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나라
[clearfix]
1. 개요
중국 춘추시대의 나라. 춘추시대의 양쯔강 하류에 존재하던 나라로 오(吳)나라보다도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2] 주 왕조로부터 자작의 작위를 받았다. 물론 말이 작위를 하사한 것이지 실질적으로 놀리는 것에 가까운데, 이 시기의 자작 작위는 제후가 아니라, '''제후의 신하'''에게 주는 작위였다.[3] . 수도는 회계.
왕성(王姓)은 사(姒)[4] 였는데 33대 왕인 부담(夫譚) 이후는 확실히 미(羋姓)[5] 이다. 하나라 6대 왕의 서자 무여(無餘)가 봉해진 나라이다.
1대 왕인 무여, 무여의 10여 대 후손인 무임(無壬), 무임의 아들인 무심(無瞫) 이후 33대 왕인 부담까지 기록이 없고, 왕성이 바뀐 것으로 보아 무심과 부담 사이에서 왕실 혈통이 바뀐 것으로 보인다.
2. 역사
2.1. 춘추시대
《사기》 〈월구천세가〉에 의하면 하나라 6대 왕이었던 소강의 서자 무여(無餘)가 회계에 있던 하나라 시조 우의 무덤 제사를 맡기 위하여 봉해졌다고 한다. 물론 근거는 없으며 기록의 결손으로 그들이 춘추 시대에 어떠했는지 알 수 없으나[6] , 오나라(吳)처럼 왕호를 사용하였으며 춘추시대 후기의 윤상 대에 이르러부터 그 기록이 남아있다. 북진 정책을 펼쳐 인접국인 오나라에게 대항하지만 크게 대패하여 해마다 조공을 바칠 정도였다.
윤상의 아들 구천 대에 이르러서는 이를 벗어나기 위해 초나라의 지원을 받아[7] 부국 강병을 시행하며 오나라가 북진 정책을 한 틈을 노려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수도를 낭야[8] 로 옮겼다. 이로 인해 월나라는 산동 반도 일대[9] 를 제압하여 그곳에 있던 등(鄧), 담(郯)과 같은 약소국들을 멸망시키고 본거지인 소흥[10][11] 과의 해상 교통로를 확보함으로써, 상업과 수공업을 기반으로 발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월나라는 월왕 구천의 노력으로 춘추시대의 마지막 패자로서 위엄을 떨치게 된다.
2.2. 전국시대
그러나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면서 패자로서 위엄을 떨치는 동안 점차 세력을 회복한 초(楚)의 압박을 받아[12][13] 수도를 장강 이북인 낭야에서 장강 남쪽에 있는 고소 땅으로 옮기면서[14] 해상 교통로를 포기하게 되고, 그때부터 쇠퇴하기 시작하여 제후들이 각자 자립하는 형태로 지내게 된다. 거기에 왕족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다투면서 그나마도 초나라에게 뒤지는 국력을 까먹으면서 점점 멸망의 길로 가게 된다.[15][16]
월왕 무전대에 이르러 그나마도 고소 땅에서 월나라의 원래 근거지인 회계 땅으로 천도하는 등 안습함은 계속된다.
월왕 무전의 동생인 월왕 무강은 초나라와 싸우기 위해 국력을 회복하려 했지만 초나라 위왕의 원정으로 점차 복속되다가 기원전 300년대에 멸망한다.[17]
그래도 월나라의 후손 국가인[18] 민월과 동월이 한무제 때까지 존속하기는 했다.[19]
3. 역대 군주
- 1대 : 월자 무여(越子無餘)
- (군주 미상)
- 11대 : 월자 무임(越子無壬)
- 12대 : 월자 무심(越子無瞫)
- (군주 미상)
- 33대 : 월자 부담(越子夫譚): 기원전 564년 ~ 기원전 538년
- 34대 : 월자 윤상(越子允常): 기원전 537년 ~ 기원전 497년, 부담의 아들.
- 35대 : 월왕 구천(越王勾踐): 기원전 496년 ~ 기원전 464년, 윤상의 아들.
- 36대 : 월왕 녹영(越王鹿郢): 기원전 463년 ~ 기원전 458년, 구천의 아들.
- 37대 : 월왕 불수(越王不壽): 기원전 457년 ~ 기원전 448년, 녹영의 아들.
- 38대 : 월왕 주구(越王朱勾): 기원전 447년 ~ 기원전 411년, 불수의 아들.
- 39대 : 월왕 예(越王翳): 기원전 410년 ~ 기원전 375년, 주구의 아들.
- 40대 : 월왕 제구(越王諸咎): 기원전 375년, 예의 아들.
- 41대 : 월왕 착지(越王錯枝): 기원전 374년 ~ 기원전 373년, 제구의 아들.
- 42대 : 월왕 무여(越王無余): 기원전 372년 ~ 기원전 361년, 착지의 친척.
- 43대 : 월왕 무전(越王無顓): 기원전 360년 ~ 기원전 343년.
