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관

 



'''파평 윤씨 가문 출신 배향공신'''
'''예종'''
'''명종'''
'''문숙공 윤관'''
'''문정공 윤인첨'''
'''고려의 문하시중'''
위계정

'''윤관'''

김경용
'''별무반 행영대원수
윤관
'''
[image]
이종상이 그린 표준영정.
'''시호 '''
문경공(文敬公) → '''문숙공(文肅公)'''
'''작위 '''
영평현 개국백(鈴平縣 開國伯)
'''본관'''
파평 윤씨
'''이름'''
관(瓘)
''''''
동현(同玄)
'''묘지'''
임강현(臨江縣) 용봉산(龍鳳山)
숭복사(崇福寺) 동쪽 언덕(東麓)[1][2]
'''출생'''
1040년 음력 6월 1일 고려 양광도 파평현
'''사망'''
1111년 음력 5월 8일 (71세) 고려 개경
1. 개요
2. 역임 관작
3. 일생
3.1. 초년기
3.2. 여진정벌과 동북 9성 개척
4. 평가
4.1. 비판
4.2. 반론
5. 여러 왕비의 조상
6. 사돈의 유래
7. 청송 심씨와의 산송
8. 그 외
9. 같이보기


1. 개요


'而本勾高麗之所有也. 其古碑遺跡 尙有存焉. 夫勾高麗失之於前 今上得之於後, 豈非天歟?'

'이 땅은 본디 구고려(勾高麗)가 소유하고 있었다. 옛 비석의 글귀 또한 여전히 남아있다. '''그리하여 구고려가 전에 잃은 것을 금상이 후에 얻으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

- 고려사 윤관 열전 中. 윤관이 임언에게 영주 관청의 벽에 전적을 기록하게 한 글로 고려의 고구려 계승이 드러난다.

고려 숙종 명효왕~예종 문효왕 대의 문신. 동북 9성 개척에서 활약한 인물이라 무관으로 알려져 있지만 고려 초기의 서희, 강감찬이나 조선 시대의 김종서, 권율 등과 마찬가지로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다. 이들과 비슷하게 군사적 업적 때문에 무관으로 이미지가 굳어버린 케이스.[3]

2. 역임 관작


'''윤관의 여진정벌 시기 관작 '''
'''공신호 '''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
후에 전쟁 실패의 이유를 들어 박탈된다.
'''직위'''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 - 문하시중(門下侍中) - 판이부사(判吏部事)
지군국중사는 임시직으로 보이며 대원수인 윤관의 결정권을 확고히 해주기 위해 내린 것으로 보인다. 문하시중은 중서문하성의 장관, 판이부사는 상서성 이부의 장관.
'''작위'''
영평현 개국백(鈴平縣 開國伯)

'''고려 별무반 행영 군단'''
'''대원수(大元帥)'''
'''행영대원수(行營大元帥) 윤관'''
'''부원수(副元帥)'''
'''행영병마사(行營兵馬使) 오연총'''
'''판관(判官)'''
'''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
'''병마판관(兵馬判官) 황군상'''
'''병마판관(兵馬判官) 김부필'''
'''기타 지휘관'''
'''녹사(錄事) 척준경'''
'''권지승선(權知承宣) 왕자지'''
'''선병별감(船兵別監) 양유송'''
'''병과'''
'''신기군(神騎軍)'''
'''신보군(神步軍)'''
'''발화군(發火軍)'''
'''도탕군(跳盪軍)'''
'''경궁군(梗弓軍)'''
'''정노군(精弩軍)'''
'''항마군(降魔軍)'''
'''도합 170,000 명'''
숙종, 예종의 지지하에 만들어진 별무반은 행영(行營), 임시 군단이었으며 신기, 신보, 발화, 도탕, 경궁, 정노 6병과에 승병 항마군까지 총 7병과가 있었다. 17만 대군의 총 지휘자는 대원수 윤관이었다.
'''윤관의 여진정벌 이후 관작 '''
'''훈위 '''
상주국(上柱國)
정 2품 훈위. 공로를 치하하기 위한 직위이다.
'''수직'''
수태보(守太保)
수직은 본인의 품계보다 높은 품계의 직위를 받을 때 붙힌다. 행수법에 따른 것.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감수국사(監修國史) - 판병부사(判兵部事)
감수국사는 사관의 장관이며 문하시중이 겸했다. 판병부사는 상서성 병부의 장관으로 지금의 국방부장관이다.
'''윤관의 사후 관작 '''
'''수직'''
수태사(守太師)
태사는 '천자의 스승'이란 지위이며 명예직이다.
'''직위'''
문하시중(門下侍中)
생전 직위가 이어짐.
'''작위'''
영평현 개국백(鈴平縣 開國伯)
생전 작위가 이어짐.
'''시호'''
문경공(文敬公)
시호. 문경태후의 시호와 겹치는 것을 피해 바꿈.
문숙공(文肅公)
문경공에서 바뀐 시호.

