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color=#373a3c> '''노회찬 관련 둘러보기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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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섭단체 구성''

'''초대
노회찬'''

제2대
장병완







'''대한민국 국회의원 (서울 노원구 병)'''
제18대
홍정욱

'''제19대
노회찬'''[74]

제19·20대
안철수
'''대한민국 국회의원 (경남 창원시 성산구)'''
제19대
강기윤

'''제20대
노회찬[75]'''

제20대
여영국[76]





'''대한민국 제17·19·20대 국회의원
노회찬
魯會燦 | Roh Hoe-chan
'''
<colbgcolor=#ffcc00><colcolor=#000> '''출생'''
1956년 8월 31일
경상남도 부산시 초량동[1]
'''사망'''
2018년 7월 23일 (향년 61세)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
'''묘소'''
마석 모란공원[2]
'''본적'''
함경남도 흥남시
'''본관'''
강화 노씨
'''학력'''
부산 초량초등학교 (졸업)
부산중학교 (졸업)
경기고등학교 (졸업)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 / 학사)
'''병역'''
육군 일병 소집해제(방위병)
'''종교'''
무종교 (무신론)[3]
'''가족'''
2남 1녀 중 장남, 배우자 김지선
'''의원 선수'''
'''3'''
'''의원 대수'''
17, 19, 20
'''약력'''
진보정치연합 대표
국민승리21 정책기획홍보위원장
매일노동뉴스 발행인
민주노동당 사무총장
진보신당 공동대표
진보정의당 공동대표
정의당 원내대표
평화와 정의의 의원 모임 원내대표
제17대 국회의원(비례대표)
제19대 국회의원(서울 노원 병)
제20대 국회의원(경남 창원 성산)
'''서명'''
[image]
'''SNS[4]'''

1. 개요
2. 생애
2.1. 학창 시절
2.2. 노동운동가 시절
2.3. 정치 경력
2.3.1. 민주노동당 활동
2.3.2. 진보신당 활동
2.3.3. 통합진보당 활동
2.3.4. 정의당 활동
2.3.5. 4.13 총선 준비 과정
2.3.6. 제20대 국회 활동
2.4. 사망
3. 재단
4. 수상
5. 소속 정당
6. 선거 이력
7. 평가
7.1. 친서민적인 달변가
7.2. 한글 사랑에 앞장선 정치인
7.3. 지역구 세습 논란
7.4. 페미니스트로서
7.5. 불법 정치자금 수수
7.6. 추모 분위기와 정의당 지지층 집결
8. 어록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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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정치인이자 노동운동가. 정의당과 그 전신인 정당에 몸담으며, 서울 노원과 경남 창원시 성산구 등에서 국회의원을 3차례 역임했다. 심상정과 함께 대한민국 진보정당 소속으로 최초이자 단 둘뿐이었던 3선 의원이었다. 노의 노, 노초사[5]의 노가 이 사람을 가리킨다.
진보정당계를 대표하는 스타 정치인이이었다. 여러 방송에 출연하여 진보정당 소속 정치인들 중 가장 높은 대중성을 갖추고 있었다. 진보정당의 인지도를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그에게 인생 최대의 위기가 찾아왔고, 결국 2018년 7월 23일 모친의 아파트 17층과 18층 사이에서 스스로 투신하여 생을 마감했다. 장례는 국회장으로 치러졌다.

2. 생애



'''△ 비디오머그에서 정리한 노회찬의 일생'''

2.1. 학창 시절


1956년 부산에서 아버지 노인모와 어머니 원태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6.25 전쟁 때 부산으로 피난했으며 전쟁 직후 서로 만나 결혼해 둘 사이에 노영란[6], 노회찬, 노회건[7] 남매를 두었다고 한다. 유복한 환경은 아니었지만 문화적으로 풍족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부산 초량국민학교[8], 부산중학교를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첼로를 배워 수준급의 첼로 실력을 자랑한다. 정치 초년생 시절에는 '첼로를 켜는 정치인'으로 어필을 많이 해서 90년대 초반에는 노회찬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첼로였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치적 이념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을 많이 받았고, 본인도 정치인으로서 인지도가 올라간 후에는 첼로에 대한 얘기를 꺼리고 있다. 학창 시절 음악뿐만 아니라 펜싱과 육상에 뛰어났다고 한다.
1972년 부산고등학교 입시에 실패하고 재수하여 경기고등학교에 입학했다.[9] 이때부터 고향인 부산을 떠나 서울에서 생활했다.[10]
[image]
'''△ 중학생 시절의 모습'''
경기고 재학 시절에는 10월 유신에 반대하여 반독재 투쟁에 참여했다. 유인물을 만들어서 배포하는 일을 하며 이 시기부터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다고 한다.[11] 이 시기 다양한 책을 접하며 함석헌, 선우휘, 백기완 등 재야인사들과 만나게 된다.[12] 당시 경기고 동기 중에는 이종걸황교안이 있다. 황교안은 학도호국단 연대장을 맡은 적이 있는데, 이종걸과 노회찬이 반독재 유인물을 뿌리고 다닌 걸 생각하면 참 대조적이다. 또 1년 선배로는 정두언 전 의원이 있다. 나중에 박근혜 정부 말기 탄핵 정국에 "황교안 대행과 고교 동창인 점은 죄송스럽게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정두언 전 의원이 학교를 한 해 일찍 들어가 이종걸, 황교안, 정두언 모두 1957년생이고 노회찬은 고입 재수로 1956년생이라 이들보다 한 살 많다.
1976년, 고등학교를 졸업했지만 대학 입시에 낙방했다. 그는 곧바로 군대에 지원해 입대한다. 군복무를 마친 뒤 1979년 고려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 입학 후 민주화운동을 계속 하던 중 5.18 민주화운동에 크게 충격을 받는다. 그는 조직화된 노동자가 앞장서야 근본적인 변혁이 가능하다는 판단하에 본격적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다. 그는 고려대학교 재학 중인 1982년 영등포 청소년 직업학교(현 서울산업정보학교)에서 용접기능사 2급 자격증 등을 따서 용접공으로 현장 노동자들 틈으로 섞여들어가, 일명 '학출'로 노동운동을 시작했다.[13]
노회찬은 1980년대 초중반부터 시위를 조직하고 노조를 결성한 죄로 수배되었다. 그는 꽤 긴 시간 동안 수배자 신분으로 도망다녔다.

2.2. 노동운동가 시절


1987년 6월 항쟁 이후, 노회찬은 인천, 부천의 노동조합과 노동운동 단체들을 연합하여 인천민주노동자연맹(약칭 인민노련)을 출범시키는 데 핵심 멤버로 활동했다.
인민노련은 노동자 계급의 정치세력화를 목표로 활동했으며, 사회주의를 표방했다. 인민노련은 당시 노동현장에 뿌리를 둔 조직 중 가장 전위적이고 가장 큰 조직이었다. 인민노련은 기존의 민족해방파제헌의회파가 너무 교조주의적이고 이상론에 머물러있다고 비판하며 보다 실질적인 노동계급 운동을 표방했다. 이에 따라 인민노련은 현재 PD 계열의 원류로 평가된다.
1989년 12월, 인민노련 결성 관련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경찰에 검거되었다.[14] 인민노련 멤버들은 이 당시 법정에서 자신들을 사회주의자라고 떳떳히 밝혀 큰 파문이 일기도 했다. 당시의 공판 자료를 엮은 책 '그렇소 우리는 사회주의자요'(pdf 파일로 다운 가능)
재판 결과 2년 6개월 징역형과 자격정지 3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92년 4월 1일 만기출소했다.

2.3. 정치 경력


노회찬은 90년대 초반에 정계입문을 했다. 이는 그가 속한 인민노련의 노선 변화와 관련이 있었다.
인민노련은 90년대에 들어 동구권의 붕괴와 소련 해체를 경험하면서, 이제는 제도권으로 나와서 활동해야 한다고 노선을 전환하게 됐다. 인민노련은 합법 정당 운동을 위해 한국사회주의노동당(약칭 '한국노동당') 창당위원회로 전환하게 되고, 한국노동당은 1992년 민중당(1990년)과 통합하며 통합민중당을 이룬다.
1992년 3월 24일 치러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 참가한 통합민중당은 한 명의 당선자도 내지 못했다. 몇몇 지역구에서는 선전했으나 모두 당선권과는 멀었다. 좌절한 민중당의 지도부는 당을 해산했으며, 한국노동당 계열 인사들은 진보정당 재건을 위해 진보정당추진위원회를 결성한다.
1992년 4월 1일 출소한 노회찬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에 합류한다.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1992년 말에 있었던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백기완 무소속 후보를 지지했는데, 노회찬은 백기완 선거대책본부에서 조직위원장을 맡았다.[15]
대통령 선거 이후 진보정당추진위원회는 백기완 선본에 참여한 다른 진보정치단체들과 통합을 위한 협상에 돌입했다. 협상은 굉장히 쉽지 않았는데, 1995년 9월 24일, 민중정치연합[16]과의 통합이 성사되어 '진보정치연합'으로 재편되었다. 관련자료 노회찬은 통합된 진보정치연합에서 김철수와 함께 공동대표를 맡았다.[17]
그리고 95년에는 '반3김'을 구호로 내세운 개혁신당[18] 창당준비위에 가담했다. 이 정당은 그해 10월 창당하여 민주당과 결합하여 통합민주당을 이루었다. 노회찬 역시 통합민주당에 합류하였고, 강서 을을 지역구로 총선을 준비했지만 사면복권이 안 되어서 실패. 매일노동뉴스의 발행인으로 활동하며, 원외인사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19]
당시 원외인사로 활동하던 노회찬은 <어, 그래?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대중역사서를 집필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기도 하였다. 유시민거꾸로 읽는 세계사와 같은 책들에 비하면 그 수명은 참으로 짧았지만, 이색적인 이력.

2.3.1. 민주노동당 활동


제도권 정치를 향한 노회찬의 발길은 진보정치연합의 대표로 권영길의 대선 출마를 지원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 같은 흐름은 국민승리21민주노동당을 거치며 성공적으로 안착. 이후 2000년 민주노동당 초대 부대표와 2002년 민주노동당 사무총장을 거쳐 2004년 17대 총선에서 비례대표로[20]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노회찬은 일반 시민들에겐 무명에 가까운 진보인사였는데, 총선 때 자주 있던 각종 토론 프로에 나오며 촌철살인과 함께 일명 대중을 웃기는 유머러스한 콘셉트의 토론으로 단숨에 유명인이 되었다.[21] 뉴스, 신문에서 노회찬에 대해서 대서특필할 정도로 노회찬 신드롬이 분 것. 노회찬의 활약이 도움이 되어 원래 민주노동당 예상 비례당선권인 5-6번을 훌쩍 넘어 본인번호인 8번까지 당선이 되었다. 당시 민주노동당은 비례대표 득표율을 13%나 기록하였다.

"간신히 3%대를 유지하던 자민련의 정당득표율은 자정쯤 2.9%로 떨어지고 맙니다. 이후 2.9%와 3%사이를 오락가락하기 2시간. 김종필 후보와 노회찬 후보의 당락도 덩달아 엎치락뒷치락 한 2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새벽 2시가 지나자 2.9%는 3%로 돌아오지 못했습니다. 차이는 불과 0.1%. 결국 0.1% 때문에 보수정객 김종필은 퇴장하고 노동운동가 출신 노회찬은 한국 정치의 전면에 화려하게 등장했습니다."

2004년 4월 16일 MBC뉴스, 17대 국회의원 중 최후로 당락이 확정된 김종필과 노회찬의 낙/당선을 알리며.출처

당선 이후 대중적인 인지도의 유명 진보 정치인으로 발돋움하게 된다.
2004년 당선 이후 처음으로 발의한 법안은 호주제 폐지 법안이었다.[22]
2005년 8월 18일 삼성 X파일 사건의 떡값 검사 리스트를 공개했다. 기사

2.3.2. 진보신당 활동


이후 NL-PD 갈등이 심해지면서 2008년 민주노동당을 탈당하고, 진보신당을 창당했다. 심상정과 함께 진보신당 공동 당대표를 맡았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진보신당 후보로 노원구 병에 출마했으나 한나라당 홍정욱에게 3% 차이로 밀려 낙선했다. 통합민주당 김성환 후보가 16%의 표를 가져간 것이 뼈아팠다.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이때 한명숙과의 단일화를 거부하고 완주한 것 때문에 일부 야권 지지자들에게 많은 비판을 받았다. 당시 한나라당 오세훈이 민주당 한명숙을 불과 0.6%차로 이겼는데, 노회찬이 가져간 표가 3%대였으니 단일화가 이뤄졌다면 오세훈이 낙선했을 것이라는게 비판의 내용이었다. '''사실 그가 욕먹을 이유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이 3%는 진보정당 쪽 고정지지층의 성격이 강했고 진보정당 지지자도 사표방지심리에 한명숙에게 투표한 사람이 있기 때문에 실질적 지지층은 더 많았을 수도 있다. 그리고 노회찬이 한명숙과 단일화를 했다고 해서 그 3%가 고스란히 한명숙에게 녹아들지 않았을수도 있다[23].
당시 노회찬은 '내가 투명인간이냐?'면서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은 성의있게 단일화 협상을 하지 않았다. 훗날 노회찬 의원이 나꼼수에 게스트로 출연해 밝힌 바에 의하면 민주당 쪽에서 자신에게 선거기간 동안 전화 한 통 걸지 않았다고 토로하며 '''물러나려고 해도 물러날 명분조차 안 주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무엇보다 2년 전 2008년 총선에서는 민주당 김성환 후보가 단일화해주지 않았음을 생각한다면 민주당 지지자들의 노회찬 비판은 적반하장스러운 면이 있다.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이때 서울시장 선거에서 노회찬과 한명숙의 단일화로 오세훈이 낙선했다면 무상급식 캐삭빵과 2011년 서울시장 재보궐선거도 없었을 것이고, 박원순안철수는 정계입문이 늦어지거나 심지어 정계에 발을 들이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족을 덧붙이자면, 노회찬은 위와 같이 불편한 심경을 토로하긴 했으나, 오세훈 당선에 대한 책임만큼은 누구보다도 통감하고 있었다. 만약 자신이 지지율 50%를 받았다면 오세훈 후보의 당선은 막을 수 있었는데, 어찌됐든 지지율이 낮았던 것은 본인이 책임져야 할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민주당 지지자들의 거센 항의도 귀담아 들었고, 이는 2년 후 2012년 대통령 선거 때 심상정 예비후보가 일찌감치 사퇴하는 데 영향을 주게 된다. 대통령 선거는 진보정의당을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이지만, 2012년 총선 때 박근혜 비대위원장의 지도력에 야권이 불의의 일격을 당하며 위기에 몰려있었기 때문이었다. 2012년 대선 시작부터 안철수 후보에 대한 지지가 폭발하며 야권이 분열 되고 있는 와중에 자칫 박근혜 후보가 대통령 선거에 당선되면 그 책임은 고스란히 진보정의당을 향할 수 있고 진보정의당 홍보효과를 상쇄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판단 때문이다.
이정희 대선 후보가 3차 방송토론을 앞두고 사퇴하면서 진보, 보수 양진영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지만, 진보정의당은 이러한 논란을 피해갔음은 물론, 박근혜 후보 당선에 대한 야권의 책임에서도 당당할 수 있게 되었다.
이후 노회찬은 민주노동당과의 합당을 밀고 나가다 결국 부결되면서 심상정, 조승수와 함께 진보신당을 탈당, 이후 통합진보당 창당에 참여했다.

