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기(전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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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전국시대 진나라의 무장. 전국책(戰國策)에서는 이름이 공손기(公孫起)로 기록.
전국시대 최고의 명장으로 꼽히며, 초한쟁패기의 전설적인 무장인 한신 등과 더불어 중국사를 대표하는 명장이다. 그러나 동시에 수없이 많은 적과 포로를 죽여 학살자로 불리기도 하는 인물이다.[1][2]
2. 생애
2.1. 초기
섬서성 미현(郿縣) 출신으로, 그의 조상은 역사서에 다르게 기록되었는데, 신당서 재상세계표(新唐書 宰相世系表)에서는 진목공(秦穆公)의 부하 장수인 백을병(白乙丙)[3] 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당나라의 시인 백거이(白居易)가 지은 자기 자신의 조상의 기록이 담긴 고공현령백부군사장(故鞏縣令白府君事狀)에서는 백기의 선조가 초나라의 왕족 백공 승(白公勝)으로 백공의 난이 실패한 뒤에 백공의 자손들은 진나라로 망명했고, 후에 후손들은 백(白)을 씨로 삼았고, 진나라의 관리가 되었다고 한다. 백기가 백공의 후손 중 한명이라고 하였다. 백공 승은 초평왕의 태자였던 웅건의 아들이므로 백거이의 기록이 맞다면 백기는 초평왕의 후손이 된다.
백기는 상앙의 변법 이후, 장의의 연횡책과 범수의 원교근공책을 받아들인 진나라가 삼진(三晉)[4] 을 지속적으로 압박할 때 두각을 나타낸 장군이다.
그는 당시 진나라의 왕이었던 소양왕 대신 권력을 휘두르던 소양왕의 숙부, 위염의 천거로 장군이 되었다고 하는데 이것 때문에 훗날 진나라의 재상인 범수가 그를 견제했다고 한다. 범수는 위염과 그 일파를 쳐내며 재상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
크고 작은 전투에서 단 한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 당대 최고의 명장으로 칭송받았다. 백기의 칭호인 무안군(武安君)의 의미부터 '''싸우면 지지 않고, 병사를 잘 길러 나라를 평안하게 하였다.'''라는 의미가 담겨있는 칭호인데, 즉 '''불패'''의 명장이었다는 뜻. [5]
역사적 기록이 얼마나 정확한지 판단할 길이 없지만 어쨌든 기록상 종군한 30여 년 동안 대략 '''165만명을 죽인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의 인구가 2000~3000만 남짓이었다는 걸 생각해보면 싸울 수 있는 장정의 20% 가량을 몰살시켰다는 결론이 나오지만, 아직 국가제도가 제대로 완비되려면 한참 남았을 시기라 사실 정확한 기록이라고 볼 수는 없다.[6] 현실적으로 볼 때 학살되었다고 기록된 165만명은 탈주병과 필요에 의한 부풀림 등이 포함된 수치였을 수도 있고, 상대해 깨뜨린 적군의 규모를 합산한 숫자일 수도 있다. 물론 백만명은 아니라도 수십만 명을 죽인 것은 거의 사실로 인정되는 분위기.[7]
2.2. 학살의 시작
사기 백기왕전열전에서는 백기의 전공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진소양왕 13년: 좌서장이 되어 한나라 신성 공격.[8]
- 진소양왕 14년: 좌경으로 승진[9] , 한나라, 위나라를 공격하여 24만 참수, 적 장수 공손희를 포로로 잡고 5개의 성 점령. 이후 국위가 되었고 한나라 안읍에서 간하까지의 영토를 얻음.
- 진소양왕 15년: 대량조[10] 로 승진, 위나라를 공격하여 61개 성 공략.
- 진소양왕 16년: 사마착과 함께 위나라 원 점령.
- 진소양왕 21년: 조나라를 공격하여 광랑 점령.
- 진소양왕 28년: 초나라를 공격하여 언, 등을 점령하고 5개 성 점령.
- 진소양왕 29년: 초나라 영(수도)를 점령하고 이릉을 불태우며 동쪽으로 경릉까지 정벌. 초경양왕은 진으로 도읍을 옮겨야 했고 진나라는 초나라 수도를 남군으로 삼음. 이 공으로 무안군에 봉해짐. 또한 초나라의 무와 검중도 평정.
