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로크

 



'''본명'''
'''존 로크 (John Locke)'''
'''출생'''
1632년 8월 29일, 잉글랜드 왕국 섬머셋셔, 라잉턴
'''사망'''
1704년 10월 21일 (72세), 잉글랜드 왕국 에식스
'''국적'''
잉글랜드 왕국 [image]
'''직업'''
철학자, 정치학자
'''학력'''
옥스퍼드 대학 크리스트 칼리지 철학 석사
옥스퍼드 대학교 의학 학사
'''서명'''
[image]
1. 개요
2. 사상
2.1. 로크의 인식론
2.2. 로크의 정치 사상
3.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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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국의 철학자로 '''현대인류사회가 탄생하는 데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정치학자 중 한 사람'''이자 '''근대 자유주의의 시조'''이다. 영국 경험론의 흐름 속에서 빼놓을 수 없는 철학자 중 한 명으로 이후 이마누엘 칸트가 정립하여 철학사의 한 획을 그은 인식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유명하며, 유명한 철학 저서인 《인간오성론》의 저자. 인간은 아무 것도 각인되지 않은 백지 상태(타뷸라 라사, tabula rasa)에서 태어나 경험을 통해 자신을 완성해 간다는 주장을 펼쳤다.

2. 사상



로크는 사회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상당히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이는 토머스 홉스가 주창했던 사회계약론을 바탕으로 주권재민 사상을 확립시켜 민주주의의 이론적 기반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로크는 특히 영국과 미국의 정치사에서 커다란 영향을 끼쳤으며 다른 나라에서도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홉스의 사상을 한 단계 발전시켰다고 보자니, 홉스와 비교해 그의 사상이 부르주아 계급의 입맛에는 맞으나 이론적으로 모순되는 부분이 꽤 있고 정밀하지 못하다는 한계가 있다. 또 홉스가 가열찬 모두까기 정신으로 현실 정치에서 어느 당파도 홉스 지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홉스 이론과의 맞대결은 슬쩍 피하고 약간 정합성이 떨어지는 팔머의 이론을 까는 데 집중할 수 있었던 장점이 있었다.

2.1. 로크의 인식론


근대철학의 핵심분야였던 인식론에서 로크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한 명의 철학자이다. 로크는 관념이 외부사물의 실재성을 보증할 수 없고, 앎의 기원이 전적으로 경험에 놓여있다고 주장했다는 점에서 경험론적 기반을 갖는다. 합리론자들이 근본적으로 개념이라는 것은 사물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던 반면, 로크는 개념은 결코 사물의 실재성을 직접적으로 반영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정신 또는 의식의 대상인 관념은 그것의 기원인 경험을 통해 얻어지는 것인데, 그는 인식 산출 과정에서 오성의 적극적 역할을 부정하였다. 그에 의하면 오성은 단지 경험을 통해서 주어진 표상들을 정리하거나 비교하는 수동적인 것이다.
로크에 따르면 인간의 정신은 경험 이전에는 '''백지상태(Tabula rasa)'''에 놓여있고, 경험은 외적인 경험인 ''''감각(Sensation)''''과 내적인 경험인 ''''반성(Reflection)''''으로 이루어져 있다. 반성은 외부사물과 직접적으로 관계하지 않고, 오성의 작용만 지각하는데, 반성은 감각에 의해 받아들인 표상들을 비교, 제한, 결합하는 소극적인 능력이다.
로크의 인식론의 구조는 '''감각→반성→관념'''으로 간단히 정리할 수 있다. 외부로부터 오는 감각을 반성의 과정을 거쳐 관념으로 만드는 것이 인식이다. 여기서 로크는 관념을 단순관념과 복합관념으로 나누는데, '''단순관념'''은 우리가 사물을 직접적으로 경험하여 얻는 관념이다. 이러한 단순관념은 일차성질과 이차성질로 나누어지는데, '''일차성질'''은 연장, 형태, 운동, 길이, 수와 같은 객관적인 성질이고 '''이차성질'''은 색, 맛, 향기와 같은 주관적인 성질이다. '''복합관념'''은 정신이 단순관념을 서로 비교, 제한, 결합하여 산출시키는 관념을 말하는데, 단순관념으로부터 복합관념을 산출해내는 것엔 경험이 불필요하다. 즉 이것은 정신의 작용에 의한 단순관념의 재구성이다. 복합관념의 산출과정에선 정신의 역할은 적극적 · 주도적인데, 이러한 면은 로크가 전적으로 경험론자의 입장에 의존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이유가 된다. 복합관념엔 사물의 공간, 시간적인 상태나 수를 표현하는 '양태', 신, 정신, 물체와 같이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나 인간, 식물, 동물과 같은 종을 표현하는 '실체', 두 가지 이상의 사물을 비교(ex.인과율)하는 '관계'와 같은 것이 있다.
로크는 일차성질은 우리의 주관적인 경향에 의존하는 이차성질과 달리 사물에게 고유한 성질이고, 경험의 대상이 되는 사물은 인간의 감각과 정신의 외부에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면 인간의 감각과 정신의 밖에 있는 사물의 존재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로크는 여기에 대해 확실하게 답할 수 없었다.''' 로크는 감각기관에 의해 전해지는 외부사물의 존재가 그것의 본래적인 모습과 다를 수 있기에 경험을 통해 얻은 외부사물의 성질이 전적으로 외부사물에 속한다고 단정할 수 없었다. 이를테면 우리가 물컵에 담긴 직선의 막대의 굴절된 모습을 본다고 해서 굴절현상이 막대 자체의 속성은 아닌 것을 생각해 보자. 로크는 감각경험의 내용이 사물의 실제성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라 말할 수 없었기에 인간의 감각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사물, 즉 실체의 존재를 단정할 수 없었다.
다만 로크는 우리의 감각들이 일정한 다발들로 묶여있으며 항상 일정한 방식으로 경험되는 것으로 미루어 외부의 실체가 있을거라 짐작하였다. 예를 들어 마당의 장미는 우리에게 항상 특정한 향기인 후각과 빨간색이라는 특정한 시각감각, 만질때의 특정한 촉각 등의 여러 감각의 다발로써 경험된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의 다발은 우리가 밤에 장미를 경험할때 시각이 경험되지 않더라도 후각과 촉각으로 미루어 빨간색이라는 감각이 다발로 묶여져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즉 선뜻 독립적으로 보이는 감각들이 항상 다발로 묶여 경험된다는 점에서 이러한 감각의 다발을 지탱하는 어떠한 실체(substance)[1]가 알려지지 않지만 있을거라 추정된다고 보았다.(supposed but unknown support)
로크는 복합관념인 세 가지의 실체 중에서 신과 정신은 그것의 존재가 확실한 것으로 생각하였다.