2.3.3. 통합진보당 활동


2011년 12월 통합진보당의 대변인으로 선임되었다. 노회찬정도의 중량감있는 인사가 대변인직을 맡는게 이례적이라는 평가가 있었는데, 심상정 공동대표에 따르면 "이번 인선은 진보정당 통합을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서 너그럽게 국민의 사랑을 받고 총선에서 승리하는데 헌신하려는 본인의 결의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기사
노회찬 본인은 "유시민 공동대표가 농반진반으로 대변인을 해보라고 해서 생각해봤는데 정말 그렇게 해도 되겠다 싶어 대변인직을 수락했다"고 한다. 기사 10년동안 대표, 부대표,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안 해본 게 없는데 대변인만 못 해봐서 해보고 싶었다고. 인터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서울특별시 노원구 병) 국회의원을 지냈다.

2.3.4. 정의당 활동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이 터지자 2012년 9월 13일 심상정, 유시민, 조준호 등과 함께 통합진보당을 탈당했다. 기사
2012년 10월 21일 조준호와 함께 새로 창당되는 진보정의당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기사

2013년 2월 삼성 X파일 사건의 떡값검사(일명 떡검)들의 실명을 공개한 혐의로 통신비밀보호법 위반 유죄를 선고받고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2005년 노회찬은 이상호기자가 입수한 도청녹취록 속에 있는 삼성측 뇌물을 받은 검사들 중 7명의 실명을 공개했는데, 이로 인해 2011년 10월 28일 서울중앙지법으로부터 징역 4개월 집행유예 1년 자격정지 1년을 선고받고, 2013년 2월 14일 대법원에서 원심을 확정받으면서 의원직을 상실했다.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2013년 재보궐선거에서 안철수가 노원구 병 지역구에 출마하자 노회찬은 “가난한 집 가장이 밖에 나가서 돈을 벌어올 생각을 해야지 왜 집안 식구들 먹는 걸 뺏으려고 합니까?”라고 성토하며 우회적으로 안철수의 부산 출마를 권유했다. 아내인 김지선노원구 병에 출마하자, 지역구를 사유화한다는 비판이 있었다. 결국 무소속 안철수 후보가 당선되었다.
2014년부터 정의당에서 제작하는 팟캐스트 노유진의 정치카페 고정멤버로 출연했다.
2014년 7.30 재보궐선거에서 서울 동작구 을에 출마하였다. 새정치민주연합, 정의당, 통합진보당, 노동당 이 4당이 후보 단일화로 막판까지 시끌벅적하였다. 통합진보당 후보가 노동당 김종철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하였고, 새정치민주연합의 기동민 후보가 노회찬 후보 지지를 선언하며 사퇴해 마지막에는 나경원 VS 노회찬 VS 김종철의 3자 대결로 갔지만 결과는 노회찬 48.7%, 새누리당 나경원 49.9%로 나경원 후보가 아슬아슬하게 당선되었다. 참고로 이때 김종철 후보 표를 합치면 50.1%가 되어 나경원 의원을 이길 수 있었다.[24]
2015년 결선투표제로 치러진 정의당 당 대표 선거에 출마하였다. 1차 선거에서는 큰 표 차이로 1등을 차지했지만 2차 선거에서 심상정 의원에게 역전을 당해 낙선하였다. 당시에 상당수가 노회찬이 될 것으로 생각했는데, 덕분에 노회찬의 캠프 쪽에서 방심한 반면 심상정의 캠프에서는 필사적이었다고 한다.

2.3.5. 4.13 총선 준비 과정


2015년 11월경에는 다시 서울시 노원구 병 지역구로 이사해 총선을 준비한다고 알려졌다. 국민의당 안철수, 그리고 새누리당 이준석의 3파전 양상이 예상되었다.[25]
그러던 중 창원 성산 출마설 기사가 나왔다. 노유진의 정치카페 84편에 따르면, 창원시 성산구의 경우 지역과 정의당 경남도당의 출마요청이 있어 고심을 하고 있었다. 또 같은 방송에 따르면 광주 광산구 출마 역시 요청 받았다고 힌다. 2016년 1월 30일 전국위에서 결국 창원 성산 출마가 결정되었다. # 하지만, 해당 지역구에는 현역의 새누리당 강기윤,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민주노총 소속의 손석형[26] 후보가 이미 있다. 국민의당 후보 출마설까지 나오는 상황에서 야권 단일화는 필수로 보인다. 허성무는 이에 반발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손석형과는 민주노총 지지 후보 투표로 단일화 투표가 진행 중이다. 두 번의 단일화와 본선거, 모두에서 승리하여야 당선되는 상황이라 매우 어렵다.
MBC경남의 여론조사에서는 야권 단일화를 이룰 경우 가장 경쟁력 있는 후보로 노회찬이 24.6%로 가장 앞섰다. #
2월 20일, 민주노총 단일화 후보 투표에서 승리했다. 당초 예상보다 훨씬 박빙의 승부였다고. #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와의 단일화 여론조사가 3월 27~28일 양일간 진행될 예정이다. #
더불어민주당 허성무 후보와의 단일화 후보 투표에서 승리했다. 양측 합의로 조사결과는 비공개하기로 했다고 한다. #
2016년 4월 3일 선관위로부터 '''야권단일후보'''라는 홍보 문구를 지적 받았다. 아직 국민의당 후보가 남아있기 때문이었다. #
하지만 결국 당일 선거 결과에서 51.5%로 여유있게 승리하며 당선됐다.[27]

2.3.6. 제20대 국회 활동


당선 이후, 정의당 원내대표로 선출되었다. #
2016년 9월 22일, 태광그룹 이호진 전 회장의 병보석 의혹을 민주당 박주민, 박범계 의원과 제기하면서 법원의 엄정한 조사를 촉구한다. 이것이 선견지명이었던 것이 2년 후인 2018년 '''"황제 보석"''' 사건으로 모두 사실로 밝혀지면서 다시금 회자되게 되었다. 사법부와 대기업이 반박했던 의혹이 사실이었던 것. #
11월 11일 국회에서 열린 최순실 게이트 긴급현안질문에서 "속단하지 말라"는 황교안 국무총리의 반론을 '속단'이 아니라 뒤늦게 안 '지단(遲斷)'이라며 맞받아쳤다. #[28]
2017넌 1월 6일.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의 발의자 중 한 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는데, 해당 안은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2차 가해를 막기위한 취지로 발의된 것이나, 성폭력 무고죄 고소를 성폭력 수사 종결 후로 미룬다는 부분이 무죄추정의 원칙에 반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발을 사기도 했다.
2017년 이낙연 총리 후보자의 인준 투표 중 신 새누리당의 조원진 의원이 여당 상대로 마구 항의를 했는데 그걸 조금 떨어진 곳에서 페이스북으로 라이브 중계를 했다. 근데 이때 모습이 안 찍는 척 안 보면서 조 의원을 찍는 게 언론에 잡히면서 노 룩 라이브라는 평가를 받았다. 나중에 기자가 왜 안 보면서 찍었냐고 물으니 찍고는 싶었는데 보고 싶진 않았다고.
법원행정처안경환 법무부 장관 후보자의 혼인무효소송 관련 판결문을 상대방 여성의 개인정보가 노출된 상태로 공식 요청을 받은 지 불과 8분 만에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제출했음을 공표했다. #
2017년 5월 30일 정의당 원내대표직에 재신임되면서 1년을 더 원내대표직을 수행하게 되었다. 노회찬, 심상정 의원 말고는 다 비례대표인 정의당의 상황을 감안하면 20대 국회 내내 원내대표직을 수행할 가능성이 있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감방에서 인권침해를 당했다"고 주장하며 UN 인권위에 제소하자, 2017년 10월 19일 감사원 국정감사 도중 이에 반박하며 직접 누워보였다. 일반 재소자들의 수용면적은 신문지 2장 반 크기인데 박근혜는 그보다 10배나 더 넓은 면적의 방에서 지내고 있으므로 인권 침해는커녕 오히려 분에 넘치는 특혜를 누리고 있음을 직접 신문지 2장 반 위에 누워서 몸으로 보여주었다. 이때 지역구 신문인 경남도민일보를 들고나와서 시연을 했는데, 물 들어온 김에 노젓는 깨알같이 경남도민일보 페북 포스팅은 덤. 기사 야구팬들은 눕동이라고 불리는 KIA 타이거즈김기태감독을 떠올렸다.
2017년 11월 24일 '사회적 참사법' 표결 불참으로 논란이 생겼다. 세월호 사고 및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등의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 수정안이 이날 본회의에서 통과했는데, 노회찬 의원은 이 표결에 불참했다. 게다가 노회찬은 당일 국회 구내식당에서 국수를 먹은 인증샷을 트위터에 올렸었다. 그래서 국회에 있으면서 왜 표결에는 불참했냐는 논란이 나왔다. 다음 날 트위터에서 해명하였다. 요는 통과를 축하하는 잔치국수 인증샷이라는 것이다.
2018년 7월 5일부터 유시민이 하차한 썰전에 진보 논객으로 출연을 시작했다. 현역 국회의원으로는 이례적인 일인데, 과거 논객들이 총선, 재보선 출마를 이유로 줄줄이 하차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현직 국회의원이 고정적으로 나선다는 것은 타 프로그램과 비교해봐도 흔치 않은 상황이다. 어차피 다음 총선이 2020년이기 때문에 부담없이 출연한 것으로 보인다. 탈당 사실이 알려졌지만 정의당 평당원으로 유명했던 유시민의 후임이다 보니 정의당의 홍보 차원에서 지속성을 유지할 수가 있게 되었다. 첫 출연부터 자유한국당 안상수 비대위 준비위원장을 탈탈 털어서 이름 값에 맞는 활약을 했다.
그러나 드루킹 특검팀이 최근 노회찬 의원에 대한 계좌추적에 착수 보도와 함께 그 이후 드루킹이 노회찬에 4,600만 원 줬다고 특검에 진술하면서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고 또 관련자들의 진술과 그러한 진술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지면서 썰전 시청자들은 실망감과 분노한 반응을 보였고 썰전 시청자 게시판에 노회찬 의원 하차하라는 의견도 나오고있다. 특히 유시민이 하차하고 노회찬 의원이 진보 논객으로 출연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채 드루킹 불법 정치자금 수수의혹이 터지면서 썰전 제작진도 곤혹을 치루고 있다. 썰전 제작진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의혹을 조사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특검 수사를 예의주시하고있다”며 “이번 주(7월 19일 밤 11시)는 정상 방송된다”고 확인했다. JTBC 홍보 관계자도 “최종 조사결과가 나온 상황이 아니다”면서 “노 의원은 16일 썰전 녹화에 참여했다”고 전했다. #

2.3.7.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건


2018년, 드루킹 여론조작 사건이 불거졌다. 김경수송인배 등이 선거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 위해 닉네임 드루킹에게 여론조작을 지시했다는 논란이 제기되었다. 결국 2018년 5월 21일 여당과 야 3당간의 합의로 특검법안이 통과되었다.
2018년 7월 특검 수사 중에 전혀 뜻 밖의 의혹이 짙게되는데, 드루킹 측이 노회찬 측에 5천만 원 상당의 불법 정치자금을 전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 이에 노회찬은 드루킹으로부터 돈을 받은 적이 없다고 강력히 부인하였으나 # 결국 불법 정치자금 수수가 사실임을 유서를 통해 인정했다. 다만 대가성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특검의 수사는 다음과 같이 이루어졌다.
허익범 특별검사팀은 7월 17일 새벽 1시 5분, 노회찬 정의당 의원에게 5,000만 원을 전달한 혐의(정치자금법 위반)와 이 돈 중 4,190만 원을 돌려받은 것처럼 증거를 위조한 혐의(증거위조)로 ‘경제적 공진화 모임(경공모)’ 핵심회원인 도 모 변호사를 긴급체포했다. # 특검팀의 박상융 특별검사보는 체포된 도 모 변호사가 2016년 드루킹과 공모해 특정 정치인[29]과의 만남을 주선하고 정치자금을 전달·교부한 혐의, 수사 과정에서 혐의 부인 내용을 담은 위조 증거를 제출해 무혐의 처분을 받게 한 혐의 등을 적용했다"고 설명했다. #
드루킹 일당은 노회찬 측에 5,000만 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한 혐의로 2016년에 이미 경찰의 수사를 받으나 당시에는 "돈이 실제로 전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반면 허익범 특검팀은 노회찬 측에 드루킹의 돈이 실제로 전달됐을 것으로 판단하여 재수사를 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특검팀은 2016년 경찰 수사 때, 도 모 변호사가 자금 출납 자료 등 각종 증거물을 위조해 제출한 것으로 보고 있었다.

