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희(한나라)

 


'''생몰년도'''
? ~ BC 196
'''이름'''
진희(秦豨)
'''작위'''
양하후(陽夏侯)
'''출생지'''
완구(宛朐)[1]
1. 개요
2. 생애


1. 개요


초한쟁패기전한(西漢) 초기의 인물. 한 제국에서 나온 공신 출신 '''반역자''' 중에 대표적인 인물. 이 사람 때문에 엮여들어간 인물들의 면면이 쟁쟁하다.

2. 생애


어렸을때는 신릉군(信陵君) 위무기를 존경해서 이를 본받으려고 했다고 한다.[2] 정확히 언제부터 유방을 따라 종군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진희가 반란을 일으켰을 당시 유방은 "무척이나 믿음직했던 인물이었다." 라고 말을 한 바 있다. 그런 점으로 볼때는 듣보잡 같은 인물은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방에게 합류할때는 오백명의 병사를 이끌고 패상에 이르러서 후에 봉해졌으며, 유격장군으로 대나라를 평정하고 연왕 장도를 물리치는 일에 힘을 보태 양하후에 임명되었다.
천하가 평정되고, 한왕 신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유방은 이를 추격하다 백등산 포위전에서 곤경을 당했는데, 돌아오는 길에 진희를 열후에 봉하고 조(趙)나라 상국의 지위를 맡겨 조와 대(代) 변경의 군사를 지휘하도록 하였다. 이로 인해 진희는 조나라와 대나라의 군사력을 손아귀에 쥘 수 있었다.
그렇게 실력을 가지게 된 진희는 집으로 귀향하겠다고 보고하고 조나라를 지나갔다. 그런데 그런 진희를 따라 수많은 빈객들이 함께하여 천여대가 넘는 수레가 뒤를 따라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의 관사가 꽉 찰 지경이었다. 또한 진희는 어린 시절에 보았던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을 모두 가리지 않고 예를 다해 대접해서 인심을 샀다.
이런 모습을 보고 조나라의 다른 상국인 주창(周昌)은 유방을 만나, 진희가 이렇게 인심을 사는것에 대해 염려를 하면서 변경에서 오랫동안 군사력을 가지고 있으면 반란을 하지 않을까 하는 점에 대해 걱정이라는 말을 했다. 이런 이야기를 듣고 유방이 진희를 따르는 빈객들의 뒤를 한번 털어보자, 이 사람들이 저지른 불법적인 일들이 죄다 진희와 관련이 있었다. 즉 진희가 뒤를 봐주고 있었던건 확실했던 것이다. 실제로 반란을 하려는 의도였는지는 이것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여하간 사태가 이렇게 되자 진희는 크게 겁에 질렸다, 마침, 한왕 신 역시 이런 진희의 상황을 보고 만구신(曼丘臣), 왕황(王黃)이라는 인물들을 보내 내통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유방의 아버지인 유태공이 사망하자, 유방은 사람을 시켜 진희도 수도에 오라고 권했지만 진희는 병을 핑계로 수도에 입성하지 않았다. 그리고 BC 197년 9월 경이 되자 진희는 정말로 반란을 일으켰다. 진희는 스스로 대왕(代王)을 칭하고 대와 조나라 땅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직접 출병한 유방은[3] 동쪽에서부터 진희를 공격했는데, 진희는 조나라의 수도인 한단에 병력을 배치하지 않았다. 유방은 한단을 점령하고 기뻐하면서 말했다.

"진희가 남쪽의 장수(漳水)를 이용해서 한단을 방어하지 않았으니, 이 자가 무능한 인물이라는 것을 알았다."

한편 조나라 상국인 주창이 상산(常山)의 25개 성 중에 20개 성이 진희에게 함락당했다고 책임자들을 죽여야 한다고 상소를 올렸는데, 유방은 정작 주창이 추천한 사람들만 골라서 너희들을 어디다 쓰겠냐며 구박을 하고는[4] 주창이 징벌해야 한다고 말한 이들에겐 "힘이 부족해서 그랬겠지."라며 오히려 다른 곳에선 다 유방이 왔는데도 모른 척 하는 와중에 군사를 모아온 것을 치하하며 식읍을 1천호씩 내리는 것으로 조나라 병사들의 사기를 올렸다. 그리고 BC 197년 ~ 196년의 겨울 동안 진희와의 싸움에 나섰다.[5]결국 진희의 장수였던 후창(侯敞), 장춘(張春), 승마치(承馬絺) 등은 곽몽(郭蒙)과 주발(周勃) 등에게 패배하여 참수되었고, 주발은 태원과 대나라 땅을 평정했다. 유방 본인은 동원(東垣)을 공격해서 함락시켰다.[6]
그 외에 왕황과 만구신 등은 현상금 때문에 부하들에게 체포되어 잡혀왔고, 진희는 일단 도망쳤지만 결국 나중에 잡혀서 죽었다.
진희의 반란 자체는 그냥 단순한 반란 사건이었지만, 문제는 여기에 얽혀서 굴비 엮듯 끔살 당한 인물들이 많다는 점이었다. 우선 가장 대표적인 인물로 '''한신'''이 있는데, 한신은 진희의 반란에 내부에서 동조를 하려다 소하여후에게 참살되었다. 한신이 진희와 손을 잡았다는 이야기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더라도, 어찌되었건 진희의 반란 때문에 엮여 들어서 죽은 것 자체는 분명하다.
또다른 인물이 초한전쟁 중 막대한 공을 세운 양왕 팽월이었다. 팽월은 유방에게 진희의 반란 진압에 동원할 군사를 보내주라는 요구를 받고도 미적거렸다가 결국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게다가 진희는 또다른 반란군 한왕 신과도 관계가 있었고, 노관 역시 진희의 반란을 이용해서 미적거리다가 흉노로 도망쳤다.
'''결국 혼자서 두 명의 왕과 두 명의 전(前)왕을 보내버린 셈이다.''' 전한 초기에 있었던 반란들 중에서도 파급력이 적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1] 현재 산둥성 허쩌(荷澤) 부근[2] 아이러니하게도 나중에 진희가 배반을 하게 되는 유방 역시 어린 시절부터 신릉군의 이야기를 듣고 좋아했다.[3] 백등산 포위전의 일 때문인지, 막 출정하려고 할 때 주설이 나서서 '시황제가 천하를 평정할때도 스스로 친정한적은 없는데 폐하는 어째서 자꾸 직접 나서려 하십니까? 장수들이 못미더워서 이러시는 겁니까?'라며 울면서 매달리자 유방은 충성심이 기특해 큰 상을 내렸지만 친정은 그대로 계속하면서 다른 장수들이 못미덥다는 얘기는 은근슬쩍 인정했다.(...)[4] 이래놓고 또 조금 있다가 모두 장수로 봉했다.[5] 이때, 유방은 진희의 장수들 대부분이 상인 출신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을 이용해 매수 작전을 벌여 대부분의 항복을 받았다.[6] 성이 함락되기 전에 유방에게 욕설을 퍼붓던 병사들이 있었는데, 유방은 이후에 그들을 찾아내서 요절을 내버리고 나머지 병사들은 경형에 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