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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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진(晉)나라의 제25대 군주. 진 문공의 아들로 핍길의 소생이다. 열국지에서는 진문공이 도피행을 벌이며 평민의 집에 맡겼다가 즉위한 뒤 찾게 된 아들이라고 한다. 진(秦)과 대립했던 군주로, 진 문공 생전에 이미 갈등의 조짐을 보이긴 했으나 진진지호(秦晉之好,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의 의좋음)라 일컬어질 정도로 한 집안 같이[1] 단합되어 있던 진진의 밀월 관계가 그의 대에 이르러 완전히 파탄나게 된다.[2]
2. 생애
2.1. 선진이 진 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다.
진 문공 9년(기원전 628년), 진 문공이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서 진나라의 군주가 된다.
진 양공 2년(기원전 627년), 진(秦)나라가 정나라를 습격하였다. 정나라와 진(晉)나라는 희성[3] 으로 성이 같았기 때문에, 선군인 진 문공 휘하의 명장이었던 중군 원수, 선진(先軫)이 정나라를 돕자고 진언했다. 그리하여 진 양공은 진 문공의 장례도 미처 치르지 못한 채 진 목공이 보낸 장수인 맹명시(孟明視)[4] 와 서걸출(西乞秫), 백을병(白乙丙)[5] 을 효산 전투에서 이겨 사로잡는다. 그런데 진(秦)나라 공주이자 진 문공의 아내 중 하나로, 진 양공에게는 적모(嫡母)가 되는 문영(文嬴)[6] 이 그에게 모국의 중신인 그들을 풀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했고 이에 결국 진양공은 세 장수를 풀어 준다. 그런데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선진이 격분해 포로를 풀어줌은 곧 적을 강하게 만듬이니 아녀자의 말만 듣고 어리석은 자가 일을 엉망으로 처리했다며 진 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는다(!). 오늘날의 기준으로도 보더라도 대단한 무례고 하극상이니, 명예를 중시하고 엄격한 신분 질서가 유지되던 당시로서는 감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놀랍게도 진 양공은 너그러이 선진을 용서하였을 뿐 아니라 표현이야 어찌 됐든 그의 항의 자체는 충분히 일리 있다고 여겨 풀어 준 진나라 장수들을 도로 잡아들이게 했으나 실패하고 만다.
2.2. 그 뒤의 치세
적족이 기(箕)를 침략해오자 진 양공은 이들을 8월에 물리쳤다. 하군의 대부, 극결(郤缺)이 적족의 군주인 백적자(白狄子)를 사로잡았으나, 총수인 선진은 이미 승기를 잡은 상황에서 '''일부러 적진에 뛰어들어 장렬히 전사했다.''' [7] 싸움이 끝난 뒤 진 양공은 선진의 아들인 선차거(先且巨)에게 아비의 직위인 중군의 원수를 그대로 잇게 하였고, 결정적인 공을 세운 극결을 경으로 임명한다. 덕분에 극결은 아버지 극예(郤芮)가 진 문공을 암살하려다 발각된 이래 크게 실추되었던 가문의 명예를 되찾고 잃었던 옛 식읍인 기(冀) 땅도 돌려받게 된다. 더불어 극결을 천거한 서신 또한 은상을 받았다.
같은 해 겨울에 진(秦)나라, 정나라와 함께 허나라를 쳤다.
진 양공 3년(기원전 626년), 진 문공의 상을 마치고, 제후들과 함께 위나라를 쳤다. 이유는 주나라에 입조하지 않았을 뿐더러 진과 회맹한 정나라를 쳤기 때문. 사실 진 양공도 조현하지 않을 뻔했지만 선차거가 입조할 것을 진언한 덕분에 위나라와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피했다. 선차거와 서신에게 위나라를 치게 해 척(戚) 땅을 포위하고 6월에 점령해 위나라의 손소자(孫昭子)를 사로잡는다.
진 양공 4년(기원전 625년), 진 목공이 효산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해 맹명시를 보내 공격해 왔다. 그런데 2월 팽아 땅에서 진(晉)군은 도리어 이를 격퇴하였으며, 겨울에 송나라의 공자 자성, 진나라의 규원선, 정나라의 공자 희귀생과 함게 진나라의 왕(汪) 땅을 빼앗고 팽아까지 쳐들어가 일전의 침입에 대해 톡톡히 보복한다. 다만 이때 획득한 땅들은 나중에 맹명시가 되찾아 간다.
진 양공 5년(기원전 624년), 진 목공이 친히 진나라를 공격해 왕관(王官) 땅을 차지하였으며, 또 효산에 행차해 과거 전투에서 사망한 장병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제를 지낸다. 진나라 조정에서는 크게 분개하였으나 이를 어쩌지 못한다. 한편 초나라가 강나라를 포위하자 진 양공은 주나라에 표문을 올리고 양처보를 파견해 강나라를 돕게 하여 결국 초나라를 저지하는 데 성공한다.
같은 해 노나라와 회맹하는데 예전에 회맹할 적에 굴욕을 주었던지라[8] 이번에는 좀 신경을 써 노나라 군주를 맞이한다.
진 양공 6년(기원전 623년), 진의 신성을 빼앗아 왕관 땅의 치욕을 갚아 주었다.
