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혁

 

1. 개요
2. 생애
3. 선거 이력


1. 개요


최혁(崔爀)
1965년 12월 27일~ (58세)
청년진보당의 대표를 맡았던 정치인이자 사회운동가이다.

2. 생애


1965년 서울에서 태어났다.[출처][1]
1984년 동국대학교 농학과에 입학했다. 학생운동에 투신하여 제헌의회(CA)그룹의 학생운동 조직인 민족민주학생연맹에서 활동했다.[출처]
1991년 민중당에서 중앙당 간사로 일하던 도중, '민중당 개혁을 위한 당 실무자회의'를 결성했다. '실무자회의'는 '민중당은 개혁되어야 한다'라는 문건을 발행하는 등 장기표, 이재오, 김문수 등 민중당 지도부와 대립했다. 그러자 1991년 7월 민중당 상임집행위원회는 최혁과 김길오 등 6명을 '실무자회의라는 불법단체를 조직, 가입한 혐의'와 '왜곡된 허위사실을 유포하여 당과 당지도부의 특정인을 음해하여 당에 위해를 끼쳤다는 혐의'를 이유로 제명했다.[2] 제명 이후 중앙당기위에 재심을 요구했으나 제명 결정은 번복되지 않았다. 제명 이후 중앙당기위에 보낸 재심청구서
1991년 말에 민중당으로부터 제명당한 인원들을 중심으로 오세철 연세대 교수를 대표로 하는 '민중정치연구소'라는 정치단체를 만들었고, 이후 김영규, 김세균, 유초하 등 민교협 좌파 성향 교수들과 민중민주(PD) 계열의 조직들을 결집하여 '민중회의'라는 민중의 독자 정치세력화를 목적으로 하는 정치조직을 만들었다. 민중회의 결성 제안서 민중회의는 노회찬, 주대환 등 인민노련 계열이 주도하는 '진보정당추진위원회(진정추)'와 김철수 등 사노맹 계열이 주도하는 '민중진영 단일정당 추진위원회(민정추)' 등과 함께 1992년 제14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한 백기완 무소속 후보 선거본부(소위 '백선본')에 결합하여 활동했고, 최혁 본인도 중앙 선본에서 조직위원회 간부를 맡았다. [3] 민중대통령후보 선출대회

제14대 대통령선거에 출마한 백기완 후보가 238,648표(1%)라는 기대 이하의 성과를 얻자 ‘백선본’에 참여했던 주요 정치조직인 진정추, 민정추, 전국노련 등이 진보정당 창당을 합의하지 못하고 분열하였다. 이에 최혁은 1993년 민중회의에 참여했던 청년세력을 모아 ‘우리청년회’라는 전국 규모의 청년단체를 결성하였다. 우리청년회의 어제와 오늘 우리청년회는 서울 3개 지역과 대전, 부산 등에 지역조직을 두고 매주 ‘청년공동체’라는 회보를 발행하며, 각종 모임을 통해서 맑스주의를 비롯한 진보적인 사상에 대한 학습을 하고 노동현장과 연대하는 등 진보정당 창당을 위한 활동을 전개했다. [4] [5] 1994년 '우리청년회 사건'으로 구속당했다.[6] 1995년 출소 이후 서울대 김세균 교수가 소장이었던 한국노동이론정책연구소 연구원으로 활동하다가, 1997년 ‘노동법·안기부법 개악 철회와 민주수호를 위한 범국민대책위원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활동하였다. [7]
1997년 12월 제15대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노회찬의 진정추 계열과 김철수의 민정추 계열이 통합한 진보정치연합(진정련) 등과 함께 진보정당을 창당하여 후보를 출마시키려고 하였으나 합의에 실패하자, 독자 진보정당 창당에 나섰다. 우리는 청년정당으로 간다
1998년 11월 29일 청년진보당을 창당하고, 대표를 맡았다.[8] [9] [10] [11] 당시 청년진보당은 권영길, 노회찬 등이 주도하고 진보진영의 다수가 참여한 '국민승리21’과 다른 독자 노선을 견지하며 경쟁했다. 말지 인터뷰 '국민승리21과는 선의의 경쟁관계'
1999년 3월 1999년 재보궐선거에서 구로구 을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하지만 청년진보당 최혁 후보는 진보정당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선거운동 과정에서 장애인을 위한 수화유세와 점자 홍보물을 관철시키는 등 참신한 선거운동으로 주목을 끌었다. 한겨례21 인터뷰 [12] [13]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청년진보당은 서울 45개 전 지역구와 인천 부평 을에 후보를 출마시켰다. 당대표였던 최혁 본인도 종로구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청년진보당은 서울 지역에서 평균 3%의 득표율을 얻는 성과를 거두면서 진보정당의 가능성을 확인했다.오마이뉴스 인터뷰 '청년좌파, 우리는 다르게 생각한다'] [14] [15] 청년진보당 후보 명단
2000년 총선 이후 당 대표에서 물러나서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2002년 귀국한 이후 청년진보당을 모태로 창당한 사회당에서 부대표직을 맡았다.
2002년 5월 주대환이 밝힌 바에 따르면, 주대환과 최혁은 수차례 만남을 가지며 민주노동당사회당의 통합 문제를 논의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민주노동당 중앙이 합의안을 묵살하며 통합은 불발되었다. [16] 합당 논의에 관한 주대환 글
2002년 12월 실시된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당 후보로 출마한 김영규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맡았다.[17] 선거 결과 22,063표(0.08%)라는 저조한 성적으로 참패하자 사회당은 심각한 내분에 빠져들면서 당의 혁신을 둘러싼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사회당 혁신토론 '나의 견해'
사회당 당직에서 물러난 후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략 전쟁에 반대하는 세계적 차원의 반전평화운동에 참여했다. 전쟁 전에 ‘한국이라크반전평화팀’팀장으로 이라크에 입국하여 ‘인간방패’들과 함께 반전캠페인을 벌였고, 전쟁 후에도 남아 이라크 민중을 지원하는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이라크 입국 한겨례21 '그 어머니의 눈빛, 그 고통' 한겨례21 '반전평화팀 무슨 일을 했나' [18] [19] [20] [21] [22] [23]
2003년 이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종류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99
1999년 재보궐선거 (서울 구로구 을)
청년진보당
2,163표 (4.16%)
낙선 (3위)

2000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종로구)
청년진보당
1,141표 (1.4%)
낙선 (6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