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image]
1. 개요
昌德宮 摛文院 測雨臺.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조선시대의 강우량 관측기구 세트의 일부로, 1782년(정조 6년)에 제작되어 창덕궁 이문원(摛文院) 앞마당에 설치하였다. 본 측우대의 네 측면에는 측우기의 내력을 설명한 명문[측우기명 測雨器銘][1] 총 365자가 새겨져 있기 때문에 귀중한 역사적 자료이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대리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대리석 측우대라고도 불린다.
측우대는 일반적으로 잘 알려진 측우기 그 자체는 아니며, 정확하게는 측우기를 올려놓는 받침대를 지칭한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와 함께 세트로 있던 측우기는 현재 소실되고 없다. 하지만 본 측우대의 보존상태가 상당히 양호하며, 측우대에 새겨진 명문만으로도 조선시대에 강우량 측정 제도가 있었음을 충분히 증명할 수 있어 그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이미 1985년에 창덕궁 측우대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844호로 지정되었으나, 그로부터 35년이 지난 2020년 2월 27일에 그 과학사적 중요성을 인정받아 공주 충청감영 측우기,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 등과 함께 국보로 승격 지정되었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국보 제331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 상세정보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의 높이는 30.3㎝, 넓이는 45.3×45.5㎝이고, 윗면에는 지름 16.2㎝, 깊이 4.3㎝의 구멍이 뚫려 있어 여기에 측우기를 꽂아 올려 놓게 되어 있다. 또한 본 측우대는 조선 정조 6년인 1782년에 만들어져서 창덕궁 이문원[3] 앞마당에 설치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본 측우대의 앞뒤좌우 네 면에 새겨진 명문을 통해서 확인된다. 또한 이문원 앞에 설치된 이후로 1910년경까지 원래 있던 자리에 계속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조선시대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대석(臺石)이다.
원래는 측우기와 측우대는 창덕궁 내 이문원(摛文院, 규장각의 부속건물) 앞에 설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라고 부른다. 현재 측우기는 남아있지 않다.
측우대의 4면에는 측우기를 세우게 된 연원과 당시의 내력이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이 측우대 위에 놓였던 측우기는 1770년(영조 46)에 세종대의 제도를 따라 만들었으며, 1782년(정조 6) 여름에 기우제를 지낸 후 비가 내렸고,정조의 명으로 측우기를 설치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시대 왕실유물에 많이 쓰인 대리석으로 만들었다.
이 측우대는 세종 조에 시작한 조선 측우기 제도가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실증(實證)해주는 유물이다.
국립고궁박물관 :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소개문[2]
흥미롭게도 19세기 초엽에 그려진 동궐도에 묘사된 물체들 가운데 본 측우대도 찾아볼 수 있다. 링크 참조 : 네이버 블로그 측우기(기상청 기상역사팀) - 동궐도 속 측우기ㆍ측우대와 기상ㆍ천문 관측기기들
다만, 1910년경에 들어서는 이미 대리석 표면이 비바람에 깎여진 바람에 새겨진 글자에 손상이 가서 그 내용을 온전하게 읽기가 어려웠다. 하지만 ≪한경지략 漢京識略≫에 측우기명의 전문이 실려 있다는 것이 과학사학자 전상운(全相運)의 연구에 의해 발견돼서 다행히도 명문의 내용을 알 수 있게 되었다. ≪한경지략≫은 1820년대에 저술된 책으로, 저때만 해도 측우대 표면이 완전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었음을 뜻한다. 따라서, 측우기명의 완전 해독은 ≪한경지략≫의 기록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다만 기록 중 측우기가 1442년(세종 24)에 발명된 것 같이 적혀 있는 것은 결정판에 따른 결과이고 1441년에 발명된 것은 확실하다.