2.2. 로크의 정치 사상


홉스만 하더라도 인간은 악하므로 사회의 평화를 위해서는 방해받지 않는 강력한 권력이 어쩔 수 없이 필요하다는 식으로 설명했지만, 로크는 그러한 사고에서 탈피하였다. 로크의 사상에서 본다면 본디 '''인간은 합리적인 존재로, 자연상태의 인간들이 "공동의 선을 위한 공동체"로 시작한 것이 사회'''이다. 바로 이 점에서 '''홉스와 로크는 아주 큰 차이'''를 보인다.
그렇기에 의회와 같은 '''국가 기관은 공동의 선을 위해 시민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은 상태'''라는 것이다. 따라서 의회가 다수결로 결정한 것은 시민의 암묵적인 동의를 받은 것이 된다고 설명하였으며 이는 오늘날 대의민주주의의 기본 원리로서 인식되는 중요 개념이다. 로크는 시민이 이렇듯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중 하나로 ''''사유 재산의 보호''''를 들었다. 이렇게 되면 정부는 공동의 선을 위해 시민에게 권력[2]을 양도받아 존재하는 기관일뿐더러, 애초에 '시민의 재산 보호가 그 기관 성립의 제일 원인이게 되므로'[3] 동의 없이 시민의 재산을 침해할 수 없다는 원론적이고 강고한 논리가 펼쳐지게 된다. 당연히 세금 역시 국민, 의회의 동의가 필요하게 된다.
동시에, 홉스의 리바이어던과 달리 로크의 권력체는 언제든지 '''시민에 의해 위임된 권력을 반환해야 하는 존재'''가 된다. 이러한 점은 국민의 저항권을 인정하여 미국 독립 전쟁 등에 사상적 기틀을 제공하였다. 홉스만 하더라도 '리바이어던'의 권력(왕이든 의회든)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존재는 국민이지만, '양도'된 권력은 극단적일 만치 특별한 경우[4] 외에는 행정의 안정과 최저 효율의 보장을 위해 도로 빼앗아 갈 수 없어야 한다고 했었는데, 이를 통해 로크의 사상이 당시로서 얼마나 급진적이고 비타협적이었는지 알 수 있다. 이러한 원칙적인 태도는 후대의 계몽주의 학자들에게도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기술했듯 미국 헌법의 기초가 되었고,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서는 시민 혁명 시대를 이끈 개념이 되었다.
또한 절대 권력이 필요하다는 홉스와 달리, 로크는 '''권력은 나누어야 하는 것'''으로 판단했다. 로크는 입법과 행정의 분리를 주장(이권 분립론)[5]하였으며, 이는 몽테스키외에 의해 삼권분립론으로 확립되게 된다.
윤리(교과) 수준에서 설명하자면 사회계약에 대해 홉스는 양도, 로크는 위임, 루소는 양도나 위탁이 불가능한 고유의 권리로 보았다는 것 정도... 이지만 실제 학문적 연구로는 당연히 복잡하다. [6]
로크가 이러한 자신의 사상을 발표한 때는 1688년으로, 의회에 의해 제임스 2세가 쫓겨난 명예 혁명이 일어난 해이다. 이는 그가 명예 혁명과 직접적인 연결고리를 가진 인물이기 때문에, 혁명을 정당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7]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이며, 사회적 권력체가 없이도 잘 살아갈 수 있다는 설명은 개인적인 자유를 최대한 존중해주고자 하는 자유의지주의로 발전된다.