- 진소양왕 34년: 위나라 공격, 화양을 점령하고 삼진(위, 한, 조)의 장군을 포로로 잡고 13만 참수. 조나라 장수 가언과 싸워 2만을 익사시킴.
- 진소양왕 43년: 한나라 형을 공격해 5개 성을 점령하고 5만 참수.
- 진소양왕 44년: 한나라 남양을 공격해 점령.
- 진소양왕 45년: 한나라 야왕 점령.
- 진소양왕 46년: 한나라 구지, 인 점령
2.3. 학살의 절정
기원전 260년, 드디어 유명한 '''장평대전'''이 벌어진다. 진나라가 조나라를 침략하면서 조군 40만명과 진나라의 병력 수십만명이 전투를 벌이게 된다. 사실 이 전투는 처음부터 백기가 지휘하지는 않았고, 도중에 진의 재상 범수가 승리를 위해 앉힌 것이었다. 그 전까지 왕흘이 범수의 명을 받아 20만 대군을 이끌고 조를 공략했는데, 왕흘도 진나라에서 손꼽히는 명장이었으나 조의 명장 염파의 지구전에 말려들어 불리한 상황이었다.[11]
범수는 계략을 써 염파를 실각시키고 젊고 경솔한 조괄을 대장으로 세우게 만들었고, 왕흘 대신 백기를 조나라 모르게 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내심 백기를 정적 취급했으나, 범수로서는 필승 카드를 꺼낸 셈이다.[12]
백기는 불리한 전황과 병력 열세에도 불구하고 조나라군을 도발하여 진지에서 끌어내었고, 진나라군을 후퇴시켜 도망치는 것처럼 꾸며 조나라군을 유인하다가 조나라군의 후면에 매복시켰던 기병대 등의 병력으로 조나라군과 진지를 갈라놓아 대승을 거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군은 병력을 다수 유지하고 있었으며 그 자리에서 요새를 만들었는데, 백기는 이를 포위하고 사마근의 기병을 이용해 조군의 후방 보급도 끊어버린 채 말려죽이려고 했다. 결국 조군 30만은 굶주림을 견디지 못하고 나와서 싸우다가 패하고 항복하며, 조괄은 이 과정에서 전사한다.
백기는 조나라 포로들을 곱게 돌려보낼 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로로 잡아 먹여살릴 만큼 진의 생산력이 좋지도 않다고 판단하여 '''모든 병사를 구덩이에 파묻고 전후로 포로 45만을 참수시켰다(前後斬首虜四十五萬人)'''. 한 명도 안 돌려보낸 건 아니라서 소년병 240명 정도는 조나라로 돌려보냈다.
이러한 대학살의 원인은 고대 중국은 당대 서양과 달리 노예시장같은 게 없어서 노예시장에 팔아넘기거나 하는 수단이 없었기 때문에 고려대상이 아니었고 수십만을 진나라에 포용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며 조나라로 돌려보내면 후환이 우려되니 죽인다는 결론이었다. 또한 진나라의 군공수작제에 따르면 죽인 적의 머리를 갖고 가야 신분 상승이 되는데, 잡은 포로들을 풀어주는 순간 진나라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전부 죽였다는 설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백기의 포로학살은 흔히들 생각하는 피에 굶주린 학살자들과 달리, 명확한 목적을 가지고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같은 성격의 학살이었다 볼 수 있다.
일단 위에 기록된 추측을 떠나, 열전에 기록된 바로는 백기는 이러한 이유를 들어 학살을 저질렀다고 한다.
