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수사

 



1. 개요
2. 설명
2.1. 천수사남문도


1. 개요


天壽寺
고려의 왕립 사찰 중 하나. 숙종 명효왕이 건설했고, 예종 문효왕 때 크게 재건된 사찰이다. 건설 후 예종은 천수사를 숙종 명효대왕과 명의태후의 원찰로 삼았다.
굉장히 오랫동안 유지된 절로 여말 황산대첩 당시까지 존재했다. 조선시대엔 몰락한 상태로 잔존했고, 현재는 완전히 사라져 부지만 남아있다.

2. 설명


원래 천수사 부지엔 '약사원(藥師院)'이라는 작은 사원이 있었다. 숙종이 지은 천수사는 처음엔 다른 곳에 짓고 규모도 크지 않았다. 사찰명의 뜻은 '하늘의 수명', '천자의 삶'을 의미한다.
숙종이 붕어한 후, 예종은 아버지가 지은 사찰을 크게 중창해 부왕의 원찰로 삼고자 했다. 그리하여 1106년 9월에 영평현 백작 윤관이 책임자가 되어 천수사 건설을 지속하여 끝냈다.
허나 1111년에 태사(太史)가 천수사 부지가 최악이라는 보고서를 올렸고, 약사원이 있는 부지로 옮기자고 제안했다. 이에 예종은 친히 약사원에 가 직접 터를 살펴 보았다.
그리하여 약사원을 없애고 그 부지에 천수사를 새로 짓기 시작했는데, 이미 다 지은 사찰을 딴 데로 옮겨 짓는다니, 더 크게 만든다니 하자 빡친 신하들은 천수사 중수를 반대했다. 예종은 처음엔 이에 동의했지만, 1112년 7월 어머니 명의태후도 붕어하자 신하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천수사 중수를 시작했다. 신 천수사에 부왕과 모후를 같이 모실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은 1116년 3월, 천수사가 완공되었고, 예종은 부왕과 모후의 어진을 안치했다. 예종은 이 천수사를 보고 부모의 얘기를 하다가 잠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파한집에도 천수사에 관한 기록이 남아있는데, 천수사는 경성(京城)[1] 동쪽에 있었고 천수사 북쪽에는 산봉우리가, 남쪽에는 시냇물이 있었다고 한다. 천수사로 들어오는 큰길 양 옆으론 월계수 수백 그루가 있어 강남(江南)[2]에서 온 사신이 황도(皇都)[3]로 올 때 반드시 이 월계수 밑에서 쉬었다고 한다.[4] 또한 왕손(王孫)[5]과 공자(公子)[6]들은 꼭 이 천수사에서 놀았다고 한다.
보한집 권하엔 혜문선사(惠文禪師)란 승려가 쓴 시가 기록되있는데, 천수사에 관한 시다. 제목도 천수사인데, 두 문구만 기록했다.

긴 길과 문 밖엔 사람들이 남북으로 오가고,

늙은 소나무와 돌 옆엔 달이 고금부터 있었네.

- 보한집 권하 中.[7]

천수사는 매우 화려해 인종, 의종, 명종이 찾았으며 여몽전쟁 이후 충렬왕제국대장공주도 자주 찾았다고 한다.
조선 때에는 크게 몰락했고, 천수원(天壽院)이란 이름으로 여행객들이 묶는 숙소로 전락했다.

2.1. 천수사남문도


고려시대의 화가 이령(李寧)은 고려사에 본인 열전이 남을 정도로 당대에 유명한 인물로 그가 그린 그림은 북송 황제 휘종까지 감탄할 정도였다.
어느날 인종 공효왕은 북송 상인에게 진귀한 그림 한 장을 진상받았다. 왕은 그림이 맘에 들어 이령을 불러 보여줬는데, 이령은 자신이 그린 것이라며 인종을 놀래켰다. 이령이 접합된 그림 뒷면을 뜯어내 보여주자 정말 이령의 글귀가 적혀 있어 이령의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그림이 바로 천수사를 그린 '천수사남문도(天壽寺南門圖)'이다. 그림은 실전됐으나 제목이나 관련 일화를 보면 천수사 남문을 중심으로 고려의 실제 환경을 그린 작품으로 보인다.
고려사 이령 열전과 파한집 권중에 이 일화가 있다.
[1] 파한집 원문 기록으로 만월대의 별칭.[2] 북송, 송나라의 별칭.[3] 파한집 원문 기록으로 만월대의 별칭. 광종 ~ 성종 초엔 개경의 정식 명칭이었다.[4] 이 문구 원문은 '自江南赴皇都者'인데 송나라와 고려를 대등하게 표현한 것이다.[5] 국왕의 자손들.[6] 공작의 자식들. 고위왕족의 자제들을 통칭한 것으로 보인다.[7] 보한집의 저자인 최자는 뒤 문구가 정지상의 시를 교묘히 베낀 것이라며 영악하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