3. 일생


'''윤관의 가족관계[4]'''
'''고조부'''
윤신달(尹辛達)[5]
'''증조부'''
미상[6]
'''조부'''
윤선지(尹先之)[7]
''''''
윤집형(尹執衡)
'''아내'''
경원군부인(慶源郡夫人) 이씨(李氏)
'''자식'''
윤언인(尹彦仁)
윤언순(尹彦純)
윤언식(尹彦植)
윤언이(尹彦頤)
윤언민(尹彦旼)
윤언영(尹彦榮)[8]
윤대원(尹大原)[9]
[출가.]
[출가.]
파평▨대부인 윤씨[10]

3.1. 초년기


왕건을 도와 공을 세운 개국공신 윤신달후손이고 아버지 윤집형이 '검교소부도감'이라는 직책을 지냈다는 것 외에는 집안에 대한 기록이 상세하지 않다. 다만 검교소부도감이 높은 관직은 아니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집안이 좋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다[11]. 어머니가 신라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후예라 하는데, 이에 대한 기록은 없다. 문종과거에 급제하고 여러 관직을 거친 끝에 숙종이 즉위하자 숙종의 즉위를 요나라에 알린 이후 출세길이 트여 여러 내직을 거쳤다.
1104년 여진족이 강력하게 성장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해 북방에 진출했으나 패배해 강화를 맺고 돌아왔다. 이에 숙종에게 고려군의 문제점을 진언하고 보완할 대책을 마련하여 여진 정벌을 위한 별무반이라는 부대를 만들어 이를 양성하는데 온 힘을 기울였다. 별무반은 기병인 신기군, 보병인 신보군, 승병인 항마군으로 구성되었다.
당시 고려 조정요나라(거란족)의 침입에 대비해 천리장성을 쌓고 이를 경계로 삼았다. 하지만 천리장성 밖에서도 근처에 자리잡은 여진족들에 관해 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근데 천리장성 밖 여진족들이 준동하면서[12] 천리장성을 위협하자 아예 간접 지배가 아닌 군사적 점령을 통한 직접 지배를 고려한 것. 고구려 계승 의식에 따른 고토 수복이라는 명분과 오랜 전성기를 거치며 늘어난 인구 수(물론 추정)에 따른 토지 수요를 충당하기 위한 선택이 아니었나 하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3.2. 여진정벌과 동북 9성 개척


[image]
고려대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척경입비도(拓境立碑圖).출처 9성을 개척하고 선춘령에 비석을 세우는 고려군의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북관유적도첩(北關遺蹟圖帖)의 일부이다.
윤관이 별무반을 편성해 훈련을 시키며 침략을 준비하던 중 숙종이 죽었고 예종이 즉위한다. 예종은 선왕의 정책을 계승하여 윤관으로 하여금 1107년에 17만 고려군의 총사령관이 되어 함경도 일대로 출진[13], 그 지역의 여진족을 격파하고 그 일대에 동북 9성을 쌓게 하였다. 9성은 함주·영주·웅주·복주·길주·공험진·숭녕·통태·진양의 9성인데, 그 위치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많은 논란이 있다. 특히 윤관이 고려여진족의 국경을 표시한 비석을 세웠다는 선춘령의 위치가 제일 논란이 된다. 함흥평야설, 두만강 유역설, 두만강 이북설, 함경도 일원설 등이 있는데, 이게 조선시대에도 국경 문제와 연관되어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image]
전쟁 초기에는 윤관이 20만 대군을 앞세워 여진족들을 몰아내고 땅을 손쉽게 점령, 9성도 별 어려움 없이 세웠으며, 이 공으로 예종으로부터 부름을 받아 개경에 가서 큰 상을 받았다. 당시 조정은 그야말로 잔치 분위기. 하지만 이 과정에서 '''여진족 족장들을 속여 잔치에 부른 다음 모두 술에 취해 있을 때 몰살'''시킨 것 때문에 여진족 전체의 미움과 불신을 사게 되어 얼마 안가 곧 여진족의 강력한 반격을 받게 되었고, 동북 9성은 점령을 넘어 과연 그 유지가 가능할 것인가라는 난관에 봉착하게 된다.
사실 윤관의 전략은 9성으로 진출하는 통로가 병목 지형으로 막혀 있다는 정보를 믿고 짠 것이었는데, 막상 가보니 우회 루트가 여러 곳 존재하는 바람에 9성이 모두 여진족의 공세에 노출되어 있었다. 전쟁 전 지리와 판세 분석을 엉망으로 한 것이다. 9성 간의 거리도 너무나도 멀어 서로간의 연계가 안되고 적에 둘러쌓인 채 각자도생을 해야 하는 판국이었다. 또한 인근 여진부족에 대한 무리한 학살정책, 빵점 수준의 대전략으로 적을 대책없이 늘려버려 우호부족으로 막을 수 있었던 루트까지 모조리 적대구역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수비상의 문제점과 재정 문제 등 여러 문제가 겹쳐 결국 9성을 여진에게 돌려주게 되었다.
이를 두고 윤관의 공을 시기한 조정 대신들의 모함이라고 해석하기도 하나,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9성의 수비에 문제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여진족은 9성의 곳곳으로 공격해 들어왔고, 한 때 길주성은 여진족이 성벽을 넘어 들어와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했는데도 윤관과 오연총의 구원군은 여진의 방어선에 가로막혀 전진이 불가능한 상황에 빠지기도 했다. 다행히 밤 사이에 고려군이 토벽을 쌓아 가로막기는 했지만 고려의 방어능력도 거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여기에 여진족은 장기전을 계획하고 있었던데 반해 고려가 더 이상 전쟁을 수행할 역량이 있었는지도 살펴볼 부분... 이 아니고 사실 고려는 갈라수 전투 참패 이후 전쟁수행 역량이 거덜난 상태였다.
참고로 당시 여진은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을 주축으로 그들을 만주의 여진족들이 지원하는 양상이었다. 특히 땅을 빼앗긴 여진족들은 '''죽기살기'''로 덤벼들었다. 말이 좋아서 동북 9성 진출이지 여진족 입장에서는 잘 살고 있던 고향이 침략당한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135개의 마을이 불태워졌고 3740명을 참살했다고 하니 여진족 입장에서 고려는 부모와 형제를 죽인 원수였다. 더군다나 윤관은 포로를 풀어준다는 미끼를 풀고 잔치를 열고는 초대한 여진족 추장 400명을 모조리 죽여버렸으니 원수로 여기지 않는게 이상할 지경이다. 유목민족에게는 초대한 손님을 가족처럼 환대하는 풍습이 있는데 거기에 대놓고 엿을 먹여 버렸다. 미군으로 따지면 이라크에서 코란 표지에 오줌을 눠버린 꼴이다. 그러니 석성의 여진족들은 싸움에 졌음에도 항복도 하지 않고 바위에 몸을 던져 자살할 정도였다.
고려군에 원한을 품은 여진족들은 완안부에 복수를 요청했고 완안부의 아골타는 "지금 가만히 있는다면 어찌 갈라전[14]만 잃겠습니까? 모든 부족이 우리의 곁을 다 떠날 겁니다!"라는 주장을 하며 주변 세력을 끌어모아 죽을 각오로 저항하기 시작했다.
결국 고려는 9성 중 2개를 잃었고, 여진족과 회전을 벌여 대패했다. 이런 점을 생각하면 이를 돌려줘야 한다는 대신들의 의견도 일리가 있었다. 또한 9성을 돌려받은지 얼마 안 되어 여진이 곧 금이라는 신흥 제국을 건설한 것을 생각해 보자. 그만큼 당시의 여진은 꽤 강했다. 어찌보면 고려의 침략 시도가 여진에게 완안부라는 구심점을 만들어줬고 단합을 도모하게 해준 꼴이다. 즉 고려가 금을 건국시켜 줘버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여진이 동북 9성에 대한 반환 요청을 하기 전에 '''이미 2성은 함락된 상황이었고 고려는 역대 손꼽히는 패전인 갈라수 전투를 맞이한 상태였다.''' 갈라수 전투에서 오연총이 이끄는 5~7만 규모의 고려 대군이 회전에서 여진족들에게 대패했다.[15]
그러나 여진 역시도 갈라수 전투 이후 무렵에는 처참한 소모전으로 인해 국력을 모조리 갈아넣은 상태였다. 따라서 그들도 다 죽자는 식의 치킨게임보다는 외교적 화친에 동의할 수 밖에 없었다. 금이 요나라와는 달리 고려에 대한 외교를 온건일변도로 간 것도 동북 9성에서의 처참한 체험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면 어느 정도는 합리적인 해답이라고 여겨진다.
어쨌든 여진 정벌에서 돌아온 후 윤관은 패전했다는 이유로 대신들의 탄핵을 받아 잠시 파직되기도 했으나 예종의 비호로 다시 최고 재상직인 '수태보 문하시중'으로 복직했으나 얼마 못가 1111년에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경(文敬)이었으며 이후 문숙(文肅)으로 고쳐졌다.

