샨르우르파에서도 민병대들에 힘입어 프랑스군을 막아내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남동부지방의 대프랑스 전선은 앙카라에서 너무 멀었기 때문에 터키 대국민의회가 신경써줄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고, 때문에 이 전선에서 벌어진 사건들은 "안텝 전쟁"(Antep Savaşı)이라고 따로 분리하기도 한다. 본 항목에서는 소문단 형식으로 추가했다.
결국 프랑스는 1921년 10월 20일에 앙카라 협약[4]을 체결하면서 제일 먼저 전쟁에서 빠졌다.

5.2. 동부전선의 상황


동부에서는 아르메니아군이 , 비틀리스 일대를 노리고 3개 보병사단과 1개 기병여단을 동원해서 동부 국경 지대를 침공했지만 1920년 9월 24일부터 12월 2일 사이에 벌어진 전쟁에서 캬즘 카라베키르가 이끄는 독립군 4개사단에 밀려서 오히려 과거 제정러시아에 오스만 제국이 할양한 카르스(Kars), 반(Van), 아르다한(Ardahan)을 다시 터키에 넘겨주게 된다.
트라브존, 리제일대에서는 현지 폰토스인들이 민병대나 마적단을 구성해 학살과 약탈을 벌이고 있었다. 특히 튀르크인과 아르메니아인, 그리스인이 섞여 거주하던 트라브존 일대에서는 폰토스 민병대가 튀르크인과 아르메니아인을 대량으로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으며 당시 해외 언론인과 현지인들이 남긴 참상의 사진들이 상당히 많이 남아있다. 하지만 캬즘 카라베키르의 군대는 폰토스 민병대까지 전멸시키는 데 성공했고, 폰토스 민병대가 사라지자 폰토스인들이 대량으로 보복학살을 당하는 일도 발생했다.[5] 인종청소 개념의 대량학살은 이 전쟁에서 특히 동부에서 두드러지게 자행되었다.
1921년에는 이미 서부전선을 제외한 다른 전선들은 소강상태에 들어간 상태였다. 하지만 그리스군은 대국민의회가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버거운 상대였으며, 아나톨리아 내부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은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군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고 있었기 때문[6]에 연합군의 장비까지 지원받아 막강해진 그리스군을 상대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6. 전황의 변화


때문에 대국민의회가 결정한 주된 전략은 게릴라전이었다. 터키 민간인에 의한 테러나 소요사태, 무장봉기는 이미 1919년 전쟁 발발시기부터 계속되어 왔었지만, 앙카라에서 들어온 공작원과 교관들에 의해 그리스군 점령지 내의 무장군은 점점 더 격렬하고 과감한 공격을 감행해 왔다. 때문에 그리스군은 빠른 시일 내에 아나톨리아 중심부로 진격해서 앙카라 정부를 끝장내기로 작정하고 그동안 대치 상태였던 형국을 무너트리고 1921년 새해를 기점으로 빠른 속도로 앙카라를 향해 진격해 들어왔다. 그리고 당시 그리스와 인접한 이스탄불이 그리스군에게 점령당할 뻔했다.[7]
대국민의회군은 이스메트 파샤(Ismet Paşa)가 이끄는 병력 6천으로 아나스타시오스 파풀라스 장군이 이끄는 그리스군 2만여를 이뇌뉘강에서 막아세웠으며 비록 대국민의회군이 패하긴 했지만 두차례에 걸친 전투 끝에 그리스군의 진격속도를 늦추는 데는 성공했다. 이후 터키에서 성씨 사용법이 통과되자 이스메트 파샤는 자신이 분전한 전선인 이뇌뉘강의 이름을 따서 자신의 성을 이뇌뉘(İnönü)로 정한다. 이스메트 이뇌뉘는 아타튀르크의 가까운 친구이자 전우였으며 아타튀르크 사망 후 터키 공화국의 제 2대 대통령으로 즉위하게 된다.
대국민의회가 그리스군을 막아서는 동안 후방에서는 터키인들의 집요한 항쟁이 이어졌다. 그리스군의 짐을 운반하는 짐꾼들이 방심한 틈을 타 어디론가 사라진 다음에 독립군에 합류한다거나, 길 안내를 자처한 터키인들이 장교들이 방심한 사이에 수류탄을 터트려 장교와 함께 동귀어진하는 사건도 벌어졌다. 여자들은 공장에서 총알을 만들고, 아이들은 어머니를 도와 물자를 전선으로 날랐다. 막대한 피해를 입으면서도 터키인들은 끊임없이 항쟁했으며, 결국 이는 독립전쟁을 터키의 승리로 굳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21년 8월에 그리스군은 앙카라를 목전에 두고 있었다. 앙카라에서 불과 200km 정도 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아피욘-카라히사르 전선(Afyon-Karahisar)이 붕괴되어 그리스군은 사카리야강까지 이르렀으며, 이곳에서 8월 23일부터 9월 13일까지 장장 21일에 걸친 전투가 벌어진다. 대국민의회는 필사적으로 이곳을 사수해야 했지만 그리스군의 수가 너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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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부 전선의 상황도, 사카리야 전투 당시 터키 대국민의회는 그야말로 풍전등화 상태에 몰려 있었다.

