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 버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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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애
Esse is percipi [1]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다'''[2]
아일랜드 출신 철학자이자 성공회 주교. 1685년에 아일랜드 의 킬케니 근처에서 태어났다. 1696년에 킬케니 대학에 들어갔다가 1700세에 더블린의 트리니티 대학에 들어가서 1704년에 졸업했다. 3년 후인 1707년에 트리니티 대학의 펠로우가 되었으며 1710년에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다.철학이란 진리를 탐구하기 때문에, 철학에 시간과 노력을 들이면 지식의 확실성을 가지며 더 평온하게 살아가야 한다.
'''그런데 왜 평범한 사람들이 더욱 안락하게 살아가는 동안, 철학을 하는 사람들은 더 깊은 회의주의의 수렁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는가.'''[3]
1709년 『새로운 시각 이론에 관한 시론』(Essay towards a New Theory of Vision)을 출판했다. 1710년에는 『인간 지식의 원리론』 1부 (A 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 Part I) 를 출간하였고[4] 1713년에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Thr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5] 을 출판하였다. 이 두 권의 책에서 버클리는 지각과 독립적으로 물질이 존재한다는 입장을 공격하며 비물질주의(immaterialism)을 옹호한다. 1721년에 『운동에 관하여』(De Motu)를 출판하였는데 여기에서 그의 과학철학적인 입장과 뉴턴 역학에 대한 도구주의적인 입장을 제시한다. 1732년에는 자유사상가들에 맞서 기독교를 옹호하는 『알시프론』(Alciphron, or the Minute Philosopher)을 출판했다. 이 책에서 언어에 대한 버클리의 입장을 볼 수 있다. 1734년에는 『분석가』(The Analyst: or, a Discourse Addressed to an Infidel Mathematician)를 출판해서 미적분학의 근거를 공격했다. 1744년에 그의 마지막 저작인 사이리스(Siris)를 출판했다. 여기에서 버클리는 타르-물이 거의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그 효능을 옹호한다. 이 특이하고 이상해보이는 책이 그의 생전에 가장 많이 팔렸던 책이다.[6]
2. 버클리의 철학
시기상 로크와 흄의 사이에 있는 철학자로, 두 사람과 함께 영국경험론의 대표자로 꼽힌다. 로크는 인간이 인식하는 것들을 '관념'이라 부르고, 이 관념을 직접 경험하여 얻는 것('''단순관념''')과 경험한 것들을 비교하거나 조합하여 만들어내는 것('''복합관념''')으로 나누었다. 이 때, 신이나 영혼, 죽음과 같이 인간이 경험할 수 없는 것은 설명할 수 없다는 한계가 생긴다. 버클리는 이에 대해 로크의 철학을 크게 비판하며 추상 관념의 존재를 부정하는 방식으로 설명한다. 모든 존재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만큼 존재한다는 것이다.
2.1. 인식론
버클리는 기존의 추상 관념, 즉 보편자의 존재를 부정한다. 예를 들어 '필통'이라는 단어가 있을 때, '''필통의 이데아와 같은 것은 없으며''', 그저 필통과 유사하게 생긴 사물들을 그렇게 부르기로 약속한 것이 필통이라는 단어라는 것이다. 철학자들이 '이성(Reason)'이라는 단어를 두고 이성의 본질(이데아)이 무엇인지 고민한다고 가정해보자. 인간은 제각기 생각하는 '이성'이 다르기 때문에, 모든 인간에게 해당되는 보편적인 정의를 찾아내기 어려울 것이다. 이성적이란 말이 누군가에겐 차분한 태도를 말할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논리적인 모습일수도 있다. 토론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근거를 설명하는 사람에게 '이성적으로 말해주세요' 라고 하면 전자일 것이고,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감정적 발언이나 욕설을 할 때 '이성적으로 말해주세요'란 후자를 가리킬 것이다. 이렇듯 '''언어는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버클리는 여기서 오해가 시작된다고 보았다. 즉, '''한 언어를 정확히 한 개념으로 정의해야 한다는 강박'''이 추상 관념을 만들어냈을 뿐, 이는 허상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보편자 개념이 없다면 어떻게 법칙을 만들어낼 수 있냐는 반론이 제기될 수 있는데, 버클리는 '''해당 증명에 사용된 특수성을 공유하는 다른 개별자들에게도 증명이 적용되는 방식으로 보편화된다''' [7] 라고 설명한다.