4. 평가


고려사열전 윤관편을 보면 그에 대한 기록이 생각만큼 많지는 않은 편이다. 출생연도도 미상이며,[16] '''윤관 열전을 봐도 여진 정벌 기사를 보면 소드마스터 척준경의 무용담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상황.''' 그만큼 전투에서 윤관의 활약이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는 뜻이 될 수도 있으며 그나마 그의 전적을 보면 사실 패배가 더 많았다. 붙잡힌 히로인 신세였다 척준경이 구해주는, 뭔가 만화 같은 전개가 많았다고. 그런 의미에서는 명장이라고 보기는 조금 부족한 감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왕 숙종의 명을 받들어 여진족에 대비하기 위한 별무반 양성을 실질적으로 주도했으며 동시에 강력한 부족체제를 중심으로 강대국인 요와 송을 연달아 털어먹을 정도로 날쌘 기병군단을 소유하고 있었던 완안부의 여진을 상대로 많은 피해를 감수해 가면서까지 어떻게든 9성을 지켜냈으며 또 그 전쟁의 총지휘관이었다는 점은 변함이 없다.[17] 더욱이 '''그 전설적 소드마스터 척준경을 발굴해 낸 인물도 바로 윤관이었다는 사실.''' 척준경이 옥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하는데, 이를 듣고 구해준 인물이 윤관이다. 그래서 척준경은 윤관 휘하에서 그를 위해 온 힘을 다해 분투했고, 윤관은 척준경과 부자 관계를 맺기도 했다.
이런 행적을 보면 뛰어난 장군이라기보다는 전략의 큰 그림을 그리는 것이나 지도력과 굳은 의지가 장기인 '뚝심형 리더'의 인상이 더 강해 보인다. 말하자면 '프로젝트 기획자'형 스타일. 고려사 말미에는 "젊어서부터 학문에 힘써 전장에서도 경서를 휴대했고, 어진 이와 착한 것을 좋아함이 당대 최고였다."고 그를 호평하고 있다. 그리고 숙종의 뒤를 이은 예종 역시 그를 매우 신뢰해 같이 여진 정벌을 주도하고 그것이 실패했음에도 비호해주는 한편[18] 복귀시킬 때 오히려 더 높은 품계인 문하시중에 제수하며 그를 대우하고자 했다.
윤관은 북방에서 갖은 고생을 하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려 했으나 결국 실패로 돌아갔으며 말년에 출세했어도 그것을 누려보지 못한 채 쓸쓸히 세상을 떠났지만, 그 아들 윤언이와 손자인 윤인첨[19]도 재상직에 올랐고, 윤관 이후 파평 윤씨는 일약 명문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가문발로 컸다기보다는 무난하게 높은 가문을 바탕으로 해서 그것을 최상위권으로 드높인 유형에 가깝다고 할 수 있겠다. 고려 초기의 상황을 고려하면 자수성가까지는 좀 오버고.
여담으로 김유신을 존경해서, 윤관 열전에 실려 있는 영주 관청 벽 비문에 의하면 ‘김유신이 6월에 강물을 얼게 해 삼군을 건너도록 하였으니, 이것은 다름이 아니라 지극한 정성일 뿐이다. 나 또한 어찌 그렇게 못할 사람이겠는가?’라고 말하곤 했다고 한다.

