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경공(통일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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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秦)나라의 제14대 군주. 진환공(秦桓公)의 아들. 진애공(秦哀公)의 아버지. 진(晉)나라와 싸운 기록이 많다.
1986년에 그의 무덤이 발굴되었는데 순장자가 182명에 묘실 크기가 60m, 너비 40m, 깊이 24.5m의 거대한 무덤이다. 은허에서 발굴된 상나라때 왕릉보다 10배나 큰 규격으로 주례에 규정된 제후의 묘를 넘어서는 크기이다. 이로써 춘추시대의 신분질서가 이미 상당히 흔들렸음을 알 수 있다. 한나라때부터 송나라에 이르기까지 숱한 도굴꾼들이 이 무덤을 도굴해서 200개가 넘는 도굴통로가 확인되었지만 그래도 1986년 발굴당시 청동기와 골기를 비롯해 3000여점의 유물이 발굴되었다.
2. 재위 기간에 일어난 사건들
진 경공 13년(기원전 564년), 진 경공은 사견을 파견해 초나라와 공동 작전을 펼쳐 진(晉)나라를 치려 했다. 이때 자낭이 진(晉)나라는 강하고, 진(秦)나라는 약해 하지 말라고 했으나 그것은 초공왕이 듣지 않았다. 같은 해 가을에 초 공왕이 병사를 몰아 구성에 주둔했다. 이때 진(秦)나라가 진(晉)나라를 쳤다. 결국 진(晉)나라가 패했다. 그 복수로 진도공(晉悼公)은 순앵(荀罌)을 보내 진(秦)나라를 쳤다.
진 경공 15년(기원전 562년), 초 공왕은 정나라를 쳤다. 그리고 자낭을 파견해 진나라에 원병을 요청하니 진 경공은 대부 첨을 시켜 구원을 가게했다. 정간공은 진(晉)나라 대신 초나라에게 붙었다. 같은 해 초나라는 정나라와 함께 진(晉)나라의 동맹국인 송나라를 치자 진(晉)나라가 송나라를 구원했다. 진 경공은 서장 포와 무를 보내서 정나라를 돕게 했다. 서장 포는 진나라의 국경으로 들어와 진나라의 장수인 사방을 쳤다. 그리고 서장 무는 보씨를 쳤다. 그리고 그리고 황하를 건넜다. 진(秦)나라는 역 땅에서 교전해 진(秦)나라가 대승했다. 이어 진(晉)나라는 정나라를 쳤다.
진 경공 16년(기원전 561년), 초나라는 자낭을 보내 양량의 진(秦)나라의 서장 무를 시켜 송나라를 치게했다. 같은 해 초 공왕은 사마 자경을 진(秦)나라로 보내 감사를 표하며 딸을 초나라로 시집보냈다.
진 경공 18년(기원전 559년), 진 도공은 순언(荀偃)을 보내 노나라의 숙손표, 제나라의 최저, 송나라의 화열, 중강, 위나라의 북궁괄, 정나라의 공손만, 조나라, 거나라, 주(邾)나라, 등나라, 설나라, 기(杞)나라, 소주(小邾) 등이 진(秦)나라를 쳤다. 거기에 견디지 못한 진(秦)나라가 패배했다.
진 경공 28년(기원전 549년), 진 도공이 죽고, 그 아들 진평공(晉平公)이 즉위하자 한기를 보내 진나라와 회맹했다.
진 경공 30년(기원전 547년), 진(晉)나라와 다시 회맹했다. 여름 진(秦)나라는 초나라와 함께 오나라를 쳐서 우루 땅을 쳤다. 그리고 진(秦)나라는 초나라와 함게 정나라를 쳐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진 경공 31년(기원전 546년), 송나라의 대부 상수가 제후들과 미명에서 회맹해 진(秦)나라에게 회맹하자고 했으나 거기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진 경공 36년(기원전 541년), 진 경공의 동복 아우인 후자 침이 모함을 받아 죽임을 당할게 두려워 진(晉)나라로 달아났다.
진 경공 40년(기원전 537년), 진 경공이 죽고 그 아들 영적(嬴籍)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 애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