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메트 이뇌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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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터키 공화국의 총리 겸 2대 대통령. 초대 대통령 아타튀르크 시절엔 그를 보좌한 정권의 2인자였고, 전후론 공화인민당 좌파 세력의 거두로 존재감을 보였다.
2. 생애
이스메트 이뇌뉘는 1884년에 판사였던 아버지 레시트 에펜디(Reşit Efendi)와 어머니 제브리예 테멜리 하늠(Cevriye Temelli Hanım) 부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전근을 거듭했기 때문에 이뇌뉘는 유년시절을 터키 중부의 시바스(Sivas)에서 보냈다. 그의 본관은 말라티아(Malatya)로 쿠르드 혈통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훗날 공화국 초대 총리 재임시절 소수민족에 관한 법을 제정할 것을 아타튀르크에게 요청했지만 아타튀르크는 "터키 공화국에 거주하고 있는 모든 이들은 같은 민족이고, 같은 국민이다. 소수민족과 다수민족으로 구분하는 것은 옳지 않다." 라고 말하며 이를 거부한다.
장성한 이후로는 이스탄불의 군사학교에 진학했는데, 여기서 선배인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를 만나게 된다. 당시 상당히 엄격한 기수문화가 존재하던 군사학교에서 아타튀르크와 이뇌뉘는 서로 죽이 잘 맞는 사이였고, 선후배관계를 떠나 진정한 친구가 된다. 이후로도 계속 서술하겠지만 이뇌뉘와 아타튀르크의 동지애는 이뇌뉘의 일생에 있어 상당히 큰 영향을 끼쳤으며, 아타튀르크의 추천으로 캅카스 전선의 제4군단 사령관으로 진급할 수 있었다.
그는 1909년, 예멘에서 벌어진 반란에 참전했으며 이때 반란진압의 공을 인정받아 소령으로 진급하며, 또한 청년 튀르크당의 혁명 이후 오스만 제국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통일과 진보 위원회(İttihat ve Terakki Cemiyeti)에 가입하게 된다.
제 1차 세계대전 기간 동안 이뇌뉘는 캅카스 전선에서 러시아군에 맞서 싸웠으며, 러시아군의 내륙 진격을 저지하는데 크게 기여한다. 하지만 종전 이후인 1919년에 그는 병가를 내고 이스탄불로 돌아오는데, 이때 파리 강화 회의를 위해 꾸려진 대표단에 무관으로 참여한다. 그리고 회의 결과에 실망한 이뇌뉘는 아타튀르크의 제안을 받아들여 오스만 제국군을 떠나 터키 대국민회의에 참여하고 에디르네 대표 국회의원으로 선출된다.
2.1. 터키 독립전쟁의 영웅
대국민회의에 참가한 이스메트 이뇌뉘는 아나톨리아 서부를 침공한 그리스에 맞서 다시금 군대를 이끈다. 1921년 1월과 4월에 이뇌뉘강 전역에 참전한 그는 장기전을 펼쳐 그리스군의 보급에 타격을 주고, 그리스군의 진격을 저지하는데 혁혁한 공을 세운다. 본인도 자신이 맡은 전투중 가장 자랑스러운 전투로 이뇌뉘 전투를 꼽았으며, 훗날 터키 국회에 의해 성씨사용법이 통과되자, 자신이 분전한 이뇌뉘 강을 따와서 자신의 성으로 쓴다.