4.1. 비판


그러나 역덕후 사이에서 윤관은 꽤 박한 평가를 받고 있는데, 이는 여진 정벌 과정과 결과를 재평가하면서 윤관 및 고려군이 저지른 실책들도 재조명되었기 때문이다.
최대한 좋게 말해서 스타일적으로 기획자나 리더라고 봐줄 수 있는 것이지 도저히 윤관을 좋은 기획자라고는 평해줄 수 없다는 것이 역덕 커뮤니티의 중론이다. 명장은 싸우기 전에 이기는 판을 구축하고 싸운다고들 하는데 윤관은 지는 판을 만들어놓고 전쟁터에 들어갔다. 지리분석을 엉망으로 해 동북 9성이 지리적 이점 없이 적진 가운데서 성 하나하나가 따로 노는 꼴이 되어버린 것이 대표적이다. 사전계획을 그르쳐 방어라인이 개판으로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전쟁 초기에 여진족 추장들을 살해하고 일거에 9성을 점거한 작전에서 윤관이 보여준 전략적 안목은 상당히 처참한 것이었다. 뒷통수와 양민 학살, 밑도끝도 없는 적대행위로 일관된 것이 윤관의 점령지역 관리책이었다. 하다못해 현지 정세에 어두워 실책을 거듭한다는 현대의 미군도 이렇게까지 어리석은 행동은 하지 않을 부분이다. 그 미군도 점령지에서 동맹세력을 만들고 싸운다. 적이 될 가능성이 있는 부족을 아군으로 돌려 적 규모를 줄이는 것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지리정보나 현지정세같은 정보를 획득하고 전장에서 병력으로 써먹는 등 효용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진의 풍습을 모를 리도 없는 바로 옆 나라인 고려에서 근본없는 학살투성이 현지정책을 실시해버렸다. 영토획득이라는 단기적 이익에 눈이 멀어 대국을 그르쳤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대목이다.
정보와 지원을 제공하고 고려에 우호적이던 친고려 여진부족들을 잔치에 부르고선 뒷통수를 쳐서 지도부를 싹 쓸어버린 것은 동북 9성 전역에서 윤관의 대표적 실책이다.[20] 우호세력으로 휘하에 쓸 수 있었거나 최소한 중립으로 돌릴 수 있었던 부족들이 죄다 완안부에 붙어버려서 적의 수만 왕창 불려준 것이다. 동북 9성 개척 당시에는 완안부조차 고려의 17만 대군에 질려 싸움을 망설일 지경이었던 상황이었다. 그런 마당에 고려 코앞에 붙어 있는 동북의 여러 여진부족들은 겁에 질릴 수 밖에 없는 상태였다. 그러나 윤관의 지나친 학살정책으로 여진은 굴복하느니 죽는게 낫다는 식의 결의를 다지게 되었다.
보통 명장들이 그러하듯이 회유정책으로 살살 흔들면서 내분을 유도하고 우리편 여기저기 박아가며 싸웠다면 유리한 전황으로 이끌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윤관은 인근 여진부족들을 학살하고 배신하여 모조리 적으로 만들었고 동북 9성은 스스로 만든 적들에 포위되는 꼴이 되어버렸다.
거기에 윤관은 군대 지휘력도 낮게 평가받을 만한 사료가 많다. 윤관 하의 고려군은 수차례 전멸 위기를 맞았고 갈라수 전투에서 칠천량 해전급의 대참패를 겪기도 했다. 고려의 야전군이 싹 소멸되는 수준의 한국사 역대급 참패였다. 동북 9성 유지 실패의 제1원인이기도 하다.
국사책에서 동북 9성 반환은 정신승리 사관으로 '먹으려면 못먹을 것도 없지만 내부에 먹물들이 발목을 잡아대고 여진족이 졸라대서 쓸모없는 땅 돌려줬다'는 식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게 두루뭉술하게 써있는 부분이다. 그러나 실상은 고려의 국력이 완전히 소진되어 도저히 더 이상 싸울 힘이 없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오랜 세월 조련한 17만 정예 대군을 동원해 수만의 피를 흘려 얻은 영토를 미쳤다고 공짜로 퍼주겠는가. 있는재산 없는재산 다 털어 국력을 몰빵하고서 빈손으로 돌아온 것이나 다름없는 꼴이다.
거기에 동북 9성 진출 실패는 단순히 침공에 실패했다는 것에서 그친 사건이 아니었다. 갈라수 전투 승리라는 대업을 성취한 완안부에게 엄청난 위상과 명분이 주어진 것이다. 역사적으로 침략자에 맞서 싸워 고향을 지키며 승리한 지도자들은 막대한 정치적 자산을 갖게 되는 것이 보통이었다. 갈라수 전투 승리 이후 여진은 완안부를 중심으로 단합하여 뭉치게 되었고 이것은 금 건국의 초석이 되었다. 다시 말해 윤관의 섣부르고 미숙한 침공이 금나라를 반쯤 만들어줬다고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같은 면모 때문에 역덕후 사이에서 윤관은 트롤러 취급으로까지 평가가 떨어진 인물이다. 척준경의 인간을 벗어난 신들린 무공, 지는 싸움을 이기게 해주는 항우급의 싸움실력이 아니었으면 목이 진작에 떨어졌을 위인으로 보는 급이다. 다만 이런 부분은 대중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편.