1920년경에 이 측우대는 당시 경성박물관 앞 계단으로 옮겨 놓았다가 6·25전쟁 시기를 지나서는 창경궁 명정전 뒤로 옮겨 전시하였다. 다행인 점은 일제시대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도 본 측우대 자체에는 큰 손상이 없이 상태가 양호하게 전해진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대단히 아쉬운 점은 측우대 위에 올려져 있던 측우기가 일제시대를 거치면서도 계속 남아 있었지만 6·25전쟁의 난리통은 못 이기고 결국 사라져 버렸다는 것이다.[4] 이후 본 측우대는 1960년대 말에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가 또 1970년대 후반에 여주의 영릉진열관으로 옮겨지는 등 이리저리 떠돌아 다니다가 지금은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5]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아쉽게도 측우기 실물은 함께 전해지지는 않지만,[6] 명문이 잘 남아있어 제작연대를 명확하게 확인할 수 있고 동궐도에 그려진 모습을 통해서도 그 실체가 확인되며, 전래 및 입수 경위도 분명하여 그 가치가 높다. 이 뿐만 아니라 본 측우대는 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함께 조선시대에 세계 최초로 국가 단위로 행해진 체계적이며 표준화된 강우량 측정 제도가 있었다는 것을 실제 유물로써도 증명하는 귀중한 문화재이기도 하다. 따라서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한반도 과학사 연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자료라 할 수 있다.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는 익히 그 가치를 인정받아 1985년 8월 9일에 보물 제844호로 지정되었으나, 학술적인 여러 측면에서의 중요성을 고려하여 2020년 2월 27일 국보 제331호로 승격 지정되었다.
3. 바깥고리
- 한국어 위키백과 :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 국립고궁박물관 :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소개문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측우대
- 한국 미의 재발견 - 과학문화 :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 시사상식사전 :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 두산백과 :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
- 두산백과 : 측우대
- 네이버 블로그 측우기(기상청 기상역사팀) : 동궐도 속 측우기ㆍ측우대와 기상ㆍ천문 관측기기들
- 한국어 위키백과 : 창덕궁 측우대
- 문화재청 홈페이지 : 창덕궁 측우대 (昌德宮 測雨臺)
4. 국보 제331호
국보 제331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昌德宮 摛文院 測雨臺)’는 1782년(정조 6) 정조의 명에 의해 창덕궁 규장각의 부속 건물인 이문원(摛文院)앞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이는 측우대 좌우 네 면에 새겨진 ‘측우기명(測雨器銘)’과 19세기 궁궐그림인 <동궐도(東闕圖)>를 통해 확인된다. <동궐도>에는 이문원 앞뜰에 받침돌 없이 놓인 것으로 그려진 측우대 한 기가 그려진 것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이다.
석재는 조선시대 왕실유물에 많이 쓰인 대리석(당시는 대리암으로 불림)으로, 잘 다듬어 유려하게 새긴 글씨 또한 중앙의 장인이 제작했음을 보여준다. 이문원 측우대는 1910년경까지 원래 자리에 있다가 이후 경성박물관으로 옮겨졌고 창경궁 명정전, 덕수궁 궁중유물전시관을 거쳐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측우대의 겉면에 새겨진 ‘측우기명’은 내각일력(內閣日曆) 1782년 9월 14일 기사와 <한경지략(漢京識略)>에도 수록되어 있어 전체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명문은 창덕궁 이문원에 측우기를 세우게 된 연원과 그 중요성에 대한 내용으로, 다음의 중요한 몇 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첫째, 측우기는 세종 24년에 구리로 주조하였으며 높이 1자 5치(1척 5촌), 직경 7치라는 사실, 둘째, 1770년(영조 46)에 세종 대의 제도를 따라 측우기를 만들고, 창덕궁, 경희궁, 팔도(八道), 강화부, 개성부에 설치하였다는 사실, 셋째, 1782년(정조 6) 여름에 기우제(祈雨祭)를 지낸 후 비가 내렸고 정조의 명으로 규장각 이문원 뜰에 측우기를 설치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명문을 통해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기우제를 통한 특별한 소망의 대상으로 제작되었을 뿐 아니라 세종 조에 시작한 조선 측우기 제도가 영조 대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을 구체적으로 실증(實證)해주는 유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국보 제331호 ‘창덕궁 이문원 측우대’는 1442년(세종 24) 조선에서 농업에 활용하고자 세계 최초로 측우기와 측우대를 제작한 이후 조선 후기에도 전통이 면면이 이어져왔음을 보여주는 유물로서,‘공주 충청감영 측우기’,‘대구 경상감영 측우대’와 함께 국보로 지정해 우리나라 전통과학의 우수성과 그 위상을 국내외에 널리 알릴 가치가 충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