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설
1. 소개
중국 초한쟁패기에 활약한 한나라(漢)의 인물.
2. 생애
유방과 같은 고향인 패현 출신으로, 아직 유방이 거병해서 출세하기도 전부터 참승(驂乘)[3] 노릇을 하고 있었는데, 유방이 거병 할때는 보좌하는 사인(舍人)으로서 유방을 따랐다.
딱히 세운 공은 없었지만 유방을 따라 종군하여 관중으로 가고, 다시 파촉으로 가고, 또 삼진 평정에도 종군하여 지양(池陽)[4] 을 식읍으로 받았다.
초한전쟁 때는 동쪽으로 진군해서 초군의 양도를 끊고, 이후 북쪽으로 가 한신의 군대에서 싸웠는데, 한신의 아래에서 싸우면서 유리할 때도 있고 불리할 때도 있었지만, 단 한번도 유방을 배신하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이 공으로 무신후(武信侯)에 봉해지고 3300호의 식읍을 받았다.
천하가 통일된 후에, 유방이 진희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몸소 출정을 하려고 할때는 직접 '''울면서''' 말렸다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유방은 주설이 자기를 생각해주는 마음이 꽤나 갸륵해서 이후 주설이 궁궐 내에서 일부러 빨리 걸을 필요가 없게 했으며, 설사 사람을 죽인다고 해도 결코 처형하지는 않겠다는 특전을 내렸다. 정작 친정을 그만하라는 말은 듣질 않아서 결국 주설의 우려대로 유방은 영포 토벌 도중에 유시에 맞은 곳이 도져서 죽고 말았다.[5]일찍이 진나라가 천하를 공격하여 병탄할 때 황제가 직접 나선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황제께서 몸소 전쟁터에 임하려고 하시니, 그것은 황제를 대신할 사람이 없어서입니까?"
이후 한문제 시절까지 살다 사망했는데, 죽고 나서 정후(貞侯)라는 시호를 받았다. 아들 주창(周昌)이 뒤를 이었지만 죄를 지어서 후국이 폐지되었다.
그리고 한경제 시절에 주설의 다른 아들인 주거(周居)가 후에 봉해지면서 주설의 작위를 이었고, 한무제 시절에는 구경(九卿) 중의 하나인 태상(太常)이 되었지만 역시 죄를 지어 후국이 폐지되었다.
3. 평가
어떤 특별한 공을 세우지는 않았지만 그야말로 '''유방빠''' 라고 할 수 있는 인물. 사마천은 주설에 대해 '''마음을 다스리며 바르고 굳건한 태도를 견지했으므로 다른 사람에게 아무런 의심을 받지 않았다.''' 면서, 실로 돈후한 군자라고 좋은 평가를 내렸다.
[1] 배성후(䣙成侯), 빙성후(憑成侯)라고도 한다.[2] 존후(尊侯)라고도 한다.[3] 수레를 모는 사람.[4] 지금의 섬서성 경양현(涇陽縣) 서북[5] 사실 화살이 치명적이었다기보단 유방이 치료를 거부하며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긴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