7. 사카리야 전투의 기적


장장 21일동안 전투는 밤낮없이 벌어졌다. 당시에 해당 방면으로 돌릴 수 있는 군대란 군대는 다 투입했기 때문에 앙카라 수비군도 전원이 이 전투에 투입되었으며, 아타튀르크는 말을 타고 최전선으로 나와서 장병들을 독려하였고, 심지어 다른 장군들과 함께 직접 총을 들고 싸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이와 같은 노력 끝에 비록 전사자 수는 터키군이 더 많았지만 어쨌든 그리스군의 진군을 최종적으로 저지시키는데 성공했다.
여기서 다 이겨놓은 전쟁을 왜 그리스군이 멈췄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하지만 당시에 그리스군도 전 병력을 사카리야에 꼴아박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또한 보급선이 너무나 긴데다가 그나마도 튀르크 민병대에게 지속적으로 습격받던 상황이었기 때문에 더 이상 공세를 계속 할 수 없었다고 보는 것이 주류 해석이다.[8] 한 마디로 그리스군은 공세종말점에 다다랐기 때문에 공세가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할 것이다. 즉 '''그리스와 터키의 주력군이 대규모 전투를 벌인 끝에 간신히 터키가 승기를 잡은 것이다. 총력전에서 물량이 많은 국가가 결국 승기를 잡을 수밖에 없었고 마침 앙카라 앞에서 그리스군의 공세를 저지하게 되었던 것.''' 그리고 이 전투가 끝나고 얼마 지나지도 않아서 동부, 남부전선의 상황이 종결되었기에 대국민회의군은 모든 전력을 서쪽으로 집중할 수 있게 되었으며, 결국 1922년에 이르면 도리어 터키군이 그리스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된다.
이렇게되자 이스탄불에서 사건을 관망하던 열강들은 다시금 저울질을 시작한다. 대국민회의는 영국의 요청에 따라 이스메트 파샤를 특사로 파견했으며, 스위스의 로잔에서 장장 1년여에 걸친 회의를 거듭했다. 터키 측에 아나톨리아를 보전하겠다는 서양 열강들의 제안에 이스메트 파샤는 "'''우리 민족의 완벽한 독립이 아니면 회의 따위 때려치워라.'''"라는 초강경자세로 버티고 있었으며 소련은 물자까지 지원하면서 독립군을 지원하고 있었다. 대국민회의군은 1922년을 기점으로 터키 전국에서 그리스군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고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1922년 8월 30일 퀴타햐 인근의 둠루프나르에서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터키군이 완승을 거두면서 더 이상 열강들도 시간을 끌 수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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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호에서 대기 중인 터키 국민회의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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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 직전 아타튀르크(왼쪽 앞)과 이스메트 이뇌뉘의 모습(오른쪽 앞).