또한 눈여겨볼 점은, 호왈백만으로 불린 숫자일 가능성이 크지만 무려 45만에 달하는 포로를 백기의 뜻으로 학살했다는 것이다. 즉 당시 왕이었던 소양왕이나, 재상 범수의 허락을 받지 않고 독단적으로 벌인 학살인데, 학살에 대해서는 왕과 범수도 문책하지 않았으며 사서에서는 '진나라 사람들이 백기는 죄가 없었다 여기며 제사를 지냈다'는 대목이 나올 정도로 진나라 사람들은 백기의 행동에 문제가 없었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당대 진나라 사람들의 마인드는 수십만 조나라인을 학살하고 나서도, 그것을 개의치 않을 정도로 잔인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13]「前秦已拔上黨,上黨民不樂為秦而歸趙。趙卒反覆。非盡殺之,恐為亂。」
「예전에 진나라가 상당 땅을 점령했을 때, 상당의 백성은 진나라에 속하는 것을 싫어하여 조나라에 의탁했다. 조나라 병사는 줏대가 없어 언행을 이랬다저랬다 한다. 모두 죽여버리지 않으면 난을 일으킬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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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기 백기왕전열전
열국지에 따르면, 이때 베어낸 목으로 누각 3개를 지어 백기대(白起臺)라 이름 붙였다고도 한다. 어쨌건 이 사건으로 인해 40만이나 되는 성인 남자들을 일시에 상실한 조나라는 이후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진과 맞붙지 못할 국력으로 전락했다. 그리고 실제로 현대에 장평으로 추정되는 지역에서 상당한 수의 유골이 발굴되기도 했다. 다만 유골의 규모가 수십만 구까지는 가지 않고, 많이 쳐줘도 1만구 정도라고 한다. 참고
2.4. 몰락
그러나 장평대전의 업보 때문이었을까, 이후로 백기는 몰락하게 된다.
장평대전 직후 백기는 바로 조나라 수도인 한단으로 쳐들어가 멸망시키자고 주장했지만 범수는 정적인 백기가[14] 공을 세움으로써 자신보다 더 높은 자리에 있게되어 장차 있게될 정치적 보복을 염려했고 결국 조나라의 세객인 소대[15] 의 설득에 넘어가 백기가 공을 쌓지 못하게 소양왕을 설득해 몇 달 이후 한단을 공격할것으로 결정했다.
당시의 상황은 사기 백기왕전열전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
범수의 모함 이후 한단 공성전이 실패로 끝나고, 진왕은 다시 백기에게 지휘를 맡기려고 하였으나 백기는 계속 병을 핑계로 전쟁에 나가질 않았다. 이 와중에 백기는 '진나라가 내 말을 듣지 않더니 지금 이렇게 되었구나!'라는 말을 했다. 이 말을 듣고 분노한 진왕은 그를 귀양보내고 자결을 명한다.韓、趙恐,使蘇代厚幣說秦相應侯曰:
한나라와 조나라가 두려워하며 소대(蘇代)에게 후한 예물을 주고 진나라 재상 응후 범수를 설득하게 했다.
「武安君禽馬服子乎?」
「무안군이 마복군의 아들을 잡았습니까?」
曰:
응후 범수가 말했다.
「然。」
「그렇소.」
又曰:
또 소대가 말했다.
「即圍邯鄲乎?」
「곧바로 한단(邯鄲) 땅을 포위할 것입니까?」
曰:
응후 범수가 말했다.
「然。」
「그렇소.」
「趙亡則秦王王矣,武安君為三公。武安君所為秦戰勝攻取者七十餘城,南定鄢、郢、漢中,北禽趙括之軍,雖周、召、呂望之功不益於此矣。今趙亡,秦王王,則武安君必為三公,君能為之下乎?雖無欲為之下,固不得已矣。秦嘗攻韓,圍邢丘,困上黨,上黨之民皆反為趙,天下不樂為秦民之日久矣。今亡趙,北地入燕,東地入齊,南地入韓、魏,則君之所得民亡幾何人。故不如因而割之,無以為武安君功也。」
「조나라가 망하면 진왕은 천하의 왕이 되고, 무안군은 삼공(三公)이 될 것입니다. 무안군이 진나라를 위해 싸워서 이기고 70여 개의 성을 공격해 빼앗았으며, 남쪽으로 언 땅ㆍ영 땅ㆍ한중 땅을 평정하고 북쪽으로는 조괄의 군대를 모두 사로잡았으니, 비록 주공(周公)ㆍ소공(召公)ㆍ태공망(太公望)의 공적도 이것만은 못할 것입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고 진왕이 천하의 왕이 되면 무안군은 반드시 삼공이 될 것인데, 그대는 그보다 낮은 자리를 참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그 밑에 있지 않으려고 해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나라가 일찍이 한나라를 공격해 형구(邢丘) 땅을 포위하고 상당 땅을 곤궁하게 했을 때, 상당 땅의 백성들은 모두 조나라로 갔으니 천하가 진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을 싫어하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조나라가 망하면 북쪽 땅은 연나라로 들어가고, 동쪽 땅은 제나라로 들어가며, 남쪽 땅은 한나라와 위나라에 들어갈 것이니, 그대가 얻을 백성은 얼마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차라리 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무안군이 공을 세우지 못하게 하는 쪽이 낫습니다.」[16]
於是應侯言於秦王曰:
이에 응후 범수가 진소양왕에게 말했다.
