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브라운

 

1. 개요
2. 생애
3. 평가
4. 대중매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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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년 시절
말년의 초상 (1859)
John Brown
1800년 5월 9일 ~ 1859년 12월 2일
미국노예해방론자.

2. 생애


코네티컷 주 토링턴에서 작은 피혁공장을 운영하는 강성 노예해방주의자인 부친의 영향을 받아 노예해방에 투신했다. 가난한 집안 사정으로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부친이 운영하는 공장이 노예들의 탈출로였기에 브라운 또한 강경한 노예해방주의자가 되었다.
성년이 되면서 캔자스 주로 이주했으나 당시 캔자스는 이른바 '피 흘리는 캔자스'라 불릴 만큼 노예주가 되느냐 마느냐로 노예제 찬성파와 반대파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상태였고 이웃한 미주리 주의 지원을 받은 노예제 찬성론자들이 노예제 반대론자들을 위협하는 상황이었다. 존 브라운도 이러한 첨예한 대립 속에서 노예제 찬성론자들이 조직한 민병대와의 충돌을 통해 점점 과격한 성향이 되어 갔고 1851년 미국 길리애드 동맹(American Gilead League)이라는 탈주노예들이 주축인 비밀결사를 만들어 1856년 노예제를 옹호하는 5명의 백인을 살해한 포토와토미 학살사건(Pottawatomie Massacre)을 일으켰다. 이때 브라운은 5명을 피해자들의 가족들이 보는 눈앞에서 브로드소드로(!!!) 살해했다. 이는 노예제 찬성파들의 로렌스, 캔자스 공격의 결과로 여겨지며 존 브라운은 시체들의 사지를 절단하고 캔자스 주 경계에 뿌려 노예제 찬성파들이 캔자스로 넘어오는 것을 경고했다.
사실 이 사건은 노예제 폐지론자들에 대한 전반적인 국민감정을 대단히 악화시켜서,[1] 링컨을 위시한 노예제 반대파 정치인들은 급히 존 브라운과의 관계를 부정해야만 했다. 브라운이 살해한 노예제 찬성론자 일가는 그 이전부터 존 브라운에게 살해 위협도 포함된 협박을 해온 전적이 있었고 당시 캔자스 주에서는 노예제 찬성론자들이 먼저 무력을 동원해 반대론자들을 공격해 사망자까지 나오는 험악한 분위기였기에 옹호론도 나왔지만 상당히 과격하고 잔인한 보복임은 부인할 수 없었고 결국 노예제 찬성론자들의 분노를 사 미주리 주의 민병대가 캔자스 주로 쳐들어오는(!) 사태가 벌어졌다. 비록 전력의 열세로 인해 반대론자들이 거주하던 지역의 마을들은 지키지 못했지만 브라운이 조직한 반대론자들의 민병대는 미주리 주 민병대와 찬성론자들의 민병대들을 상대로 선전했고 이는 존 브라운의 명성이 노예제 반대론자들에게서 높아지는 계기가, 동시에 남부에서는 사악한 악마의 화신이라는 악명이 떨쳐지는 계기가 된다.
캔자스 주의 노예제 문제로 인한 물리적 충돌이 정치적인 합의로 간신히 막을 내린 후 존 브라운은 1859년 남부 지역 깊은 산에 해방노예의 나라를 세워 노예해방의 전진기지로 삼을 계획을 세우고 무기조달을 위해 버지니아 주 하퍼스 페리(Happers Ferry)에 위치한 정부군의 병기고를 습격하여 점령하나, 곧 출동한 연방군과 민병대[2]와의 교전 끝에 패했다. 이 때 브라운의 아들과 해방노예 등 10명이 전사하고 브라운은 체포되어 그 해 12월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만약 내가 부유한 자, 권력자, 지식인, 소위 '위대한' 사람들과 그 지인,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아내, 아이들, 그러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위하여, 이 법정에서 내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은 행동을 취하며 고통을 겪고 희생을 치뤘더라면 누구나 그 행위를 가치있는 것으로 여겼을 것이며 처벌은커녕 보상을 이야기했을 것이다.

이 법정은 하느님의 법을 존중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사람들은 - 적어도 신약으로 보이는 - 성서에 입을 맞추는 모습을 나는 보았다. 바로 그 성서야말로 내게 가르치길, 내가 대접받는 대로 남을 대접해야 하며, "너희도 함께 갇힌 듯 지금 갇혀있는 사람들을 생각할 것이며, 너희도 몸을 가진즉 학대받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라"[3]

고 하였다.

나는 그 명령을 따르기 위해 노력했을 뿐이다. 내가 아직 어리석어서 그런건지, 하느님이 어찌 사람의 외모를 따지신다는 소리인지 난 당최 모르겠다.[4]

내가 순순히 인정한 바와 같은 내 일련의 행위는 하느님의 소외받는 빈한한 사람들을 위한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코 잘못이 아니라 올바른 행위였다고 생각한다.