4.2. 반론


전쟁 초기 여진족 추장들을 살해해버린 점, 지리 분석이 뒤떨어졌다는 점을 들어 윤관이 희대의 트롤러라 다름없다는 평가가 계속 제기되었다. 다만 이는 지나치게 현대적 혹은 결과론적으로 보기 때문에 일어나는 비판이라 할 수 있다.
가장 비판받는 부분이 전쟁 초반에 여진족 추장들을 몰살시켰다는 점인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서 몰살당한 여진족 추장들은 이미 고려에서 '''믿을 수 없는 족속'''으로 낙인 찍힌 상태였다.

여진(女眞)은 본래 말갈(靺鞨)에서 떨어져 나온 종족으로 수나라와 당나라 때 고구려에 병합되었고, 뒤에는 취락을 이루어 산천에 흩어져 살아 그때까지 통일을 이루지 못했다. 그 중 '''정주(定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정평)·삭주(朔州 : 지금의 강원도 춘천시) 부근 지역의 거주민들은 간혹 귀부해와서 신민 노릇을 하다가도 곧 배반하곤 했다.''' 영가(盈歌)와 오아속(烏雅束)이 이어 추장이 되어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게 되자 그 기세가 점차 강포해졌다.

이위촌(伊位村)의 경계에 있는 연산(連山)은 동해안에서부터 우뚝 솟아올라 우리나라의 북쪽 국경에 이르러서는 매우 험준하고 거칠어 인마의 통행이 불가능했다. 그 사이에 소로 하나가 나 있는데 사람들은 그 길을 병목[甁項]이라 부르는 바, 출입구가 하나 뿐이라 그렇게 부르는 것이다. 공로를 세우고 싶어하는 자들이 왕왕, 그 소로를 막아버리면 여진족의 길이 끊어질 것이니 그때 군사를 동원해 평정하라는 건의를 올리기도 했다.

숙종 7년(1102) 여진이 정주(定州)의 관문 밖에 와서 진을 치니 혹시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 아닌가 의심해 추장인 '''허정(許貞) 및 나불(羅弗)''' 등을 유인 체포해 광주(廣州)에 가두고 고문하였더니, 과연 우리를 공격하려는 것이었음을 자백받고 그들을 억류해 보내주지 않았다. 마침 변방의 장수 이일숙(李日肅) 등이 “여진이 허약하니 겁낼 필요가 없습니다. 지금 빼앗지 않고 기회를 잃으면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입니다.”라고 건의했다. 또한 오아속(烏雅束)이 다른 부락의 부내로(夫乃老)와 틈이 생겨 군사를 동원해 그를 치느라, 국경 근처까지 와서 진을 치자, 왕이 임간(林幹)을 시켜 수비에 임하게 하였다.(중략)

(중략)병마판관(兵馬判官) 최홍정(崔弘正)과 황군상(黃君裳)을 각각 '''정주(定州)와 장주(長州 : 지금의 함경남도 정평군 장원)'''로 나누어 보낸 다음, 여진 추장더러 “우리나라에서 '''허정(許貞)과 나불(羅弗)'''등을 석방하려 하니 와서 우리 조정의 명령을 듣도록 하라.”고 속이고서 복병을 숨겨두고 기다렸다. 추장들이 그 말을 믿고 고라(古羅) 등 4백여 명이 오자 술을 먹여 취하게 한 뒤 복병을 동원해 모조리 죽였다.

- 고려사 윤관 열전

당시 윤관이 몰살시킨 여진족 추장들은 정평군 일대에 있던 여진족들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귀부했음에도 불구하고 배반을 했다고 대놓고 언급되어 있다. 그리고 여진족 추장들을 모아올 때 허정과 나불을 석방한다는 핑계를 대고 불러들였는데 허정과 나불은 고려를 공격할 계획을 꾸미다 체포된 여진족 추장들이었다. 이들을 석방한다고 했을 때 모였던 여진족 추장들 중엔 단순히 허정과 나불과의 단순한 친분만 있다거나 고려 조정의 명이 무엇이었는지 파악하려는 추장들도 있었겠지만 허정과 나불이 고려 공격을 계획할 때 찬동했던 여진족 추장들이 많았을 가능성도 있었다. 즉, 여진족 추장들을 몰살한 건 단순히 당장의 이익을 노리고 벌인 것이 아니라 충분히 통수를 칠 수 있는 여진족들을 제거하여 후방 안정을 도모하려는 목적이 더 크다고 볼 수 있다. 정평군은 윤관이 여진 정벌을 진행할때 단순한 후방만 되는 곳이 아닌 본토에서 점령지로 이어지는 보급로가 될 수 있는 곳이라 행여나 정주 일대 여진족들이 변심해서 교란 작전을 벌이면 윤관 입장에선 대단히 골치가 아파지는 상황에 처할 수 밖에 없다. 거기에 이미 통수를 친 전적까지 버젓이 있었기 때문에 이들이 최소한 중립을 계속 유지해준다는 보장도 없었던 지라 차라리 위험 요소를 사전에 제거한다는 판단이 당대엔 합리적일 수도 있다고 여겨졌을 것이다.
그리고 윤관 열전에도 나와 있듯이 윤관이 여진 정벌을 시작하기 이전에도 이미 병목만 차지하면 여진을 평정할 수 있다는 이야기가 나 돌던 상황이었다. 지금이나 결론적으로 보면 불가능한 이야기였지만 그 당시의 지리와 정보 수준이 오늘날처럼 발달되지 않았음을 고려하면 기정 사실로 받아들여져도 이상한게 없었을 상황이었다. 함경도 일대는 발해 멸망 이후 사실상 200여년 동안 한반도 왕조의 영향력에서 벗어난 상태였다. 지금이야 구글 어스로도 함경도 일대가 어떤지 대략적으로나마 파악 할 수 있지만 그 시절에는 그런 거 없다. 저걸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던 당대 사람들의 인식 수준으로 생각하면 그렇잖아도 배신때리는 여진족들을 굳이 길잡이 맡길 필요가 없다고 여겼을 가능성도 있다.
윤관의 여진족 추장 학살로 여진족 부족들이 대거 완안부에 붙게되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이미 윤관의 여진 정벌 이전에도 여진족 부족들 대다수가 완안부의 영향력 하에 놓인지 오래였다.'''