「秦兵勞,請許韓、趙之割地以和,且休士卒。」
「진나라 병사는 지쳤으니, 한나라ㆍ조나라의 땅을 나누어 받고 화친을 맺어 우선 병사들을 쉬게 하십시오.」
王聽之,割韓垣雍、趙六城以和。
진소양왕은 이를 받아들이고 한나라의 원옹(垣雍) 땅과 조나라의 성 6개를 나누어 받고 화친했다.
正月,皆罷兵。
정월, 병사를 모두 불러들였다.
武安君聞之,由是與應侯有隙。
무안군이 이를 듣고 이 일 때문에 응후 범수와 사이가 나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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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백기왕전열전
그러나 이 유언이 정말 후회를 담은 발언인지는 명확치 않다. 기록에는 단지 장평에서 수십만을 묻었으니 죽는 것이 당연하다는 정도로 나오는데,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는 그런 공을 세웠는데 나를 죽이냐는 힐책으로 (한마디로 내가 너무 많은 공을 세웠으니 나를 죽인 것이 아니냐는 말.) 생각해볼 수 있다. 워낙 생전에 학살을 많이 한 사람이다보니, 정치모략으로 실각 후 자결을 명령받았다고 갑자기 일생 동안 저지른 학살을 후회한다는 정황이 어색하게 판단될 여지가 있기 때문이다.진소양왕 50년 (기원전 257년 11월)
秦昭王與應侯群臣議曰:
진소양왕이 응후 범수 및 여러 신하와 의논하였다.
「白起之遷,其意尚怏怏不服,有餘言。」
「백기가 유배를 가면서 오히려 불만을 품고 복종하지 않으며 쓸데없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秦王乃使使者賜之劍,自裁。
진소양왕이 사자를 보내 검을 주면서 자결하라고 하였다.
武安君引劍將自剄,曰:
무안군이 검을 받아들고 스스로 목을 베려다가 말했다.
「我何罪于天而至此哉?」
「내가 하늘에 무슨 죄를 지어 이 지경에 이르렀는가?」
良久,曰:
한참을 생각하다가 말했다.
「我固當死。長平之戰,趙卒降者數十萬人,我詐而盡阬之,是足以死。」
「나는 죽어 마땅하구나. 장평 땅의 싸움에서 항복한 조나라 병사 수십만 명을 내가 속이고 모두 구덩이에 파묻었으니 이것만으로도 죽어야 한다.」
遂自殺。
마침내 자결했다.
武安君之死也,以秦昭王五十年十一月。
무안군이 죽으니 진소양왕 50년 11월의 일이다.
死而非其罪,秦人憐之,鄉邑皆祭祀焉。
백기가 죽었으나 죄가 없었으므로 진나라 사람들은 그를 불쌍히 여기고 고향에서 제사를 지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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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백기왕전열전
결국 백기는 중국 역사를 넘어 세계사에 길이 남을 학살자로 남았다.
이 유언이 진심이든 아니든 이는 훗날 환관 조고에게 살해되는 몽염의 "내가 이렇게 비명횡사하는 건 만리장성을 지으며 지맥을 많이 끊었기 때문이다." 는 유언과, 항우의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려는 것이지 내가 싸움을 잘하지 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 는 유언과 대비된다.[17]
3. 사후
진나라 백성들에게는 전쟁영웅이라서 그런지 민중들이 그의 죽음을 동정하여 사당을 세우고 매년 제사를 지냈다. 진나라 백성들 입장에서는 그가 외국인들을 많이 죽이든 말든 알 바 아니었을 거고.
한편 전설에 따르면 당나라 때 어느 소가 벼락에 맞아 죽었는데 나중에 살펴보니 소에 '백기'라고 쓰여져 있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백기가 사람을 많이 죽인 죄로 소로 태어난 것도 모자라 벼락을 맞아 다시 죽은 것으로 여겼다고 한다.