이후 1922년 10월 26일, 이스메트 이뇌뉘는 파리 강화회의의 경험 덕분인지는 몰라도, 외교부장관으로 임명되어 스위스 로잔에서 열리는 열강과의 강화회의에 참가한다. 로잔에서 이뇌뉘는 이즈미르와 트라브존을 포함한 그리스의 점령지를 그리스에 할양하라는 열강의 제안에 대해 '''"우리 민족의 완벽한 독립이 아니면, 회의 따위 때려치워라!"''' 및 여의치 않을 경우 터키군이 발칸 전쟁당시 상실한 서트라키아로도 진격할 가능성을 시사하며 초강경대책으로 일관해 시간을 끌었다. 그동안 터키 본토에서는 그리스군을 점령지에서 몰아내고 있었고, 결국 1923년 7월 24일, 연합군과 터키 대국민회의는 오스만 제국이 체결했던 무드로스 정전협약과, 세브르 조약을 대신하는 로잔 조약을 체결해 터키 공화국을 승인한다.[4] 그리고 같은 해 10월 29일에 터키 공화국이 수립되자, 이스메트 이뇌뉘는 대국민회의에 의해 공화국 초대 총리로 선출된다.
2.2. 총리 재임기간
총리 재임기간 동안 이스메트 이뇌뉘는, 대통령 아타튀르크와 더불어 각종 개혁에 동참한다. 1924년엔 민주주의를 위한 다당제의 실험적 실행 정책으로 아타튀르크의 옛 전우들인 휘세인 라우프 오르바이(Hüseyin Rauf Orbay), 알리 푸아트 제베소이(Ali Fuat Cebesoy), 무사 캬즘 카라베키르(Musa Kâzım Karabekir)에 의해 진보공화당(Terakkiperver Cumhuriyet Fırkası)이 수립된다. 허나 진보공화당은 반개혁성향으로 공화인민당의 개혁정책에 발목을 잡게 되고, 때마침 1925년 2월 15일 디야르바크르에서 셰이흐 사이트(Şeyh Said)의 반란을 발생하자 아타튀르크는 계엄령을 발효, 이에 이스메트 이뇌뉘는 스스로 책임을 지고 총리에서 물러난다.[5] 하지만 그의 후임으로 총리에 지명된 알리 펫히 오키아르(Ali Fethi Okyar)가 셰이흐 사이트의 반란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자, 국회는 내각불신임을 내고 다시금 이스메트 이뇌뉘를 총리에 지명한다. 이스메트 이뇌뉘는 셰이흐 사이트의 반란을 진압했으며, 이후로도 아타튀르크의 개혁에 적극 동참, 지원하게 된다.
하지만 1937년, 이뇌뉘는 아타튀르크와 갈등을 빚게 된다. 이뇌뉘는 현재의 개혁이 지나치게 빠르고 강압적이라고 주장했으며, 이에 아타튀르크가 화를 내자 여차저차해서 이뇌뉘는 두번째로 총리에서 물러나게 된다. 하지만 후임 총리로 지명된 젤랄 바야르(Celâl Bayar, 훗날 터키 공화국 제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게 된다.)는 이스메트 이뇌뉘를 옹호하는 입장이었으며, 결국 1938년 11월 10일, 아타튀르크가 이스탄불,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사망하자 터키 국회에 이스메트 이뇌뉘를 차기 대통령으로 지명하도록 지지성명을 내어 그 다음날 이스메트 이뇌뉘가 공화국 제2대 대통령으로 선출되는데 기여한다.
2.3. 대통령 재임기간
이스메트 이뇌뉘의 대통령 재임기간 동안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다. 전통적으로 터키의 우방이었던 독일은 끊임없이 터키의 추축국 참전을 요청했으나 이뇌뉘는 지금은 곤란하다 조금만 기다려달라며 시간을 끌었고,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의 연합국 참전 요청에도 지금은 그럴 시기가 아니오라며 시간을 끌었다. 그러다 1945년 1월에야 뒤늦게 연합국에 참전한다. 그리고 유엔의 수립 당시 창립맴버로 가입하게 된다. 당시 터키의 상황을 이야기하자면 제1차 세계 대전, 터키 독립전쟁, 그리고 세속주의 개혁에 반대하는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발로 인해 군사력이 매우 약화된 상황이었다. 사실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싶어도 참전할 여력이 없었다. 현재 8000만을 넘어서는 터키의 인구가, 1927년 첫 인구조사 당시에는 겨우 1700만에 불과했으며, 이뇌뉘가 대통령에 재임할 당시에도 2500만에 불과한 상황이었다.