7월 18일, 허익범 특검팀은 드루킹로부터 노회찬 의원에게 불법 정치자금 4,600만 원을 줬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 박상융 특검보는 금품 수수 의혹이 제기된 정치인을 소환 조사하겠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조사할 필요성이 당연히 있다”고 밝혔고 "(금품을) 전달한 측 관련자들의 진술과 그러한 (진술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확보해, 도 변호사에게 구속영장을 청구했다"며 자금 조성과 전달 과정의 흐름 역시 계좌추적을 통해 파악했다고 말했다. # 실제 특검팀은 노회찬 의원이 2013년에 떡값 검사 실명 공개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한 후 강연으로 연명할 적에 경공모 측으로부터 강의료 명목으로 수천만 원을 받았다는 진술과 함께 관련된 회계장부를 확보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
그러나 7월 20일에 법원은 노회찬 의원에게 정치자금 5천만 원을 불법 기부하는 데 깊숙이 관여한 혐의를 받는 드루킹의 핵심 측근인 도 모 변호사(61)에 대한 영장실질심사에서 "긴급체포의 적법 여부(긴급성)에 의문이 있고, 증거위조 교사 혐의에 관하여 법리상 다툼의 여지가 있음을 고려할 때 구속의 사유를 인정하기 어렵다"며 영장을 기각했다. #
7월 23일, 노회찬 의원은 노모의 아파트 복도에서 투신하여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 노회찬 의원은 자신의 유서에서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000만 원을 받았다"라며 금품 수수 사실을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라고 밝혔다. 이어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절차를 밟아야 했다"라면서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라고 밝혔다.
위 내용이 문제가 되는 이유는 대한민국 정치자금법 때문이다. 정치자금법에서는 '''회원들의 모금을 단체의 이름으로 특정 정치인한테 후원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고, 반대로 어느 단체의 자금을 개인의 이름으로 위장하여 특정 정치인한테 통칭 "쪼개기 후원" 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오직 '자발적 의사'에 의한 '개인'의 기부만 가능하며 액수는 기명의 경우 1인당 500만 원, 1년 누적 2,000만 원까지 가능하고, 익명 기부는 1인당 연 10만 원까지 가능하다. 애당초 드루킹한테서 노회찬이 4000만 원을 받았다면 자금의 성격에 상관 없이 '''기부액수 초과로도 정치자금법 위반'''이다. # 사건 초기에 자신의 혐의를 부인한 것은 #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대법원까지 확정된 판결문에 의하면 노회찬은 2016년 3월 7일 2,000만 원, 같은 해 3월 17일 3,000만 원, 총 5,000만 원 상당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 노회찬 의원은 유서에서 4,000만 원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여러 증거를 고려하면 실제로는 5,000만 원이 전달되었다고 판결을 내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정치자금법이 제도적인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
  • 정치자금법의 완화 및 개정에 찬성하는 측의 주장
우리나라의 정치자금법이 과할 정도로 모금을 제한하는 이유는 한국정치의 고질적인 금권선거의 폐단과 이른바 차떼기대북송금 특검 문제가 터져나오면서, 트럭에 현금을 가득 채워서 트럭째로 불법 정치자금을 넘겨주는 추태를 막고자 2004년에 현재와 같이 개정됐다.[30] 법을 지금과 같이 개정한 취지도 좋고 필요성도 인정되나 현행법은 현역 정치인이 아닌 사람에게는 불리하게 여겨질 측면이 있다. 현역 국회의원의 경우 2018년 현재, 매년 세비로 약 1억 4천만 원을 받고 후원금으로 매년 1억 5천만 원까지 모금할 수 있으며 선거가 있는 해당 년도에는 추가로 1억 5천만 원을 모금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정당에 지급되는 국고 보조금은 첫 50%는 교섭단체(20석 이상 정당)들이 나눠 받고 나머지 50%만 의석 수대로 나눠 받는다. 정치후원금은 정책개발비, 보좌관 인건비, 국회의원 개인의 생활비 뿐만 아니라 지역구 사무실 임대료, 상근 인력 인건비, 관리비, 공무 수행에 필요한 사람들 만나고 다닐 때 드는 교통비, 밥값 등 정치활동 전반에 걸쳐 쓰이고, 선거를 앞 둔 경우에는 선거 명함, 펼침막, 차량 운행비, 문자메시지 발송비, 공약개발비 등으로 쓰이기도 한다. 다른 특별한 직업이 없는 낙선 정치인인의 경우 합법적 모금이 가능한 다음 선거 예비후보등록 시기까지 버티기 위해서는 입법 활동과 관련된 비용을 제외하더라도 앞서 언급한 부대비용 중 일부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나 현행법 아래에서는 부족한 측면이 있다. 정치자금법은 국회의원 예비후보의 경우 1억 5천만 원까지 후원금을 모금하는 것을 허용하고 있으나(정치자금법 제12조 4항) 선거법상 예비후보 등록은 총선 120일 이전부터 가능하기 때문에 정책과 공약을 개발하고 검토하고 지역사회의 유권자와 만나면서 자신을 홍보하고 다닐 자금을 4년 내내 안정적으로 확보한 현역 국회의원과 비교해 준비 기간도 너무 짧고 액수도 충분하지 않다. 따라서 그들의 공약은 현역 의원들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질 수밖에 없고 선거도 적은 비용으로 치룰 수밖에 없다.
따라서 현행 정치자금법이 사실상 낙선/재야/소수정당 정치인들에게 페널티로 작용할 수 있으므로 이를 개정할 필요가 있다. 국고 보조금 분배를 교섭단체가 먼저 가져가는 것을 폐지하고 전액을 의석수에 따른 분배로 변경, 개인이 후원할 수 있는 금액의 상한선을 상향조정, 단체의 모금을 통한 후원을 합법화 하는 조치가 필요하다. 단 사용의 투명성을 강제하는 조항을 잘 정비해야 한다.
  • 정치자금법 완화 및 개정에 반대하는 측의 주장
현행법상 1인의 후원자가 정치인에게 1년 동안 기부할 수 있는 정치 자금의 총액은 무려 2000만 원이며[31], 10만 원 이하 소액 정치후원금은 '''전액 세액공제 혜택을''' 주며 제도적으로 다수 유권자의 합법적 정치후원을 장려하고 있다. 이는 정치인의 능력이나 비전에 따라 합법적인 범위내에서 충분한 정치자금을 조달할 수 있음을 뜻한다.[32] [33] [34] 일부에서는 이 금액도 작다고 주장하며 미국의 예를 들지만, 미국/정치 문서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슈퍼팩들의 거액 기부, 이익단체들의 로비, 가진자들 위주의 기부로 인한 정경유착의 문제가 심각하게 제기되고 있는 상태이다. 예를 들어 만약 1인이 1인의 정치인에게 1년 동안 후원 할 수 있는 정치자금 지원액의 한도를 높게 설정한다면, 일반적으로 많은 유권자의 후원을 받는 정치인보다 후원자들의 수가 적더라도 부자 유권자 위주의 후원을 받는 정치인이 정치자금 확보에 상대적으로 유리해진다. 또 정치자금 후원액수 상향조정하고 단체의 후원을 허용한다면, 이는 현역 정치인이나, 기성정당에 더욱 유리해질 공산이 크다. 상대적으로 정치인에게 더 많은 자금을 후원할 수 있는 여력은 소수의 부유층 혹은 이익집단이 더 크기때문에 그들이 지지하는 현역 정치인 혹은 기성정당이 더 많은 금액을 모금하기 용이해진다. 그러므로 상대적으로 그들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치신인, 신생정당들과 기성정치인, 기성정당들 간 후원금 모금 격차는 더욱 벌어질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정치자금법을 완화한다면 다수 국민들의 정치참여 장벽을 더욱 높히는 부작용을 낳을 우려가 크다. '''노회찬 전 의원''' 역시 생전에 '''금단현상으로 괴롭다고 해서 아편을 다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며 정치 자금법의 완화의 부정적인 입장을 분명히 한 바 있다.
현역정치인이 정치후원금을 받는 근본적인 이유는 정치활동으로 인한 수익이나 합법적 후원외에는 현역 정치인의 자금 형성에 제약을 가지는 점[35] [36]을 보완하기 위함이다. 또한 현역의원의 정치후원금은 오로지 선거만을 위해서 사용하는것이 아니라 본인이 정치활동을 하는 합법적 분야 전반에 걸쳐 사용할 수 있으며 현역의원은 정치인을 지망하는자나 낙선자와 달리 현재 정치업무를 수행하고 있는사람들로서 합법적 정치자금의 모금 필요성이 현역의원 이외의 사람보다 높다. 현직 의원이 아닌 전직 의원이나 정치지망생 경우에는 현직 의원보다 자유로운 수익활동을 할 수 있다. 더불어 현역의원의 경우 차기 선거의 출마 여부와 관계없이 적어도 현역의원의 정치활동수행을 목적으로 정치활동의 모금을 할 수 있으나, 출마 희망자나 전직 의원들은 업무수행과는 관련이 없으므로 그들이 정치후원금을 받을 필요성은 오직 선거에 공식적으로 출마한 이 후에 성립될 것이다.[37] 따라서 만약 예비후보자에게 현역의원과 똑같은 모금을 허용한다면 현역의원들에게 오히려 역차별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현행 정치자금법은 차떼기, 박스떼기로 대표되는 금권선거와 불법 정치자금의 폐단을 근절하고, 합법적인 범위내에서 최대한 평등한 조건으로 선거 및 정치자금을 운용하자는 취지로 개정되었다. 따라서 정치자금법의 금액 상한 기준 완화와 단체의 의한 후원을 허용한다면, 제2 혹은 제3의 차떼기, 박스떼기가 부활할 우려가 크다. 소수의 이익집단 혹은 소수의 후원인이 거대한 자금력을 이용하여 특정 후보에게 후원금을 몰아주는 행위는 결국 정치인이 해당 소수 이익집단이나 개인에 포섭되어 그들의 특수한 이익에 따라 행동을 강제당하는 상황이 초래할 수 있다. 민주주의의 기본 가치를 지키기 위해서라도 일부 소수의 후원금이 전체 후원액의 다수를 차지하는 상황보다, 소액 후원인들에게 혜택을 주어 다수 국민들의 합법적 정치후원활동을 장려하는 현행제도를 발전시키는 것이 더욱 투명한 정치활동을 보장하는 것에 도움이 될 것이며. 종국적으로 돈 안드는 선거제도 및 선거문화를 지향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노회찬 전 의원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인해 2013년 2월 19대 국회의원직을 상실했다. 노회찬이 드루킹 측으로부터 4600만원을 받았다는 시점은 2016년 3월로 이는 20대 총선으로부터 대략 한 달 전이며, 당시 노회찬 전 의원은 창원 성산구의 출마 한 상태로서 최소 예비후보자 신분이었다.[38]
갑작스런 노회찬의 사망으로 난항 수준이 아니라 관련 수사가 종결까지 될 수도 있는데 일단 특검은 '진상 규명' 에 주력하기로 하고 수사를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기사 단, 조사를 하더라도 "공소권 없음(사망)"으로 처리된다. 허익범 특별검사비통하다며 유감 표명을 했다.
한편 드루킹이 검찰조사 중 자신이 건네준 건은 강연료 4,000만 원뿐이며, 불법 정치자금이라고 주장했던 4,600만 원은 거짓 진술이었다고 말을 바꾸었다. (관련기사) 그러나 이는 드루킹이 본인의 처벌을 피하기 위한 진술일 가능성이 있다. 첫 번째로 불법 정치자금죄는 돈을 받은 사람뿐만 아니라 돈을 건넨 사람에게도 처벌을 할 수 있다. 드루킹이 진술을 번복한 시점은 노회찬의 사망 이후이며 즉 노회찬의 사망으로 인하여 양자간 수사가 불가능하므로 본인만 진술을 번복한다면, 노회찬이 사망하지 않았을 때보다 혐의 입증이 상대적으로 어려워지므로 진술의 번복은 피의자인 드루킹에게 유리한 카드이다. 두 번째로 그것이 드루킹의 주장처럼 정령 합법적이고 아무 문제 없는 강연료였다면 노회찬이 극단적인 선택을 할 이유가 없다.
드루킹 재판의 1심 법원은 드루킹이 '''노회찬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준 것이 맞다는 판결'''을 내렸다. 드루킹, 1심서 3년 6개월…법원 "노회찬에 돈 준 거 맞는다" 재판부는 드루킹이 2016년 3월17일 창원을 방문해 노회찬의 아내를 통해 노회찬에게 현금 3000만 원을 건내주는 등 여러 객관적 증거에 의하여 2차례에 걸쳐 5000만 원을 전달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판결하였다.
2019년 3월 20일 18대 대선·19대 대선 대선 무효소송인단 공동대표를 맡고 있는 한 모 씨는 드루킹의 변호인 김형남 변호사와 함께 오전 당일 서울남부지검에 노회찬 의원의 부인 김지선 씨에 대해 정치자금법 위반 공범 혐의로 고발장을 제출했는데 "드루킹의 발언에 따르면 노 의원에게 정치자금 5000만 원을 줬는데 이 중 3000만 원은 부인을 통해 전달됐다"면서 "특검에서는 계좌추적과 장부 대조를 통해 조사를 해야하는데 그 과정이 없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 수사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

2.4. 사망


2018년 7월 23일 오전, 투신 자살했다는 기사가 각 언론사에서 일제히 보도되었다.# 7월 23일 오전 9시 38분경 서울 중구 약수동의 한 아파트[39] 현관 앞에 쓰러져 사망한 채로 발견되어 경비원이 112에 신고하였다. 같은 아파트 17-18층 사이 계단에 남긴 노회찬의 외투 안에서 지갑, 신분증, 명함과 함께 유서(휴대폰의 미발신 문자메시지)가 발견되어 조사 중에 있으며 유서의 내용은 ''''드루킹으로부터 금품을 받았으나 청탁은 받은 적이 없으며 가족(아내)과 당에 미안하다''''는 취지인 것으로 알려졌다. 빈소는 신촌세브란스병원에 마련되었다.
7월 18일에 4박 6일의 일정으로 미국으로 출국했다는 기사를 보면, 모든 일정을 소화하고 귀국한 지 몇시간도 되지 않아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으로 보인다.
23일 오후 유서가 공개되었다. 유서는 당에 남긴 것과 유가족에 남긴 것이 따로 있었다고 한다. 당에 남긴 유서 1통은 공개되었고, 유가족에 남긴 유서 2통은 유가족 뜻에 따라 공개하지 않기로 했다고 한다. 아래는 공개된 유서 전문.
2018년 7월 23일 정의당에서 노회찬의 유서를 일부 공개하였다. 유서 전문

2016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경공모로부터 모두 4천만원을 받았다. 어떤 청탁도 없었고 대가를 약속한 바도 없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다수 회원들의 자발적 모금이었기에 마땅히 정상적인 후원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러나 그러지 않았다. 누굴 원망하랴. 참으로 어리석은 선택이었으며 부끄러운 판단이었다. 책임을 져야 한다.

