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상

 

1. 개요
2. 생애
3. 여담


1. 개요


雨歇長堤草色多 비 개인 긴 둔치에 풀빛이 더욱 푸르른데

送君南浦動悲歌 그대를 남포에서 떠나 보내며 노래 가락 슬퍼라

大同江水何時盡 대동강 물이 언제 다 마를 것인가

別淚年年添綠波 이별의 눈물만 해마다 푸른 물결에 더하는데[1]

鄭知常 (? ~ 1135년 1월 25일)
고려 중기 인종(仁宗) 때의 문신이자 시인이다. 서경(西京) 출신으로 초명은 지원(之元), 호는 남호(南湖)이다. 서경 정씨의 시조이기도 하다.[2]
고려와 조선에 사신으로 온 중국 사신들이 소국의 잡문이라며 고려와 조선 문인들이 쓴 시나 시조를 비웃었지만 유독 정지상이 쓴 시만은 감탄하고 심지어 정지상의 시와 글을 적어서 가져갔다고 할 정도로 천재 문학가였다. 그래서 항상 사신 접대할 때는 정지상의 시로 사신이 머무는 곳을 도배했다고 할 정도이다.

2. 생애


그의 생년은 구체적으로 나와있지 않아 알 수 없는 부분이 많다. 한국의 참고서에는 고려 12시인의 한 명으로 꼽고 있는데 고려 12시인이 누구인지도 정확하게 짚을 수 없다. 조선 초기의 한시문집인 동문선에 정지상의 한시 작품 14수와 산문(황명으로 지은 국가 의례에서의 표전문이나 연회에서의 축사) 4편이 실려 있는데 과거 급제 때 자신의 어머니에게 물품이 하사된 것을 하례하는 표전문에서 어머니의 성이 노씨(盧氏)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정사간집(鄭司諫集)이라는 그의 작품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해지지 않는다.
2살 때 이미 대동강 위에 노니는 오리를 보고 아래와 같은 시를 지었다.

何人把新筆 방금 누가 붓을 집었길래

乙字寫江波 을(乙) 자를 강물 위에 써놨을까?

