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세윤(독립운동가)

 


'''대한민국의 독립운동가'''
'''최세윤'''
'''崔世允'''

<color=#fff><colbgcolor=#0047a0> '''출생'''
1867년 11월 10일
경상도 흥해군 동부면 곡성리
(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
<color=#fff> '''사망'''
1916년 8월 9일
경성형무소
<color=#fff> '''본관'''
흥해 최씨
<color=#fff> '''이명'''
최세한(崔世翰)
<color=#fff> '''자 / 호'''
성집(聖執) / 농고(農膏)
<color=#fff> '''묘소'''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
<color=#fff> '''상훈'''
건국훈장 독립장
1. 개요
2. 생애


1. 개요


한국의 독립운동가.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받았다. 독립유공자 최산두는 그의 장남이다.

2. 생애


최세윤은 1867년 11월 10일 경상도 흥해군 동부면 곡성리(현 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흥해읍 학성리)에서 통덕랑(通德郞)을 지낸 부친 최재순(崔再淳)과 모친 경주 최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한학을 수학하였고, 병법 천문, 지리, 음양 등에 조예가 깊었다. 또한 성품이 청렴 강직하고 절의를 숭상했다고 한다. 일찍이 흥해군의 형방서기(形房書記)를 지냈으며, 1894년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했을 때 동학군에 가담하여 소모장을 맡아 휘하 300명을 이끌고 관군에 대항했으나 패했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으며 살던 그는 1895년 을미사변이 발발하자 분노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결심하고, 1896년 1월 의병 3~400명을 규합하여 안동의병장 김도화의 부대에 가담하여 아장(亞將)으로 활동했다. 그는 관군을 상대로 결사 항전했으나 무기와 훈련의 부족으로 고전하다가 끝내 군대를 유지할 수 없게 되자 김도화와 상의한 뒤 의진을 해산했다.
그 후 향리로 돌아와 계림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던 그는 1905년 을사조약 체결 소식을 듣고 의병을 재차 일으킬 것을 계획했다. 이때 정환직이 고종으로부터 밀지를 받고 아들 정용기로 하여금 고향 영천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키게 했다. 이 소식을 접한 최세윤은 영천으로 가서 정용기를 방문해 의병을 일으킬 방략과 거사 날짜 등을 약속하고 돌아가 준비를 서둘렀다. 그러나 정용기가 의병을 일으켰을 때 그는 병에 걸려 참가하지 못했다.
1907년 9월 1일 정용기가 입암 전투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뒤늦게 장정들을 이끌고 달려가서 남은 병력을 수습한 정환직에게 가담했다. 하지만 병이 악화되자 고향으로 돌아가 신병 치료에 주력했다. 그해 12월 정환직 마저 일본군에게 체포된 뒤 교수형에 처해졌다는 소식을 접한 그는 비분강개하여 병석을 박차고 일어나 남은 의병대를 찾아갔다.
1908년 2월, 정환직의 부장이었던 이세기(李世紀), 정진한 등의 추대를 받고 의병장이 된 최세윤은 보현산 거동사에서 의진을 수습한 뒤 흥해, 청하, 청송, 영해, 영천, 의성 등지에서 활동하며 일본군을 상대로 격전을 치렀다. 이때 그의 부대는 400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의성 전투에서 크게 패한 뒤 일제가 남한 대토벌 작전을 감행하면서 형세가 어려워지자 의병을 해산하고 은신했다.
그러나 1909년 초 경주군 양북면 용동에서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청하헌병대로 압송되었다. 이때 그는 적에게 욕을 당하느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형산강에 몸을 던졌으나 일본 헌병과 순사보 김영준(金永俊)이 건져 올려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1911년 11월 15일 대구지방재판소 형사부에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공소했지만 12월 12일 대구공소원 형사부에서 기각되고 경성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다. 이후 그는 단식 투쟁을 전개하다 1916년 8월 9일에 옥사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68년 최세윤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그리고 1976년 그의 유해를 국립서울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