만약 정의를 위하여 내 목숨을 포기해야 한다면, 그리고 이 노예제의 나라에서 내 자손은 물론이요, 사악하고, 잔인하고, 불의한 제도로 인하여 인간된 권리를 무시당하고 있는 수 백만의 피에 내 피를 또한 더해야 한다면 그렇게 될지어다!

존 브라운의 마지막 변론

I, John Brown, am now quite certain that the crimes of this guilty land can never be purged away but with blood.

나 존 브라운은 이 죄악의 땅의 범죄를 정화할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피 뿐이라고 이제 확신한다.

처형장으로 마지막 발걸음을 옮기며 간수에게 건네준 쪽지이자 유언


3. 평가


브라운이 죽은 뒤 북부에서는 브라운을 찬양하는 여론이 일게 되는데 반해 남부에서는 마귀 수준의 살인마로 욕을 먹었다. 4개월 후 남북전쟁이 발발하고 브라운은 노예해방의 상징으로 추앙받아 북군의 우상이 되었다. 그리하여 존 브라운의 죽음을 기리는 군가가 만들어졌으니 그 유명한 John Brown's Body#이다.
남북전쟁이 북부의 승리로 끝나자 브라운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지고, John Brown's Body는 국가행사에서도 불리는 노래가 되었다. 여기에 다른 가사를 붙인 곡이 Battle Hymn of the Republic이고 이것을 한국어로 번안하여 찬송가에 편입한 곡이 누구나 잘 아는 "영광 영광 할렐루야"라는 후렴구가 붙은 찬송가인 '''마귀들과 싸울지라'''(새찬송가 기준 348장, 통합찬송가 기준 388장)이다.
존 브라운에 대한 평가는 양면적이다. 노예 해방이라는 목적은 분명 숭고한 것이지만, 굉장히 과격하고 테러리스트 활동을 한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본인의 깊은 기독교 신앙과 타락한 세상에 대한 절망, 핍박받는 사람들에 대한 애정이 한 인물 속에 결합해 있었던 '의로운 분노(righteous wrath)'를 목숨으로 보여준 인물이란 평가를 받는다. 옹호하는 사람들은 존 브라운을 노예해방이라는 옳은 대의를 위해 투신한 이상주의자로 보고, 비판자들은 미국 역사상 최초의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기도 한다.
유명한 노예해방 운동가인 프레드릭 더글러스는 존 브라운에 대하여 "자유라는 대의에 대한 존 브라운의 신념은 나의 그것보다 훨씬 강력했다. 나의 신념이 작은 촛불이라면, 그의 신념은 거대한 태양이었다. 나의 신념은 시간에 매였지만, 그의 신념은 영원의 조용한 해안까지 닿았다. 나는 흑인을 위해 말했지만 그는 흑인을 위해 싸웠다. '''나는 흑인을 위해 살았고, 그는 흑인을 위해 죽었다.'''"고 평가했다. 브라운의 극단성은 후대까지도 강렬한 충격을 남겨 먼 훗날의 말콤 X는 '흑인민권운동에 같이 참여할 만한 백인은 있는가?'라는 질문에 '없다. 혹시 존 브라운이 다시 살아 돌아온다면 몰라도'라고 대답했다.[5]

4. 대중매체


넷플릭스 미니시리즈 "The Good Lord Bird"가 존 브라운을 다룬 드라마이다.

게임 스플린터 셀의 4편 이중간첩에서는 이 존 브라운의 유지를 받들어 썩어빠진 미국의 체제를 엎어버리고 미국을 새로 세우겠다는 "존 브라운의 군대(John Brown's Army)"라는 미국 내 테러리스트 조직이 등장한다. 그런데 본부의 컴퓨터에서 볼 수 있는 선언문에서 존 브라운을 애국자가 아닌 혁명가라고 일컫는 것은 그렇다 쳐도 존 브라운이 그 당시 답없던 정부 체제를 엎으려 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보면 왠지 존 브라운의 이름만 팔아먹는 것 같기도 하다. 거기다 두목 측근은 '''백인우월주의자'''(칼슨 모스)다(...).

[1] 당시 북부에서도 강경한 노예제 폐지론자들은 소수였다.[2] 당시 연방군 부대의 지휘관은 휴가를 나왔다가 지휘관이 된, 그 유명한 로버트 리(당시 대령)이었다. 당시 로버트 리는 노예 문제에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이 단지 상부의 명령에 따라 존 브라운 일당을 진압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얼마 후에 그 노예 해방 문제로 인해 벌어진 남북전쟁에서 로버트 리는 노예 제도의 수호를 위해 남군을 이끌고 참전했으니 참 아이러니하다.[3] 히브리서 13:3[4] 사도행전 10:34를 인용. 인종차별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보내는 비아냥이다.[5] 이 대답을 했을 때 말콤 X는 메카 순례 이후 더 포용적이고 보편 인류애적인 방향으로 운동을 전환하기 이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