무엇보다 어렵게 여기까지 온 당의 앞길에 큰 누를 끼쳤다. 이정미 대표와 사랑하는 당원들 앞에 얼굴을 들 수 없다. 정의당과 나를 아껴주신 많은 분들께도 죄송할 따름이다. 잘못이 크고 책임이 무겁다. 법정형으로도 당의 징계로도 부족하다. 사랑하는 당원들에게 마지막으로 당부한다. 나는 여기서 멈추지만 당은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길 바란다.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모든 허물은 제 탓이니 저를 벌하여 주시고, 정의당은 계속 아껴주시길 당부드립니다.

2018.7.23. 노회찬 올림

유서는 노회찬 본인 자필이라고 경찰에서 발표하였다. 기사 하지만 자필이라는 경찰의 발표를 보도했던 과정에서 오류가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장윤선 기자의 이슈파이터에서 자필 유서가 아니라 문자 메시지가 임시 저장된 것이라는 기사가 나왔다. 장윤선 기자: (유서가) 컴퓨터 워딩은 맞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컴퓨터가 아니라 노회찬 대표가 늘 들고 다니던 휴대폰에 문자 메시지를 비서실장에게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전송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게 임의 저장 방식으로 남아 있는 것을 경찰이 확인해서 김종철 비서실장에게 건넸고 그것을 확인해서 당 내부에서 내용을 확인한 다음에 기자들에게 공개적으로 브리핑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중략) ... 민동기 기자:그 워딩도 자필이 아니라 워딩이다더라 왜 기자들은 확인을 하지 않았나 #영상보기 6분 10초에 나옴
노회찬의 갑작스러운 자살로 인해 드루킹 특검노회찬 관련 수사를 잠정 중단했다. 동일하게 투신자살한 노무현의 사례와 마찬가지로 '공소권 없음'으로 사건이 종결될 예정이며 특검은 나머지 사안들에 대해서는 진상 규명을 위해 수사를 계속 진행하기로 결정했다고 한다. 시신은 발인 후 화장되어 남양주시 마석에 위치한 마석 모란공원에 안치된다.
장례는 본래 '정당장'으로 5일간 실시하기로 하였으나 국회의장 문희상의 발언으로 '국회장'으로 승격되어 7월 26일부터 이틀 동안 국회에서 영결식이 진행될 예정이다. 빈소는 연세 세브란스 장례식장이고 지역구였던 창원 등에 분향소가 설치되었다. #
노회찬의 빈소엔 여야를 비롯한 정치계와 정부 인사, 노동계, 연예인 등 각계 인사뿐 아니라 일반 시민들의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조문 열기가 대단했는데[40] 사망 당일인 23일에만 3,000여 명이 방문했고 이어 24일에는 5,600여 명, 25일에는 12,000여 명, 추도식이 열린 26일에는 28,000여 명이 방문했다. 이는 방명록에 근거한 것이라 실제 방문한 조문객은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 생전에 그를 좋아했던 많은 시민들의 추모와 조문이 이어졌고 서울의 빈소뿐 아니라 고인의 생전 지역구였던 창원을 비롯한 전국에 세워진 분향소에서도 시민들의 조문이 이어졌다.# 그리고 27일 열린 영결식에는 3000여 명의 시민이 참석한 것으로 추산된다. # 전국의 빈소에는 72,300여 명의 조문객들이 방문했다.
그러나 유명 정치인이 자살하면 미화되는 분위기를 바꿔야한다는 비판도 있다.# 홍준표도 "잘못을 했으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지 그것을 회피하기 위해서 자살을 택한다는 것은 또 다른 책임회피에 불과하다"고 비판했다.#

3. 재단


사후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이 설립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고.

4. 수상


  • 2018년 - 국민훈장 무궁화장[41]
  • 2006년 - 조계종 조선왕조실록 환수 감사패
  • 2005년 - 한글날 국경일 제정 범국민추진위원회 한글을 빛낸 큰별
  • 2005년 - 국회57주년 개원기념 우수의원외교 공로패
  • 2005년 - 광복회 친일재산환수법 통과 감사패
  • 2005년 - 여성단체연합 호주제 폐지 감사패
  • 2004년 - 전태일 문학상 특별상

5. 소속 정당


'''소속'''
'''기간'''
'''비고'''

( )
1992
창당준비위원회[42]

1992
창준위 흡수[43]

1992 - 1995
정당 해산
정계 입문

1995
창당

1995 - 1997
합당[44]

1997
신당 창당을 위한 탈당

1997 - 1999
창당

1999 - 2000
신당 창당을 위한 정당 해산

2000 - 2008
창당

2008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08 - 2011
창당

2011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 )
2011
창당준비위원회

2011 - 2012
창당

2012
당내 노선 차이로 인한 탈당

2012 - 2013
창당

2013 - 2018
당명 변경

6. 선거 이력


<rowcolor=#373a3c> 연도
선거 종류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2004
제17대 국회의원 선거
비례대표

'''2,774,061 (13.3%)'''
'''당선 (8번)'''
'''초선'''[45]
2008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 병

32,111 (40.05%)
낙선 (2위)

2010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서울특별시장
143,459 (3.26%)
낙선 (3위)

2012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서울 노원 병

'''52,270 (57.21%)'''
'''당선 (1위)'''
'''재선'''[46]
2014
상반기 재보궐선거 (제19대 국회의원)
서울 동작 을

37,382 (48.69%)
낙선 (2위)
[47]
2016
제20대 국회의원 선거
경남 창원 성산
'''61,897 (51.50%)'''
'''당선 (1위)'''
'''3선'''[48]
낙선한 3번의 선거의 경우 사표론이 제기가 될 정도로 해당 선거의 1, 2위의 격차가 크지 않았다. 그중에서 2010년 서울특별시장 선거는 사표론으로 비난 받는 입장이었고, 2008년 국회의원 선거와 2014년 재보궐 선거는 사표론을 주장해야 되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당선된 3번의 선거는 진보정당의 거센 풍파와 함께 한 인물임을 증명하듯 모두 임기를 끝까지 채우지 못했다.[49]
<color=#373a3c> '''역대 선거 벽보'''
[ 펼치기 · 접기 ]

여담으로 벽보가 따로 없는 비례대표를 제외하고 모든 선거 벽보에 쓰인 사진이 다 똑같다.

7. 평가



7.1. 친서민적인 달변가


노동자와 서민의 입장에서 권위주의나 엘리트주의를 지양하고 대중주의적 정치를 지향한 정치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운동권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강성의 이미지 대신 소통력과 친화력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한편 나름 유명 정치인이 되었음에도 주류정당에 편입되지 않고 계속 진보성향의 소수당에 몸담는 것에 대해서는 평가가 엇갈린다. 일각에서는 소신과 초심을 잃지 않고 있다고 호평하는 반면 다른 일각에서는 2000년대 이후 민주당 등의 중도성향의 정당과 정치적 지향성 측면에서 별 차이가 없어졌는데도 분파적 성향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성격이나 성향 측면에서 봐도 진보정당보다는 좀 더 대중적인 정당에 어울린다는 평가가 많다.[50]
언변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도 유명한데, 같은 당 유시민 못지 않게 뛰어난 말솜씨를 자랑한다. 도리어 어떤 경우에는 '''유시민도 능가하는 언변을 보여주기도 한다.''' 유시민이 보수 계열 정당의 정치인 중 토론 상대로 가장 좋은 상대로 꼽은 인물이 박형준유승민으로 모두 정계 인물 중 뛰어난 토론 실력으로 유명한데, '''노회찬은 그 박형준을 상대로 맹공을 퍼부어서 잠시 쩔쩔매게 한 적까지 있다(...).''' 다만 말하는 스타일은 두 사람이 전혀 다른데, 유시민이 뛰어난 논리력과 풍부한 지식을 바탕으로 사안에 대해 분석적인 차원에서 접근한다면, 노회찬은 상황에 맞는 적절한 비유풍자를 통해 복잡한 사안을 직관적으로 이해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 이 때문에 김어준 총수는 "홍준표와 토론에서 다이다이를 떠서 상대가 될 만한 정치인은 역대급으로 뽑아도 한 손을 채우지 못하지만, '''노회찬 의원은 능히 상대가 될 만하다'''"고 평했다.[51] 홍준표의 토론 스타일은 논리 대신 강한 어휘로 상대를 찍어누르는 타입이기에 논리로 상대하려다가는 도리어 말려들기 십상이지만, 노회찬 의원의 언변이라면 그것마저 받아치는 게 가능하고 방송에 출연하면 항상 최소한의 재미가 보장된다.
박근혜 정권에서 통합진보당 해산 사건으로 통진당 세력이 무너진 후, 노회찬과 심상정이 이끌고 있는 정의당이 사실상 진보세력의 원내 입성을 기대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가 되어 버렸다. 정의당이 어려운 환경에서도 나름의 입지와 지지도를 얻는 데는 성공했지만 기존 주류정당의 대안으로까지 부상하지는 못한 상황이다. 그 원인으로 당의 인지도를 높이기 위해 특유의 진보성을 구축하는 대신 대중성에만 치중하다가 진보정당 특유의 선명함이 많이 퇴색하고 기성정당과의 차별성이 모호해진 점, 노회찬/심상정/유시민 등 소수의 스타 정치인에 대한 의존도가 너무 높고 인재 영입이나 양성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점 등이 지적되고 있다. 20대 국회 시기쯤 되자 이들도 이미 환갑 줄에 들어섰기 때문에, 빨리 지명도와 자질을 갖춘 후배 정치인이 나타나지 않을 경우 그마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진보세력이 크게 위축될 우려가 있다. 때문에 숨지기 전까지 당 수뇌부에 젊은 당원들을 기용하는 등 세대교체를 진행한다.
진보신당 창당 당시에는 사민주의 우파 성향으로 평가받았다. 다만 이는 사민주의에 비판적이었던 친NL계 민중의소리에서의 평가라 걸러들을 여지가 있다.

7.2. 한글 사랑에 앞장선 정치인


한글 사랑에 앞장선 정치인이었다.
2004년 처음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자 국회의원 뱃지에 한자로 國이라고 써져있다는 이유로 뱃치 착용을 거부했다. 국회의원 임기가 시작된 후 약 한 달이 지난 후에는 한글문화연대와 한글사랑 대학생 동아리 학생들로부터 한글로 '국회'라고 쓴 뱃지를 선물받아 착용하고 다녔다. 기사 이러한 노력은 2014년에 결실을 거두어 국회의 뱃지가 한글로 바뀌었다. 기사 정의당의 관악구의원 이기중이 이를 본받아 관악구의원 뱃지를 한글로 바꾸기도 했다. 기사
2005년 국정감사에서 노회찬 의원은 김선욱 법제처장에게 한자로 된 법률 용어 10개를 제시하고 몇 개나 뜻을 아는지를 질의했다. 법학교수 출신의 법제처장은 10개 중 두 개만 뜻을 대답했고 나머지는 뜻을 대답하지 못했다. 이는 한국의 법률이 일제시기의 법률 문장을 그대로 베낀 것이 많아 일반 국민들의 시선에서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한 질의였다.
2012년 국회의원 선서문을 한글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국회측에 전달했고, 국회 사무처가 이를 받아들였다. 이로서 서기호 의원은 한글로 선서하는 최초의 국회의원이 되었다. 노회찬은 이를 두고 '국회의원 선서문이 이제 한글로 바뀌었기 때문에 내용을 몰라 (선서를) 못 지켰다는 변명은 통할 수 없다.'고 트위터에 썼다.

7.3. 지역구 세습 논란


삼성 X파일 떡값 검사 실명공개 사건으로 대법원에서 유죄판결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한 뒤 보궐선거에 아내인 김지선을 내보낸 행동으로 비판을 받은 적이 있다.
노회찬이 의원직을 상실하여 열린 2013년 재보궐선거에 안철수가 출마를 선언하자 노회찬은 "왜 집안 식구들 먹는 걸 뺏으려고 하는가?”, "동네 빵집으로 어렵게 이룬 상권에 대기업 브랜드가 들어왔다."는 식의 발언으로 안철수를 비판하였다. # 그러나 '''노원병 지역구는 노회찬 개인이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개인 영토도 아니고, 심지어 안철수는 노회찬과 같은 당도 아니며, 여러정당이 경쟁하는 지역구의 선거구도를 동네빵집에 비유한 것은 적절치 못하였다. '''누구를 국회의원으로 뽑을지는 노원병 지역주민들이 선택할 일인데, 노원병을 마치 자신의 나와바리인 양 여기며 다른 정파 정치인의 출마를 비난하는 행동은 적절치 못한 행동이다.
게다가 자신의 지역구 보궐선거에 아내인 김지선을 내보낸 것은 지역구 세습 논란을 일으키며 같은 당 서기호 의원으로부터도 비판을 받았고, 서기호 의원은 선거유세를 거부하겠다는 뜻을 내비쳤다.#
이에 대해 반박이 있었는데, 2013년 재보궐선거에서 김지선 후보의 선거 캠프 멘토를 맡았던 표창원은 1. 김지선 후보 자체로 충분한 경쟁력을 갖춘 분이고 2. 당내 절차에 따라 후보로 선정되었고 3. 거대 후보인 안철수와 경쟁하기 때문에 세습이라고 칭하기 어렵다는 의견을 냈다. 당시 표창원 인터뷰
민주당의 김근태인재근의 사례가 이와 유사하다. 민중당 김창현이영순의 사례도 이와 비슷하다.