예를 들어,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180도' 임을 증명하려 한다면 기존 철학자들은 '삼각형의 본질'이 있다고 전제할 것이다. 하지만 버클리는 '''둔각 삼각형이자 직각 삼각형이자 이등변 삼각형이자 예각 삼각형... 은 없다'''고 말한다. 그러한 삼각형은 떠올릴 수 없다.
이렇듯 '삼각형'에 대응하는 추상관념은 지각되지 못하고,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어야하므로 삼각형의 추상관념은 없다고 할 수 있다. 한 삼각형이 모두를 대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간'의 본질을 떠올려보면 쉽다. 교과서에 '인간이란 이런 것이다' 라고 백인 남성 그림을 올려두면 굉장한 지탄을 받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흑인, 황인, 여성, 대머리, 장신, 단신 등의 인간이 '인간의 본질'이라 할 수도 없고, '흑인이자 백인이자 남성이자 여성이자 장신이자 단신이자 비만이자 저체중인' 사람이 존재할수도 없다. 즉, '''본질은 없다'''. 삼각형도 마찬가지다.
그럼 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어떻게 증명할까. 아무 삼각형을 그려보자. 그것이 예각이든 둔각이든 상관없다. 둔각삼각형을 그렸다고 가정하고 그걸로 세 내각의 합이 180도임을 보인다. 이 때 이 삼각형이 가진 많은 성질, 즉 '한 각이 둔각이다, 길이가 얼마다, 색깔이 어떻다' 등등의 특징들은 사용되지 않았다. 다만 '세 직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이라는 특징만이 사용되었을 뿐이다. 다시 말해 이 증명은 '''세 선으로 둘러싸인 도형에는 모두 적용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간의 추상 관념이 없어도, 연구를 통해 인간이 어떻다는 점을 알아내고 그걸 '인간 유전자를 가진 사람'에 모두 적용된다고 말하는 식으로 보편화할 수 있다.[8]
주교이기 때문인지, '신은 인간이 알려고 하면 웬만하면 충족시키도록 세상을 만들었다'는 서술도 나온다. 즉 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더 모르는 것만 많아지고 고뇌에 빠지는 것은, 원래 인간이 유한한 존재라서 무한한 진리를 모르도록 태어난 게 아니라 '''방법론에 문제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오해는 바로 여러 비슷한 특징을 묶어 부르기로 한 '단어(언어)'에 '''하나의 확고하고 변치않는 정의'''를 내리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 한 철학자가 ''''오 신이시여, 왜 저는 '이성(Reason)'의 본질(이데아)에 대해 알 수 없도록 만드셨습니까!'''' 라고 한다면, 아마도 그 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야 이 미친놈아, 단어는 니가 만들어놓고 왜 나한테...''''
존재함은 곧 지각함이라는 것은 감각 외부의 실체가 감각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없다는 관념론적 시각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방에서 책상을 보았을때 그 책상은 나한테 감각되므로 보고 있는 동안 책상은 나에게 지각되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그 방에서 나와 더 이상 책상을 보고 있지 않는다면 책상이 더 이상 존재한다고 확신하여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관념론적 생각은 내가 다시 그 방에 간다면 책상을 지각할 수 있다는 경험적 사실로 인해 우리의 직관과 매우 불일치한다. 당시 버클리의 주장도 많은 학자들의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엄밀하게 생각해본다면 내가 책상을 보고 있지 않을 때도 그 책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해선 나는 아무런 증명도 이끌어 낼 수 없다.[9]
버클리도 우리의 직관과 배치된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고 이러한 괴리를 해결하기 위해 주교로서 탁월한 해결책을 제시하였다.