갑진일. 동여진(東女眞) 태사(太師) 영가(盈歌)가 사자를 입조시켜 왔다. 고려의 의원(醫員)으로 완안부(完顔部)에 거주하는 자가 있었는데 병을 잘 치료하였다. 당시 영가의 친척이 병이 들자, 영가가 의원더러 병을 고쳐주기만 하면 자신이 사람을 시켜 고국으로 돌려보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사람이 과연 완쾌하자 영가가 약속대로 사람을 시켜 의원을 국경까지 보내주었는데 의원이 왕에게, 흑수(黑水)에 살고 있는 여진의 부족이 날로 강성해지고 군세가 갈수록 기세를 떨친다고 보고했다. '''이 말을 들은 왕이 그 때부터 흑수 여진과 사자를 교환하기 시작하였고, 그 후 계속 사자가 끊이지 않았다.''' 영가가 소해리(蕭海里)를 격파한 후 그 사실을 우리에게 알려오자 우리도 사람을 보내 축하하였다. 이에 영가가 자기 사촌 동생인 사갈(斜葛)을 보내 답례하니, 왕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였다.

고려사 세가 숙종 8년(1103) 계미년

윤관의 여진정벌이 있기 4년 전에 고려는 흑수, 즉 갈라전 일대에 있는 여진족들에게 끊임없이 사신을 보내 완안부에 포섭되는 것을 막으려 했었다. 하지만 영가의 사촌동생 사갈이 고려로 답례를 하러갔다 오는 길에 고려가 여진족들이 완안부에 복속되는 걸 방해하는 것을 알아챘다. 이에 영가는 석적환을 갈라전 일대에 보내 갈라전 일대 여진족들의 귀부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그 일대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나갔고 이는 1104년 2월 정주 일대에서 임간이 지휘하는 고려군이 대패하고 정주 선덕관성이 약탈당하는 결과로 이어졌다. 윤관이 임간을 대신해 여진족을 물리치려했으나 윤관도 패배했고 고려는 결국 1104년 6월에 여진이 사절단을 보내 화친을 요청하자 받아들이고 고려에 귀화했던 (친고려파) 6명의 추장을 포함한 14명을 돌려보내는 걸로 마무리 지어야 했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고려로서는 예전처럼 여진족을 상대로 적극적인 회유책을 쓰기가 어려웠다.
결국 윤관이 여진족 추장들을 몰살 시켰던 것은 단순히 단기적인 안목으로 저지른 실책이라 보긴 어려운 것.

5. 여러 왕비의 조상


윤관의 후손들 중 여성들 상당수가 훗날 조선왕조왕비가 된다.
첫째 아들 윤언인의 후손에서 남원 윤씨와 함안 윤씨가 갈라졌다. 그 10대손이 그 유명한 폐비 윤씨(윤관 11대손).
넷째 윤언이의 먼 후손이 문정왕후(14대손)와 윤원형이고, 그 외 후손으로 세조비이자 수렴청정을 한 정희왕후(10대손), 성종의 계비이자 중종을 낳은 정현왕후(12대손), 중종의 비로 인종을 낳았고, 윤임의 동생인 장경왕후(13대손)가 있었다. 8대손 윤척에서 정희왕후와 정현왕후의 집안이 갈라지고(정현왕후와 같은 항렬에 윤필상과 세종의 부마 윤사로가 있다.), 정희왕후의 아버지인 윤번(9대손)으로부터 윤임은 4대손, 윤원형 5대손이니까 윤임은 윤원형의 9촌 아저씨 뻘이 된다.(한국어 위백에서 한 대를 잘못 계산했다.) 이것만 외어도 세조~명종까지의 역사가 다 나오는 후덜덜한 집안.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량, 윤원로와 윤원형의 형인 윤원량의 딸은 인종의 후궁 숙빈 윤씨가 된다. 숙빈 윤씨에게 문정왕후는 친고모이고, 장경왕후는 10촌 할머니뻘이 된다.
잘 안 알려진 사실인데, 희비 윤씨도 윤관의 후손이다. 넷째 윤언이의 5대손 윤보의 첫째 아들 윤계종의 딸이 희비 윤씨이다. 희비의 아들 충정왕에게는 외9대조 할아버지가 된다. 윤계종의 동생 윤안숙이 바로 조선시대 왕비들과 후궁들의 조상이 된다.
반면 대한제국의 황후이자 한국 역사상 마지막 국모인 순정효황후도 파평 윤씨 출신으로 윤관의 후손으로 잘못 알려져 있는데 순정효황후는 파평 윤씨가 아니라 해평 윤씨로 윤관의 후손이 아니다.

