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국회의원 선거

 



'''대한민국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투표 독려 공익광고

1996년 4월 11일
15대 총선

2000년 4월 13일
'''16대 총선'''

2004년 4월 15일
17대 총선
}}}
'''투표율'''
57.2%▼ 6.7%p
'''선거 결과'''
[image]

'''정당'''
'''지역구'''
'''비례대표'''
'''총합'''
'''비율'''
'''한나라당''']]
'''112석'''
'''21석'''
'''133석'''
'''48.7%'''
'''새천년민주당''']]
'''96석'''
'''19석'''
'''115석'''
'''42.1%'''
'''자유민주연합''']]
12석
5석
17석
6.2%
'''민주국민당''']]
1석
1석
2석
0.7%
'''희망의한국신당''']]
1석
0석
1석
0.4%
'''무소속''']]
5석
-
5석
1.8%
1. 개요
2. 배경
3. 결과
3.1. 정당별 분석
3.2. 문세표의 전설 - 초, 초, 초박빙선거
3.3. 아슬아슬한 여소야대 - 50:50 국회
4. 여담
4.1. 출구조사 大실패
4.2. 낙천 운동
5. 국회의원 목록
6. 관련항목

[clearfix]

1. 개요


2000년 4월 13일 치러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 투표율은 '''57.2%'''였다.[1] 지금과는 달리 '''1인 1표제'''였으며 비례대표 의석은 지역구에서 각 정당이 득표한 것의 합산으로 결정했다. 법률에 따른 공식명칭은 '비례대표'였지만, 실상은 15대 총선에서의 전국구를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2] 이 때문에, 이 시기의 비례대표를 그냥 전국구로 칭하는 일도 잦은 편이다.

2. 배경


의원 정수는 273명[3]으로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 비해 26명이 줄었다. 비례(전국구) 의석 수를 동수로 유지한 채 지역구 의석 수만 26석 줄였다. 2021년 현재, 6공화국 역사상 의원정수가 줄어들었던 유일한 경우인데 이는 1997년 외환위기 여파로 전 국가적으로 고통분담을 하는데 국회 역시 몸집을 줄이고 불필요한 비용 지출을 막아야한다는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출마 정당은 연립 여당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야당한나라당, 민주국민당, 민주노동당, 청년진보당(사회당의 전신), 희망의한국신당 등이 참여했다.
참고로 '''새천년민주당-자유민주연합 연립정부가 구성'''되었던 시기라, 여야의 승패를 분석해보려면 두 정당의 득표율과 의석수를 합산해서 봐야 한다. 다만, 이 선거에서는 2당 후보간 선거 연대는 없었다.

3. 결과


  • 지역구별 당선 의원 목록은 "제16대 국회의원" 문서의 해당 부분 참조
  • 비례대표 당선 의원 목록은 "제16대 국회의원" 문서의 해당 부분 참조
  • 지역별 상세 개표 결과는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선거 통계를 참조 #
[image]
[4]
범례: 하늘색-한나라당, 청록색-새천년민주당, 연록색-자유민주연합, 남색-민주국민당, 밝은연록색-희망의한국신당, 회색-무소속.
만약 색깔이 비슷해서 위 지도가 헷갈린다면, 한나라당을 빨간색으로 바꾼 버전도 참조해보자. 사진 참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지역
한나라당
새천년민주당
자유민주연합
민주국민당
희망의한국신당
무소속
합계
서울
17
'''28'''
0
0
0
0
45
인천
5
'''6'''
0
0
0
0
11
경기
18
'''22'''
1
0
0
0
41
강원
3
'''5'''
0
1
0
0
9
대전
1
2
'''3'''
0
0
0
6
충남
0
4
'''6'''
0
1
0
11
충북
'''3'''
2
2
0
0
0
7
광주
0
'''5'''
0
0
0
1
6
전남
0
'''9'''
0
0
0
1
10
전북
0
'''11'''
0
0
0
2
13
부산
'''17'''
0
0
0
0
0
17
대구
'''11'''
0
0
0
0
0
11
울산
'''4'''
0
0
0
0
1
5
경남
'''16'''
0
0
0
0
0
16
경북
'''16'''
0
0
0
0
0
16
제주
1
'''2'''
0
0
0
0
3
지역구
'''112'''
96
12
1
1
5
'''227'''
비례
'''21'''
19
5
1
0
-[5]
'''46'''
총합
'''133'''
115
17
2
1
5
'''273'''
'''비례대표'''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인