이스메트 이뇌뉘의 또 다른 족적은 전후 냉전에서 자유진영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본인의 정치성향은 사회주의에 가까웠으며 아타튀르크 부터 시작해 초기 공화국의 경제정책은 사회주의적 계획경제 및 국유화 정책을 담지하고 있었으나 그는 외교에 있어 철저히 실리를 따졌다.
이스메트 이뇌뉘의 대통령 재임기간에도 개혁은 계속되었다. 오히려 이뇌뉘는 아타튀르크보다 더욱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이뇌뉘는 개인적으로는 항상 자그마한 코란을 지니고 다니던 독실한 무슬림이었으나 이슬람에 대해서는 철저한 세속화 정책을 강요하고 초대 총리 재임당시 불발되었던 다당제를 실행해 진정한 의미의 유럽화를 이루고자 했다. 결국 1946년에 부활한 다당제에 의해 젤랄 바야르 등 일부 공화인민당원들이 민주당(Demokrat Parti)을 세우는것도 승인했으며, 바로 이 민주당에 의해 1950년 5월 14일에 치러진 첫 자유총선에서 공화인민당이 철저하게 패함으로써 27년간의 공화인민당 일당체제를 마무리하게 된다. 이에 군부는 이뇌뉘 대통령에게 쿠데타를 일으키자고 종용했지만, 이뇌뉘는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순순히 권좌에서 내려왔다.
2.4. 야당지도자 시절
대통령에서 물러난 이스메트 이뇌뉘는 대통령 재임 당시 부여받은 공화인민당 종신 대표로써 야당활동을 했으며 6.25 전쟁 당시 한국에 터키군을 파병하는 일에 대해 '''"조국의 자녀들을 타지에서 죽음으로 몰아넣는데에 무슨 국익이 있단 말이오?"'''라며 당시 총리인 아드난 멘데레스의 정책에 반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아드난 멘데레스의 "나는 이 민족을 위해서라면 3명의 아들을 전선으로 보내는데에 단 3초도 망설이지 않을 것이오!" 라고 말하자 그를 인정하기도 했다. 야당 시절 당시 이뇌뉘와 멘데레스는 아타튀르크 이후 터키어로 하게 하던 아잔[6] 을 다시 아랍어로 되돌리는 안건부터 시작해서 사사건건 갈등을 벌여왔으며 서로를 권위주의적 술탄과 민주주의를 팔아먹는 포퓰리스트라고 비난했으나 이 6.25 전쟁의 건 만큼은 서로가 동의한 안건이기도 했다.
한편 멘데레스 내각은 경제정책에 있어 완전히 실패하고 있었다. 무분별한 외국상품 도입과 계획경제를 해체하는 과정에서의 부패로 인해 멘데레스 내각은 파산을 선언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공화인민당의 급진적인 개혁에 피로를 느끼고 반발해왔던 농촌의 지지자들을 기반으로 1954년에 실시된 총선에서 승리하고 이스메트 이뇌뉘의 공화인민당을 비롯한 지식인, 군인들의 비판에 맞닿은 멘데레스는 모든 언론에 대한 검열을 강화, 선거를 조작, 자기 지지층인 농민들에게 선심성 정책을 던져주는 등의 독재로 입막음하고 있었다.
2.5. 쿠데타와 더불어 돌아오다
결국 1960년, 한국의 4.19혁명의 영향을 받은 젊은 대학생들이 "자유언론"을 주장하며, 멘데레스를 규탄하자[7] 군부도 멘데레스 내각에 대해 친이슬람정책과 반개혁정책을 규탄하며 쿠데타를 예고한다. 종국에는 5월 27일에 제말 귀르셀(Cemal Gürsel) 장군을 중심으로 멘데레스 정권을 뒤집는 터키 공화국 역사상 첫 쿠데타를 벌여 정권을 장악하고, 군부는 이스메트 이뇌뉘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앉힌다. 그리고 이듬해에 군부의 비상대책위원회가 해산되고 열린 총선거에서 다시 이스메트 이뇌뉘는 당선되어 총리로 복귀하게 된다.
