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고회
1. 개요
竹林高會.
고려 중기 무신정권 시대에 일곱 문인이 설립한 문학 모임이다.
이 모임의 핵심인물은 이인로로 중국 시인 백낙천의 4우를 모방해 미수사우를 맺었는데 임춘을 시우, 조통을 산림우, 이담지를 주우, 그리고 승려인 종령을 공문우라 칭했다.
후에는 중국의 모임을 따서 죽림칠현이라 고쳤으며, 현대에도 흔히 죽림칠현이라 불린다. 또 해좌칠현(海左七賢)이라고도 부른다.[1]
이들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의 자유방임적인 노장사상에 심취하여 시주를 벗삼던 죽림칠현을 본떠 모임을 가짐으로써 죽림고회라 불렀다. 무신정권기에 문신들이 정계에서 소외되자 산야로 들어가 시와 술로써 불우한 자신들의 처지를 위로했다. 중국의 죽림칠현이 진대의 난시에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초야에 들어가 생겨난 것처럼 죽림고회도 무신이 집권하여 문신들에 대한 횡포가 심해지자 난세를 피하여 향리에 들어가 문학에 열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7현 중 이인로와 조통을 제외한 나머지 5명은 문사로서 불우한 생애를 살았던 사람들이다. 그러한 자신들의 처지에서 오는 울분과 강개의 심정을 문학과 술로써 위로하고 잊으려 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들이 노장사상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청담적, 출세간적, 방종적인 풍모를 흠모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오세재의 비극적 죽음 등을 고려하면 관직에 적극적으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기 보다는, 무인정권기에서 이들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쪽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이인로나 죽림고회를 신나게 깐 이규보는 후일 최충헌 정권에 출사해서 크게 출세하였고 어용문인 소리를 후대에 듣게 된다.
고려시대 당시 문단을 대표했고 상당한 영향력도 끼쳤다고 한다. 시를 쓴 것 외에도 시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했던 것으로 추측되는데 이인로의 《파한집》은 한국문학사에서 중요하게 거론되는 평론집이다. 이규보는 나이 19세에 35년이나 연상인 오세재와 망년지우를 맺고, 죽림고회에 출입하면서 이들과 교유했다. 그러나 이들이 매일 모여 술을 마시고 시를 짓고 거리낌없이 함부로 행동하자 이러한 태도를 비난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고 한다.
2. 멤버
3. 이규보의 칠현설
이규보의 〈칠현설〉에 의하면 오세재가 경주에서 돌아오지 않자 죽림칠현은 이규보에게 오세재 대신 7현으로 들어올 것을 권유했다. 그러자 이규보는 "7현이 무슨 조정의 관직이어서 빈 자리를 메울 수 있는 것입니까? 중국의 완적과 혜강이 죽은 후 그것을 계승한 자가 있다는 말은 못 들었습니다"라고 하여 좌중을 웃음바다로 만든 후, 이어서 시로써 "7현 가운데 그 누가 왕융과 같은 사람인지 아직 모르겠다"고 읊어 좌중을 성나게 만들었다고 한다.
4. 기타
노래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에서는 '''죽림칠현 김부식'''이라고 나오지만 엄밀히 말하면 같은 문인이라는 것 말고는 관계가 없다.
5. 같이보기
6. 둘러보기
[1] 중국의 원판 죽림칠현은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 부른다. 해좌(海左, 바다의 왼쪽), 강좌(江左, 강의 왼쪽)는 해동(海東, 바다의 동쪽), 강동(江東, 강의 동쪽)과 같은 뜻이다. 황제가 남쪽을 보고 앉으면 왼쪽이 동쪽, 오른쪽이 서쪽이 되므로. 실제로 해동은 중국에서 우리나라를 가리키는 별칭 가운데 하나였다. 마찬가지로 남쪽은 앞, 북쪽은 뒤라고 부른다.[2] 오세재[3] 동도는 당시 동경으로 불렸던 경주로, 오세재의 외가가 있었다. 오세재는 이곳으로 가서 말직을 지내다가 생활고로 죽었다. 경주로 놀러간 것이 아니다.[4] 이담지[5] 혜강과 완적은 7현중에서 비교적 일찍 죽었다. 특히 혜강은 관직에 오르지 않고 사마씨 정권에 항거하다가 처형당했다.[6] 이를 죽림칠현의 핵심이 될 인물이라고 오역한 글도 있다. 그것도 문학사 관련해서. 사실은 본문에도 나오지만 왕융의 고사이다. 왕융은 자기집 자두를 팔면서 그 씨를 가져다가 싹을 틔울까 싶어서 자두 씨에 모두 구멍을 뚫었다는 일화가 유명할 정도로 죽림칠현의 이름에 먹칠을 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죽림고회에 참석한 이들 보고, 지금은 나름대로 관직을 떠나서 유유자적한다고 하지만 뒤에 왕융처럼 행동할 인물이 없으란 보장이 있느냐고 돌직구를 던지는 장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