6. 사돈의 유래


윤관은 부하 장군인 부원수 오연총과 사돈을 하기로 했다. 윤관은 아들을 오연총은 딸을 보내기로 한 것. 그런데 술통을 들고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비가 많이 와서 강이 불어서 건너지 못했다. 결국 윤관과 오연총은 등걸나무에 앉아 상대편을 마주보고, 서로 가져온 술을 상대방에게 권하는 제스처를 취한 뒤 고개를 돌려 자신이 마셨다.
이때부터 등걸나무의 사와 손을 모으다는 돈수를 붙인 사돈수라는 말이 생겼고, 여기에서 사돈이라는 말이 유래했다. 사둔은 틀린 말.
하지만 이것은 우리말 단어 모두를 한자어 기원에서 찾으려던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견강부회에서 비롯된 민간어원이라는 것이 정설이다.[21]

7. 청송 심씨와의 산송


윤관의 무덤은 경기도 파주시에 있는데[22], 이것을 두고 청송 심씨와 400년을 끈 분쟁이 일어나게 된다. 임진왜란 직후 윤관 묘는 관리되지 않아 버려진 상태였는데, 당시의 권신이었던 영의정 심지원이 이곳에다가 자기 씨족의 묘역을 조성하였다. 윤관의 씨족인 파평 윤씨 일족은 100년 후 심지원의 묘를 일부 파내는 방식으로 항의하였는데, 심씨도 지지 않고 윤씨 일족의 처벌을 요구하며 사태가 커졌다. 파평 윤씨는 4명의 왕비를 배출한 집안이고, 청송 심씨도 3명의 왕비를 배출한 명문가라서 어느 한 편의 손을 들어주기 어려웠던 영조는 양쪽 무덤을 그대로 두라는 식으로 중재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평윤씨 집안에서 심씨 가문의 묘지를 파헤치려고 하자 심씨가문의 사람들이 무력을 써서 윤씨가문의 사람들을 두들겨 패 내쫓았다. 이 일에 대해 서로 잇따라 격고(擊鼓)하여 아뢰자 영조는 양가의 대표였던 윤희복(尹熙復)·심정최(沈廷最)에게 형을 가하고 멀리 귀양을 보냈다. [23] 그런데 윤희복은 이미 70의 고령이라 형을 받고 귀양을 가는 도중에 사망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 산송(山訟, 묘지에 관한 분쟁)이 늘어났던 이유는 조상을 공경하였던 유교사상과 묏자리에 따라 자손이 부귀를 누린다고 생각하는 풍수지리설이 결합되어 퍼졌기 때문이었다. 위의 사례처럼 다른 집안 묘역에 자기네 묘역을 조성하거나, 심한 경우는 아예 파내고 자기 조상을 모시는 일까지 벌어졌다. 영조는 이를 무척 짜증스러워하며 “근자에 상언(사대부가 임금에게 올리는 탄원)한 것을 보니 산송이 열에 여덟, 아홉이나 된다”고 투덜댄 적도 있다. 산송 문제가 하도 심각해지자 영조는 “늑장·유장·투장 같은 것을 각별히 엄금하고, 법대로 시행하고, 수령 또한 잡아다 죄를 묻고, 비리를 엄단하라."는 특별지시까지 내린다. 그는 묏자리를 뺏는 것은 다른 이의 집을 찬탈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논리도 폈다. 아관파천 직후 당시의 대신이었던 어윤중이 피살된 것도 산송 문제 때문이었다.
이후 파평 윤씨청송 심씨 사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2006년이 되어서야 청송 심씨가 심씨 일족의 묘를 이장하고, 파평 윤씨는 필요한 토지 2500여평을 제공하는 식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경기도 문화재위원회에서 "문화유산은 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근거를 내세워 이장을 거부해 문제가 다시 불거질 기미를 보이는 듯 하다가 경기도 문화재위원회가 이 방침을 철회하면서 결국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8. 그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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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특별시 중구 서소문공원에 그의 동상이 있다. 이 공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위와 같은 장군 동상이 하나 있는데 그 동상의 주인공이 바로 윤관이다. 이 동상은 1979년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을지로6가에 위치한 훈련원공원에도 비슷한 동상이 있다. 그 외 상무대에도 윤관의 기마상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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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에 거주하는 파평 윤씨 문중에서 소장하고 있는 영정. 눈이 달마대사처럼 둥근 형태로 그려져 있는지라 '''얼굴이 대단히 비범하다.''' 함경도에 있는 사당의 것을 옮겨 그린 것이라 하지만 확실하지 않다. 마치 민간신앙 속 장군들을 묘사한 느낌도 들어서 윤관 역시 신격화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윤관이 여진족의 포위망을 돌파해서 강을 건널 때 잉어 떼가 다리를 만들어주어 강을 건너게 도왔다는 설화가 있다. 윤관의 시조가 잉어가 변신한 미소년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연관된 설화가 생긴 듯하다. 그 때문에 파평 윤씨는 잉어를 먹지 않는다고.
왕비의 조상인 것과는 별개로 신숭겸, 김방경과 더불어 윤관도 후손을 잘 뒀다. 임진왜란 시기 다대포진성에서 군사 8백 명으로 만 명이 넘는 왜군과 처절하게 싸우다 전사한 윤흥신/윤흥제 형제[24]가 바로 윤관의 후손이다.