7.4. 페미니스트로서


매년 3월 8일 여성의 날마다 주변 여성들에게 장미꽃을 선물했다는 일화가 유명하다. 기사 기사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뒤 소감으로 "'남자가 최고의 스펙'인 대한민국의 많은 제도, 문화, 관습을 깨기 위해서라도,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야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발언 출처 링크
YES24에 의하면 노회찬은 페미니즘 소설 82년생 김지영의 홍보대사로 불린다.

노 전 의원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성평등 사회를 위한 소신을 밝히고 변화를 촉구했다.

지난해 5월 19일 문재인 대통령과 5당 원내대표의 만남에서는 대통령 부부에게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을 선물하며, 성평등한 사회를 만들어달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앞서 지난 2월 초에도 자신의 트위터를 통해 “올해 세 권의 소설을 읽는다면 『82년생 김지영』, 이 책은 반드시 포함돼야 한다. 이 책을 읽은 사람이 많아질수록 우리 사회도 좀 더 인간다운 사회가 되리라 확신한다. 강추!”라고 소개한 바 있다.

이번 6·13지방선거에서는 ‘정의당 여성당당 선거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여성 후보자들의 당선을 위해 노력했다. 발족식에서는 “제가 태어나서 맡은 직책 중 가장 영광스러운 직책을 오늘 이 자리에서 맡게 됐다”면서 “나라다운 나라의 첫 번째 조건은 바로 성평등한 나라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어 “여성의 가사부담, 폭력으로부터의 위협, 경력단절, 차별 등 무수한 문제가 바로 여성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 전체의 성평등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성평등·약자 인권 대변한 고 노회찬 의원

하지만 '남성이 최고의 스펙'이라는 말은 성차별적인 발언으로 해석되어 많은 이들이 정의당에게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 사실 정의당은 그동안 젊은 남성들의 지지를 받는 정당이였다. 그러나, 저 발언을 시작으로 점점 등돌리는 여론이 많아졌고, 이는 노회찬 본인에게나 정의당에게나 최악의 결과로 되돌아왔는데, 이는 '''현재의 청년층. 특히, 2, 30대 남성들이 도저히 동의할 수 없는 발언'''이기 때문이다.[52][53] 결국 이는 정의당에게 대해 많은 젊은 지지자들이 등을 돌리게 하는 원인이 되었고, 이후 정의당의 몰락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시각들이 많다.
사실 '남자가 최고의 스펙'이라고 여겨지던 시기는 오히려 노회찬와 동연배의 남성들인 기성세대에게나 해당되는 문제고, 세대갈등이 일어나는 원인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현재 한국의 젊은 남성들은 '남자가 최고의 스펙'이라고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가장 노회찬이 비판 받았던 이유. 차별당했음, 차별당했다고 생각하지 그 걸 스펙이라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장 현재의 남성들이 여성에 비해 누리는 것이 '''단 한 가지도 없기 때문.''' 심지어, 대학 진학의 기회 조차 남자들은 차별 받고 있는데, 여자대학교가 대놓고 있을 정도로 남성들을 대놓고 차별하고 있다. 약학대학이나 의과대학, 법학전문대학원 같은 고소득 직종만 해도 어떤가? 맨박스, 독박복무[54]라는 말이 존재할 있을 정도로, 기성 세대들이 만들어 놓은 기준들은 오히려 현재의 젊은 청년들을 옥죄는 올가미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 것에 대한 책임을 노회찬, 나경원 등을 포함한 기성 정치인들이나 정부 부처인 여성가족부까지 아무도 귀담아 들으려고 하지 않았고, 노회찬에게 실제로 생물학적으로 여성인 페미니스트가 남장을 해서 남자 인생을 살아보고 쓴 서적인 <548일 남장 체험>만 읽어보아도 '남자가 최고의 스펙'이라는 말은 현재의 젊은 세대들이 공감할 수 없는 얼마나 허황된 소리인지 알 수 있다. 그간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던 독박 육아의 경우, <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남성들이 육아를 돌봐주면서 '아이는 같이 키우는 것이다'에 대한 인식이 꽤 나아진 편이고, 일부 회사에서 출산휴가를 남성도 쓸 수 있게 해주고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노회찬 본인이 이렇게 페미니스트로서 행보를 걸은 나머지, 남성들이 받는 차별은 외면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사실 그보다 훨씬 전인 2016년 7월에 터진 클로저스 티나 성우 교체 논란에서 정의당이 보여준 행보 때문에 정의당에 호의적이였던 커뮤니티가 돌아섰다며 아쉬워한다는 노회찬의 말이 있었다고 할 정도로 이유로 관련 논평을 철회했을 정도로 정의당에 대한 여론이 안 좋아지고 있던 건 기정 사실이였으나, 노회찬은 문재인 정부 출범 후 <82년생 김지영>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선물해 줌으로써, 이런 지나친 친페미니즘의 행보로 인해 젊은 유권자들이 반감을 일으키게 되어, 20대 총선 이후로는 정의당에게 교차 투표하는 계층들이 많이 사라졌다.
정의당은 이후 치뤄진 선거에서 모두 망했다. 물론 이런 원인들 만이 정의당의 패배의 모든 원인은 아니나, 7대 지방선거에서도 정의당은 기초지자체장은 물론이고, 지방의원 조차도 거의 당선자를 내지 못 하고 말았다. 노회찬 사후 치뤄진 2019년 재보궐선거에서도 여영국이 단일화 끝에 가까스로 노회찬의 지역구를 이어받았지만, 득표율이 많이 떨어진 상태이고, 21대 총선에서 정의당창원시 성산구를 뺏기는 등 의석이 더 줄어버리고, 비례대표 당선자도 몇 명 못 내는 등, 사실상 패배한 선거가 되어 그 규모가 쪼그라들고 말았다. 이는 페미니즘에 대한 논란이 존재하는 정의당 비례대표 후보자들이 있었고, 지도부부터가 거대 양당인 더불어민주당이나 미래통합당 보다도 친페미 성향이 심했기 때문인지 끌어안기에 바빴던 원인이 제일 컸다.[55] 개중에는 페미니즘에 호의적이였던 노회찬도 예외일 순 없었기 때문.

7.5. 불법 정치자금 수수


2016년 경 예비후보자 신분일 때 정치자금법상 위법한 돈 4천만원 가량을 받은 사실은 청렴한 이미지의 그에게 큰 심적 부담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2016년 총선 때 불법 정치자금 5000만원을 줬다는데

“총선이 있던 그해 총선 전후로 만난 적도 없고 전화 한 통 한 적이 없다. 어디 보도엔 심지어 국회의원도 아닌 데 강연료로 2000만원을 줬다고 하는데 대한민국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저는 이런 부분에 관해선 나중에 문제 삼을 것이다 "

노회찬 "의원도 아닌데 한 번 강연료 2000만원, 말이 되나" 

애초에는 위와 같이 의혹을 부인했으나 점차 특검의 수사가 좁혀지면서 끝내 유서로 불법 정치자금 수수를 시인하고 투신하기에 이르렀다. 청탁이 없었다 하더라도 현행법상으로는 분명히 불법임이 틀림없고, '''불법 정치자금 수수 사실을 국민들에게 솔직히 밝히고 책임지지 못하고 거짓으로 부인했다는 점'''은 비판받아 마땅한 지점이다. 더욱이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하였을 당시 노회찬의 재산은 '''10억원'''에 가까웠는데 부자의 기준에 충분히 들만한 액수이다.# 즉,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했을 당시의 노회찬은 생활에 쪼들리는 형편도 아니었던 것이다.
한편, 이 사건과 관련하여 노회찬을 옹호하는 목소리도 있으며 정봉주의 다음과 같은 발언이 대표적이다.

정 전 의원은 "저도 똥 묻은 처지에 있는 신분이지만 국회의원 299명에게 묻고 싶다"며 "(정치할 경우) 친구 등 주변에서 금전적으로 도와주는 경우가 많은데 '후원금으로 처리하겠다'는 국회의원 한 명도 없다"고 말했다. 후원금 등록을 할 경우 외부에 이 사실이 공개되므로 암묵적으로 정치자금을 건네는 경우가 많다는 주장이다.

그러면서 "노 전 의원이 4000만원을 받은 것은 개인적인 부귀영화를 위해 쓰지 않았을 것"이라며 "지역구를 하다 보면 등록하지 않고 들어가는 돈이 있다. 노 의원은 그런데 썼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정 전 의원은 "국회의원들에게 묻고 싶다. 선거관리위원회에 등록하지 않고 비법적으로 쓴 돈 한 푼도 없냐"며 "이런 경우를 알고 있는 국회의원들은 노 의원에게 돌을 던질 수 없다"고 말했다.

정 전 의원은 "노 의원이 이 문제로 고민하고 고통스러워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찢어진다. 더 구린 돈 안 받으려고 한 것 아니겠냐"며 "난 내 근황보다 이 얘기를 꼭 하고 싶다. 막상 국회의원을 하면 그렇게 들어가는 돈이 생각보다 많다. 비법이라고 할 수 있지만 불법이라고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5개월 만에 나온 정봉주 "노회찬에 대해 이 이야기는 꼭 해야겠다"

이처럼 노회찬을 옹호하거나 동정하는 쪽에서는 정치자금법 자체가 문제가 있음을 지적하며, 이 때문에 노회찬이 큰 잘못을 저지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그러나 정치자금법은 노회찬 사망 이전부터 지금까지 상당히 많은 개정이 있어 왔었고 정치자금법이 노회찬 본인에게 딱히 불리하게 적용된 것도 아니다. 이미 본인부터가 차떼기와 박스떼기 같은 말도 안되는 뇌물수수 방법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정치자금법을 완화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던 인물이니만큼, 그런 그가 정치자금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해서 정치자금법이 문제가 있다는 주장으로 그의 행위를 옹호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7.6. 추모 분위기와 정의당 지지층 집결


바로 그 전 주 한국갤럽 여론조사상으로 정의당의 지지율이 제1야당인 자유한국당을 뛰어넘었으나 노회찬의 부재로 인해 다음 총선까지 정의당의 진로는 한치 앞을 모르는 상황이 되어버렸다.[56] 다만 노회찬 사망 이후 '''정의당에 입당하거나 후원금을 납부하는 사람들이 급증'''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대해 정의당은 고인이 불미스러운 일로 사망한 데다 장례 절차가 진행중인 만큼 당원 가입이나 후원금 증가 수치를 공개하지는 않겠다고 밝혔다. #, #
그럼에도, 노회찬의 죽음 이후 정의당은 7월 30일 발표된 리얼미터 여론조사에서 역대 최고 지지율인 12.5%를 기록했다.# 정의당은 노회찬의 투신과, 이와 연루된 당내 핵심 심상정, 김종대에 대한 추가적인 수사로 인해 더욱 위기에 봉착할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적극적으로 대처하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 #, #, #, #, #, #
시간이 좀더 지나자 정의당의 지지율은 이보다 훨씬 더 늘어나, 무려 15%의 지지율을 기록, 한국당을 제치고 제1야당에 등극하는 데에 이르렀다. #
이정미 정의당 대표는 노회찬의 죽음에 대한 책임을 묻겠다고 말했다.#

“노회찬 의원 알지. 너무 아까워.” 노회찬 의원의 얘길 꺼내자 뒷좌석 승객 상당수는 그를 안다고 했다. 하지만 절반쯤은 아무 표정도, 말도 없었다. 기자는 그들에게 노 의원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 얼굴을 묘사했다. “조금은 못생긴…”이라고 말했다가 금세 반박을 당하고 말았다. 노 의원을 ‘안다’ ‘모른다’ 티를 내지 않던 이가 갑자기 팔을 저으며 큰 소리로 말했다. “무슨 소리야, 잘생겼지.” 6411번 버스를 10년째 타고 있다는 윤혜순씨(74·가명)도 말을 보탰다. “훤하게 생겼잖아, 근데 옛날 사진 보니까 자라면서 얼굴이 커진 것 같아.” 웅크리고 앉은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너무 억울해. 왜 나쁜 사람은 잘살고 정직한 사람은 목숨을 던져야 하는지.” '''좌석이 이내 고요해졌다.

"노회찬 의원, 사람 대접 해줘서 고마웠어요" 나흘간 기록한 6411번 첫차의 풍경

그러나 추모 분위기가 가라앉으면서, 정의당의 지지율은 노회찬이 사망하기 전 당 지지율보다 살짝 오른 수준인 평균 9퍼센트 대[57]로 다시 갔고 2019년 2월 즈음에는 6%대 지지율로 원상복귀하였다.#

8. 어록


기본적으로 재치있고 유머러스한 화법을 구사하지만 그 속엔 촌철살인의 의미가 숨어 있어 진보 진영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으로 국회의원으로 재직 당시에도 기회만 되면 유머러스한 드립을 치는 정치인으로 유명했다. 여의도 정치판에서 대중친화적이면서도 선출직 공무원의 품위를 잃지 않는 수준의 언어구사력을 가진 정치인은 찾기 힘들다. 무엇보다 감탄이 나오는 건 역시 비유 실력. 하나의 대답을 누구나 이해할 수 있을 만큼 쉬운 비유를 바로 탁탁 내보내는 능력은 감히 적수가 없을 정도.
이런 말솜씨 덕분에 각종 방송이나 토론의 초대 손님으로 출연 요청을 많이 받는다. 특히 언론인 김어준과 친분이 두터운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김어준의 파파이스김어준의 뉴스공장, 블랙하우스에도 고정 출연하였다.
유튜브에서 검색하면 여전히 노회찬의 어록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음을 알 수 있다.
거기다가 이명박이 문재인 정부의 적폐청산 기조에 불만을 나타내는 페이스북 글을 게시하자, 노회찬은 그 글을 패러디하기도 했다.
그리고 단순히 재치있는 말뿐만 아니라 하나의 정당 소속의 정치인으로써, 그리고 당시 민심을 가늠하는 척도 역할을 하는 국회의원으로써 남긴 발언 또한 있다는 걸 유념하고 보도록 하자.

