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칠현

 

1. 개요
2. 실상
2.1. 호평
2.2. 비판
3. 죽림고회(竹林高會)의 원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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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죽림칠현'''('''''')은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당시 위나라진나라의 정권교체기 시대에 부패한 정치권력에 등을 돌리고 대나무숲에 모여서 거문고와 술을 즐기면서 청담으로 세월을 보낸 7명의 선비로, 산도(山濤), 왕융(王戎), 유영(劉伶), 완적(阮籍), 완함(阮咸), 혜강(嵆康), 상수(向秀) 를 묶은 말이다. 강좌칠현(江左七賢)이라고도 한다.
죽림이 관련된 이유는 이들이 청담을 논하는 장소가 죽림인데, 탁한 속세와 멀리 떨어져 있어 죽림은 당시에 청담을 논의하기 위해 좋은 장소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친상에 가면서 거문고를 가져가 연주한 것, 상 중에 고기와 술을 먹는 것, 옷을 벗어던지는 것, 불효의 죄로 고소당한 친구를 변호하는 것 등 당시 유교라는 전통적인 가치관에 반기를 드는 행위를 많이 했다. 덤으로 나체 악기 연주 댄스 같은 현대에도 백안시당할 일도 많이 했다.

2. 실상



2.1. 호평


이들이 보이는 행동은 겉보기에는 자유분방하지만 속으로는 오히려 유가사상을 깊이 믿고 있었다. 완적이 정작 자신의 아들은 음주 행렬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거나 혜강이 가계(家誡)라는 책을 써서 자신의 아들에게 올바른 사람이 되기 위한 예절과 주의사항을 훈계한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그리고 후한시대의 청의(淸議)라는 사상에 따라 불의한 정권에 대한 소극적인 저항의식도 있어서 조정에서의 출사권유를 여러가지 방법으로 거부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들의 사상은 하안(何晏)과 왕필(王弼)이 시작한 유학의 새로운 해석을 바탕으로 한 3현(三玄)이라고 불리는 도덕경(道德經), 장자(莊子), 주역(周易)의 연구와 해설을 중심으로 하는 현학(玄學)과 합쳐져서 '''청담사상'''을 완성한 공로가 있다. 적어도 이 때까지의 청담사상은 불의한 권력에 대한 저항의식을 가지고 유가 이외의 다른 사상에 대한 생각의 확대를 도모했으며 물욕과 권력욕을 억제해서 시대의 한계점은 있으나 나름대로 정상적인 발전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저항의지를 권력자들이 모를리가 없었고, 결국 탄압받게 되면서 청담사상은 저항의식을 상실하고, 현학도 2류 학자들의 얼치기 따라하기로 인해 망가지면서 청담사상은 사실상 권력가의 취미 겸 헛소리 경연대회라고 볼 수 있는 '''공담(空談)'''으로 급격하게 변질했다. 덕분에 청담사상은 위진남북조시대가 끝날 때까지 해악을 끼치게 되며, 공담을 즐기는 작자들이 자신들의 한량놀음을 '''죽림칠현을 본받는 것이다!'''라고 면피질까지 하면서 후세의 평가까지 덩달아 떨어지는 불운을 겪게 된다.