당시의 상당 지역은 오늘날의 산서 성 고평(高平) 일대에 해당하는데, 이 지역에는 '백기를 삶아 먹고 싶다'라는 뜻의 츠바이치(吃白起), 혹은 바이치러우라는 음식이 있다. 물론 백기의 고기를 사용하는 것은 아니고 두부를 물에 삶아 먹는 요리인데 이 바이치러우를 한자로 쓰면 '''白起肉'''. 즉 '''백기의 고기'''라는 의미이다. 백기의 고기를 먹음으로써 장평의 학살에 복수하는 의미라고 한다. 이렇게 보면 백기는 옛 조나라 땅의 민중들에게 잔혹한 학살자이자 원수로 수천 년 동안 기억되어 온 듯하다.[18] 한국사에서 개성시 사람을 탄압하고 고려를 무너뜨린 이성계를 개성 사람들이 원망해서 해먹은 성계탕과 비슷한 유래. 그래도 세월의 격이 다르지만.
백기의 전공은 중국사 최고의 명장 중 하나로 꼽아도 손색이 없지만, 민심을 헤아리지 않고 많은 학살을 자행해서 백기에 대한 후세의 평가는 위인 반열에는 오르지 못하고 대학살자, 전쟁병기 정도로 인식되고 있다.
백기가 죽은 뒤 50여 년 후에 진나라는 백기가 벌였던 일과 비슷한 것을 당하는데, 진나라 병사 '''20만'''이 항복한 뒤 결국 신안(新安)에서 초나라의 무장인 항우에 의해 불시에 습격을 받아 태반이 죽고 살아 남은 자들도 모조리 생매장을 당한 신안대학살이 그것. 하지만 장평대전에서 벌어진 학살은 포로가 된 군인들을 대상으로 한 포로학살만을 말하지만[19] 신안대학살은 포로학살은 물론이고 수도로 쳐들어간 뒤 벌어진 민간인 학살도 포함되며 거기다 여러 이유로 끌려온 외국 출신의 사람들도 있었고 심지어 초나라 출신도 있어서 살려달라고 빌었지만 억울하게 죽은 자들도 있다. 이 민간인 학살에 대해서는 농민 출신이었던 유방이 항우를 씹어댈 때 반드시 언급했을 정도.
4. 기타
진나라가 당대 중국의 국가들 중 최강이었으니 진나라의 통일은 시간문제였고, 백기가 거기에 묻어간 것일 거란 평도 있으나 설득력이 낮다.
당시 상앙의 변법으로 인하여 진나라의 국력이 전국칠웅 중 최강이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사기열전에서 채택이 범저에게 언급하기를 백기에게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국가인 초나라는 '''땅이 사방 수천 리나 되며 백만의 군사가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강대한 나라였다.그런 초나라에 백기는 원정군을 끌고가서 수도를 점령하고, 초나라 왕들의 왕릉을 약탈했다. 다만 초나라는 너무나 강력한 귀족들의 권력과 역대 왕들의 실책 때문에 가진 국력을 온전히 쓰지 못했다는 것을 감안해야한다.
뿐만 아니라 당대의 또 다른 강국인 '''조나라와 초나라가 진나라를 치지 못한 것도 백기 때문'''이었다는 구절이 있을 정도다.[20] 백기는 6국을 상대로 73번 이상의 공성전을 치렀으나, 그동안 단 한 번도 패한 기록을 찾아볼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 외에도 위나라와 한나라 연합군을 이궐의 대전투에서 대패시키고, 위나라 수도 함락, 강력한 국력을 자랑하던 초나라 수도를 점령, 조나라 군사들을 수공으로 수장, 한나라 군사들을 참수, 장평대전에서 조나라 군사 40만명을 생매장 하는 등 엄청난 전과를 거두고 무안군으로 책봉되는 영예를 누린 대단히 뛰어난 명장임은 분명하다. 이 와중에 대학살은 빠짐없이 등장한다만(...)