'''대통령 공약 중에서 가장 잘 만든 공약집이 박근혜 대통령 공약집이에요. 세상을 바꾸는 약속. 그거 아주 제 애독서입니다. 제가 그 책이 한 권밖에 없는데 두 권이 있다면 박대통령에게 선물하고 싶어요. 본인이 안 읽어본 것 같아.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제목을 바꿔야 해요. 약속을 바꾸는 세상.'''

'''솔직히 대통령 후보의 약속중에 안 지켜지는 것이 있잖아요. 뭐 다른 대통령도 그랬고. 그런데 스스로의 약속을 안 지키는 대통령은 많았지만 자기 약속을 정면으로 반대로 위배하는 대통령은 처음이에요.'''

'''해고를 어렵게 한다는 게 공약이에요. 그런데 지금은 쉬운 해고를 밀어붙이고 있잖아요. 그래서 제가 국회의원이 되면은 제 1호 법안을 해고를 어렵게 만드는 법안을 내겠습니다. 그래서 박근헤 대통령의 공약을 실현하는. 5개의 공약을 전부 다 박근혜 대통령이 약속을 했지만 (지키지 않은 것들).'''

'''이런 것도 있어요 대기업이 중소기업을 원청 하청 관계 속에서 괴롭힐 때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를 도입하겠다, 엄청나게 좋은 법인데 이거 안 하고 있어요. 그래서 이런 것만 해가지고 진짜 진박이 누구냐! 진박 될려면 이 정도는 해야 한다! 노회찬 진박 선언!'''

2016년 2월 제20대 총선 선거운동 기간 중에 김어준의 파파이스에 출연해서 한 말. 파파이스 풀버전 이 후에 이어지는 누리과정 비판도 재밌다.

'''"한나라당, 민주당 의원님들 그동안 수고하셨습니다. 이제 퇴장하십시오. 이제 저희가 만들어 가겠습니다."'''

'''"50년 동안 같은 판에다 삼겹살 구워먹으면 고기가 시꺼매집니다. 판을 갈 때가 왔습니다."'''

2004년, KBS 심야토론에서.

'''"노무현, 참 구차하다."'''

"'''(노무현은) 대통령을 지내신 분으로서는 정말 부정부패 관리에 있어서 무능력함까지 드러냈다고 보여진다"'''[58]

2009년 4월, 노무현 전 대통령이 권양숙 여사가 박연차 태광실업회장으로부터 돈을 받았음을 고백하자, 납득할 수 없다면서 평화방송 라디오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에 출연해 발언.#

'''"콜레라균을 이유미가 단독으로 만들었건 합작으로 만들었건 국민의당 분무기로 뿌린 거 아닌가"'''

'''"여름에 냉면집 주인이 "나는 대장균에게 속았다, 균이 나를 속였다, 대장균 단독 범행"이라고 얘기하는 격"'''

국민의당 제보 조작 사건 관련해서 국민의당 지도부가 단독 범행이라고 결론 내렸을 때 했던 말.

'''KTX가 코리안 택시입니까?'''

2012년 총선 당시 허준영 후보의 KTX 노원 연장 공약을 비판하며 #

'''정옥임: 야권 연대면 당을 통합하든가 하지 같은 당도 아니면서 왜 하나인 것처럼 행동하죠?'''

'''노회찬: '같으면 통합을 해야 하는데 다르기 때문에 연대#s-4를 하고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요, 우리나라일본이랑 사이가 안 좋아도 외계인이 침공하면 힘을 합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2012년, SBS 시사토론에서

'''"학교 앞에 즐겨다니던 분식집 사장에 소환되니까 (일부 학생들이) 수업을 거부한 것"'''

고용노동부김장겸 체포영장 발부에 반발한 자유한국당이 국회 일정을 보이콧했을 때 했던 말.

'''"'남자가 최고의 스펙'인 대한민국의 많은 제도, 문화, 관습을 깨기 위해서라도, 차이를 차별로 만드는 야만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해서라도 많은 남성들이 이 책을 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2017년 8월 29일 '예스24 문학학교'에서 남성들에게 소설책 82년생 김지영의 일독을 권하며 위와 같이 발언#

'''"동네에 파출소 생긴다니까 동네에 폭력배들, 우범자들이 싫어하는 거나 똑같은 거죠."'''

'''"모기들이 반대한다고 에프킬라 안 삽니까?"'''

2017년 9월 20일,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공수처 신설안을 반대하는 자유한국당 의원들에게.

'''잘못된 시대를 엎고 새로운 시대를 만들어나가는 것이지 신석기 시대가 구석기 시대를 보복합니까? 시대가 바뀌었을 뿐이죠.'''

'''그렇죠. 청소할 때는 청소를 해야지 청소하는 게 먼지에 대한 보복이다. 그렇게 얘기하면 됩니까?'''

2018년 1월 2일 JTBC 소셜라이브 인터뷰 中

[youtube]

'''"그러니까 탄핵당했지. 이 사람아."'''

2018년 1월 2일, JTBC의 신년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한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에게. #[59]

김성태: 정책 보복하지 마세요. 4대강도 이미 20조를 넘게 쓴 사업인데 지금 와서 그걸 철거하고, 물을 빼는 게 잘하는 일입니까?

'''노회찬: 네.'''

'''김성태: 에?'''

(청중 웃음)

2018년 1월 2일, JTBC의 신년토론회에서 패널로 참석한 자유한국당 김성태 의원에게. 김성태는 이날 일로 '''혼수성태'''라는 별명을 얻는다(...)

'''금단현상으로 괴롭다고 해서 을 다시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

'''"불법정치자금 받은 적 없다. 수사에 당당히 임할 것."'''

드루킹으로부터 불법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의혹에 대한 노회찬의 대답출처"


9. 기타


  • 2017년 1월 11일, 이명박 정당인 늘푸른한국당 창당 시, 축하 인사 차 찾아와서 이재오에게 반갑게 인사한 다음 축사를 낭독하기도 했는데, 그가 이명박에 대해 평소 비판적인 것을 생각한다면 좀 이례적이다. 하지만 노회찬은 과거에 이명박과도 인연이 있었으며[60], 특히 이재오의 경우 존경하는 운동권 선배 중 한 분이라고 언급했다. 거기다가 이명박과 노회찬 모두 같은 고려대학교 출신. 한편으로 이재오 또한 2013년 당시 안기부 X파일 문제로 노회찬이 의원직을 상실할 때 안타까움을 표현했으며 그의 의원 상실직을 막고자 통신비밀보호법 개정안발의에 이름을 올린 적이 있다.[61] 거기다가 이명박 정부 시절, 노회찬과 심상정이 민주노동당에서 탈퇴한 직후 진보신당을 창당했을 때랑 창당 2년차 때, 이명박이 직접 축하 화환을 보내기까지 했다.[62] 다만, 이명박이 대통령에 취임한 이후로는 관계가 다소 소원해진 듯하다.
  •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나온 이야기인데, 1999년에 대한항공 조종사들이 노조를 만들며 노회찬에게도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63] 깜짝 놀란 노회찬이 '월급도 많이 받는 분들이 노조가 왜 필요하냐'고 물었더니 '돈이 문제가 아니라 인간 대접을 받고 싶다'고 말했다고(...) 대한항공 사주 일가가 직원들을 대하는 태도를 능히 짐작할 수 있다. 35분 26초부터
  • 애플빠다. 2009년부터 아이폰을 이용해 왔는데, 사망할 때까지 아이폰을 애용했다.[64] 또한 iPad도 자주 사용하며, 심지어는 노회찬과 아이폰은 구글에서 자동검색으로도 등장한다.
  • 2009년 진보신당 중앙당 당직자 전원에게 아이폰을 선물했던 적이 있다. 비용은 전액 사비로 충당했다(...) 새로운 소통의 도구를 과감하게 도입하기 위한 시도였다고 한다. 기사
  •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 당시 박원순 후보 지지 출근인사를 당고개역에서 진행할 것이라고 올렸었는데, 하필이면 영 좋지 않은 곳에 오타가 나서 박원순후보 자지 출근인사로 올라가는 해프닝이 있었다.#[65] 일단 투표한 후 애플 사에 강력하게 항의해서 자판 크기를 늘리라고 하겠다고.
  • 노회찬은 중학교 때부터 조선일보를 즐겨읽던 자칭 '30년 독자'이다. 민주노동당 시절 당차원에서 조선일보의 편파, 왜곡보도를 문제삼아 모든 인터뷰를 거부했을때도 조선일보 본사를 방문하여 직원들을 상대로 강연을 열어 논란이 된 적이 있다. 노회찬은 조선일보의 논조에는 동의하지 않더라도 기사의 품질만큼은 최고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2010년 조선일보의 90주년 창간식에도 참여하였다.[66]
  • 서민적인 이미지 때문에 노회찬의 재산이 서민 수준일 것이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실제로는 신고된 재산만 10억원으로 상류층 수준의 재력을 지니고 있었다.# 10억원의 재산은 신고당시를 기준으로 보았을때 '부자'로 불릴 정도의 재산이다.# 노회찬의 재산은 다른 국회의원들의 재산과 비교해도 결코 하위권이 아니었다.#, # 대학 선배였던 권오을에 따르면, 노회찬이 부산 부잣집 아들이라는 소문도 있었다고.
  • 정치인들 중에서는 드물게 자녀가 아예 없다. 뒤늦은 나이에 결혼했는데(본인 34세, 아내 36세) 결혼한 지 얼마 안 되어 수배되고 몇 년간 교도소에 갔다오는 사이 아내의 가임기가 지나버렸다. 입양이라도 할까 했으나 당시에는 의원도 아니고 해서 수입이 일정치 않아 거절되었고 결국 실패했다.
  • 노회찬의 로스쿨에 다닌다는 가짜뉴스가 있었지만 본인이 직접 자식이 없다고 일갈했다. 욕먹는 딸이라도 하나 있으면 소원이 없겠다고. #
  • 개인 성격은 정치계의 코미디언이라 불릴 정도로 유머 감각이 탁월해 주변 사람들을 웃기고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 미디어를 통해 비친 모습으론 비유가 탁월하고 말이 청산유수라서 평소 성격도 활달할 것 같지만 동료 의원들의 말에 의하면 실제로는 수줍음이 많고 무척 겸손했으며 혼자 사색하는 모습이 많이 목격됐다고 한다.
  • 3선 국회의원을 역임했던 권오을 전 의원의 대학 후배이다. 권오을은 1957년생으로 노회찬보다 1살 젊었는데, 정작 권오을은 77학번[67], 노회찬은 79학번이라 이리 꼬였던 것. 1982년 권오을이 군 전역을 하고 복학을 하니[68] 노회찬이라는 후배가 있었다고. 권 전 의원의 회고에 따르면 "늘 해박하고 책을 끼고 다니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2004년 국회에서 다시 만나기는 하는데 서로 소속된 정당이 많이 다르다 보니[69] 많이 친하게 못 지냈었다고 한다. 노회찬이 사망한 후, 권오을이 그의 조문을 간 후 이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1982년, 군대 제대하고 복학을 하니 고대 정외과에 노회찬이가 있었습니다.
>늘 책을 끼고 다니면서 해박하고 달변이었습니다.
>부산 부잣집 아들이란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
>시간이 흘러 2004년,
>17대 국회에서 다시 만날 땐 반가우면서도 한편 서먹한 분위기였습니다.
>그 뒤 말을 트기도 하고 서로 올리기도 하면서 가끔 보는 사이었지만 한국 최고의 국회의원이란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습니다.
>
>오늘 조문을 마치고 노 의원을 다시금 생각합니다.
>
>유명을 달리한 노회찬 의원님.
>이 시대의 정직하고 양심적인 참 정치인이었습니다.
>부정비리에 추상 같았던 잣대를 본인 스스로에게도 들이댄 정치인이었습니다.
>
>이제 돈 걱정 없는 저 세상에서 마음껏 경륜의 정치를 펼치길 빌어봅니다.