- 44대 : 월왕 무강(越王無彊): 기원전 342년 ~ 기원전 306년, 무전의 동생.
4. 기타
- 오나라와는 역사적인 라이벌 관계로 오월동주(吳越同舟)라는 고사가 유명하다. 서로 원수지간이면서도 어떤 목적을 위하여는 부득이 협력을 하는 상태를 말하는 것.
- 중국 4대 미녀 서시가 월나라 출신이라고 전해진다.
- "월(越)"은 월나라 뿐 만 아니라 고대 중국에서 장강 이남의 여러 남방 민족들을 뭉뚱그려 지칭했던 말이기도 하다.[20] 대표적인 예로 춘추시대의 우월(于越), 전국시대의 양월(揚越), 한나라 때의 구월(瓯越) · 민월(闽越) · 남월(南越) · 낙월(駱越), 삼국시대의 산월(山越) 등이 있으며, 지금의 좡족(壯族) · 다이족(傣族) · 리족(黎族) · 둥족(侗族) · 수이족(水族) · 무로족(仫佬族)과 일부 대만 원주민들이 그 후예로 여겨진다. 이들 대다수는 현재 한족으로 동화되었다. 남송 이후 한족이 강남 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면서 베트남(월남)과 관련된 기록 및 중국의 지방을 나타내는 명칭을 제외하고는 더 이상 민족명으로서의 "월(越)"이란 이름은 나타나지 않는다.
- 여담으로 사기를 비롯한 중국 역사서를 보면 월인들은 피부색이 상당히 검고 키도 작으며 얼굴은 짧고 코는 낮고 널찍하며 눈이 큼직하다는 등의 서술이 있는데 이로 미루워 짐작했을 때 말레이인을 비롯한 오스트로네시아인 같은 동남아시아들과 연관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확히 말하자면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의 본향은 중국 남부[21] 와 타이완이며 베트남인을 비롯한 오스트로아시아인들이나[22] 태국인, 미얀마의 버마족들도 이 시절에는 중국에 거주했었다. 물론 중국 남부에 살던 오스트로네시아인들이나 오스트로아시아인 계통의 종족들은 한나라와 삼국시대, 남북조 시대를 거치면서 한족들과의 통혼이 이루워지며 대부분이 한족에 동화되었지만 그래도 중국 북부와 중원, 남부 사람들의 생김새는 어느 정도 차이가 있는 편이다.
- 현재 베트남(월남)의 국명에도 월(越, 베트남어 : Viet)이라는 글자가 들어가지만 본 문서의 월나라와 직접적인 관련은 없다. 월나라와 동족 국가인 민월과 동월이 지금의 절강성과 복건성에 위치했고[23] , 베트남의 기원이 되는 남월(南越)[24] 은 지금의 광동성, 광서성, 북베트남 일대에 근거했다. 월나라에서 썼던 고월어가 오스트로아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로 추정되고있기에 언어적으로는 어느정도 관계는 있다고 추정되지만 애초부터 전한대 이전까지는 같은 나라로 묶인적이 한번도 없기에 같은 종족은 아니다.
- 몇몇 베트남 민족주의자들은 월나라가 베트남인들이 세운 나라며 구천, 서시 등도 베트남인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중국에게 빼앗긴 양자강 이남의 옛 베트남 영토들을 모조리 되찾아야 한다는 주장를 하기도 한다. 왠지 이 분들을 떠오르게 하는 행보인 듯..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5. 관련 문서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음은 /*ɢʷat/. 현대 발음은 yuè. 원래는 나라·민족 이름 한정으로 越(넘을 월) 대신 粤(어조사 월)로 써도 됐었지만, 지금은 용법이 구분되고 있다. 오늘날 춘추 시대 월나라는 越로 고정해서 쓰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또 베트남을 뜻하는 남월(南越) / 대구월(大瞿越) / 대월(大越) / 월남(越南) 등에 있는 '월'은 越로 고정해서 쓴다. 오늘날의 광동성을 가리킬 때는 粤로 고정해서 쓴다. 예를 들면 광동어는 粤語(월어)라고 쓴다.[2] 오나라는 오늘날의 장쑤성 일대에 위치했었고 월나라는 그보다 더 아래인 오늘날의 저장성 일대에 위치했다.[3] 하지만, 이 나라는 한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다보니 대놓고 푸대접을 받은 거고, 월나라같은 이민족계의 강대국들이 당대의 중화권 정세에 개입해서 내정간섭을 하려면 이런 불이익은 울며 겨자먹기로 감수하는 수 밖에 없었다. '구정의 무게를 묻는다'(=천하의 패권을 탐낸다)는 말을 해서 주나라와 여러 제후국들을 패닉에 빠뜨렸던 초나라도 똑같이 자작을 칭했던 것이 그 예다.