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디펜베이커

 



'''존 조지 디펜베이커(John George Diefenbaker : 1895년 9월 18일~1979년 8월 16일)'''
“I am a Canadian,
a free Canadian,
free to speak without fear,
free to worship in my own way,
free to stand for what I think right,
free to oppose what I believe wrong,
or free to choose those
who shall govern my country.
This heritage of freedom
I pledge to uphold
for myself and all mankind.”
“나는 캐나다인,
자유로운 캐나다인이라,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말하며,
내 방식대로 자유롭게 경배하고,
옳다고 생각하는 바를 자유롭게 지지하며,
그르다 믿는 바에 자유롭게 반대하거나,
또는 자유롭게 이들 중에 택할 수 있으니,
누가 우리나라를 운영해야 할지 말이다.
이 자유의 전통을
굳건히 받잡기로 맹세하노니
나 자신과 모든 인류를 위함이다”
1. 소개 및 약력
2. 업적
3. 생애


1. 소개 및 약력


1957년부터 1963년까지 제13대 캐나다 총리를 지낸 정치인이다. 서스캐처원 대학교에서 법학을 배우다가 1916년 1차대전에 참전했고 1917년 중위로 제대한 후 변호사 생활을 하다가 정치에 뛰어들어 1935년 이후 22년 만에 총리직에 오른 우익 인사이다. 디펜베이커는 총리로 임명되기 전인 1940년에 이미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56년부터 캐나다 진보보수당 대표를 지낸 경력이 있었다. 총리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1967년까지 진보보수당 대표를 유지하였으며, 의원직은 죽을 때까지 유지하였다.
총리직을 지내는 동안 최초로 여성 장관과 캐나다 원주민 출신 상원의원을 임명하였으며, 캐나다 권리 장전을 통과시키는 등 인권 분야에서 높은 업적을 남겼다. 또한 1958년 총선에서 그가 이끈 진보보수당은 208석을 확보했었는데, 이 의석수는 총선 역사상 단일 정당이 얻은 가장 많은 수였으며 의석수 비율에서는 지금까지도 최대치이다. 그러나 외교와 국방 정책 면에서는 여러가지 실책을 저질러 임기 말기에는 곤혹을 치뤘는데, 특히 CF-105 애로우 전투기의 생산 취소와 미국으로부터 보마크 미사일을 구입해 캐나다 본토에 배치한 조치는 반대파를 비롯하여 많은 국민들의 반발을 일으켰으며, 그 결과 1963년 총선에서 패하게 된다. [1]

2. 업적


동서 냉전이 한창이던 시절, 존 디펜베이커 총리는 당시 만연하던 일당독재나 독재자들과는 확연히 다른 캐나다를 선언했다. 1957년 6월 21일 1963년 4월 22일까지 총리로 활동하며 남긴 그의 말은 캐나다 시민권 교재 맨 마지막에 등장한다. 그로 인하여 캐나다인들은 상당히 오래전부터 정치적인 제한없이 자유로운 대화를 나눴고, 그 결과 사회적으로 진보보수의 갈등이 다른 나라들에 비하면 적다. 캐나다에서 진보보수란 통치의 방식일 뿐 선악을 구별하는 잣대가 아니다. 최소한 캐나다 사회에서는 정치적 태도와 관련해 목숨의 위협이나 인격 모독을 하는 행위는 배제의 대상이다.

3. 생애


온타리오주 노이슈타트에서 독일계 아버지와 스코틀랜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1903년 가족과 함께 서스캐처원주로 이주하였다. 변호사가 될 계획을 세워 서스캐처원 대학교에서 법학을 공부하였고, 1919년 서스캐처원 주의 워코(Wakaw)에서 자신의 법률 사무소를 열었다. 주민들은 그를 가리켜 방어적 능력이 뛰어난 변호사로 주목하였다.
1920년 정계에 입문하여 진보보수당 당수로 1940년에 캐나다 하원 의원에 선출되었다. 1957년 6월 21일 13대 총리에 취임하여, 캐나다를 더욱 부유한 국가로 성장시키기 위한 직무를 시작했다. 또한 오대호대서양을 잇는 세인트로렌스 수로를 여는 데 도움을 주었다. 1963년 4월 22일에 총리직을 사임하였고, 1967년 진보보수당 당수 직위에서도 물러났다.
1979년 8월 16일 수도인 오타와 근교에서 8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그가 죽은 후 1993년에는 존 디펜베이커를 기리기 위해 새스커툰 국제공항이 존 G. 디펜베이커 국제공항으로 명칭이 변경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1] 이게 그냥 취소한거면 그렇고 말고로 넘어가겠지만 여기서 그치지 않고 완전히 처리 하기위해 이를 통해 파생된 항공기반등을 타국에 판매해서 처리하는 계획도 세웠지만(영국,미국) 이게 부진하자 몽땅 폐기처분을 하는 행동을 옮긴다. 엔지니어들은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되어버리고 이들은 모두 해외로 도피하게 되는데 이런 행동으로 인해 사실상 캐나다 항공역사와 개발은 완전히 박살이 나고 소멸해버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