  • 손석희 앵커, 박원순 서울시장과 동갑이다. 해당 영상은 100분 토론 손석희 앵커 하차 특집 때 나온 것으로, 손석희 앵커의 지나친 동안 때문에 노회찬 의원은 졸지에 노안이 돼 버렸다. 게다가 홍의락 의원이 노회찬보다 나이가 1살 많은데, 동안이라 같이 있으면 노안으로 보일 정도. 다만 같은 학교 3년 선배이자 1살 동생이 되는 권오을(1957년생)보다는 동안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
  • 노안에 대한 재밌는 에피소드가 많은 듯 한데 신혼여행 중 만난 여행사 안내원이 옆구리를 쿡쿡 치면서 "아저씨 좋겠네요. 두번째(재혼)죠?"라고 해서 뭐라 말은 못하고 허허 웃기만 했다고 한다. 또 38살 때 경인선 전철에서 노인인 줄 알고 자리를 양보받기도 했다고.
  • 정의당의 개그 페이지 정의당 X-File의 이름은 삼성 X파일 사건에서 따온 것이다. 운영자 중의 한 사람이 전직 노회찬 대학생 팬클럽 회장이었을 정도로 노회찬을 좋아했다.
  •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인기를 끈 김어준의 뉴스공장에 수요일 고정 패널로 출연해서 큰 인기를 얻고 있다. 당초에 이 코너는 임시로 설정된 것인데, 일단 시도해 봤다가 큰 인기를 끌면서 고정적인 코너로 정착되었다. 이 코너의 이름은 오랫동안 정해지지 않고 있다가 2017년 5월 이후 노회찬의 이름에서 유래한 '노르가즘'으로 확정되었다. 시국 현안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촌철살인의 비유 덕분에 인기 코너로 자리잡았다. 이 코너에서 논의된 노회찬과 김어준의 대화는 상당수의 언론에서 그대로 기사화돼서 내보낼 정도로 임팩트가 높다.
  • 중요한 정치적 선택들을 함께 취해왔기 때문에 진보정당 지지자들에게 심상정과의 커플링(...)이 꽤 오래 회자되었던 듯하다. 물론, 두 사람 모두 각자의 배우자가 있다. 심상정은 실제로 둘이 진짜 부부인 줄 알았다는 시민도 만난 적이 있다고. 심상정과 노회찬은 오랜 경쟁자 관계이기도 하다. 조직과 강한 리더십을 강조하는 심상정과 개인기의 비중이 강한 노회찬은 여러모로 대조되는 인물이기도 하다. 두 사람은 동지이자 라이벌인 셈이다.
  • 유시민과 친분이 있어, 노유진의 정치카페 및 정의당에서 행적을 같이 하고 있다.
  • 1988년 결혼식 피아노 반주를 고교 동창인 이종걸이 직접 해줬다.#
  • 이명박 정부 시절, 정봉주수감되었을 때, 정봉주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하기도 했는데, "1달 내로 정봉주를 사면복권시키지 않으면 바로 그 자리에 이명박을 집어넣겠다"고 연설하기도 했다(...).[70]
  • 이명박 정부 시절인 2008년 5월 광우병 사태를 비꼬며, 심상정과 함께 "광우병보다 대통령이 더 무섭다"는 성명을 냈다.
  • 진보신당 대표이던 2010년에 '노회찬의 요리교실'이라는 쿡방을 한 적도 있다. 1편 매생이굴국 2편 곰치국[71] 3편 벨기에식 홍합요리
  • '투캅스' 등의 작품으로 유명한 영화배우 및 탤런트 박중훈이 '회찬이 형'이라고 부를 정도로 상당히 친한 사이다.[72] 그래서 박중훈이 노원역에서 노회찬의 선거 유세를 도와주기도 했다. 박중훈은 개인적으로 노회찬을 "참 좋은 형"이라고 호평한다고 한다. 또한 노원구 병 국회의원 시절 삼성 관련 폭로에서 벌금형을 받아 국회의원직이 박탈된 적도 있으나, 노원구와의 인연이 매우 깊은 정치인으로, 맹형규법이나 다른 법에 걸리지 않았다면, 노원구에 출마하려 했고, 20대 국회의원 선거 때도 노원구에 출마하려 했으나 권영길의 지역구였던 창원이 걸려있어, 권영길이 노회찬에게 창원 지역구 출마를 요청해서 창원에 출마한 것이라 한다. 실제로 현재 잠시 창원에 내려오기 전까지는 주거지와 주 활동 장소가 모두 노원구이기도 했다.[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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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7년 3월부터 김어준의 뉴스공장의 수요일 고정 인터뷰이로 출연, 특유의 명쾌한 분석과 촌철살인의 비유 덕분에 뉴스공장의 인기몰이에 한몫 한다. 원래 이 코너는 이름이 없다가 '(노회찬의) 노르가즘'이라는 타이틀이 붙었다.
  • 손석희가 진행하는 토론에 많이 나와서 그런지,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내가 진행하고 손석희가 토론하는 모습을 보는 게 소원"이라고 했다. 손석희가 말하면, 자신이 전부 "짧게 해달라"며 말을 끊을 거라고.
  • 조국 교수가 문재인 정부 민정수석으로 발탁되기 전까지 노회찬 의원의 후원회장을 맡았다. 기사 조국은 민정수석에서 물러난 후 첫 일정으로 노회찬 1주기 추모전시회 봉사활동을 했다.
  • 노무현 정부시절부터 일관되게 한미FTA를 반대하며 국정조사를 요구한 바 있다.
  • 광화문 광장에 박정희 동상 설치를 조건부로 찬성한 적이 있다. 지하 100m에 지어서 모두가 밟도록 하면 찬성하겠다고.
  • 2018년 4월 5일, 제7회 지방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과의 창원시장 선거연대를 언급했다. 문제는 창원시장에 20대 국회의원선거 당시 노회찬과의 선거연대를 거부하다가 당지도부의 설득으로 노회찬과 단일화 경선을 치렀다 패배하여 후보를 사퇴한 허성무 역시 창원시장에 후보신청을 한 상태이다. 악연이라고 해야 할지...
  • 2017년 3월 10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박근혜에 대한 탄핵소추안이 가결된 날 SNS에 잔치국수를 먹는 인증샷을 올리며 이 날을 기념일로 지정하자고 제의한 바 있는데, 노회찬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일베저장소를 비롯한 보수 성향의 인물과 단체들이 똑같이 잔치국수를 먹는 인증샷을 올리며 고인드립을 일삼기도 했다. 대한애국당 국회의원 조원진의 보좌관은 페이스북에 잔치국수 사진과 함께 "7월 23일을 좌파 척결 기념일로 지정하겠다"라는 조롱 글을 올렸다. 극우 인터넷언론인 뉴스타운 또한 유튜브채널에 출연자들이 잔치국수를 먹으며 고인을 향한 욕설과 조롱을 내뱉는 동영상을 업로드했다. [정치부회의] "잔치국수 먹었다"…고 노회찬 향한 도넘은 조롱. 당연히 범국가적인 피해를 입힌 중범죄자를 공직에서 파면한 것을 반기는 것과 사람의 죽음을 조롱하는 것은 전혀 성격이 다른 것이기에 그와 같은 행위들은 크게 지탄을 받았다. #, #, #, #, #, #, #, #, #, #, #, #
  • 우파 만화가 윤서인이 페이스북에 조롱조의 비난글을 게시했고, 자유한국당 곽상도 의원이 진보의 이중성 운운하며 노회찬을 비꼬는 고인모독성 글을 본인 페이스북에 올렸다. # 홍준표 전 대표 또한 노회찬의 영결식이 진행된 날 “자살이 미화되는 세상은 정상적인 사회가 아니다”라는 식의 주장을 페이스북에 올리며 은연중에 노회찬의 죽음과 추모 분위기를 비난해서 논란이 되고 있다. #
  • 사망 직후 구급차로 운송되는 모습을 TV조선연합뉴스가 생중계하면서 두 언론사는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게다가 조선일보는 부고를 알리는 기사 바로 옆에 고교야구 기사라는 명목으로 샴페인을 터뜨리며 환호하는 사진(...)을 넣어 부적절하다는 비판을 받았으며, 의도가 있는 거 아니냐는 의심을 강하게 받았다. 또 기자들이 장례식장을 찾은 유명인사들에게 집요하게 심경을 묻는 과잉취재가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 노컷뉴스는 23일 오전 노회찬 의원 사망 소식에 정의당과 정치권 반응을 전한 두건의 기사를 페이스북에 링크했는데 문제는 노회찬의 모습을 흑백처리해버린 것. 노회찬이 김성태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와 손을 잡은 사진과 정의당 회의실에서 회의를 하는 모습인데 노 의원만 흑백 처리를 해버린 것였는데 이와 관련해 부적절한 조치라며 강하게 반발하였고 고인을 능욕하는거냐는 비판이 쏟아지면서 항의를 받은 노컷뉴스는 결국 사진을 교체했다. #
  • 노회찬이 사망한 후, 그가 2012년 진보정의당의 당대표로 선출되었을 때 했던 일명 '6411 연설'이 화제가 되었다. 관련기사

>“아들딸과 같은 수많은 직장인들이 그 빌딩을 드나들지만, 그 빌딩이 새벽 5시 반에 출근하는 아주머니들에 의해서, 청소되고 정비되고 있는 줄 의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 이 분들의 삶이 고단하지 않았던 순간이 있었겠습니까. 이분들이 그 어려움 속에서 우리 같은 사람을 찾을 때 우리는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들 눈앞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습니까. 그들의 소리가 들리는 곳에 과연 있었습니까.”(노회찬 의원, 2012년 진보정의당 당대표 수락연설)
> 승객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담은 노 의원의 연설을 알지 못했다. 버스가 노들역을 지나 한강변 인근을 달릴 즈음 뒷좌석의 승객 몇몇에게 ‘6411번 버스 연설 영상’을 메시지로 전달했다. “저도 좀 줘 봐요.” 8명이 휴대폰을 내밀었다. “나는 휴대폰이 옛날 거라 저런 거 못 봐.” 아쉬운 듯 바라보는 이도 있었다.
  • 2017년 12월 6일 방송된 tvN쿨까당에서 자신이 고교시절 자작한 노래를 불렀었는데, 그의 사망 후 7월 24일 방송된 김어준의 뉴스공장에서 그를 추모하며 다시 이 노래를 소개하여 화제가 되었다. 곡 제목은 '소연가'로, 서정주 시인의 수필 '석남꽃'에 실린 동명의 시에 음을 붙인 곡이다. 25일 인디밴드 '노랑'이 이를 락 버전으로 편곡해 유튜브에 공개했다. 음원은 인디밴드 노랑 공식 블로그에서 다운받을 수 있다.

  • 사망 당일 손석희 앵커는 뉴스룸 앵커브리핑 대신 노 의원의 미공개된 영상을 공개하는가하면 다음날부터 영결식 전날까지 3일 동안의 앵커브리핑을 노 의원과 관련된 내용으로 방송했다. #1 #2 #3 방송을 마치고 난 뒤 직접 조문도 갔고. 그리고 2019년 4월 4일. 2019년 보궐선거에서 노회찬의 빈자리를 채울 후보로 나온 정의당 여영국 후보가 승리하면서 '이제는 탈상할 수 있다'는 이정미 대표의 말을 앵커브리핑에서 전하면서 차마 말을 잇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줬다. 1주기 때 tbs에서 제작한 추모 다큐에도 출연했다.
  • 한편, 사망하기 얼마 전에는 대선 직후부터 지속되어온 포퓰리즘 공약 경쟁에 대해 반성어린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 당시 한창 논의되고 있던 최저임금 관련 정책들이 비현실적이고 포퓰리즘적이었다고 비판한 것.
  • 노회찬 1주기를 무렵해서 강상구 전 정의당 대변인이 그의 어록을 모은 책을 출판했다. 책 이름은 <언제나, 노회찬 어록>
  • 본인 인스타에 따르면 생전 탈모로 꽤 맘고생을 한 듯 보인다. 단 본인은 인정 안하려고 한 듯.