3. 기타


정치가이면서 학계에 이름을 남긴 사람이 흔히 그렇듯, 그의 주요 저서들은 대개가 다 할 일 없던 망명 시절에 지어졌다.
정치가인 까닭에 그의 사상은 보편적이다가도 서구 유럽 중심적인 사고를 보여주거나[8] 인류의 권리나 능력의 평등함을 주장하다가 신분제에 대한 긍정을 바탕으로 논의를 펼치는 등 이론 그 자체의 정교함보다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반영하는 면이 컸다. 그의 가장 유명한 저작인 통치론 자체가 왕당파와 휘그파 사이의 팸플릿 전쟁에서 로크가 휘그파의 대표적 이데올로그로서 로버트 필머의 왕권신수설을 반박하기 위해 쓴 것이며, 이렇기에 급박한 시대를 살아가는 야당 정치가라는 정체성을 빼놓고는 그의 이론을 얘기할 수가 없다는 말도 있다. 정교한 이론을 자랑하던 홉스와 견주어 혼돈된 사람들의 홉스라고 불리기도 했다.
특히나 '사유재산을 보장하기 위한 국가의 권리'는 한 국가에서 보면 좋아보일 수 있지만, 근대를 강타한 식민지경영 제국주의를 고려해서 보면 매우 심각한 논리가 될 수 있다. 이러한 논지는 국가이기주의의 합리화에 이용될 수 있다. 일례로 '세계에서 가장 더러운 전쟁이자 승전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전쟁사 최고의 수치인' 아편전쟁만 해도 표면적인 전쟁 명분이 '자국 국민의 통상, 상업권을 침해한 청나라 정부에 대한 응징'이었다. 아편마약이고 당연히 한 국가는 마약 유통을 단속하고 처벌할 권리가 있다. 그런데도 영국은 '정상적인 통상을 방해해 자국의 상인의 이익을 해친' 청나라를 공격한 것이다!
특히나 존 로크의 저서 중 하나인 '통치론'에선 더 큰 문제가 드러나는데, 존 로크는 '사유재산을 침해하는 자는 충분히 피해자의 다른 권한을 침해할 여지가 있어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방어를 위해 어떤 짓을 하더라도''' 상관없다.'는 주장을 하였다. 물론 정당방위의 범위는 현대 한국에서도 논란거리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런 과잉방어가 허용될 수 있는지는 더 생각해 보아야 하며, 역시 이런 논지는 제국주의 국가이기주의 앞에선 확대해석되어 사용되기 일쑤였고, 로크도 그 부분에선 큰 관심이 없던 것으로 보인다. 확대해서 해석해 보면 근대 서구 외교의 상징인 포함외교가 이런 사상에 기반해서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니네가 감히 우리 상인, 선교사의 권리를 침해해? 죽기 싫으면 문 열지?' 하는 논리가 당연스럽게 허용되고, 이 자체는 서구 국가에서도 매우 자연적으로 이루어졌다. 상기 예시로 언급된 아편전쟁부터 해서 로크의 사상이 제국주의와 버무려져 악용된 사례가 매우 빈번했다.
이와 같은 로크 주장의 문제점은 결국 이론가로서의 로크와, 당파에 속해 당의 입장을 대변해야 하는 정치가로서의 로크라는 이중 자아가 시도 때도 없이 부딪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결국 이 이중 자아의 충돌에서 로크의 악명 높은 혼돈, 모순, 비일관성이 생겨나며 동시에 이렇게 붙여도 저렇게 붙여도 쓸 만해지는 특성도 생긴다. 예를 들자면, 시민의 동의 개념이 위 문단에 쓰여져 있으나 암묵적이라는 단서가 붙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홉스 역시 동의의 개념을 썼으나 개인을 절대적으로 존중한 것에 비해 로크는 홉스의 동의 개념을 따르되 다수의 동의 개념을 도입했으며, 그것도 암묵적 동의이다. 이 암묵적 동의의 개념은 곧 말하자면 너 동의하니? 하고 물어보고 선언시키는 정부는 사실상 없으므로 그냥 너 여기 태어나서 여기 사니까 내 말에 동의하는 거다? 넌 외국인이지만 어쨌든 교역하러 우리나라 지나가고 있으니까 지나가는 동안에는 내 말에 동의하고 있는 거다? 같은 느낌이기에 사실 별 의미가 없다. 즉 다수의 동의, 암묵적 동의라는 말은 절대적으로 공동체 구성원의 동의나 권리를 존중하는 이론은 아니고 이론적으로 보면 그냥 구색을 맞춰주는 정도라는 것. 로크 본인조차도 동의하고 태어나는 어린이는 없다는 서술로 이 암묵적 동의 개념의 미묘함을 인정했다.
또 재산의 정의에 대해서도 오락가락하는데, 어떤 때는 재산에 천부인권적인 생명과 자유를 포함하다가도 정부와 권리 등의 실질적인 문제가 들어가면 슬그머니 생명과 자유를 제외하는 개념을 사용해 유산 계급만이 정부에 의미가 있는 듯 서술한다. 자유에 대해서도 홉스처럼 그냥 간섭 없는 게 자유다! 라고 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간섭 없이 내 자신의 의지를 따르는 자유 위대하다! 라고 써놓다가도 곧바로 법치도 자유의 일종이라능....우리를 보호해서 자유롭게 해준다능...그런데 법은 최소한이어야 한다능...하며 오락가락한다. 또, 당시 시대나 사상가들에 비추어 볼 때 무신론자들 믿으면 안 됨, 가톨릭 놈들은 교황이 우선이니 마찬가지임, 시나 음악 같은 거 계집애들이나 하는 거지 남자는 그런 거 하는 거 아님 따위의 주장을 하는 등 의외로 그렇게 급진적이지도 않았다. 역사가 존 액튼은[9] 로크를 일컬어 항상 온당하고 분별 있지만 술에 물 탄 듯 물에 술 탄 듯하다고 평했다.
여담으로 토마스 홉스와 함께 근대 성경 주석가로 유명하다.
특이하게도 1670년에 출판된 하멜 표류기 프랑스 번역판인 "Relation du Naufrage d'un Vaisseau Holandois, Sur la Coste de l'Isle de Quelpaerts: Avec la Description du Royaume de Corée: Traduit du Flamand; Par Monsieur Minutoli"라는 책에 자신의 이름을 서명했다. 존 로크의 서명을 해당 책의 앞부분에 확인 할 수 있다. 1670년대에 출판된 하멜 표류기 프랑스 번역판을 존 로크가 읽었다는 증거라고 할 수 있다.