하지만 총리 복귀 이후 이스메트 이뇌뉘 내각은 연립내각이라는 치명적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65년, 제3차 내각은 아예 집권내각이 다수를 차지하지 못한 총체적 난관에 부딪쳤는데, 이때 이스메트 이뇌뉘는 뷜렌트 에제비트(Bülent Ecevit)를 등용해 공화인민당의 레프트 라이트를 켠다. 하지만 결국 연립내각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1965년에 정의당(Adalet Partisi)에 총리직을 내주고 세번째로 총리직에서 물러나게 된다.
한편 이스메트 이뇌뉘는 1960년 쿠데타 정부에 의해 정치활동이 종신금지된 구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의 복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비록 정적이었지만 그는 1969년에 젤랄 바야르 전 대통령과 오랜만에 만남을 갖고, 젤랄 바야르의 구 민주당 소속 정치인들의 정치활동금지령 폐지를 위한 활동에 지지를 표하고 이뇌뉘의 전폭적인 지지아래 헌법재판소에서 위헌판결을 받아냄으로써 젤랄 바야르와 구 민주당 정치인들은 정계로 돌아올 수 있었다. 비록 1970년대에 이뇌뉘와 바야르는 각각 좌파와 우파의 수장으로써 서로 대립하게 되지만, 본인의 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정계로 돌아올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지를 했다는 점에서 이뇌뉘를 높이 평가할 수 있다.
2.6. 2차 쿠데타
1971년, 터키정국은 좌파와 우파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었다. 이스메트 이뇌뉘는 총리에서 물러나고, 다시 야당생활을 시작하지만 공화인민당 종신대표로서 좌파의 거장을 맡고 있었다. 당시 대학가는 좌파와 우파 운동권이 캠퍼스에서 총질을 하는 막장 상황이 연출되기도 했는데[8] 이에 군부가 고만해 미친놈들아 식으로 다시 정치에 개입한다.
이때 이스메트 이뇌뉘는 군부를 지지함으로써 뷜렌트 에제비트와 갈등을 빚게 된다. 결국 연로한 나이로 인해 공화인민당 당수에서 물러나면서 뷜렌트 에제비트를 버리고, 자신이 지지하는 후보를 지명해 놓았으나 당선거에서 뷜렌트 에제비트가 승리하자, 결국 그에게 공화인민당 당수 자리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이뇌뉘는 1973년에 앙카라에서 사망했으며, 평생의 동지였던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무덤인 아느트카비르(Anıtkabir)에 묻힌다.
3. 평가
이뇌뉘는 유럽의 환자로 골골거리며 점차 서구에 의해 이권이 침탈되던 오스만 제국 말기에 태어나 평생의 동지였던 아타튀르크와 함께 공화국을 수립하고 터키의 근대화를 위해 노력했다고 평가받는다. 기본적으로 이뇌뉘는 공화국 수립 초창기부터 다당제의 실행이 진정한 민주공화국의 원칙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래서 1924년 진보공화당 사건부터 1946년 자신의 권력을 잃게 된 계기인 다당제 개혁까지 모두 이뇌뉘의 아이디어에서 비롯되었으며, 자기 스스로 열어놓은 다당제와 자유선거로 권력을 잃게 되었을 때에도 자신은 기꺼이 결과를 수락하고 멘데레스 내각 10년 동안 야당 활동을 하기도 했다.
