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양왕

 


'''초(楚)나라 39대 국군
23대 왕
양왕
襄王
'''
''''''
미(羋)
''''''
웅(熊)
''''''
횡(橫)
'''아버지'''
초회왕(楚懷王) 웅괴(熊槐)
'''생몰 기간'''
음력
기원전 ???년 ~ 기원전 263년
'''재위 기간'''
음력
기원전 298년~ 기원전 263년
1. 개요
2. 재위 기간
3.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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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초나라의 제39대 군주. 제23대 . 초회왕진소양왕에게 억류되자 초나라 신하들의 도움으로 진나라에서 빠져나와 이 된다. 시호는 경양왕(頃襄王)이지만 약칭 시호인 양왕(襄王)으로 불린다.

2. 재위 기간


개요에서 언급했듯이 초 회왕이 진(秦)나라에 억류되어 더 이상 왕위를 비울 수 없다고 판단한 초나라 신하들이 태자인 그를 데려와 추대하여 왕이 되었다.
초 경양왕 원년(기원전 298년), 초 회왕을 억류해도 검중 땅을 얻을 수 없자 빡친 진 소양왕은 병사들을 집결시켜 무관에서 초나라를 치니 초나라에서는 5만 병사가 죽고, 진군은 석읍과 그 주변의 15개 성을 차지했다.
초 경양왕 6년(기원전 293년), 진나라에서는 무패의 명장 백기(白起)를 보내 한나라(韓)의 이궐 땅을 쳐서 차지했다. 한군 전사자만 24만이 되었다.[1] 그리고 진 소양왕은 제대로 한판 붙자고 초나라에게 압박을 가했다. 초 경양왕은 국력이 진에 미치지 못하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2] 강화를 요청하였다.
초 경양왕 7년(기원전 292년), 초 경양왕은 진나라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초 경양왕 14년(기원전 285년), 초 경양왕은 소양왕과 완 땅에서 화친을 맺었다.
초 경양왕 15년(기원전 284년,) 초 경양왕은 진, 삼진과 힘을 합쳐 제나라를 쳐서 회북[3] 땅을 얻었다.
초 경양왕 16년(기원전 283년), 진 소양왕은 언 땅에서 회맹을 가졌다. 그리고 같은 해 가을 양읍에서 회맹을 다시했다.
초 경양왕 18년(기원전 281년), 한 명궁이 있어 그 소식을 들은 초 경양왕이 그를 부르고는 말을 주고 받았는데, 그가 초 경양왕을 자극하는 말을 했다. 그런데, 초 경양왕은 그 의도를 알아보고 다시 부르니, 그는 오자서의 전례를 들어 진에게 복수할 것을 진언했다. 초 경양왕은 결국 그 진언에 따라 진에게 복수하기 위해 합종을 해 진을 치기로 했다. 그러자 열받은 진 소양왕은 초나라를 쳤다. 그리고 초 경양왕은 주나라를 병탄할 마음을 품었으나 영윤 소자의 말을 듣고는 그 계획을 철회했다.
초 경양왕 19년(기원전 280년), 진이 초를 치자 초나라가 진나라에게 패했다. 그리고 상용과 한수 이북 땅을 진나라에게 떼주고 화친하였다.
초 경양왕 20년(기원전 279년), 진이 초나라의 서릉 땅을 빼앗았다.
초 경양왕 21년(기원전 278년), 진의 장수 백기가 초나라의 수도 영을 빼앗고 초나라 왕들이 묻힌 이릉 땅에 불을 질렀다. 초군이 궤멸하여 더 싸울 수 없었으므로 옛 진(陳)나라 땅으로 천도했다. 그리고 그곳을 영(郢)[4]이라고 불렀다.
같은 해에 진에서 검중 땅과 무군을 점령했고, 거기에 군을 설치했다.
초 경양왕 23년(기원전 276년), 초 경양왕은 진(陳)으로 천도한 뒤 패잔병을 모아들이니 그 수가 10만에 달했다. 그리고 진나라가 점령한 장강 연안의 15개 군현을 되찾았다.
초 경양왕 27년(기원전 272년), 초 경양왕은 삼진(三晉)과 함께 연나라를 쳤다. 그리고 진나라와 화친하며, 태자를 인질로 보냈고, 춘신군에게 그를 보좌하게 했다.
초 경양왕 36년(기원전 263년), 초 경양왕이 위독하자 태자 웅원이 춘신군의 책략으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그가 초나라로 와서 죽은 초 경양왕의 뒤를 이으니 그가 바로 초고열왕이다.

3. 여담


삼국지연의에서는 초선을 칭찬하는 시에 등장하는데, 초 경양왕이 선녀를 만난 일화이다. 출처가 어딘지 모르지만 그것이 야사든 정사든 초 경양왕이 호색한인 것 같다.
[1] 당연히 중국 특유의 과장임을 감안해야겠지만 그만큼 한나라는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2] 바로 초 회왕 때 전투로 증명되었다.[3] 회수 이북을 말한다.[4] 초나라의 서울 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