7,365,359
'''39.0%'''
21

6,780,625
'''35.9%'''
19

1,859,331
9.8%
5

695,423
3.7%
1

77,498
0.4%
0

3,950
0.02%
0

223,261
1.2%
0

125,082
0.7%
0

1,774,221
9.4%
-
총합
18,904,740
100.0%
46

3.1. 정당별 분석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인제 선대위원장 체제를 전면에 내세우고 제주, 호남에서 충청, 수도권을 거쳐 강원까지 이른바 "S자 노선" 전국 정당을 꿈꾸었다. 그리고 선거 결과 전략이 어느정도 들어맞으며 의석수가 늘어나 호남 석권과 함께 수도권과 강원, 제주에서 1당을 차지했고 충청권에서도 상당수의 의석을 확보한다. 하지만 공동여당이었던 자민련과의 선거공조 무산으로 한나라당에게 20여개 선거구를 어부지리격으로 내주며 과반 확보에는 실패하고 만다.[6] 수도권도 제1당 달성에는 성공했지만 경기와 인천에선 경합 우세 정도 수준이라 당초 기대치보단 못한 결과였다.
공동여당이었던 자유민주연합은 텃밭인 충청도에서 기대보다 부실한 성적을 낸다. TK와 강원도에서 크게 선전하고 충청을 석권하며 무려 50석을 기록한 15대 총선 의석의 1/3 토막난 결과였다. 세부 내용을 보면 반민자민주 정서를 자극하여 15대 총선 당시 TK 의석을 상당히 차지했지만 16대 들어선 DJP 연합 등의 여파로 TK를 비롯한 비충청권 보수 유권자들은 자민련 대신 한나라당에 다시 몰표를 던지게 되었고, 충청권도 당시 충청 출신인 이인제 선대위원장을 내세운 새천년민주당에 상당수 의석을 뺏기게 된다. 특히 충청북도는 한나라3, 민주2, 자민련2의 구도로 바뀌면서 이후 본격적인 캐스팅보터 지역으로 거듭나게 된다. 물론 애초에 충북 지역은 이주민이 많아 과거부터 충남보다 충청계 지역정당세가 약한 지역이긴 했다만.
한나라당영남 지역을 제외하곤 (충북을 충청도로 합칠시) 어느 지역에서도 제1당이 되지 못했지만, 여권분열 등에 힘입은 수도권 접전지역 선방과 인구수가 풍부한 영남 텃밭의 결집으로 의석을 쓸어담으며[7] 과반에서 4석 모자라는 133석으로 제1당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하지만 영남 지역주의에 기반한 1당이란 점에서 전국적 지지세가 약했다는 한계점은 노출된다.
참고로 이 때 노무현 후보가 지역주의 타파를 명분으로 종로 대신 부산에 출마하지만 낙선하고 만다. 다만 이런 그의 모습은 훗날 그가 대통령이 되는 밑거름이 되고, 이런저런 여파가 겹쳐 1990년대 3당 합당 이후 보수 텃밭이 된 PK 지역은 2010년대 이후부턴 다시 TK 대비 보수세가 약화된다. 한편, 재미있게도 이때 영남에서 비 한나라당 후보로 당선된 유일한 사람이 울산에서 당선된 정몽준 후보였다.
정리하면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의 기대치엔 못미친 선방,[8] 한나라당의 약진, 자민련교섭단체 달성 실패 정도로 요약되며, 선거는 백중세였지만[9] 그래도 당만으로 따지자면 제1당을 차지한 한나라당이 승리했다고 간주되었다.
한편, 선거 직전인 2000년 1월 창당한 민주노동당은 당초에 창원과 울산에서 의석을 획득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예측되었고 실제 출구조사 결과에서도 2석의 의석을 확보하는 것으로 나왔지만 막상 투표함을 까보니 두 곳 모두 한나라당 후보가 이기는 바람에 원내정당의 꿈이 다시 물거품이 되고 만다. 청년진보당은 비례득표에선 마찬가지로 저조했지만 지역구 득표에선 서울 전 지역구에 출마한 젊은 후보를 중심으로 진보정당 치고는 만만찮은 2~5%의 득표를 올렸으나,[10] 이후 선거에서 진보정당 포지션을 민주노동당에 빼앗겨 사실상 듣보잡화되었기 때문에 큰 의미는 없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한나라당 낙천 현역 의원들을 중심으로 한 민주국민당은 제법 거물들이 많아 기대를 모았으나, 막상 결과는 지역구전국구에서 1석씩 밖에 못건지며 대패하였다. 반면 한때 김종필의 가신이었다 자민련을 탈당해 희망의한국신당을 만든 김용환 후보는 보령시-서천군 지역구에 출마해 당선된다. 김용환 후보가 허화평과 손을 잡긴 했으나, 사실상 선거에 홀로 나와 홀로 살아남았다는 점에서 거물들이 대거 낙마한 민주국민당을 생각하면 저비용 고효율(...)의 극치를 보여준 셈. 이후 민국당은 한나라당 대신 여권에 협조하고, 김용환 의원은 당을 해체한 후 이듬해인 2001년 한나라당에 입당한다.

