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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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선의 왕실 도서관 및 기록원
1.1. 개요
한자로는 奎章閣으로 조선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 서화, 유교(遺敎) 등을 관리 및 보관하던 곳이다. 최초로 이를 구상했던 사람은 7대 왕인 세조로, 1464년에 양성지의 건의로 처음 설치하였으나 세조가 사망한 후 곧 폐지하였고, 훗날 정조 때 다시 부활하였다. 세조 때는 어제존각지소(御製尊閣之所)라고도 불렸으며, 세조 사후 폐지되어 건물이 황폐화되자 1694년(숙종 20년)에 세조가 친히 쓴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액자를 종정시(宗正寺)의 환장각(煥章閣)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세조 때 규장각을 설치한 후 우리 나라 최초의 왕조 시문집인 열성어제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내각일력에는 규장각의 업무나 문화 사업에 관련된 일을 모두 실려있다.
1.2. 구성
관원은 제학(提學) 2인, 직제학(直提學) 2인, 직각(直閣) 1인, 대교(待敎) 1인, 검서관(檢書官) 4인이 있었다. 강화도에 외규장각이라는 분관이 있었다.
1.3. 의의
규장각의 의의는 역대 국왕의 어제나 어필을 보관하는데에도 있었지만 당시 왕권을 위태롭게 하던 척신들의 음모와 횡포를 누르고 신하 중 학식, 경륜이 뛰어났던 사람들을 모아 경사를 토론시키고, 정치의 득실,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등 다방면에 걸친 시폐를 개혁하는 것에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예절과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으나 실질적으로는 국왕의 선택을 받은 측근들이 왕을 보좌하며 왕권 강화를 꾀하는 참모기구로 운영되었다.
1.4. 변질과 폐지
하지만 정조 사후 조선이 급격히 무너지면서 세도 가문인 여흥 민씨들이 출세하는 중앙 통로가 돼버렸다. 그래서 갑신정변 때 폐지를 주장하기도 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하여 궁내부에 소속되다가 1895년에 규장원으로 개칭되었으나, 1897년에 다시 규장각으로 개칭되었다. 하지만 결국 1910년 국권 피탈로 폐지되었다.
1.5. 청사
1.6. 창작물
- KBS1에서 방영되었던 성균관 스캔들의 원작 성균관 유생들의 나날의 후속작인 규장각 각신들의 나날의 작중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1.7. 기타
- 여기서 술판을 벌이면 10월 26일에 사람이 총에 맞아 죽는 저주가 있다. 피해자(?)는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이다.[차길진의 갓모닝] 664. 규장각의 저주
1.8. 유사기구
1.8.1. 한국
1.8.1.1. 국립
1.8.1.2. 사립
1.8.2. 외국
1.9. 같이 보기
2. 서울대학교 규장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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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 奎章閣韓國學硏究院
정식 명칭은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이다. 2006년 2월 1일자로 서울대학교 학내 기관인 기존의 규장각과 한국문화연구소를 통합하여 설치한 엄연한 '''연구 기관'''이다. 홈페이지 주소는 http://e-kyujanggak.snu.ac.kr.
1번 항목 규장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주요 고문헌을 보관, 전시하고 있다. 조선총독부에서는 조선의 구관제도(舊慣制度)를 조사하며 조선의 고전적을 다수 수집하였는데 당시 조선 관청에서 보관 중인 고전적을 통째로 인수하였다. 이 고전적들은 처음에는 총독부 참사관실 등에서 조사하고 정리하여 보관하였고 후에 일부는 이왕가로, 나머지는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다. 이왕가로 이관된 고전적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으로 옮겨졌고,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된 고전적은 서울대학교에서 인수한다. 이런 이유로 현재 규장각에는 본래 규장각 장서 이외의 자료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이외에 일본이 조선을 식민지로 재편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행정 문서[1] 도 일부 보관하고 있다.