1114년(예종 9) 과거에 급제해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1127년(인종 5)에 좌정언의 자리에서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믿고 발호하는 척준경을 탄핵해 유배보내는 활약을 펼쳤다.
1129년 좌사간으로 기거랑(起居郎) 윤언이(尹彦蓬)[3] 등과 함께 시정(時政)의 득실을 논하는 소(疏)를 인종에게 올렸다. 이 해에 서경의 대화궁이 완성되어 인종이 행차해 대화궁의 건룡전(乾龍殿)에서 하례를 받을 때 묘청이나 백수한(白壽翰) 등과 함께 “임금께서 자리에 오르시자 공중에서 풍악 소리가 들렸으니 이 어찌 새 대궐에 행차하시는 상서로운 조짐이 아니겠습니까."라며 하례하는 표문을 초하여 재신과 추신에게 서명하기를 청했지만 관원들은 “우리가 비록 늙었으나 귀는 아직도 어둡지 아니한데 공중의 풍악 소리를 듣지 못하였으니 사람은 속일 수 있지만 하늘은 속이지 못할 것이다."라며 따르지 않았고 이에 정지상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이는 비상한 아름다운 상서이니 마땅히 청사에 기록하여 후세에 밝게 보여야 할 터인데 대신들이 이와 같으니 매우 통탄할 일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표문은 결국 올릴 수 없었다.
1132년 4월 병술에 서경에 행차했던 인종이 대동강에서 용주(龍舟)를 타고 뱃놀이를 했는데 예종의 제사가 든 달이라서 악기를 준비해 놓고 연주하지는 않자 “예법에 기일(忌日)은 있으나 기월(忌月)이 있다는 말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고 기월이 있으면 기년(忌年)도 있어야 되겠습니까? 풍악을 울려서 서경 백성들의 바람에 부응하소서.”라고 해서 왕이 허락하였다고 한다.
서경 출신으로 묘청과 함게 수도를 서경으로 옮길 것을 주장해 김부식 등의 개경을 기반으로 둔 문벌 귀족들과 대립하였다.
동시대의 김부식과는 정적이자 문장으로도 라이벌 관계였다고 한다. 다만 문장에서는 정지상이 한 수 뛰어나서 김부식이 그를 질투했다고 한다. 사실 시에 뛰어난 재능을 보인 정지상과는 달리 김부식은 시보다는 당시에 유행하기 시작한 당송대의 고문체에 능한 문장가였다. 그 때 즈음 고려에서는 그간 대세를 이루던 사륙변려체 대신 고문체가 자리잡고 있었다.
강경한 서경파인 묘청에 비해 온건한 서경파에 가까웠지만 서경을 거점으로 묘청의 난이 일어나자 김부식은 묘청을 토벌하러 가기 전에 화근을 미리 없애는 차원에서 개경에 있던 정지상, 김안, 백수한 등을 함께 처형하였다. 참고로 이 일은 김부식이 왕에게 아뢰지 않고 독단적으로 처형한 뒤 왕에게 사후 보고를 한 것이다.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은 김부식은 평소 정지상과 같이 문인으로서 명성이 비슷하였는데 문자 관계로 불평이 쌓여 이에 이르러 정지상이 내응한다고 핑계하고 죽인 것이다’ 평가했다. 사실 묘청이 서경에서 반란을 일으키는데 개경에 그대로 남아있었다는 것부터가 정지상 등이 묘청의 반란과 연관성이 약하다는 증거지만 원래부터가 정적이므로 일말의 구실이 생기자 이때다! 하고 제거한 것이다. 애초에 문신 간의 대립이기도 해서인지 고려사에서는 정지상 등은 반란자로 꼽지도 않고 있다.

3. 여담


  • 야사 <백운소설>[4]에 의하면 김부식이 시를 짓자 정지상의 귀신이 나타나 "그것밖에 못짓냐 멍청아"라고 비웃고는 더 좋은 구절을 제시해서 김부식을 버로우시키는 이야기도 남아 있다. 자세히 말하면 정지상이 죽은 후의 어느 날 김부식은 이라는 주제로 다음과 같은 를 지었다.
> 柳色絲綠 버들가지는 천 가닥 실처럼 푸르고
> 桃花點紅 복사꽃 일만 점이 붉구나
그런데 갑툭튀한 정지상 귀신이 김부식의 싸닥션을 날리더니 "버들가지가 천 가닥인지 복사꽃이 만 송이인지 세어 보는 미친 놈이 어딨냐? 왜 이렇게 못 짓느냐?"라며 자신이 김부식이 지은 그 시를 고쳤다는 것이다.
> "柳色絲綠 버들가지 가닥가닥 푸르고
> 桃花點紅 복사꽃은 점점이 붉구나"
겨우 두 글자만 바꿔서 김부식을 버로우시키는 일화의 사실 여부야 어쨌든 이 일화는 시를 퇴고하는 하나의 요령으로 인용되곤 하는 일화 중 하나다.
  • 파한집 권하에도 유명한 시인으로 당당히 소개되지만 저작자인 이인로가 정지상의 이름을 까먹어 정씨 성을 가진 인물로 등장한다.[5]

[1] 송인. 고려 시인 정지상을 대표하는 유명한 한시로 언어영역 문제집이나 고전문학 참고서에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2] 서경 정씨는 2000년 조사에 따르면 총 104가구 265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3] 윤관의 아들.[4] 원전은 고려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으로 조선 시대 홍만종이 동국이상국집에서 내용을 발췌해 편집한 것이 백운소설이다.[5] 원문은 '有俊才姓鄭者忘其名' '준수한 재주를 지닌 정씨가 있는데 그의 이름을 잊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