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후(기원전 7세기)

 


'''고조선 ?대 단군'''
'''朝鮮侯 | 조선후'''
'''시호'''
미상
'''왕호'''
조선후(朝鮮侯) / 단군(檀君)
'''성'''
기(箕) / 한(韓)[1]
'''휘'''
미상
'''생몰'''
? ~ ?
'''재위'''
? ~ ?
'''활동'''
기원전 7세기 경

桓公曰 四夷不服 恐其逆政 游於天下 而傷寡人 寡人之行 爲此有道乎。 管子對曰 吳越不朝 珠象而以爲幣乎。發·朝鮮不朝 請文皮毤【他臥切 落毛也。】服而以爲幣乎。 … (중략) … 一豹之皮 容金而金也 然後八千里之'''發朝鮮'''可得而朝也。 … (중략) … 故物無主 事無接 遠近無以相因 則四夷不得而朝矣。

(제나라) 환공이 말하기를, "사방의 오랑캐가 복종하지 않아, 천하를 거스르는 정치를 하여 과인이 해를 입을까 두렵다. 과인의 행함에 길이 있는가?" 관자가 대답하여 말하기를, "오나라월나라가 입조하지 않으면, (그들의) 구슬과 상아를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발조선'''이 입조하지 않으면, 무늬있는 털가죽【발음은 타(他)와 와(臥)의 반절이다. 낙모(落毛)를 말한다.】과 옷을 청하여 보물로 대우해 주십시오. … (중략) … 하나의 표범 가죽을 값지게 받아들여 준 후에야 8000리 밖의 '''발조선'''에게서 입조를 받을 수 있습니다. … (중략) … 물건에 주재하는 바가 없고, 일에 접하는 바가 없고, 멀고 가까운 곳이 서로 관계하는 바가 없으면, 사방의 오랑캐가 입조하지 않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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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자』 경중 갑 편}}}

侯準旣僭號稱王, … (중략) … 魏略曰: 昔箕子之後'''朝鮮侯''', 見周衰, 燕自尊爲王, 欲東略地, '''朝鮮侯亦自稱爲王''' (후략)