'''그 방에 책상이 항상 존재할 수 있는 이유는 신이 항상 보고 있기 때문이다.'''
2.2. 무한소 비판
미적분학의 태동기에 극한의 정의가 완전하지 않아 어지간한 수학자/과학자들[10] 이 무한소를 남발해대자 롤의 정리로 유명한 미셸 롤과 함께 이들의 행태를 깠다. 특히 버클리 본인은 "사라진 값의 유령(the Ghosts of departed quantities)"이라는 말까지 써가면서 신랄한 디스를 했는데, 미적분의 시초인 아이작 뉴턴의 유율법이 주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이 광풍은 이후 오귀스탱 루이 코시가 엡실론-델타 논법을 만들고 나서야 멈추게 되었다.
[1] 『원리론』 3절에 등장하는 구절로서 영어와 라틴어를 혼용한 것이다. 라틴어로 이 구절을 쓴다면 'esse est percipi'가 되겠다.[2] 버클리는 그가 『원리론』을 쓰기 이전에 적은 철학 노트에 "existere is percipi or percipere"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 혹은 지각하는 것이다)라고 적어두었다. 버클리의 철학 체계에서는 지각의 대상인 관념뿐아니라 관념을 지각하는 정신 역시 존재하기에 노트의 구절이 버클리의 존재론을 보다 정확하게 요약해준다고 할 수 있다.[3] 『인간 지식의 원리론』 서문에서 제시한 문제. 이에 대한 답으로 기존 철학자들이 관념(Idea)을 인식하는 방법에 문제가 있다며,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 나간다. [4] 2부도 계획에 있었으나 결국 출판되지 않았다. 버클리가 새뮤얼 존슨에게 보낸 편지에 의하면 2부를 썼지만 이탈리아 여행중에 원고를 잃어버렸다고 한다. 버클리는 1716년에서 1721년 사이에 유럽대륙을 여행했으니 원고를 잃어버린 것은 이 시기일 것이다.[5] 여기서 필로누스는 Philo(사랑)+nous(정신, mind)의 합성어로,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뜻이며 버클리의 입장을 대변한다.[6] 따라서 『하일라스와 필로누스가 나눈 대화 세 마당』이후에 출판된 버클리의 책들이 주목받지 못했다"던 이전 문서의 서술은 잘못된 것이다. 이 책 외에도 미적분학의 근거를 공격한 『분석가』와 같은 책 역시 큰 영향을 남겼다.[7] 뜻이 어렵다기 보다는 직역한 것이라 문장 구조가 복잡한데, '''해당 증명에 사용된 특수성을 공유하는 다른 개별자들에게도/ 증명이 적용되는 방식/으로 보편화된다'''으로 끊어 읽어야 한다.[8] 증명 과정에서 '인간의 특정 유전자'가 사용되었다면 그 유전자를 가지지 않은 개체에겐 적용되지 않을 것이다. 예를 들어 손가락이 5개라는 유전적 특징을 사용하여 어떤 연구결과 A를 도출한다면, 이것은 유전적으로 손가락이 6개인 사람에겐 적용되지 않는다. 참고로 손가락이 6개인 쪽이 우성 유전자다. 즉 법칙은 '인간은 이런 것이고, 이것에겐 A 라는 성질이 있다. 그러니 인간은 A이다'가 아니라 ''''a라는 전제를 이용하여 결론 A를 도출한다. a는 인간에게 주로 나타나는 성질 중 하나이니 a를 가진 인간에게 결론 A를 보편화할 수 있다''''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는 현대 과학적 방법론의 맥락과도 상통한다.[9] 내가 보고있지 않을 때 책상이 사라졌다가 다시 그 방에 들어갔을 때 책상이 다시 생긴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10] 피에르 드 페르마, 아이작 뉴턴, 레온하르트 오일러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