3.2. 문세표의 전설 - 초, 초, 초박빙선거


1표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보여준 초접전의 본좌급을 보여준 총선이다.
[image]
-경기도 광주시(박혁규 vs 문학진) '''3표차(0.0006%차!)'''[11]
문학진 의원의 별명을 '''문세표'''가 되게 한 이 선거는 전설은 아니고 레전드로 길이 남았다.
[image]
-서울 동대문구을 '''11표차(0.014%차)'''(김영구 34,796표 vs 허인회 34,785표)
다만 동대문구을은 위장전입이 선거 결과에 영향을 줬다고 판단되어 '''선거 자체가 무효'''로 처리되었다. 양 후보가 모두 위장 전입을 한 것으로 밝혀져 그 숫자차이가 표차보다 많다는 이유였다. 당선 무효가 아니라 선거 무효이므로, 재판부는 의원직을 상실한 김영구 의원의 재출마도 가능했었다고 해석했으나#, 김영구 의원은 나오지 못했고 허인회 후보만 재도전 했다. 그 때 치뤄진 재보선에서 당선된 사람이 바로 한나라당의 '''홍준표'''다. 결국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허인회 후보가 또 설욕전을 펼쳤으나 홍준표가 1.5% 차로 아슬하게 당선된다.
[image]
-경북 봉화군/울진군 '''19표차(0.03%차)'''(김광원 vs 김중권[12])
여기는 표차도 주목을 받았지만, 여기가 당시 한나라당의 텃밭 중 텃밭이던 TK의 군인 것에서 더욱 주목을 많이 받았다. 만약 김중권이 20표만 더 받았다면, 밑에 나온 김부겸보다 먼저 지역감정을 깬 최초의 민주당 후보가 되었을 것이다.
김중권 후보는 고향인 울진군을 중심으로 강한 표몰이를 했지만 김광원 후보도 같은 울진 출신이었을 뿐더러, 삼척시 산불로 인해 많은 울진 사람들이 투표에 참여하지 못해 낙선 했다는 말이 지역 정가에 오르내렸다. 울진 원자력발전소를 반대했다가 낙선한 14대 총선의 전력도 한몫 했을 것으로 보인다.
[image]
-서울 용산구 '''113표차(0.12%차)'''(설송웅[13] vs 진영[14])
[image]
-경남 진해시 '''115표차(0.18%차)'''(한나라당 김학송 vs 무소속 김우석)
[image]
-서울 동작구 갑 '''146표차(0.16%차)'''(서청원 vs 이승엽)
[image]
-인천광역시 중구/동구/옹진군 (서상섭 vs 서정화 vs 이세영) '''193표차(0.27%차)'''[15]
[image]
-경기 군포시 '''260표차(0.25%차)'''(김부겸[16] vs 유선호) 등...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양당 초접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3당 초접전 선거구가 제법 나왔다지만 이 16대 총선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었던 셈이다.[17]
여튼 이 초접전 격돌의 승자는 결과적으로 한나라당에게 돌아갔다. 처음 출구조사에서 불리하게 나올 때만 해도 "남북 정상회담 발표가 영향을 미친 것 아니냐"라는 반응이 나왔지만 끝까지 가본 결과 도리어 한나라당에 유리했다. 서울에서만 6곳(상술한 동대문을, 동작구갑, 서대문구갑, 마포구 갑/을[18], 구로구 갑)에서 한나라당이 2% 이하의 격차로 승리했다. 경기도에선 광주시, 안양시 동안구, 광명시, 남양주, 파주시 6개 지역에서 2% 미만의 격차로 한나라당이 승리했다. 그러므로 서울을 포함한 '''수도권 지역이야말로 여야의 승패가 갈린 지역'''이었다고 볼 수 있다.