[1]부산광역시 동구 초량동[2] 민주화 운동가나 사회, 노동 운동가가 안장되는 곳이다.[3] 딴지일보와의 인터뷰에서 본인은 무신론자라고 밝혔다.#[4] 현재는 노회찬재단 명의로 전환되었다.[5] 정의당의 노회찬+심상정+초선 비례대표 4명.[6] 남편이 대학 교수다.[7] 기업을 운영하고 있다.[8] 이경규와 같은 학교 출신이며 냄비받침에서 만났다.[9] 당시에는 명문고 입시경쟁이 치열했기 때문에, '''중학교 4학년'''은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사족이지만 그가 재수해서 들어간 해는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 이전 마지막 입시였다. 경기고등학교를 비롯한 모든 서울시내 고등학교 입시가 폐지된 건 1974년부터이다. 또 화동 교사 마지막 졸업생이기도 하다. 고교 동기로 고승덕, 황교안, 이종걸, 김기준, 김용덕 대법관이 있다. 72회는 졸업생 720명 중 450여명이 서울대에 진학했다.[10] 그래서인지 현재 노회찬의 말투를 들어보면 동남 방언 억양이 강하게 섞인 서울 말씨를 사용한다.[11] 1970년대까지는 고등학생들이 반체제 투쟁에 참여하는 일이 많았다. 이 당시에는 데모하다 학교를 잘려서 검정고시 쳐서 대학에 진학한 케이스도 심심찮게 찾아볼 수 있다. 노회찬 의원이 이런 운동에 참여하게 된 계기를 모 TV프로에서 직접 얘기한 적이 있는데, 본인이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과 현실 사이의 괴리감에 의문점을 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12]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재야인사들을 만날 때 늘 전화로 만나고 싶다며 자신의 이름만 말하고 가서 직접 만나 고등학생 신분인 그를 확인한 후 적잖게 당황했다고.[13] 70년대에는 전태일의 분신자살로 지식인들이 큰 충격을 받아, 자신들의 지위를 내던지고 용접이나 선반공 자격증을 따서 현장에 들어가는 경우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이를 '학생 출신'이라 하여 '학출'이라 불렀다. 여담으로 이쪽에서 전설적인 인물이 바로 1994년 신한국당 입당하면서 우파 정치인으로 전향한 김문수였다.[14] 여담이지만 이때 노회찬과 같이 검거된 사람 중에는 무려 차명진(...)이 있다. 기사[15] 출처[16] 현재 존재하는 민중정치연합과는 다른 PD계열의 단체이다.[17] 출처[18] 현재는 국민의힘에 있는 정태근, 그리고 바른미래당에 있었던 무소속 김성식도 이 정당 출신이다. '제3의 정치세력'을 표방했지만, 진보정당이라기보다는 국민의당과 가까운 정치성향을 가지고 있는 정당이었다. 이들은 이회창 총리를 대통령 후보로 내세우겠다는 포부를 밝혔으나 실패. 그 뒤로 각자의 길을 걸어갔다.[19] 매일노동뉴스를 발행하던 시절, 경영난으로 신용불량자가 되기도 했다. 훗날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은행사에서 카드를 좋은 조건으로 발급해주겠다고 찾아왔는데, 다음날 전화로 신용불량 이력때문에 카드 발급 대상이 아니라고 통보해왔다고... 오마이 기사[20] 비례대표 8번이었다. 그리고 '''자민련의 비례 득표율이 0.179073329%(...)만 높았어도 그는 낙선이었다.''' 참고로 이 '반올림해서 0.2%'가 모자라 낙선한 자민련의 비례대표 1번은 김종필. 참고로 이때 충격먹은 김종필은 정계은퇴한다.[21] 당시 민주노동당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된 노회찬의 일기에서도, TV토론 몇 번 나오니 순식간에 민노당과 자신의 인지도가 상승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22] 출처: 한겨레 기사 국회 의안정보시스템 민법중개정법률안(노회찬의원등 10인)[23] 이 부분은 5대 지선 문서에도 상세히 설명된 부분이지만, 당시 서울의 선거결과는 민주당이 시의원 106석중 79석을 차지하고 25개 구청장 21석 중 21석을 쓸어가는 등 사실상 민주당의 승리나 다름없었다. 단지 시장 선거에서만 한명숙이 오세훈에게 졌던 것뿐이다. 산술적으로 단순 계산을 해 보면 한명숙의 득표수는 민주당 소속 구청장 후보들의 득표수 합계보다 27만여 표나 적었고 반대로 오세훈의 득표수는 한나라당 소속 구청장 후보의 득표수보다 26만여 표나 많았다. 그런데 정작 선거에서 한명숙은 0.6%, 26천여 표 차이로 패배한 것. 결국 한명숙 후보가 민주당 구청장 후보들 평균만큼의 득표력만 가졌어도 노회찬이 가져간 표를 이야기 할 필요도 없이 낙승할 수 있었고, 심지어 구청장은 민주당을 찍고 시장은 오세훈을 찍은 유권자(즉, 민주당을 지지할 생각은 있지만 한명숙은 지지하지 않은 유권자)의 수가 노회찬의 총 득표수를 가볍게 뛰어넘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결국 요약하면 '''민주당 후보의 경쟁력 부족으로 기존의 민주당 지지층조차도 다 확보하지 못한 결과 패배한 선거'''. 이 선거가 2000년대~2010년대 한국 정치의 중요한 이슈였던 진보(반 보수) 대연합/후보 단일화 문제에서 중요한 사례로 다뤄지는 것 역시 이 때문이다. 진보정당 지지자 중에서는 <보수정당(당시 한나라당. 이후 새누리당)이 유리한 국면을 극복하기 위해 민주당과 진보정당이 후보단일화 등을 통해 연합하자>는 주장 자체에는 상당히 공감하면서도 "민주당 및 그 지지자들이 자신들 스스로 지지기반을 확충할 생각은 하지 않고 만만한 진보정당에게만 표를 내놓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냐" 고 의심하여 반대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5대 지선에서 서울시장 선거 패배와 그 책임을 노회찬(및 진보정당 지지자들)에게 돌리는 일부 민주당 지지자들의 모습이 그러한 나쁜 인상을 굳어지게 만들었다는 것.[24] 김종철 후보가 현재 정의당 소속이며 정의당 입당 뒤에 노회찬 의원의 비서실장을 맡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아이러니하다....[25] 결론적으로는, 정의당의 노회찬 대신 더민주의 이동학이 나와 3파전이 되었다. 정의당에서는 주희준 후보가 예비등록을 하긴 하였으나, 당선가능성은 굉장히 낮다고 평가받았다. 참고로 이 시기 노회찬 의원은 범야권후보면서 자기 지역구에 출마한 안철수에게 섭섭함을 토로하기도 했다.[26] (구)통합진보당, (현)무소속. 19대 총선에는 48%로 석패하였다.[27] 단일화 두 번과 본선에서까지 모두 승리한 것이다.[28] 훗날 유시민썰전에서 프랑스 축구선수를 말했다고 드립을 쳤다.[29] 박 특검보가 언급한 특정 정치인은 노회찬 의원을 지칭한다.[30] 공직선거법, 정치자금법, 정당법과 동시기에 개정[31] 정치자금법 제11조(후원인의 기부한도 등)[32] 대통령 선거의 경우 후원자는 개별 후보자에게 1000만 원까지 후원 가능, 국회의원 선거의 경우 개별 후보자에게 500만 원까지 후원 가능[33] 국회의원·국회의원후보자등 및 당대표경선후보자등의 후원회는 각각 1억 5천만 원(후원회지정권자가 동일인인 국회의원후보자등후원회는 합하여 1억5천만원)을 후원받을 수 있다.더불어 경우에 따라서 선거가 있는해에는 정치자금법 제13조(연간 모금·기부한도액에 관한 특례)에 의하여 연간 모금·기부한도액의 2배를 모금·기부할 수 있다. [34] 원내 정당에 경우에는 합법적으로 국고에서 정당에 선거자금을 지원하고 있으며, 선거에서 일정 득표율 이상 지지를 얻으면 후보자의 선거비용 전액 혹은 반액을 국고에서 보전해준다.[35] 헌법 제 43조 국회의원의 겸직금지[36] 국회법 제 25조 품위유지의 의무[37] 선거에 출마할지 출마하지 않을지 확실치 않는 상황에서 정치후원금을 허용한다면, 정치후원금의 국고보조와 후원금 세액공제등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38] 후보자 등록 기한인 2016년 3월 24일, 25일 이 후에 받았다면 노회찬 전 의원의 당시 신분은 예비후보자가 아닌 후보자이다.[39] 속보를 내던 일부 방송사가 처음엔 노 의원 자택으로 알렸으나, 곧 모친과 남동생이 거주 중인 아파트로 정정했다. 노회찬의 생전 거주지는 노원구 상계동. 노회찬은 사망하기 전날 자택에 잠깐 들러 부인에게 '어머니를 뵙고 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외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아파트는 2007년 동호공고 폐교 시도 사건으로도 유명한 곳이기도 하다.[40] "대한민국 대통령이 보낸 조화도 있고, 대한민국 국회의원도 있고, 기업인도 있고, 청소부도 있고, 장애인도 있고. 노인도 있고, 어린아이도 있고...이런 장례식은 처음 보는 것 같다."고 말하는 기자도 있었다.#[41] 2018년 12월 4일 추서[42] 이때 노회찬은 구속된 상태였다.[43] 구속에 의해 활동을 하지 못하는 상태였으나 창준위가 흡수되면서 일시적으로 민중당 소속이 되었다.[44] 민주당과 신설 합당[45] 2008.2.11 의원직 상실 (민주노동당 탈당에 따른 자동상실)[46] 2012년 진보정의당으로 당적변경, 2013년 2월 의원직 상실[47] 전임자 정몽준 서울특별시장 출마로 인해 사퇴.[48] 2018.07.23 사망으로 궐위.[49] 17대 총선(비례대표)은 민주노동당의 신당권파인 NLPDR과의 대북관 차이로 탈당하며 의원직을 자동상실하였고, 19대 총선(노원구 병)은 삼성 X파일 사건으로 의원직을 상실하였으며, 20대 총선(창원시 성산구)은 특검이 자신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관련 수사를 진행하자 스스로 생을 마감하며 4년 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채운 적이 한번도 없다.[50] 심상정도 강성 세력으로부터 진보정당들을 우경화시켰다고 평가받는 마당에 그보다 우측에 있다고 평가받는 노회찬은 말할 필요도 없다. 노회찬은 대중지향적인 성향의 참여계와 발맞춤을 같이 하는 경우가 많을 정도로 온건한 스타일이라는 것. 심지어 그의 벗이 자유한국당에도 있을 정도로 발이 넓었다.[51] 실제로 홍준표는 한나라당 국회의원 시절 노회찬과 토론에서 붙은 적이 있었는데 토론에서 한 번 맞부딪혀 보고는 노회찬의 언변을 인정했다. 여담이긴 하지만, KBS의 방송을 찾아보면 제17대 대통령 선거 직전에 노회찬과 유시민, 홍준표가 술자리에서 만나서 농담을 주고 받은 적이 있었는데, 동영상도 찾아볼 수 있다.[52] 이는 팟캐 나가서 대놓고 "남성들은 게임만 한다."고 성차별적인 발언을 했다가 엄청난 욕을 먹던 유시민도 마찬가지의 경우이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유시민은 정의당 당원이였었다.[53] 비록 노회찬 본인에게는 <82년생 김지영> 책이 최고의 책이라고 생각할진 몰라도, 그건 어디까지나 페미니스트들 생각이고 상업적으로나 성공했지, 주요 구매자가 2~30대 여성에 편중되어 있는 데다, '여성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최악의 상황을 다 한 인물에게 때려박아놨다.'는 책을 본 사람들이 내릴 수 있는 부정평가가 있을 정도로 호불호가 갈리는 책이다. 아니, 부정평가가 더 많다고 보는게 옳을 것이다. 맘카페82cook 같은 기혼 여성들이 더 많은 커뮤니티 등지에서는 "공감 못 하겠어요. 여성이라는 이유로 받는 혜택이 더 많은데"라고 의견을 교환할 정도로 부정평가가 훨씬 더 많을 정도였다. 게다가 여성전용도 문제가 많은게, 아산 트렁크 살인사건이 이 여성전용 때문에 일어났다.[54] 징병제가 남성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에 나온 말.[55] 당장, 성적자기결정권을 침해하거나 유죄추정 논란, 악용 우려 등 여러 문제 소지가 매우 심한 것 때문에 수면 밑으로 들어갔던 비동의 강간죄를 수면 위로 다시 끌어올린 정의당 류호정 의원만 해도, 게임 유저들 상대로 트롤링을 끌은 걸로 낙인찍혔다. 이번 총선에서 젊은 남성들의 지지를 꽤 받기 때문에(20대 남성에게도 1위를 기록했고, 60대 이상에서는 백중열세였다.) 더불어민주당 조차 비동의간음죄가 당론이여도 크게 언급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56] 정의당은 심상정과 노회찬, 두 스타 정치인의 이름값에 기대어 버티던 정당이기 때문이다. 이정미(정치인) 당대표가 나름 이름값을 올리곤 있다지만 노회찬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편.[57] 사망 전에는 약 6~8%사이었다.[58] 아이러니하게도 자신도 금품수수 때문에 투신했다.[59] 1:18:25경[60] 이명박은 운동권 경력도 있는 데다 이재오와 매우 가까운지라, 개인적으로도 그렇지만 이재오를 통해서도 노회찬, 심상정과의 관계가 비교적 좋았던 듯. 실제로 이명박도 대통령에 당선되자마자 바로 심상정을 찾아가서 인사하기도 했었다.[61] 사실 정치적 성향이 상극이어도 인간적으로는 절친한 경우가 제법 많은데, 일례로 자유한국당 정갑윤 의원과 더불어민주당 강기정 전 의원이 있다.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 때 강기정 의원이 눈물을 쏟으며 임을 위한 행진곡으로 발언을 마무리하자 사회를 보던 정갑윤 부의장이 "나는 강 의원과 매우 각별한 사이다. 다음에 또 국회에서 만났으면 좋겠다. 사랑한다."는 말로 애정을 드러냈을 정도. 평소의 언행을 생각하면 정말 이례적인 상황이다.[62] 진보신당계에 속해 있는 노회찬, 심상정의 경우 예전부터 이명박과 친분이 있었던 점이 있어 이명박이 직접 축하 의사표현을 했던 듯하다. 또한 이명박은 민주노동당과는 인연이 전혀 없었지만, 노회찬, 심상정, 조승수가 민주노동당을 탈당해 만든 진보신당에는 창당 2년차 행사 때에까지 직접 대통령 명의로 된 축하 화환을 보내준 것을 보면 이들과는 다소 친분이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어쩌면 이명박의 동반자라고 불릴 정도로 매우 가까운 사이이며 마찬가지로 노회찬, 심상정과 친분이 있는 이재오의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민주노동당한테는 전혀 우호적이지 않던 이명박이 정작 노회찬과 심상정이 주축이 돼서 창당한 진보신당에는 창당 2년차에까지 화환을 보냈을 정도면 예전부터 노회찬, 심상정과는 사적인 친분도 있었다고 봐야 정확할 것이다.[63] 이 시기의 노회찬은 유명 정치인은 아니었지만 김포공항이 있는 서울 강서구를 지역 기반으로 삼고 활동했으니 어떻게 어떻게 연이 닿았던 것으로 추측된다.[64] 아이폰은 보안적인 측면에서 다른 스마트폰들보다는 낫기 때문에 이명박, 문재인, 박원순 등 많은 정치인들이 애용한다. 다만 갤럭시와 아이폰으로 번갈아 바꿔 가며 쓰는 경우가 많은 타 정치인들과 달리 노회찬은 일관되게 아이폰만 사용한다.[65] 첫 번째 트윗은 지워졌고, 두 번째 트윗은 남아있다.[66] 다만 의외로 조선일보 계열의 경우 민주당계-진보정당계 정치인들과도 친분이 꽤 있는 편이다. 심지어 문재인과도 친분이 있을 정도.[67] 재수를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68] 이 때 권오을과 노회찬 모두 4학년이었다.[69] 이때 당시 권오을은 한나라당 소속 국회의원이었다. 2008년 이래 잇달아 낙천하였고, 노회찬 사망 직전인 2018년 이래로 중도보수 정당인 바른미래당 소속이다.[70] 정봉주는 노원구 출생이고, 노회찬도 현재 창원의 국회의원으로 가기 전까지는 노원 쪽에서 활동을 많이 했는데, 이런 연유인지 정봉주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었던 듯하다. 실제로 노회찬은 문재인 대통령 당선 직후 국회에서 정봉주 사면복권 관련 기자회견 및 청원에 참여했다.[71] 곰치국을 요리했던 2편은 유튜브 영상이 비공개 처리되었고 다만 당게시판에 올린 링크가 남아있다.[72] 다른 예로는 유인촌과 친한 이명박이라던가, 지석진지상렬과 친한 지상욱이 있다.[73] 특히 노회찬이 운영하던 씽크탱크 명칭도 '마들연구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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