[4] 하나라 우왕의 후손이 썼던 성[5] 축융의 후손이 썼던 성[6] 오나라는 조작인지 사실인지 불확실해도 역대 군주에 대한 기록이라도 모두 남아 있지만, 월나라는 1대 무여, 11대 무임, 12대 무역, 32대 부담을 제외하면 역사에 본격적으로 월나라가 등장하는 33대 윤상 이전의 왕에 대한 기록이 아예 없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 그나마 중원에 붙어있던 초나라나 오나라도 중원의 국가들에게 따돌림을 당했는데 야만족의 땅이라 여겨지던 월나라가 주목을 받았을 리가 없다.[7] 초나라 입장에서는 월나라를 빌어 오나라를 멸망시키거나 못해도 약화시키고 그 동안 초나라는 내실을 다지려는 속셈으로 도와준 것이었다.[8] 산동 반도에 위치한 도시로 그야말로 영토 최북단에 위치한 국경 지대였다. 수도로는 적합하지 않은 입지지만, 일부러 수도를 전방으로 옮겨 국경지역의 군권을 장악하고 팽창을 추진하는 정책은 역사상 종종 있는 일이다. 애당초 장안이라든지 베이징 또한 상당히 국경지대에 치우친 도읍이고 현대에도 파키스탄이 굳이 인구 2300만의 대도시이자 안정적인 옛 수도인 카라치를 놔두고, 분쟁지역인 카슈미르의 턱밑인 이슬라마바드로 이전한다든지 하는 사례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아무래도 아직 개발이 덜 되고 부양력이 부족했던 월나라 본토보다는 중원 한복판이 물자의 풍부함으로나 문화적 수혜로나 유리했을지 모른다.[9] 전국시대의 제나라의 본거지[10] 오늘날의 저장 성의 샤오싱[11] 당시에는 회계(會稽)라고 불렸다. 삼국지에서 왕랑이 다스렸던 그 회계가 맞다.[12] 초나라 입장에서는 원수같은 강국인 오나라가 멸망하자 월나라를 지원해 줄 가치가 떨어져 지원을 끊었다.뿐만 아니라 오나라보다도 부족국가에 가까운 한계를 지닌 월나라가 오나라와의 흥망을 건 전쟁을 하는 동안 초나라는 국력을 다질 수 있었다.[13] 월나라는 구천 이후 그를 능가하는 군주는 커녕 버금가는 군주조차 나오지 못했으며, 부족국가의 한계를 끝내 벗어나지 못해 인재풀이 초나라는 커녕 오나라에도 미치지 못했으므로 서서히 멸망해가는 시한부 국가로 전락한다.[14] 월왕 예대에 고소 땅으로 옮긴다.[15] 월왕 불수가 아들인 월왕 주구에게 죽은 일이나 월왕 예가 그 아들 월왕 제구에게 죽은 일, 또 제구의 아들 착지가 제구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다가 대부 사구의 추대를 받은 친척 무여에게 내쫓기거나 그 무여도 대부 사구의 동생의 손에 죽어 그 아들 월왕 무전이 왕위에 오르는 등 지극히 불안정한 시기를 보냈다.[16] 왕권이 불안정해서 생긴 일이다. 고구려 장수왕의 압박으로 개로왕이 죽고 웅진으로 천도한 백제가 왕권이 약해 툭하면 암살당한 일을 보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17] 멸망 시기는 사료마다 다르다. 사마천의 《사기》에는 기원전 334년.[18] 월나라 왕족이 세운 나라가 아니라 민족 구성원이 월나라와 비슷하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중국 남부 지역에서 중국티베트어족계 언어는 별로 쓰이지 않았고 몽몐어족이나 오스트로아시아어족, 타이카다이어족, 오스트로네시아어족 등 동남아에서 쓰이는 계통의 언어가 널리 쓰였다고 추정된다.[19] 흔히 알려져있는 사실과는 다르게 장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한족의 활동 영역이 된 것은 동진 시대이다.[20] 종족과 분포가 다양해 백월(百越)이라고도 불렸는데, 그 만큼 각 종족들끼리 언어도 달랐다. 2016년 현재도 대만에 오스트로네시아어족계열의 언어를 쓰는 원주민들이 현존해 있고, 중국 내에서도 오스트로아시아어족이나 타이카다이어족, 몽옌어족계 언어를 쓰는 민족들이 현존해 있는데, 한족으로 동화되지 않은 이들이 많았던 당시야 어떻겠는가.[21] 양쯔강 하구에 살았다고도 추정된다.[22] 다만 춘추전국시대 당시 베트남에서는 반랑이라는 자체 국가가 이미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이 당시 중국 남부 일대에 베트남어와 가까운 계통의 언어가 꽤 쓰였던것 자체는 사살이기는 하다 또한 베트남 남부 일대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를 쓰는 종족들이 정착해있었고 이들은 참파라고 하며 자체 국가를 오랬동안 형성해왔다.[23] 이 들은 춘추전국시대~위진남북조시대에 이르는 오랜 시간 동안 한족들과 부대껴오면서 서서히 동화었으며 현재는 해당 지역 중국인들의 직계 조상이 된다.[24] 남월(남비엣)의 글자를 뒤바꾸어 월남(비엣남, 베트남)이 되었다. 베트남/역사 항목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