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목공
[clearfix]
1. 소개
춘추시대 진나라(秦)의 제10대 군주. 인재를 기용해 진양왕 때 주왕에게서 받았던 서융의 땅을 획득하고 동쪽으로 진출을 꾀해 춘추오패 중 한 사람으로 거론된다.
2. 생애
2.1. 초기 치세
진목공 원년(기원전 659년), 진목공은 군사를 이끌고 모진(茅津) 땅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진목공 4년(기원전 656년), 진목공은 진(晉)나라 군주 헌공의 딸이자, 태자 신생의 누이와 결혼하게 되었다.
2.2. 백리해와 건숙을 등용하다
진목공 5년(기원전 655년), 진헌공이 결혼 예물로 진(晉)나라가 멸망시킨 우(虞)나라의[1] 신하인 백리해(百里奚)를 혼인 선물로 보냈다.
우나라 사람 백리해는 재주가 뛰어났는데 몹시 가난하여 출세하기 위해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가 결국 쓰이지 못하고 귀국해 작은 벼슬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일흔이 넘은 나이에 예물로 보내지는 신세를 굴욕스럽게 생각한 백리해는 진(秦)나라에서 초나라로 도망쳐 말을 기르는 일을 맡았다.
진목공은 공손지(公孫枝)에게서 백리해가 인재라는 사실을 듣고서 등용하고 싶었다. 그러자 공손지가 조언하길 '초왕이 아직 백리해의 진가를 몰라 하찮은 일을 시키는 것인데, 지금 많은 선물을 주고서 넘겨달라 하면 초왕이 순순히 내줄 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추노를 구실로 아주 적은 몸값을 내주시지요.'라고 했고, 과연 고작 오고양피(五羖羊皮)[2] 를 주고 백리해를 사올 수 있었다. 진목공은 백리해와 대화를 나눠보고 몹시 흡족해하여 대부 자리를 주고 국정을 맡겼다. 이로 인해 백리해는 '오고대부(五羖大夫)'로도 불린다.
진목공이 인재를 찾자 백리해는 옛날 건숙과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주었다.
가난을 견디다 못한 백리해가 제나라로 가려고 하자 건숙이 말려 가지 않았다. 이 무렵 제나라를 다스리던 제양공은 여동생 문강과 근친상간을 하고 문강의 남편 노환공을 모살한 희대의 패륜을 벌였고, 이후 평소 처우에 불만을 품은 공손무지가 제 양공을 살해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그 뒤에 다시 공손무지가 살해당하고 왕위에 오른 인물이 춘추 오패의 첫 번째로 꼽히는 유명한 제환공과 관중.
가난을 견디다 못한 백리해가 주나라로 가려 하자, 건숙이 역시 말렸다. 이 무렵 주왕은 흔히 '왕자 퇴(頹)'라고 하는데, 주혜왕의 숙부 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취미가 소 키우는 것이어서(...) 소나 말 키우는 재주가 있던 백리해가 이를 노린 것이다. 그런데 자퇴는 처우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켜 주 혜왕을 몰아내고 천자가 되었다. 하지만 자퇴는 민심을 얻지 못했고, 마침 주나라 왕실과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고 싶었던 정나라가 군대를 일으켜 자퇴를 주살하고 주 혜왕을 복위시켰다.
가난을 견디다 못한 백리해가 우나라로 가려고 하자 건숙이 또 말렸다. 하지만 백리해가 이번만큼은 건숙의 말을 듣지 않고 우나라로 가서 신하가 되었다. 하지만 우나라는 얼마 못 가 멸망하고 만 것이다.
백리해의 말을 들은 진목공은 건숙이 인재임을 알고 신하로 삼았다.
2.3.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의 항쟁
진목공 9년(기원전 651년), 진(晉)헌공이 죽고 군위 쟁탈전이 일어나자, 진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진(晉)혜공이 고국으로 돌아가면 영토를 양도하는 조건으로 진나라를 떠나 진(晉)의 왕이 되었다. 하지만 진혜공은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하지만 진목공은 아무런 질책도 하지 않았다.
진목공 12년(기원전 648년), 진(晉)에 흉년이 들자 곡식을 원조해달라 요청했다. 신하들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은 진(晉)나라에는 양식을 보내지 말자고 주청했지만 진목공은 '진(晉)의 백성은 죄가 없다.'라면서 양식을 보내주었다.
진목공 14년(기원전 646년), 이번엔 진나라에 기근이 들자 진(晉)나라에 원조를 요청했다. 하지만 괵석(虢射)이라는 신하가 진나라의 기근을 틈타서 공격하면 큰 공을 세울 수 있다고 하였고, 진 혜공은 그의 의견을 따랐다(...)