허나 이렇게 터키의 세속화와 민주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과적으론 아이러니하게도 이슬람 근본주의자들 좋은 일만 시켜줬다는 평도 받는다. 뭔 소린가 하면 서구권에 비해 근대화 인식이 뒤떨어지던, 심지어 근대화에 대한 반감마저 가지고 있던 당시의 이슬람권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다는 것이다. 이뇌뉘와 공화인민당은 '''오스만 제국의 몰락이 이슬람 광신으로 인하여 근대화에 뒤쳐졌기 때문'''이라고 여겼으며, 그 때문에 공화국 초기부터 '''무지몽매하고 미신에 사로잡히기 쉬운 민중'''들을 강제적으로라도 깨우쳐야한다고 보았다. 아타튀르크 시기의 모자법, 문자혁명(Harf inkılâbı), 여성참정권 보장 등의 일련의 급진적인 개혁들은 우선 민중들의 옷부터 바꾸고, 학교에 보내 글을 읽고 쓰게 하고, 민주주의와 근대적 사상들을 학습하게 하여, 터키를 문명국의 반열로 올려놓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아타튀르크 본인도 1933년 공화국 수립 10주년 연설에서 개혁의 결과를 평가하며 10년만에 터키 공화국은 유럽 문명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게 되었다고 보았다.
하지만 아타튀르크와 이뇌뉘의 개혁은 반대로 '''글자를 알고, 학교를 나온''' 민중들이 보다 쉽게 이슬람주의와 반세속주의에 빠질 수 있는(...) 위험성도 가지고 있었다. 급진적인 개혁과 이슬람에 대한 제재정책에 보수주의 학자들이 반발하고 나섰고, 이들이 민중들 속에 들어가 반세속주의를 홍보하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인 이슬람식 교육은 쿠란을 읽고 쓰는 법으로 시작해서, 모스크에서 금요일날 하는 예배에서의 설교를 통해 이루어지고 이슬람적 가치관이 재생산되는데, 반세속주의적인 학자들은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한 "쿠란 서당"을 열어 반 세속주의 의식을 어렸을 때부터 불어넣었다.[9] 이뇌뉘 정권 시기에는 심지어 이슬람 종교의식을 무조건 터키어로 하게 강요했는데, 이 또한 보수주의자들의 반발을 초래할 뿐만 아니라, 터키어로 번역된 쿠란과 기도서를 가지고 더더욱 민중들에게 이슬람주의가 파고들 수 있는 양날의 검이 되었다.
세속주의자들은 이슬람을 넘어서기 위해 국가조직과 저 멀리 거슬러 올라가면 파나리오테스부터 시작해 탄지마트 개혁시기 이후 오래된 서구화의 역사를 갖춘 전통적인 엘리트 계급을 이용했지만, 이슬람주의자들은 민중으로 맞섰다. 이뇌뉘의 개혁은 결국 민중에 의한 자유선거로 자유당의 아드난 멘데레스가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막을 내렸고, 멘데레스 시기도 공화국 개혁 자체는 계속 유지되었으나, 아타튀르크, 이뇌뉘 시대의 종교억압정책 상당수는 취소되었다. 그리고 이에 반발한 군부가 1960년에 쿠데타를 벌여 멘데레스를 축출하고 끝내 처형시켰을 때, 이뇌뉘는 다시 총리로 돌아와 2차 집권을 시작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이미 돌릴 수 없게 되었다. 오늘날 자유와 민주주의의 이름으로 과거 아타튀르크, 이뇌뉘 시대의 세속주의 흔적을 지우려 하는 에르도안의 출현은 이미 이 시대부터 예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허나 역사에 만약이란 없는 것이고 그렇다면 어떻게 했어야 하는가를 생각해본다면 그것도 만만찮은 문제긴 하다.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준다는 나라에서 극단주의자 찾자고 종교 탄압을 대놓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
4. 여담
터키 리라화에 아주 잠깐 동안 그의 얼굴이 도안으로 쓰인적이 있었다. 초기에는 화폐법상 현직 대통령의 초상을 디자인으로 쓰도록 되어있었기 때문에 이뇌뉘의 초상이 쓰일 수 있었으나, 국민들의 반발로 인해 2년만에 아타튀르크로 복귀하게 된다. 그리고 아타튀르크의 초상이 현재까지 터키 리라화의 고정인물이 된 것도 이뇌뉘 시절의 일이다. 참고로 이뇌뉘 초상이 들어간 지폐 및 주화는 불과 몇년 발행되다 말았기 때문에 상당히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더군다나 25쿠루쉬, 50쿠루쉬, 1리라짜리 주화는 은화다.