물론 천자문에서 당대에 백기와 버금가는 명장이라 평가된 염파와 이목,[21] 왕전[22] 등이 있으며 후대에도 스스로 서초패왕이라 칭하며 오로지 군공과 용력만으로 중국의 통일을 목전에 뒀던 항우나 그 항우를 격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한신 등이 있기 때문에 백기만을 중국사 최고의 명장이라 단정짓는 것은 어렵다. 거기다 후대에도 중국사에는 온갖 전쟁의 명장들이 나타났기 때문.
5. 대중매체에서
5.1. 삼국지 시리즈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통솔력 100을 위시로 뛰어난 전투력과 이에 반비례한 정치, 매력을 보유한 S급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삼국지 10에서는 고대무장으로 등장한다. 능력치는 통솔력 100/무력 87/지력 70/정치 6/매력 42. 전체 무장을 통틀어서 한신과 함께 둘 뿐인 통솔력 100 보유자 이지만, 14 앞서는 무력을 제외한 나머지 능력치에서의 차이가 너무 크고, 결정적으로 군사 특기가 없어서 효용은 많이 쳐진다. 그래도 통솔력이 워낙 중요한 삼국지 10이고, 고무를 제외한 모든 전투 특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훌륭한 무장.
삼국지 11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00/무력 88/지력 70/정치력 3/매력 39에 특기가 투신#s-3.2인 전투형 무장이다. 병과 적성도 극병 A/창병, 노병, 기병은 S로 통솔력, 적성, 특기는 최상급. 대신 압도적인 통솔력과 무력 빼고 다른 능력치가 평범하거나 처지는데, 사실 지력 말고는 납득할 만한 수준이다.
삼국지 12에서의 능력치는 통솔력 100/무력 88/지력 70/정치력 14, 병종은 궁병, 전법은 강습이다.[23] 삼국지 12에서는 삼국지 11 때에 비해 전법이 최상급은 아니라서 약화됐다. 그래도 공격력만큼은 매우 좋다.
삼국지 13에서의 삼국지 12 때와 같다. 특기는 훈련 8, 순찰 5, 신속 9, 분전 8, 연전 8, 공성 9, 견수 7, 일기 3, 귀모 7에 전수특기는 위풍이다. 전법은 관우와 같은 '''군신'''. 병과적성 S를 하나라도 가진 무장이 매우 드문 이번 작에서 기병, 궁병, 창병 3개가 모두 S로 고대무장까지 통틀어서 유일하다.
삼국지 14에서 능력치는 통솔력 100/무력 90/지력 72/정치 12/매력 46 으로 11에 비해 최대치인 통솔력을 제외한 모든 능력치가 상향하였다. 개성으론 황금개성 투장 그외 개성으로 용장, 위풍, 일심 그리고 병사들을 많이 죽인 것을 반영해서 악명이라는 나쁜 개성을 부여 받았다. 전법으로 만인적, 돌격, 화시, 경파, 대갈, 투석으로 같은 황금개성과 전법을 보유한 장비에 비하면 사용하기 편한 S급 무장이다.
5.2. 삼국지 조조전 온라인
[image]
고대무장으로 등장. 병종은 전차계고 성우는 박상훈이다. 성능면에서 평가는 좋지 않은 편.
5.3. 만화 킹덤(만화)
5.4. 만화 달인전 ~ 9만리를 바람에 타고 ~
킹곤타의 달인전에서는 명실상부한 '''초반의 주인공 중 하나이자 최종보스 겸 작중 최강자 중 하나.''' 장평에서 도중 강판된 염파와의 우열은 알 수 없으나 직접적인 전투를 통한 일인의 무용을 과시한 횟수가 백기가 더 많다. 한 창 전성기인 나이도 있고. 상당한 미남자로 나오며 킹곤타가 작가의 말에서 작품 내 백기를 최고의 미남으로 설정하고 그렸다고 언급하고 있다.[24] 흰색 갑옷을 입거나 검은색 도포를 주로 입고 전투에 임한다. 장평에서의 대학살은 변덕+심통이 섞여서 발생한 백기의 독단적인 결정.
5.5. 드라마 대진제국
중국 드라마 대진제국 2편 종횡에서 젊은 시절을 다뤘으며 훗날 양후가 되는 위염과 단짝으로 나오는 등 비중 있게 등장한다. 3편 굴기에는 주인공 소양왕 다음으로 선태후와 같이 드라마에서 제일 큰 주역으로서 장평대전 등 그의 최후까지 다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