진목공 15년(기원전 645년), 진혜공은 배은망덕하게도 이 기회를 노려 진나라를 침략하여 한원(韓原)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때 진 목공은 진 혜공의 군대에 포위를 당해서 위험한 상황에 처했는데 뜬금없이 300명 군사가 나타나 진목공을 구출한다. 과거 진 목공이 명마를 잃어버렸는데 도둑을 잡고보니 굶주린 야인들이 진목공의 말을 잡아먹어 버린 상태였다. 관리는 즉각 처형하자고 주청했지만 진목공은 짐승 때문에 사람을 해칠 수는 없다며 그들을 풀어주고 '고기만 먹으면 속을 버릴 테니 곁들여 먹으라.'라고 술까지 내려주었다. 이때 목숨을 구한 야인들이 진목공에게 은혜를 갚기 위해 나타난 것이다. 위기를 넘긴 진목공은 진혜공을 격파해 사로잡는다. 그는 배은망덕한 진혜공을 대번에 죽이려 했으나 목공의 아내인 혜공의 누나가 동생을 살려달라고 간청하고, 천자인 주양왕도 한 번 봐주면 어떻겠느냐고 권유해 죽일 생각을 접는다.
대신 같은 해 11월, 진목공은 진혜공을 진나라로 돌려보내주는 대신 태자 어를 인질로 요구하고 자신의 딸과 진혜공의 태자 어를 결혼시켰다. 그리고 예전에 약속받은 하외의 성 다섯 곳을 가져간다.
진목공 22년(기원전 638년), 진혜공이 병을 얻어서 위독하였다. 태자는 자신의 부인인 진목공의 딸을 버리고, 진나라 군위를 계승하기 위해서 진(晉)나라로 도망갔다. 말도 없이 도망을 가버린데다 자기 딸까지 내팽개 쳤으니 진목공은 격분한다.
진목공 23년(기원전 637년), 진(晉)나라로 돌아온 태자 어는 같은 해에 사망한 진혜공의 뒤를 이어서 진(晉)회공이 되었다.
진목공 24년(기원전 636년) 봄, 화가 많이 난 진목공은 진(晉)나라로 사신을 보내 전국을 유랑하던 공자 중이를 귀국시킨다고 통보하였다. 2월 공자 중이가 진나라의 국군으로 즉위하니 그가 바로 진(晉)문공이다. 그리고 진문공은 사람을 시켜서 진회공을 죽였다.
같은 해 가을, 한편 주양왕의 동생 대(帶)가 적(翟)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주양왕을 공격했고, 주양왕은 정나라로 도망갔다.
진목공 25년(기원전 635년), 주양왕이 진(秦)나라와 진(晉)나라에게 사신을 보내어서 주나라에 난리가 일어난 것을 알렸다. 이에 응답한 진목공은 진문공을 도와서 양왕의 동생 대를 죽이고, 주양왕을 낙읍으로 돌아가게 해주었다.
진목공 32년(기원전 626년) 겨울, 진문공이 사망하였다. 진목공은 정나라를 얻기 위해 군대를 출격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정나라는 진(晉)나라를 넘어서 멀리 있었기 때문에 백리해와 건숙 등 여러 신하들이 모두 반대했지만, 진목공은 기어이 백리해의 아들 맹명시, 건숙의 아들 서걸술과 백을병을 보내 정나라 정복을 추진했다. 이때 정나라의 상인인 현고가 진나라의 군대가 정나라를 침공하려는 걸 미리 알고는 꾀를 냈다. 현고는 진나라 장군들에게 가서 정나라는 이미 모든 전쟁 준비를 갖추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는 뜻으로 정나라 왕이 선물로 보낸 것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소를 줬다. 진나라 장군들은 정나라가 적군에게 선물까지 할 정도로 자신만만한 것을 보니 정말 전쟁 대비를 확실히 했다고 믿게 되었다. 그래서 정나라 공격을 포기하고, 그렇다고 빈 손으로 본국으로 귀환할 수 없으니 진(晉)나라의 속국을 대신 공격했다.
진문공의 아들 진(晉)양공은 자신의 아버지인 진 문공의 장례가 끝나지도 않았는데, 진나라가 자신의 속국을 공격한 것에 분노하여 진나라 군대를 물리쳤다. 그리고 포로로 잡은 진나라의 세 장군들을 모두 처형하려 했지만 태후였던 진목공의 딸이 계책을 써서 이들을 살렸다. 그 계책이란 게 뭐냐면, 진목공은 패전 때문에 세 장수에게 원한이 깊을 터이니, 세 장수를 진나라에 돌려보내 진목공이 통쾌하게 삶아 죽일 수 있도록 하자는 간언이었다. 이 말을 따른 진(晉)양공은 이들을 처형하지 않고 진나라로 돌려보냈다.
세 장수가 진나라로 돌아오자, 진목공은 소복을 입고 그들을 교외까지 직접 나와 맞아하고는 울면서 "내가 백리해와 건숙의 말을 듣지 않아 그대들을 욕되게 했으니 그대들이 무슨 죄가 있겠소? 그대들은 이 치욕을 씻기 위해 마음을 다하고 나태히 하지 마시오."라고 말하며 이들을 벌하지 않고 더욱 후하게 대했다.