2014년 2월 기준으로 우리나라 고문서, 고서 자료 총 32만 7736점을 소장했다. 한국국학진흥원 및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장서각[2] 과 함께 공공기관의 한국학 연구지원을 중점적으로 받는 명실상부한 3대 축으로 한국 사학도, 특히 조선시대를 전공하는 사학도에게는 그야말로 성전이나 다름없다. 조선시대 관련 논문을 쓴다면 반드시 한 번쯤은 들러서 자료를 수집해야 하는 곳이다. 조선왕조실록 정족산본도 이 규장각에서 보관한다. 규장각 소장 고서는 서울대학교 도서관 소장 고서와도 완전히 별도 차원에서 관리된다.
무턱대고 간다고 해서 바로 고문헌 원본을 볼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규정상 대체본 열람이 우선이기 때문에 마이크로 필름(MF)나 복사본으로 보는 경우가 많다. 대체본이 없어 원본을 봐야 한다면 열람 예정일보다 며칠 정도 빨리 예약 신청하는 것이 열람에 편리하다. 또한 고문헌 이미지, PDF 등이 홈페이지에서 제공되는 경우가 있으므로, 규장각 홈페이지에서 미리 확인해보기를 권장한다. 게다가 아직도 제대로 정리, 연구되지 않은 문헌이 있을 정도로 그 양이 방대하다.[3]
이 규장각 덕분에 서울대학교 국사학과는 한국 사학계에서 상당한 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규장각에 재직했거나 재직 중인 박사급 연구원들의 실적이 한국 사학계 전체의 연구실적으로 증명된다.[4] 타 대학원의 연구자들도 규장각 자료를 활용하기 위하여 직접 서울대까지 발품을 팔거나 적지 않은 돈을 자료 복사에 쓰곤 한다. 한편 규장각 소장 고문헌들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서울대학교 안의 모든 자료, 기자재 중 '''가장 먼저''' 소개(疏開) 및 남쪽으로 이관하도록 하는 대상이라는 설이 있는데, 진위 여부는 확실하지 않다.[5]
서울대의 학내 기관이지만 서울대 학생이라고 해도 이런 곳이 있는 줄 모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중앙도서관을 기준으로 인문계와 자연계의 생활 권역이 많이 다르기도 하고 졸업 사진을 찍을 때 아니면 가 볼 일도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과학대학을 기준으로 하면 바로 코앞에 있기 때문에 이곳 학생들은 이런 시설이 있다는걸 모르는게 이상하다. 서울대입구역이나 대학동 방향의 셔틀버스, 서울 버스 5516의 정류장에서 두리번거리다가 보이는 기와 지붕 얹은 건물이 규장각이니 생각보다 멀리 있지 않다. 그리고 연구 기관임에도 이상하게 초등학생이나 10대들이 많이 보일 때가 있는데, 전시 공간을 갖추고 있기 때문에 서울대 견학을 오는 팀에서 거쳐가는 경우라서 놀라지 않아도 된다.
2.1. 소장품
3. 중국 원나라의 관청 이름
[1] 조선총독부가 1926년에 경성제국대학에 이 문서들을 이관했고, 이 문서들을 서울대학교가 접수했다.[2] 이쪽은 대한 제국기에 설치한 황실 도서관을 전신으로 삼는다.[3] 홈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따르면 2014년 2월 기준으로 각종 고문헌이 32만 7736건이다. 타 국가 기관으로 자료가 이관되거나 이후 계속 유입되는 자료가 있으므로 수치에는 변동이 있을 수 있다.[4] 규장각은 연구 논문을 수록한 3건의 연속 간행물(『한국문화』·『규장각』·『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을 발행하는 기관이기도 하다. 규장각을 거친 연구자들이 쓴 논문과 규장각 자료를 주로 활용한 논문이 많이 수록되고 있다.[5] 사실 유사시에 급히 내려보내야 할 필요성은 충분하다. 실제로 한국 전쟁 이전 장서각에서 소장하고 있던 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본은 '''한국 전쟁 때 북한에 털렸고''', 현재 평양 인민대학습당에서 소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