3.3. 아슬아슬한 여소야대 - 50:50 국회


16대 국회는 한나라당이 1당을 차지했으나 새천년민주당이 의석을 불리면서 어느 당도 과반(137석)을 점하지 못한 상황이 되었다. 호남 지역 무소속을 더하면 민주당은 119석에, 자민련이나 정몽준같은 반 한나라당계 보수가 20석을 구성했으니 그야말로 절묘했다. 이런 배경 속에 전반기 국회는 국민신당 출신의 이만섭 새천년민주당(여당) 의원[19]이, 후반기 국회는 야당 한나라당의 박관용 의원이 의장직을 맡았다.
15대 국회의 캐스팅보터였던 자민련의 의석이 줄어들면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할 제3당 없이 여야 양당의 협의정치로 대부분의 법안이 처리되었다. 여기에는 '날치기 절대불가'를 역설한 이만섭 국회의장의 역할도 컸다. 한 예로 민주당은 개원 이후 원내교섭단체 구성요건을 20석에서 10석으로 낮추는 국회법 개정안을 법사위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킨 적이 있지만,[20] 이만섭 국회의장의 거부로 말미암아 무산된 바 있다.
DJP의 사이가 서먹해지면서 무산된 선거공조로 인해 벌어진 충남 진검 승부에서 자민련은 텃밭 의석을 대거 내주며 큰 타격을 입었지만, 민주당도 자력으론 과반이 안되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진 아니었다. 결국 두 당은 다시 화해하며 손을 잡았고, 자민련 총재권한대행 이한동이 전격적으로 국무총리에 지명되면서 DJP공조는 사실상 복원되었다. 그리고 16대 국회 개원 이후에는 민주당과 자민련, 민국당이 모두 힘을 합쳐 이만섭 의원을 국회의장으로 당선시키고, 이한동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을 통과시켰다. 참고로 두 건의 표결은 모두 '''찬성 140(민주당 119석+자민련 17석+민국당 2석+한국신당 1석+정몽준) : 반대 132(한나라당 133석 중 1명 이탈)'''로 여권의 아슬아슬한 승리로 끝났다.
이런 협력무드의 연장선상에서 급기야 2000년 12월 말엔 민주당에서 자민련에 의원을 '''꿔주는''' 희대의 사건이 벌어지기도 한다(...). 즉, 민주당 의원 중 3명(송석찬, 배기선, 송영진)을 자민련으로 이적시켜 교섭단체 조건인 의원수 20명을 맞추도록 한 것. 그런데 또 자민련 의원 한명이 이런 꿔주기에 반발해 탈당[21]하면서 교섭단체 조건에서 1석이 미달하게 되자 한명(장재식)을 더 꿔주었다(...). "꿔줬다"는 표현이 참으로 정확하게도, 2001년 통일부 장관 파동으로 양당의 공조가 붕괴되자 이들 네명의 의원은 민주당으로 다시 복당한다. 어찌되었든 당시 여권은 당분간만이라도 민주당(115석) + 간신히 교섭단체를 구성한 자민련(20석) + 사실상 와해된 민주국민당(2석) + 정몽준 등으로 아슬아슬하게 원내 과반수를 확보했었다.
그러다 2001년 9월 통일부 장관 파동으로 공조가 붕괴되고, 한나라당의 재보궐 선거 승리와 일부 의원들의[22] 한나라당 이적으로 16대 국회 2기(2002년 6월부터)가 시작되는 김대중 대통령 말기에는 한나라당이 140석이 넘는 과반수를 차지하게 된다.
16대 국회의 마지막 해인 2004년에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따른 정치적 갈등으로 새천년민주당에서 분당한 열린우리당이 창당되면서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의 소용돌이에 휩싸이기도 했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13, 14, 15대 총선에 이어 16대 총선까지 선거 직후 결과는 아슬아슬한 여소야대로 끝났고, 이후로는 반대로 17대(열린우리당)-18대(한나라당)-19대(새누리당) 총선에서 여당이 과반을 차지한다. 때문에 16년 뒤인 2016년 20대 총선에서 여소야대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이 총선이 마지막 여소야대를 만든 선거로 남게 된다.