(조선)후 준이 참람되이 왕이라 칭했다가 … (중략) … 위략에 이르기를, 옛 기자의 후예인 '''조선후'''는 주가 쇠하자 연이 스스로 왕을 칭하고 동쪽을 침략하려는 것을 보고, 조선후도 역시 스스로 왕을 칭하고, (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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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전}}}
기자 이후의 고조선 군주로 기자조선설을 따르면 기자의 후손이며 조선후(朝鮮侯)의 지위에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에는 기자조선설이 부정되므로 토착 고조선의 기원전 7세기 경에 재위했던 고조선 군주(단군[2])로 추정되고, 후라는 호칭도 기자가 조선을 분봉받아 조선지역의 제후가 되면서 칭한 것이 아니라 조선이 당대(기원전 7세기 이후) 독립국 군주의 호칭 중 하나였던 것을 스스로 칭한 것으로 여겨진다. 언제 후를 호칭으로 칭했는지는 불명이나 중국과의 교역이 있어야 하고, 후라는 호칭이 독립국의 군주호칭이어야 하며, 고조선 입장에서 중국문명이 강성함을 깨달아 그 호칭이 받아들일만한 것이라고 여겼어야 하므로 적어도 희미하게나마 조선의 정체가 알려진 기원전 7세기 이전까지 올라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춘추시대~전국초기에 이르면 멸망 후 동천한 주나라의 권력과 권위가 약해지면서 각 제후국들이 슬슬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모습을 바꾸고 독립국으로 면모를 일신하게 되는데 기원전 7세기경 중국에 알려졌던 조선이라는 고대국가의 지배자도 중국과의 교역 관계를 통해 춘추~전국 초기의 각국 군주를 일컫는 호칭 중 하나인 후(侯)를 사용했을 것이라 보는 것이다. 이 당시만 해도 황하 중심 중국 문명권과 거리가 있었던 초, 오, 월 등의 장강 유역 국가들을 제외하면 각국의 군주들은 공(公)이나 후를 칭했다.
이후 전국시대에 접어들면서 존왕이라는 대의마저 허울뿐인 것임이 명백해지자 여러 나라들이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 이것을 조선도 받아들여 후에서 왕으로 호칭을 바꾼 것으로 보인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서 위략을 인용한 바에 따르면 전국칠웅 국가인 연이 왕을 칭할 때인 역왕(易王) 무렵 조선도 왕을 칭했다고 되어 있다. 전국시대 국가 중 가장 동쪽에 있어 조선과 제일 활발히 교역하였을 연이 칠웅국 중 마지막으로 왕을 칭하자 그것이 조선에도 파급된 것이다. 당시 왕은 주나라 천자만을 일컬었던 호칭으로, 한나라 이후의 황제와 같은 의미이다. 즉 이 때 전국 칠웅국과 조선이 왕을 칭한 것은 한나라 이후 베트남 군주들 및 일부 한국의 군주들이 내부적으로 황제를 칭한 것과 같은 의미라고 생각하면 된다.
관자(管子)에서 기원전 7세기 초기에 제(濟)와 발조선(發朝鮮)이 교역했다고 한다. 고조선이 최초로 문헌에서 언급되는 시기이며 이 시기의 고조선 군주는 제나라의 환공(桓公)과 활동 기간이 겹친다. 문헌에서 고조선 군주가 직접 언급되지는 않고 교역을 했다는 사실만 간략히 언급된다. 물론 『관자』는 기원전 7세기 경 실존인물 관자의 저술이라고 보지는 않고 그 이후에 관자의 이름을 빌려 저술된 것으로 보지만, 그 내용에는 기원전 7세기의 사실이 반영되어 있을 것이라고 본다. 다만 기원전 7세기에 과연 고대국가로서 조선이 존재했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의견이 분분하여 단지 종족명이나 지역명이었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시기 유물[3] 및 사료가 워낙 적어 정설이 존재하지 않는 상황. 정말 사료가 없다. 이 문단 앞에서 언급된 발조선이 한 단어인지, 발과 조선을 각각 칭한 것인지 조차 의견이 분분한 상황에서 언제 후라는 호칭을 칭했고 군주의 휘가 무엇이고 할게 남아있지 않다.
청주 한씨 족보와 속기자지에 기록된 기자조선의 왕계보도[4]에 따르면 이 당시 고조선(기자조선) 군주의 시호는 효종왕(孝宗王)[5][6] 휘는 존(存)이라고 하는데 '''근거는 전무하다'''. 한편 20세기 초에는 이와 같은 기자조선의 왕계보도가 일부는 역사로서 수용되기도 했는지 대한제국 시기의 여러 역사 교과서[7]에 효종왕과 효종왕의 치세에 대한 기록[8][9]이 수록되기도 하였다.
[1] 다만 당시에 성씨가 존재했을 가능성 자체가 없다. 기씨나 한씨로 표현하는 것은 대개 후대에 족보를 만들거나 유교적 관점에서 제사를 지내기 위해 가져다 붙였을 것이다. 특히 기자조선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도 하는 마당에 기씨를 쓰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할 수 있으나, 다양한 의견을 존중하기로 한다.[2] 다만 단군이라는 단어가 가장 처음으로 등장한 때는 삼국유사가 최초로, 단정적으로 당시 고조선의 군주가 단군을 군주의 호칭으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은 추정상 무리가 많다. 당대의 사서가 소실되어 남아있지 않다는게 크지만[3] 청동기는 다수 나와도 국가 형성의 단계라고 확정지을만한 도시 유적이나 왕궁 유적이 요동~한반도 서북부 평안도 지방에서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는다.[4] 후대의 숭조작업으로 왜곡되어진 것으로 현재 사학계에서는 '''역사적으로 가치를 두지 않는다.'''[5] 고조선 군주가 처음 칭왕한것은 300년 뒤의 기원전 4세기의 조선후때부터 이기에 기원전 7세기의 고조선 군주가 왕을 칭했을리는 전무하다.[6] 속기자지와 청주한씨 족보에 따르면 효종왕의 재위 기간은 기원전 675년~기원전 658년으로 제환공의 재위 기간에 전부 포함되며 효종왕의 제나라 관련 기록으로 보아 제나라,노나라와 교역했다는 선대 군주인 정경왕(貞敬王) 궐(闕)과 함께 기원전 7세기 발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했다는 관자의 기록이 투영되어진 것으로 추측된다.[7] 대표적으로 1906년 발행된 중등 역사 교과서인 동국사략과 독립운동가 황의돈이 저술한 대동청사가 있다.[8] 효종왕(孝宗王) 존(存)은 선우익(鮮于益)을 제나라에 보내어, 환공(桓公) 강소백(姜小白)의 정치를 관찰하여 범장률(犯贓律)을 제정하였다. 제나라에서 보낸 사신 공손각(公孫恪)을 후하게 예우하였고, 선비(鮮卑) 서백리(西伯里)의 추장, 길리도두(吉利都頭)에게 상을 주었다.[9] 1906년 출간된 역사 교과서인 동국사략에 수록된 효장왕의 기록으로 기원전 7세기 고조선이 제나라와 교역했다는 기록을 과장시킨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