2.4. 유여를 등용하다
진목공 34년(기원전 624년), 서융에서 신하로 온 유여(由餘)라는 사람이 있었다. 진목공은 진나라의 위엄을 보여주기 위해 화려한 진나라 궁궐을 보여줬지만 유여는 '이 궁궐을 짓기 위해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피땀을 흘렸을 지' 한탄하면서 오히려 진목공에게 창피를 줬다.
그러자 진목공은 유여가 인재임을 알아보고 유여를 얻기 위해 계책을 썼다. 우선 유여가 서융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시간을 끌며 억류하는 한편 서융의 왕에게 16명의 미인을 보냈다. 가까스로 유여가 서융으로 돌아왔을 때 이미 서융의 왕은 진나라에 오랜 세월 머물었던 유여를 의심하는 한편 미인들을 가까이 하느라 정사를 돌보지 않았다. 이때 진목공의 신하가 유여에게 접근하여 설득했고 결국 서융에 희망이 없음을 깨달은 유여는 진목공의 신하가 되었다.
유여는 진목공에게 서융을 정벌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진 목공은 이를 그대로 실행해 진양공 때 주평왕에게 받았던 서융의 12개 땅을 얻을 수 있었다.
2.5. 진(晉)나라와 다시 전쟁하다
진목공 36년(기원전 622년), 진목공은 맹명시 등에게 다시 명해 진(晉)나라를 공격했다. 강을 건너자 진나라의 군대는 배를 불질러 버리고 배수진[3] 을 쳐 진(晉)나라를 공격했는데 진(晉)나라의 군대는 진나라의 사기에 눌려 피해만 다니다가 결국 진나라가 승리하여 과거의 패배를 설욕했다.
2.6. 진목공의 사망과 순장
진목공 37년(기원전 621년), 진목공은 사망한다. 진 목공이 죽자 당시 진나라의 풍습에 따라 순장된 사람이 177명에 달하였고 진나라는 진목공 때의 강성함을 그대로 이어가지 못하였다.[4] 이 때문에 사기 등에서 진 목공이 저평가되기도 한다.[5]
이 순장에 대해선 당대뿐만 아니라 후일까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자거씨(子車氏)[6] 의 세 아들 엄식, 중항, 겸호의 순장에 대한 논쟁이다. 이 세 사람은 매우 어질고 뛰어나 진 목공이 중용했을 뿐만 아니라 백성들의 우러름도 받았다. 그런 세 사람이 순장되자 진나라 백성들은 이들의 죽음을 안타까워하고 나라를 원망하는 <황조>라는 노래를 지어 불렀고, 공자는 이를 시경에 수록했다. 그리고 좌구명은 춘추좌씨전에서 이를 언급하며, 이후 진나라가 (상앙 이전까지) 동쪽으로 진출하지 못한 이유를 알겠다고 비판하는 등 대체로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다.
반면 소동파는 이에 대해 "진 목공이 살아 생전 세 번 패한 맹명시[7] 도 죽이지 않고 용서했는데, 어찌 어진 세 사람을 순장시킬 수 있겠냐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세 사람은 누군가의 강요로 순장된 것이 아니라 진목공에게 입은 은혜[8] 를 갚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바쳤다고 말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내용이 응소가 한서에 남긴 각주에 있는데, 어느 한 번은 진목공이 대신들과 술을 마시다가 '살아서 같이 즐거움을 누리고 죽어서 같이 슬퍼하자'고 말하자 엄식 등이 그리하겠다고 약속하였고, 진목공 사후에 셋이 따랐다고 한다.
여하튼 순장 부분이 아무래도 진목공 생전의 모습과 크게 대비되어서 생기는 논란이라고 할 수 있다.
3. 논란
춘추 오패로서 제환공(齊桓公), 진문공(晉文公), 초장왕(楚莊王) 등 세 사람은 논란 없이 들어가지만 진목공은 논란의 여지가 많다. 자세한 내용은 춘추오패 항목을 참고할 것.
[1] 바로 이 이야기가 고사성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유래이자 병법 36계 가운데 하나인 가도벌괵(假道伐虢)이다. 즉 우나라의 길을 빌어 이웃한 괵나라를 친 뒤 돌아오는 길에 우나라까지 병합해 버렸다.[2] 검은 염소 다섯 마리의 가죽. 중국 고대 문헌에 나오는 羊은 원래 염소를 말한다.[3] 배수진은 한신의 전략으로 유명하지만 한신보단 항우가 먼저 했고 항우보다 진목공이 더 먼저했다.[4] 훗날, 순장이 폐지되고 상앙이 등장하여 대대적인 개혁을 하며 진나라는 다시 강대국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5] 이에 대해 '순장은 진 목공 이전부터 내려오던 풍습이라서 진목공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 없다'며 진 목공을 변호하는 의견도 있다.[6] 이 경우에는 車를 '''차'''로 읽지 않고 '''거'''로 읽는다.[7] 본명은 백리시로 위에 언급된 백리해의 아들이다. 앞에서 진의 포로가 되었다가 풀려나고 배수진을 쳐 승리를 거두는 게 모두 맹명시의 지휘하에서 발생한 일이다.[8] 비록 천거받았다지만 이들을 중용한 사람은 진목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