4. 여담



4.1. 출구조사 大실패


'''제16대 국회의원 선거 출구조사 결과'''#
정당
-

'''한나라당'''
115(K: 104~126/S: 113~119)
120
'''새천년민주당'''
132(K: 119~138/S: 126~133)
127
자유민주연합
17
17
민주국민당
2
3
희망의한국신당
1
1
무소속/기타
6
5
이 선거에서 처음으로 80여곳의 경합 지역구에 한하여 출구조사를 했는데[23][24] 출구조사에서는 여당인 새천년민주당이 대략 120석대 중후반~130석대 초반을 확보하는 것으로 나왔기 때문에 연립여당과 합해서 과반(다만 여기서도 자민련은 실제 개표결과와 비슷하게 참패하는 것으로 나왔다)을 넘을 것으로 예측되었다.(KBS-SBS 예측: 민주당 132석, 한나라당 115석, 자민련 17석./MBC 예측: 민주당 127석, 한나라당 120석, 자민련 17석.)
하지만 막상 개표가 중반에 이르면서 새천년민주당 경합우세로 예측되었던 곳이 상당수 뒤집혀지는 바람에 개표 결과는 반대로 한나라당의 원내 1당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따지고 보면 전체 득표율 예측은 한나라당이 약간 우세한 수준으로 오차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는 하지만(KBS-SBS: 한나라당 38% VS 새천년민주당 37%) 어차피 지역단위에서 많이 빗나간 건 마찬가지였고 당연히 방송사들은 1996년 총선에 이어 또다시 사과방송을 해야했다. 선거 다음 날 뉴스데스크 도중 사과방송.[25]
16대 총선에서 KBS-SBS 예측조사와 실제 당선자가 바뀐 지역은 아래와 같다. (앞쪽이 예측조사 1위, 뒤쪽은 실제 당선자) 총 21개 지역. 그 중 14석이 수도권에 몰려 있다.[26] '''굵은 글씨'''는 출구조사에서 경합으로 표시되지 않았는데도 결과가 뒤집힌 지역.
  • 인천광역시
    • 중구·동구·옹진군 : 서정화(새천년민주당)[예측조사]서상섭(한나라당)
  • 충청북도
    • 청원군 : 정종택(새천년민주당)[예측조사]신경식(한나라당)
MBC 예측조사의 경우, 선거 당일 MBC 개표방송 영상이나 조사 주체인 한국갤럽의 자료에 일반인이 접근하기 어렵기 때문에 자세한 선거구별 결과를 확인하기 어려운 상황이며, 총 23개 지역구 예측이 빗나갔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다. 2000년 4월 14일 MBC 뉴스데스크의 사과방송 자료화면을 통해 파악할 수 있는 예측 결과가 뒤집힌 지역은 다음과 같다.