[1] 물질(substance)이란 감각의 다발을 밑(sub)에서 지지(stance)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2] 몽테스키외의 구분상 '집행권'[3] 로크가 제시한 재산 개념에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자산뿐만 아니라 생명도 포함된다.[4] 가령 국가가 대다수 국민의 생명마저 보장하지 못할 경우.[5] 로크의 권력분립론은 기관의 측면에서는 의회와 행정부를 분리하여 이권분립이라고 볼 수 있지만 기능면에서는 입법권, 집행권, 연합권(외교), 대권으로 나누어 사권분립이라고 볼 수 있다.[6] 예컨대 루소의 경우 "주권이라는 것은 일반의지의 행사이므로 결코 남에게 양도될 수 없다." 고 하면서도, 개인의 권리는 강제력을 써서라도(!) 사회의 공동선을 지향하는 바로 그 '일반의지'에 종속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7] 네덜란드 망명 시절 로크는 제임스 2세의 즉위를 저지하려던 의회파의 샤프츠버리와 교류했으며 찰스 2세에 의해 장학금을 박탈당하고 제임스 2세가 즉위하던 해에는 반역자 명단에 오르기도 했다. 이미 불온사상가이자 의회파의 일원으로 탄압을 받고 있던 것이다. 또한 명예 혁명 이후 영국으로 돌아와 혁명세력의 탄원위원회에 가담했다.[8] 이는 아메리카 원주민에 대한 침탈을 정당화하는 구석도 있다.[9] 절대 권력은 절대 부패한다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