8. 종전 후


둠루프나르 전투에서 승리한 터키군은 기세를 몰아 그리스군의 아나톨리아 본거지였던 이즈미르까지 수복하고[9] 영국군과 트로이 주변 차낙칼레에서 대치하기에 이른다. 그리스는 베니젤로스파 플라스티라스 대령이 군사정변을 일으켜 왕당파 정권을 쫓아내고 역전의 명재상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전격 복귀시켜 동트라키아 에디르네(아드리아노플)를 지키려 하였으나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결국 평화에 동의하게 되었고, 결국 1923년 7월 24일 로잔 조약이 체결되면서 비로소 끝나게 되었다.
결국 로잔 조약에 따라 동트라키아, 스미르나는 터키에게 정식으로 되돌아왔으나 에게 해의 섬은 터키 영토의 코앞에 있는 것까지 죄다 그리스에게 넘겨주고 말았다. 현대 터키 영토의 코앞에 있는 섬들까지 그리스 영토가 된 것은 터키의 해군이 약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터키와 그리스의 현재의 국경선이 설정된 것은 제1차 세계 대전 직후이며, 오스만 제국이 세계대전에서 패배, 항복한 뒤 이스탄불에 진주한 연합군의 우두머리인 영국인 고등판무관이 그리스-터키 전쟁을 지켜보다가 그리스군이 터키군에게 져서 에게 해로 밀려나자 궁지에 몰린 그리스군을 구하고, 전쟁이 확전되는 것을 막기 위해 신생 터키 정부에 압력을 넣어 이스탄불 부근의 동트라키아땅 아니면 에게 해의 섬들 중 하나를 가지라고 제안하자 터키 정부가 이스탄불 주변 땅을 선택해서 에게 해가 그리스 영해가 된 것이다. 이 때문인지 이 지역의 영해 범위를 놓고 터키와 그리스 사이에 영토 분쟁을 벌인다고 한다. 또한 터키는 튀르크계가 일부 분포하고 있는 키프로스 역시 포기했다. 이는 이후 키프로스 분단과 전쟁을 초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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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년에 독립기념으로 제작한 아타튀르크와 그의 전우들의 사진이 담긴 포스터
협상국은 이스탄불에서 철수했으며,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술탄메흐메트 6세 바히데틴은 영국 군함에 올라타 몰타로 망명을 떠난다.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는 연합군에 이용당하는 술탄 정부를 '터키 민족의 반역자'로 규정했으며, 때문에 공화국 건국 이후 오스만 제국의 남은 황족들은 죄다 국외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이후 1923년 10월 29일에 대국민의회는 공화국을 선언하며 오늘날의 '''터키 공화국을 건국하고 이 전쟁의 가장 큰 공로자이자 총사령관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으로''' 세우게 된다.
한편 가지안테프 옆에 위치한 작은 도인 하타이(Hatay, 안타키야 Antakya라고도 부른다. 영어로는 안티오크라 읽는다 )는 터키인이 다수인 지역임에도 전쟁후 프랑스령 시리아에 자치주 형태로 속해 있다가 1938년 9월 7일 하타이국(Hatay Devleti)이라는 이름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1년 후인 1939년 6월 29일에 국민투표를 통하여 터키와 합병해 오늘날의 국경을 갖추게 되었다.