4.2. 낙천 운동


'함량 미달 정치인에 대한 낙천·낙선 운동'을 벌인 광범위한 시민단체연합인 '2000년 총선 시민연대'가 처음으로 등장해 힘을 발휘한 선거이기도 하다. 민주당 정부가 들어서면서 "안티 조선일보" 운동으로 대표되는 언론개혁 운동과 "깨끗한 정치"에 대한 열망이 높았던 시기의 산물이지만, 당시 야당(한나라당)에서는 김대중 정부가 이들을 지원해 선거에서 유리하게 활용하게 했다는 식의 비판이 일기도 했다. 게다가 이들 시민단체가 '''김종필정몽준에게 명예로운 은퇴를 권유한''' 것도 치명타. 결국 이래저래 DJP 공조는 큰 손상을 입고 말았다.
결과적으로 선관위에 의해서 '''낙천''' 운동은 불허되었으나, 선거법 개정으로 '''낙선''' 운동은 허가되면서 이런 특정 후보 떨어뜨리기 열풍은 4년 뒤인 2004년 17대 총선까지 계속되었다.
일부에서는 이들의 움직임에 대해 "당신들이 시민 전체를 대표하는가? 우린 그런 위임을 한 적이 없다"라는 기치를 내걸고 '반(反) 총선 시민연대'가 활동하기도 했다.

5. 국회의원 목록


제16대 국회의원 목록 항목 참조.