2.2. 비판


이건 죽림칠현을 너무 높이 평가하는 것이라는 비판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것이 자오찌엔민(趙劍敏)이 쓴 '죽림칠현 빼어난 속물들'이라는 책이다. 상하이대 고대정치사상사 교수인 저자에 의하면 죽림칠현은 정치적 계산과 출세 목적이 섞인 결사체로 파악한다. 이 주장에는 몇가지 이유가 있는데,
  • 혼자서 은거한 것이 아니라 여럿이 모여서 행동했다. 혼자서 은거하면 그냥 은둔이지만, 당대에 이름난 명사들이 모여서 은거하는 형태를 취하면 영향력을 유지하면서 명사로 이름을 알릴 수 있다.
  • 이들이 은거했다는 곳은 산양[1]인데, 산양은 당대의 중심지중 하나인 낙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이들의 행적은 금새 낙양을 통해서 천하로 알려졌다.
  • 결정적으로 이들의 은거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실제로 은거기인의 모습을 유지한 이들도 많지 않다. 실제로 이들이 출사권유를 거절한 것이 유명할 뿐이지, 실제로는 출사한 적이 있거나 대부분 출사했다는 사실은 모르는 이들이 많다. 이들이 청담을 논하면서 세월을 보낸 것은 그리 길지 않은 시간뿐이다. 산도가 사마소의 천거로 벼슬자리에 나가면서 죽림칠현은 해체된다.
당장 구성원들의 말년 행적만 봐도 알 수 있다.
  • 산도 -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사마소에게 천거되면서 죽림칠현 해체의 배경이 되었다. 사마소와는 먼 친척[2]으로 삼공의 하나인 사도의 직위까지 오른 인물로 죽림칠현의 상당수는 산도의 천거로 관직에 올랐다. 혜강의 아들도 천거해줬다.
  • 혜강 - 처음에는 무제 조조의 아들 패목왕 조림의 손녀 장락정주와 결혼하고 낭중으로 천거되어 중산대부에 제수되는 등 일시적으로 관직 생활을 하다가 사마씨가 집권하자 정치에 관여하지 않았으며, 산도에 의해서 천거되었으나 이를 거절하고 오히려 절교하는 등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죽림칠현의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종실의 여인과 결혼해서 워낙에 정계와 깊이 연결되어 있었기 때문에 혜강의 발언은 정치적으로 큰 의미를 지닐 수밖에 없었으며, 이 때문에 평소에 미움을 샀던 종회와 사마소에 의해서 반역과 불효죄 등이 엮여서 참형당했다.
  • 상수 - 혜강이 처형된 후 관직에 올랐으며, 산기상서를 지내는 중 병사했다.
  • 왕융 - 종회의 추천으로 관직에 올랐으며, 산도와 마찬가지로 벼슬이 삼공에 이르렀다. 워낙에 정치적으로 문제가 많아서 후대에 왕융은 죽림칠현에서 제명해야 된다는 이야기가 많았다.
  • 유영 - 역시 관직에 올라서 왕융이 장군을 지낼 때 건위참군으로 일했다. 사마소에게 도가정치를 권유했다가 무능하다고 찍혀서 낙향당했다. 이후 술마시다가 인생을 마감했다. 술과 관련해서 일화가 많기 때문에 죽림칠현의 이미지를 형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지만, 이 사람이 술 마시던 일화의 대부분은 죽림칠현 해체되고 한참 뒤의 이야기다.
  • 완적 - 조방 시기에 상서령에 올랐다가 낙향, 조상의 참군이 되었으나 다시 금방 낙향했고, 사마소의 총애를 받아서 유영과는 달리 술 마시고 막말을 많이 했음에도 꾸준히 관직을 유지했다.
  • 완함 - 완적의 조카로 역시 산도의 천거를 받아서 이부령이 되며 관직에 올랐다. 대충대충인 성격에 술 좋아해서 평은 역시 좋지 않았다. 산기상서, 시평태수 등을 역임했다.
이를 보면 알 수 있지만, 혜강이 사마소에 의해서 죽임을 당한 다음에 나머지 인물들도 모두 크건 작건 관직 경력이 있으며, 혜강마저도 그 전에는 벼슬을 지낸 적이 있다. 목숨걸고 관직에 안 오르고 그런 거 없다. 좋게 본 것이 관직에 올라서 술마시고 제대로 일 안했더라는 것이 고작이고, 심한 경우에는 열심히 일해서 고위관직에 오르다 못해 줄타기까지 한 인물도 나왔다. 이것을 고려하면 후대 인물들이 죽림칠현의 고매한 뜻을 왜곡해서 정작 이들의 평가마저 나빠졌다는 것이 신빙성을 잃게 된다. 이들 중에서 실제로 의식이 있어 보였다는 것은 혜강이나 산도가 출사했다는 것을 듣고 절교서를 보낸 완적 정도며, 나머지는 단순히 같이 묶여서 같은 평가를 받은 인물들일 뿐이다. 더구나 혜강은 조위와 일종의 부마라서 사마씨 집안과 관련해서 출사를 한다는 것이 어려웠으며 그 때문에 생을 마감했다는 것[3]이나 혜강이 세상을 떠날 때도 완적이 크게 말을 하지 못하다가 결국 혜강을 살해한 사마소의 총애를 받았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평가가 더더욱 박해지게 된다.

3. 죽림고회(竹林高會)의 원래 이름



훗날 고려에서 이들을 본딴 모임으로 죽림고회가 있으며, 처음에는 죽림고회로 쓰다가 나중에 죽림칠현으로 고쳤다.

4. 같이보기



5. 둘러보기




[1] 후한의 마지막 황제인 헌제가 퇴위 후에 임명된 산양공의 그 산양이다.[2] 산도의 아버지의 고종사촌(고모의 딸)이 사마의의 부인이 되는 장춘화이다.[3] 여기에 관구검이 반란을 일으키자 참여하려다가 산도의 만류로 그만둔 사례도 있다. 혜강은 세상이나 관직이 싫었던 것이 아니라 사마씨 정권이 싫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