9. 같이보기


[1]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 4-1[2] 윤언이 묘지명에 따르면 윤관의 묘지와 윤언이의 묘지가 같은 경내에 있었다고 한다.[3] 고려는 예종과 공양왕 때를 제외하고는 무관을 따로 뽑지 않았다. 따라서 전시에는 문신이 전쟁을 진두지휘하고 무신들은 직접 칼을 들고 적과 함께 싸우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문관들은 병법에 능해야 했고 반대로 무관들은 실전 무술이 뛰어나야 했다. 윤관은 여진 정벌 당시 '지군국중사(知軍國重事)'란 문반, 무반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비상설직을 받았기 때문에 예외이다.[4] 고려사 및 윤언식 / 윤언이 / 윤언민 묘지명 기준.[5] 신흥사 공신당에 초상화가 올라간 삼한공신이다.[6] 파평 윤씨 족보엔 윤선지가 증조부라고 한다.[7] 파평 윤씨 족보엔 윤금강이 조부라고 한다.[8] 유홍(고려)의 딸 하원군군의 남편. 파평 윤씨 족보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윤언식의 묘지명에 쓰인 기록을 바탕으로 윤언영이 처음 이름이고 나중에 윤언식으로 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9] 동인지문사륙에 수록된 윤관의 표문에 기록된 아들.[출가.] A B [10] 임원후의 처.[11] 하지만 그 이름도 유명한 파평 윤씨라는 것을 고려하면 윤집형의 재능이 별로였을 수도 있다. 단적으로 당시의 혼인가문 간의 결합인데 윤관의 어머니가 속한 가문을 보면 실제로 가문이 별볼일 없었는지에 대해서 대단히 회의적이게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소소한 명문가였던 파평 윤씨 일가가 고려를 대표하는 명문가로 확고하게 자리잡게 된게 윤관 이후의 일이다. 당장 윤관의 출생연도부터가 미상이다. 이 점을 볼때 윤집형 개인의 재능이 문제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많이 간과되고 있는 사실이지만 고려나 조선이나 혼인은 명문가의 여인과 그보다는 조금 가문의 격이 떨어지지만 능력있는 남성 간의 결합인 경우가 많았다. 명문가에서 가문은 조금 쳐지지만 장래성이 있어 보이는 사위스카우트해서 밀어주는 셈이라고 보면 된다.[12] 만주에 위치한 여진족장인 '완안오아속'에 의해 여진족 통일 작업이 펼쳐졌다.[13] 고려사에선 상당한 구체적인 숫자를 언급을 하지만 정말로 17만을 동원하였는지는 알수없다. 당시 고려의 인구를 3~400만으로 잡는다면 인구의 4퍼센트 이상을 동원하였다는 어처구니없는 계산이 나온다.[14] 고려가 장악한 여진지역의 명칭[15] 그렇지만 이때 당시 여진이 승리는 했어도 9성 전부를 함락시킨 상황도 아니었고 고려가 멸망한 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여전히 고려는 여진에게 위협적인 강적이었다. 따라서 여진이 시도한 것이 강화 요청이다. 즉, 무력+외교로 9성을 반환시킨 것이다. 이는 귀주대첩 이후 고려가 거란에게 취한 자세와 비슷하다.[16] 굳이 출생연도를 추정하자면 1040년대 전반기에 출생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여진 정벌에 참전한 사령관들은 부원수 오연총을 제외하면 대부분 60대의 노인들이었는데, 그나마 오연총도 당시 50대였기 때문에 당대의 기준으로도 꽤나 나이 많은 노장이었다.[17] 이 여진의 병력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게 아무리 고려가 20만 대군을 동원했다 하더라도 여진이 소유한 기병대의 위력은 가히 상상 이상이었다. 이후의 일이기는 하지만 금의 시조 완안아골타가 이끄는 4천여명의 군대가 요의 천조제가 친정한 10만 군대를 말 그대로 개발살낸 적이 있었다. 그만큼 여진의 기병 군단 자체의 위력이 강했다는 의미이며 이를 견뎌낸 고려도 상당한 저력을 보여주었던 것이다.[18] 예종은 이것이 자신의 책임이지 어찌 윤관의 책임이겠냐며 그의 처벌을 무마시키고자 했지만 윤관을 경계하던 관료들의 강력한 요구로 그를 파직시킬 수 밖에 없었다.[19] 그러나 윤인첨이 활동하던 시기는 무신정권시대여서 무신들의 간섭과 위협때문에 고생 좀 했다. 참고로 윤인첨은 조위총의 난 때 진압군의 총 지휘관이기도 했다.[20] 여기에 대해서는, 동북의 여진 부족들이 배신할 가능성이 높은 의심스러운 세력들이었기 때문이라는 반론이 있다. 그러나 윤관의 동기는 이해한다 해도 학살이라는 수단과 그 결과가 최악이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21] 심지어는 다산 정약용 선생마저도 이런 견강부회를 저질렀다.[22] 정확한 위치는 광탄면 분수리. 대중교통으론 서울 774번 만이 이곳을 경유.[23] 왕이 중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분쟁을 멈추지 않아 왕의 권위까지 무시한데 따른 죄로 그리된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산송은 왕도 말릴수가 없을 정도로 심각했음을 알려주는 대목.[24] 위에 서술된 윤임의 아들들이자 장경왕후의 조카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