진 양공 7년(기원전 622년), 조최(趙衰)[9] , 난지(欒枝), 호언(狐偃), 선차거가 죽었다. 조최의 자리는 그의 아들인 조돈(趙盾)[10] 이 잇는다.
진 양공 8년(기원전 621년), 이(夷) 땅에서 군대를 사열한다. 2군을 폐지하여 군을 재편하고 작년에 대신들이 죽어서 생긴 공백을 메우고자 사곡(士穀)을 중군 원수, 양익이(梁益夷)를 중군 보좌로 삼고 기정보(箕鄭父)와 선도(先都)를 등용하려 하지만, 선극의 반대로 그의 말을 따라 호역고(狐射姑)를 중군 원수에, 조돈을 그 부장으로 삼는다. 그런데 때마침 공무로 위나라에 있다 돌아온 양처보가 조돈[11] 을 극력 추천하자, 그를 받아들여 동(董) 땅에 다시 군대를 사열하고 조돈과 호역고의 관직을 바꾸었다. 과연 양처보의 예측이 들어 맞아 조돈은 그 지위에 걸맞는 기량을 발휘해 나라를 잘 이끌어 간다.
그리고 이 해 진 양공이 죽는데 세자인 희이고가 너무 어렸던 탓에 대신들 사이에서 그의 자격을 두고 다소 논란이 일기도 했지만 어찌어찌 선친의 뒤를 이어 진 영공으로 즉위한다.
3. 후일담
당초 즉위할 무렵 진 영공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조돈이 섭정을 한다. 그러나 진 영공은 장성할수록 철이 들기는 커녕 점점 삐뚤어져 명색이 일국의 군주라는 작자가 궁궐 지붕에 올라가 탄궁[12] 으로 백성을 쏘는 것을 즐기지 않나, 사소한 실수를 빌미로 사람을 잔인하게 죽이는 등 온갖 비행을 저지르게 된다. 조돈이 이를 말리기 위해 간언하지만 진 영공은 그 말을 듣기 싫어 조돈을 살해하려 하다가 오히려 조돈의 종제(從弟)인 조천에게 죽임당한다. 이에 숙부이자 진 문공의 아들인 희흑둔이 진성공으로 즉위하나 10년을 못 채우고 사망한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인 진경공이 군위에 오르는데, 그는 오나라를 이용해 숙적 초나라를 견제하는 등 나름대로 업적을 쌓아 유능한 군주로 평가 받는다.
그런데 진 경공은 그 최후가 다소 어이가 없는 게, 볼일을 보다가 변소에 빠져 죽었다. 아무튼 그렇게 진 경공이 대단히 보기 드문 방식으로 허망하게 세상을 떠나고 진여공이 자리를 물려 받는데, 그는 처음에는 나라를 그럭저럭 다스렸으나 점차 실태를 드러내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숫제 대부들을 몰아내고 총애하는 후궁의 형제들로 관직을 채우는 기행을 벌인다. 게다가 비록 권신이긴 하였지만 재능 만큼은 뛰어난 인물들이었던 극기, 극주, 극지를 대뜸 살해하는 등 폭거를 일삼다가 결국 난서와 중항언에게 살해된다. 그 뒤를 이은 이가 진 양공에게는 증손자가 되는 진도공으로, 그의 치세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진나라는 안정을 되찾게 된다.
[1] 아닌 게 아니라 진목공(秦穆公) 이래 양국 공실은 계속해서 혼인을 거듭해 인척 관계를 맺고 있었다.[2] 단 이것이 진 양공 탓은 아닌 게, 진(秦)의 입장에서 중원 지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어찌 되었든 앞을 가로막고 있는 진(晉)을 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대립할 수 밖에 없었던 것.[3] 이 성이 바로 주나라 왕실의 국성이다.[4] 본명은 백리시(百里視)로 진 목공의 재상인 백리해의 아들이다. 자(字)가 맹명. 맹명시라고 한 것은 고대 중국에서는 누군가를 가리킬 때 자에 휘(諱)를 붙여 불렀기 때문. 대표적인 예가 '공숙량흘'로 잘 알려진 공자의 아버지, 공흘(孔紇).[5] 건숙(蹇叔)의 아들들로 본명은 건출(蹇秫), 건병(蹇丙).[6] 바로 진 목공의 딸이자 진 문공의 정실이었던 회영(懷贏)이다. 적모라고 표현한 것은 개요에서 밝혔듯 진 양공은 그녀가 아니라 진 문공의 다른 부인인 핍길의 소생이었기 때문.[7] 선진이 이런 기행을 벌인 이유는 진 양공의 얼굴에 침을 뱉은 것을 책임지기 위함이다. 비록 주군이 자신을 용서해 줬다고 하지만 나중에 다른 이들에게 참소를 당할 수 있으므로 공을 세우고 의도적으로 자살한 것.[8] 일개 대부인 양처보와 노나라 군주인 노 문공을 결맹하게 했다. 대놓고 '너희는 우리보다 아래다.'라고 모욕을 한 셈.[9] 조쇠가 아니라 조최라 읽는다.[10] 조순이 아니라 조돈이라 읽는다.[11] 양처보는 조돈의 아버지인 조최의 부하였다.[12] 활과 비슷하지만 화살 대신 돌멩이를 쏘는 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