쿵쿵따 놀이에서 -이 가 붙을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 반격기이기도 하다. 파워쿵쿵따에서는 뉘앙스라는 단어가 지원되지 않는데 이를 인지하지 못하고 뉘앙스로 반격을 하려다가 실패를 하고 그 라운드에서 패배를 하는 이용자가 종종있다.
터키에서 도시계획을 세울때 도시 중심의 대로 이름은 아타튀르크 대로라고 이름 붙이고 그 대로와 교차하는 또 다른 대로는 이스메트 이뇌뉘 대로라고 붙이는 관행이 있다. 법령으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코 밑에만 콧수염을 길렀는데, 그래서인지 터키에서는 이 칫솔수염을 이뇌뉘 콧수염(İnönü bıyığı)이라고 부른다.
[1] 성씨사용법이 통과되고 나서 직접 지은 성으로 터키 독립전쟁당시 자신이 분전했던 전장인 이뇌뉘 강 전선의 이름을 따왔다.[2] Vilayet-i Aydın, 옛 오스만 제국의 행정구역 중 하나로 현재는 아이든, 이즈미르, 무을라, 발르케시르, 마니사로 분리되어 있다.[3] 메브히데 이뇌뉘는 1897년에 이스탄불에서 태어나서 1992년 앙카라에서 별세할때까지 살았다. 부부가 모두 장수했다.[4] 이 조약으로 터키는 현재의 영토들을 지켜낼 수 있었지만, 양보한 사항도 적지 않다. 현재 에르도안 정부가 지적하고 있는 로잔 조약의 독소조항으로는 1. 모술의 할양, 2. 조약체결 이후 100년간 보스포로스 해협의 국제수역화, 3. 조약체결 이후 100년간 터키영토 내에서의 유정개발 금지를 들고 있다. 모술 지방의 경우 민족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쿠르드족과 튀르크계 유목민족인 튀르크멘인의 고유영토임을 들어 터키의 고유영토임을 열강으로부터 인정받았으나, 당시 매우 낙후된 지역이었고 지속적으로 북상하는 아랍계와 끊임없이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에 내란 발발의 우려로 터키측에서 포기한 땅이다. [5] 이때 터키 공화국 최초의 야당인 진보공화당도 해산된다. 이후 터키에서 다당제는 이뇌뉘가 대통령으로 재임하던 1946년에야 부활하게 된다. 그리고 그 직후 자기가 열어놓은 다당제에 의해 공화인민당이 야당으로 전락하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된다.[6] 이슬람교에서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한 소리.[7] 당시 대학생들의 구호중에는 "한국의 청년들을 기억하라!"도 있었다.[8] 때문에 현재에도 터키에서는 대학 캠퍼스에 출입하기 위해 무조건 학생증을 제시해야 하며(만약 학교와 별 관련없는 외국인이 들어오면 여권을 맡겨야하는 학교도 일부 존재한다), 국립대학의 경우 학내에서 집회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고 있다. 터키에서 캠퍼스 생활하면서 가장 적응되지 않는게, 한국 대학과 달리 그 흔한 대자보도 없다. (대신 벽이나 창문에 A4용지 사이즈에 글귀나 선전을 붙여놓는데 이게 대자보 역할을 대신한다. 물론 불법...) 이게 다 모두 이 시절의 유산이다.[9] 페툴라 귈렌을 비롯한 반세속주의적이나 개혁주의적인 이슬람 학자들이 사립학교나 학원으로 교육활동을 했던 맥락도 이와 같다. 귈렌도 아타튀르크, 이뇌뉘 시기 반세속주의 학자였던 사이드 누르시의 제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