9. 전쟁이 남긴 영향


터키 독립전쟁은 터키 공화국을 탄생시켰으며 아직도 터키 공화국에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전쟁의 가장 큰 영향은 아타튀르크를 국부의 위치까지 올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가령 터키의 가장 큰 국경일인 국권기념일 겸 어린이날(4월 23일), 승리의 날(8월 30일)과 공화국 건국기념일(10월 29일)은 각각 1920년 4월 23일 터키대국민의회가 개설된 것과 1922년 둠루프나르 전투에서의 승리, 그리고 공화국의 건립을 기념하는 날이며, 무스타파 케말 파샤가 이즈미르를 재탈환한 날인 1922년 9월 9일을 기념하는 행사나 시바스 회의가 열린 9월 4일, 아타튀르크가 삼순에 도착한 날인 5월 19일은 각 도시에서 기념행사가 열리며, 아타튀르크가 사망한 날인 11월 10일은 비록 국경일은 아니지만 터키 전체가 9시부터 그가 사망한 시각인 9시 5분까지 울리는 사이렌 소리에 맞춰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묵념하는 시간을 갖는다.
아타튀르크가 독립전쟁 시기에 남긴 연설들, 이를테면 오늘날에까지 터키인들이 의무적으로 외우는 '우리의 맹세'(Andımız)나 '오 터키 청년들이여!'(Ey Türk gençler!), 그리고 각종 어록들[10]은 오늘날까지도 터키인들에게 중요한 행동지침으로 자리잡고 있으며, 전쟁 이후 아타튀르크가 주창한 '''조국에서의 평화, 세계에서의 평화'''는 현대 터키 공화국의 주된 국시로 자리잡혀있다. 터키 공화국의 국가인 '''독립행진곡'''(İstiklâl Marşı)도 절체절명에 몰린 시기에 군대의 사기를 고취시키고자 만들어진 노래다.
아타튀르크의 세속주의적 근대화 개혁이 급진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원인도 이 전쟁에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전쟁에 여성들이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참여하면서 여성의 사회진출이 늘었으며, 터키의 페미니즘 운동도 전쟁 이후 영향력을 넓혀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기존의 울레마를 비롯한 이슬람 지도자들이 메흐메트 6세의 퇴위와 오스만 제국의 멸망, 그리고 1924년 칼리파의 지위만 가지고 있던 압뒬메지트 2세가 퇴위함과 더불어 영향력을 잃었기 때문에 그 빈자리를 세속주의정부가 장악할 수 있었다. 공화국정부는 터키 공화국 종교부(Türkiye Cumhuriyeti Diyanet İşleri Başkanlığı)를 설치하고 주류 종교(이슬람 수니파)를 정부에 예속시킴으로써 급진적인 개혁으로 인해 일어날 이슬람 우파의 반발을 권위적으로 억누를 수 있었다.[11] 심지어 터키어 문자를 라틴 문자로 개혁하면서 아랍 문자를 사용하지 않게 되고, 그만큼 이슬람의 영향력으로부터 대중들을 유리시키는 결과도 낳았다.
아타튀르크가 주창한 케말리즘(Kemalizm)의 6대 원칙인 공화주의(Cumhuriyetçilik), 민족주의(Milliyetçilik), 인민주의(Halkçılık), 국가주의(Devletçilik), 세속주의(Laiklik), 혁명주의(İnkılapçılık)를 통해 사회주의적인 계획경제와 민주주의적인 요소를 흡수하면서 당시 일고 있었던 공산주의적 움직임 또한 사전에 차단해 훗날 터키가 소련에 대항해 반공 노선을 걷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반대편 그리스는 다 이긴 전쟁을 굴욕적 패전으로 끝냈다는 좌절감으로 전쟁을 주도한 국왕 콘스탄티노스 1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도가 최악으로 떨어졌고, 이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의 주도로 왕정이 폐지되고 그리스 제2공화국이 수립되는 데 결정적 원인으로 작용한다. 그리고 그리스-터키 전쟁과 그리스-터키 인구 교환으로 수많은 터키-그리스인들이 쫓겨남으로써 고대 그리스 이래 장구한 여명을 유지해 왔던 이오니아의 마지막 그리스 정착지는 사라진다. 그리고 이 때를 기점으로 그리스에서 극단적 민족주의는 설 자리를 잃었고, 터키에서 세속주의 개혁이 시작되면서 그리스에서도 세속주의 열풍이 불게 된다. 그래서 의외로 현재의 그리스에서도 아타튀르크에 대한 평가가 좋다고 한다.
또한 이 전쟁으로 터키 거주 쿠르드족 역시 날벼락을 맞았다. 세브르 조약을 맺을 당시 영국은 쿠르드족을 회유하기 위해 영국 점령지 중 일부를 쿠르드족에게 넘겨서 쿠르디스탄 독립을 약속했다. 하지만 터키가 전쟁에 승리하면서 세브르 조약이 파기되고 해당 점령지가 다시 터키 영토가 되면서 쿠르드족의 독립국가 건설도 불가능해졌다. 또한 이 때의 경험 때문인지 터키 정부는 이후 쿠르드족에 대해 강경책으로 일관하고 있다.
하지만 터키가 이 전쟁으로 얻은 것만 있는 것은 아닌데, 전쟁이 끝난 뒤 터키는 한동안 국제 왕따로 전락해 버렸고 그래서 한때 적국이었던, 그리고 똑같이 국제 왕따 신세였던 소련과 가까워지게 되었다.