6. 관련항목


[1] 1998년 2회 지방선거(52.7%)에 이어 연속으로 50%대 투표율이 나와 정치적 무관심에 대한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실제 2000년대 치러진 일부 선거들은 투표율이 40%대까지 떨어지기도 하는 등 부진한 성적을 기록하지만, 그래도 2010년대 이후부턴 다시 조금씩 회복되었다.[2] 1인 2표제에 따른 비례대표제는 다음 총선인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실시되었다.[3] 지역구 227명, 비례 46명.[4] 참고로 이 지도에는 오류가 좀 있다. 일례로 서울특별시 중구용산구는 한나라당이 아닌 새천년민주당 후보가 당선되었다.[5] 1인 1표제이므로 무소속은 비례대표에서 사표가 됨[6] 단순 산술적 계산만 따져보면 선거공조 무산으로 서울 6석, 인천 3석, 경기 11석, 충북 3석, 경북 2석, 강원 1석해서 무려 '''26석'''을 날렸다. 물론 선거공조를 한다고 무조건 시너지 효과를 낼지는 미지수지만, 그래도 선거공조에 성공했으면 공동여당이 아무리 못해도 과반은 충분히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는 예측은 가능하다. 실제로 새천년민주당과 자민련의 득표율을 합하면 45.7%로 한나라당을 6.7% 정도 따돌리는 수준인데 이 정도면 상당한 의석 격차를 벌려나갈 수 있는 수치다.[7] 당시 한나라당의 지역구 당선자 112석 중 무려 '''64석'''이 영남권 의석이었다.[8] 의석수를 늘렸고 전국정당화도 부분적으로 성공했지만, 정국을 안정적으로 이끌어갈 과반과 제1당 달성은 실패했다.[9] 새천년+자민련+친여권 성향 무소속까지 합치면 범여권 의석이 과반을 간신히 넘겼다. 그래서 후술되어있듯 전반기 국회의장도 새천년민주당이 가져갔다.[10] 일부 지역은 자민련을 달고 나온 군소후보나 민주노동당 후보를 앞서기도 했다.[11] 중간 판결에선 2표차로도 나와서 "문두표(...)"가 되었다가, 결국 대법원 최종 판결에서 3표로 바뀌었다(대신 전체 무효표가 늘어나게 판결했다). 그래서 최종적으로는 문세표가 맞다.[12] 원래는 5공 유력인사였으나 김대중의 사면으로 국민의정부 초대 비서실장을 지내고 당시 새천년민주당으로 출마했다.[13] 초대 민선 용산구청장이자 역사강사 설민석의 아버지. 4.19 혁명 당시 중동고등학생으로 이승만을 만난 시민(학생) 대표 5인 중 한명. 새천년민주당 소속. 후단협 출신이 되나 열린우리당에 갔다가 불출마를 했다. 2012년 18대 대선 당시엔 새누리당에 입당해 박근혜를 지지하기도 했다.[14] 박근혜 의원 시절 비서실장과 박근혜 정부 시절 보건복지부 장관을 지냈으나, 국민연금 문제로 박근혜와 마찰을 일으키고 사이가 멀어져 이후 보복성 공천 탈락까지 당하자 2016년 20대 총선을 앞두고 더불어민주당으로 당적을 옮기게 된다. 공교롭게도 앞 각주에 설명한대로 설송웅이 새누리당으로 옮겼으니 이 선거로부터 16년만에 두 사람의 당적이 엇갈리게 된 셈.[15] 각각 21,724표(30.43%), 20,351표(28.50%), 21,531(30.16%)를 득표해 서상섭 후보가 승리했다.[16] 훗날 독수리 오형제로 열린우리당으로 옮기게 되며, 2016년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때 대구광역시 수성구에서 당선되어서 민주화 이후 첫 민주당계 정당 TK 소속 국회의원이 된다.[17] 참고로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최소 표차가 경기도 성남시 수정구의 129표차이다. 정작 초접전이라던 19대 총선의 최소 표차는 고양시 덕양구갑의 170표차로 18대보다도 큰 편. 20대 총선은 인천광역시 부평구갑의 26표차, 전북 전주시을 111표차, 강원도 원주시갑 134표차 등이지만 역시 16대 총선의 기록에는 미치지 못했다.[18] 대표적인 접전 지역. 박주천 vs 황수관 박사의 대결 결과 691표차로 석패했는데, 2013년 시점에서는 두 맞수 모두 고인(...).[19] 14대에서 한 번 국회의장을 맡은 적이 있다. 이때는 민주자유당 소속.[20] 이때 법사위 여당측 간사였던 천정배 의원이 날치기의 총대를 맸다. [21] 19대 전반기 국회의장을 지낸 강창희 의원이다.[22] 강성구, 김윤식, 원유철, 이근진, 전용학, 김원길, 박상규 & 충남권의 김용환, 강창희.[23] MBC와 갤럽이 열흘 전부터 전화 여론조사를 통해 선정한 80여 개 경합 지역구를 선정해 유권자 22만명을 대상으로 출구조사를 실시했다. 나머지는 15대 총선과 동일하게 선거 당일 전화 여론조사로 했다. # 이것은 kbs도 마찬가지. 4개 여론조사기관이 그 동안 세 차례에 걸쳐 모든 지역구 여론조사를 해오고 이중 경합이 치열한 77여개 경합 지역구는 선거 당일 출구조사(하나의 선거구 당 투표소 최대 6개)를 실시해서 신뢰성을 한층 높였다고 한다. # 이런 출구조사는 17대, 18대 총선에서도 경합 지역구에 한하여 출구조사를 했고 전국 모든 지역구를 대상으로 한 출구조사는 제19대 국회의원 선거부터 시행하게 된다.[24] 4년 전인 15대 총선에서도 예측조사는 했지만 이는 출구조사가 아닌 전화조사로 예측한 것이였다. 더 정확하겐 15대 총선 당시 MBC에서 전국 67개 경합 지역구를 중심으로 자체적으로 현장 출구조사를 하긴 했지만, 당시 기준으로 불법이라 타 방송사의 훼방으로 실패한 적이 있다(...). 물론 이 출구조사 결과는 선거 당일엔 발표되지 않았고, 선거 다음 날 MBC 뉴스 프로그램에서 자사가 벌인 출구조사가 정확하다고 홍보할때 공개되었다.[25] 사실 각 지역구마다 출구조사를 하면 표본이 부족해서 결과가 뒤집힐 가능성이 높다. 그래서 아예 19대 총선의 경우 전국 246개 모든 지역구 단위로 하나의 지역구당 10여개의 투표소에서 출구조사를 했는데도 망했어요(...).[26] 신기하게도 다음 총선에서도 같은 양상이 나타난다.[예측조사] A B 1위였으나, 실제 개표에선 3위로 낙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