9.1. 알려지지 않은 사실: 아나톨리아 내 그리스계 터키인들의 행보


1차 세계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군에는 튀르크인이나 아랍인뿐만 아니라 오스만 제국 국적의 그리스인, 아르메니아인, 불가리아인 등도 있었다. 탄지마트 개혁 이후 실시된 근대적 징병제는 무슬림과 비무슬림에 차이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며 개중에는 1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도, 심지어 종전 이후 오스만 제국군이 해체될 때까지도 오스만군에 군적을 두고 있던 그리스계 장교 및 병사들도 있었다. 이들은 그리스군이 이즈미르와 그 주변을 점거한 이후인 1920년 4월 29일에 내려진 그리스군 점령지역내 32세 미만의 모든 남성에 대한 동원령이 내려졌을때 그리스군의 징집령에 응해 그리스군으로 갈아탄 이들도 있었지만 전우와 총을 맞대고 싶지 않아서, 혹은 고향을 지키기 위해 터키 대국민회의군과 함께해 그리스군과 싸운 이들도 있었다.[12] 이에 맞서서 터키 대국민의회측도 1920년 9월 13일에 볼루, 게이베, 에르투으룰, 에스키셰히르, 퀴타햐, 아피욘-카라히사르, 데니즐리, 부르두르, 으스파르타 도 내에 거주하는 20-40세 사이의 비무슬림 남성에 대해 예외없이 비전선지역으로의 이주령을 내렸으며 대부분은 앙카라로 이주시켰다. 하지만 에스키셰히르와 빌레직에 거주하던 그리스계 비무슬림들은 현지 무슬림 튀르크인들과의 사이가 매우 좋았고 그리스군에 참가하기 싫어서 그리스 점령지역에서 도망친 그리스계 주민들도 이쪽으로 많이 이주했기 때문에 이 두 지역의 그리스계 주민들은 이주령에서 제외되었다. 한편 이에 관해 1921년 8월 25일자 인민의 자유(Hâkimiyet-i Milliye) 신문에서는 "이즈미르의 룸인(그리스계 터키인)들 사이에서 군대 문제 때문에 걱정하고 있다. 많은 룸인들이 네덜란드 영사관으로 가서 본인이 오스만 제국 국적임을 증언하고 군대징집을 면하고 있다." 라는 기사를 내기도 했다. 또한 사카리야 전투 당시 포로로 잡힌 그리스군 제49보병연대 소속 병사는 본인을 포함한 연대병력 절대다수가 아나톨리아 룸인들이며 다들 탈영을 원했지만 15-20일만 버티면 된다는 지휘관의 말을 믿고 자리만 지키고 있었다는 증언을 하기도 했다.
그리스계 터키인과 튀르크계 터키인간의 인간적인 협력도 있어서 그리스군이 퀴타햐를 점령했을 때 현지의 룸인들은 튀르크인 이웃들을 보호하기 위해 튀르크인의 가게 간판에 즉석으로 그리스어를 써서 붙여주었고 이렇게 해서 튀르크인들을 그리스군의 약탈로부터 보호하기도 했다. 에디르네에서는 현지 룸인들이 튀르크인들과 사이좋게 지내는걸 보고 그리스군이 강제로 튀르크인 이웃들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룸인들이 거부해서 그리스군으로부터 학살당하는 사건도 있었고, 현재는 이스탄불에 속하는 차탈자 지역에서는 룸인들의 동네에 거주하는 파즐의 아들 요르기(Fazıl oğlu Yorgi)는 그리스군에 의해 체포되어 반죽음이 될때까지 구타당하는 사건도 있었다. 사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아버지의 이름인 파즐이 무슬림들이 붙이는 이름이라 그랬을 가능성이 높다. 그런데 아들 이름인 요르기는 그리스어로 하면 요르요스인데, 그리스에서 가장 흔한 남성이름이다.
그리스군의 철군 이후에도 튀르크인과 그리스인의 인간적인 우호관계에 대한 증언은 존재하는데, 이즈미르 해방 이후 당시 이즈미르 도에 속한 베르가마에 거주하던 룸인인 아포스톨로스 미코니아티스는 "우리 지역에 거주하는 튀르크인 이웃들이 우리를 안심시키려 하였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세간들을 나귀에 싣고 항구로 가고 해방의 꿈을 가지고 배를 기다리고 있다." 라고 증언했으며, 역시 이즈미르 근처의 우를라에 거주하던 니콜라오스 파파니콜라우는 전쟁중에 그리스군에 강제 징집되었고, 그리스군이 이즈미르에서 철군할때 남았는데 도중에 만난 튀르크인에게 안전하게 도망갈 길을 물을때 이런 대화를 나누었다고 증언했다. "튀르크인: 어디 마을 사람이우?" / "사자키 마을이오" / "어느 집안 사람이우?" / 파파니콜라우 가문인데요" / "조심하시오 자네 아버지를 아니까 하는 말인데 산길로 해서 조용히 빠져나가시오."[13]
이러한 사실과 증언들을 통해서 알 수 있는 것은 당시의 본토 그리스인들과 아나톨리아의 룸인들은 서로 동족으로 여기고 그리스에 협력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조상대대로 알고지내던 무슬림 이웃들과의 평화과 고향을 지키기 위한 이들도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들을 서로 적으로 만들고 서로를 학살하게 만든 이 전쟁은 민족주의가 초래한 비극이라고도 할 수 있다.

[1] 터키 국적을 갖고 있는 그리스인을 일컫는 말로, 그리스 국적을 가진 그리스인인 유난(yunan)과 구분된다.[2] 지금도 아랍인들에게 남아있는 풍습이지만, 여자의 히잡을 강제로 벗겨서 머리카락이 드러나게 하는 것은 그 여자 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 대한 상당한 모욕으로 여겨진다. 캬밀은 그 모욕감 때문에 분노했고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돌을 던졌던 것이다.[3] 때문에 가지안텝 도의 중심을 이루는 두개의 군의 이름은 안텝 전쟁의 첫번째 전사자인 캬밀과, 봉기군을 지도한 샤힌 베이의 이름을 따서 각각 셰히트캬밀(Şehitkâmil), 샤힌베이(Şahinbey)가 되었다.[4] 시리아를 프랑스에 할양하고 터키 남동부지방의 국경선을 정한 협약으로 아직 하타이 지방을 프랑스령으로 남겨놓았지만 이것도 1939년에 돌려받게된다.[5] 트라브존은 본래 동로마 제국 시절부터 그리스계 폰토스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으나 16세기경부터 아르메니아인들이 동쪽에서부터 이주해 상업세력을 형성했고, 폰토스인과 경쟁하고 있었다. 특히 밀레트 제도로 인해 종교 중심의 공동체사회였던 오스만 제국에서 그리스인과 아르메니아인은 같은 기독교인이었지만 종파가 달랐고, 상업에 있어 서로 경쟁하는 상대였기 때문에 서로 적대적이었다. 이 와중에 폰토스인들이 깽판까지 쳐놔서 아르메니아인들도 튀르크인에게 협조해 폰토스인에 대한 보복학살을 했다.[6] 이로 인하여 튀르크인들은 그리스인들은 적이라고 선포하고 나중에 오스만군이 아나톨리아 내부를 탈환하자 미처 달아나지 못한 그리스인들은 마구잡이로 학살당한다. 누레딘 이브라힘이 내린 명령으로 어림잡아도 20만에서 그리스가 주장하기론 90만 가까이 학살당했다. 한편 그 전에 이 그리스인들은 그리스군의 비호 아래 검은 운명 부대가 점령지역에서 튀르크인들과 아르메니아인들을 마구잡이로 학살하던 일에 협조했다. 30~40만에 이르는 튀르크인들과 30만 이상이 넘는 아르메니아인들이 학살당했기에 아르메니아 학살 항목에서도 그리스도 오스만 제국과 같은 가해자로서 언급되었다. 덕분에 그리스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비난하다가 터키에게 늬들이 저지른 아르메니아 학살은 뭐냐며 비웃음 당하기 일쑤다.[7] 끝내 그리스군이 점령하지 못한 이유는, 이미 협상국(주로 영국군)측이 이스탄불을 접수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리스군이 코 앞까지 다가오자 협상국은 '''우리랑 싸울래?''' 라는 무시무시한 협박으로 그리스군을 쫓아냈다.[8] 특히 그리스의 인구가 적어서 열세였던 것도 원인이었다. 이 당시 그리스의 인구는 500만인데 터키의 인구는 1400만으로 터키가 그리스보다 압도적이었다.[9] 이 과정에서 스미르나 대화재를 일으켜 수많은 그리스인 사상자가 발생했다.[10]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 항목을 참고할 것.[11] 오늘날에도 터키의 이슬람은 종교부에 예속되어 있으며 각 모스크에 파견되는 이맘이나 뮤에진들은 전부 정부의 임명을 받아 전국에 배치된다. 다른 이슬람 국가에서는 찾기 힘든 터키만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12] 당시 그리스군이 내린 징집령 또한 종교 구분이 없었기 때문에 아르메니아인이나 유대인, 무슬림까지도 강제로 군대로 끌려가는 일이 벌어졌다.[13] 이 문단 내 모든 증언, 기록들은 빌레직 셰이흐 에데발리 대학교 사학과 조교수 타네르 빌긴(Yrd. Doç. Dr., Taner Bilgin)의 논문 <Savaş Yıllarında Anadolu Rumlarının Yaşadığı İkilem (1919–1922)> 전쟁기간동안의 아나톨리아 룸인들이 겪은 딜레마에서 근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