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대통령 선거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image]
후보자들의 선거 벽보

1987년 12월 16일
13대 대선

1992년 12월 18일
'''14대 대선'''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선
}}}
'''투표율'''
81.9%▼ 7.3%p
'''선거 결과'''
'''후보'''
'''민주자유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통일국민당''']]
'''정주영'''
'''득표율'''

'''42.0%'''
33.8%
16.3%
'''득표수'''
'''9,977,332'''
8,041,284
3,880,067
'''당선인'''
'''민주자유당'''
'''김영삼'''
1. 개요
2. 배경
3. 과정
4. 결과
4.1. 지역별 결과
4.2. 예측 조사
5. 여담
5.1. 대선 격전 지역

[clearfix]

1. 개요


'''환호하는 김영삼 당선자 내외'''
'''당선 확정을 알리는 기사'''

'''대통령 취임 영상'''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1992년 11월 20일관보에 공고(대통령공고 제129호)[1][2], 1992년 12월 18일에 실시되었으며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득표율 8.2%, 표차 193만 6,048표 차로 꺾고 당선되었다.

2. 배경


1987년 개헌 이후 두번째로 시행된 직선제 대통령 선거이자 제6공화국이후 실시된 최초의 선거이다. 1990년 3당 합당을 거쳐 비대해진 거대 여당을 이끄는 김영삼통합 야당을 이끄는 김대중이 경쟁하였다. 특이한 점은 1960년대부터 줄곧 보여왔던 여당군인 출신 후보가 사라지고 순수 민간인 출신 후보끼리 벌인 대결이라는 것이다. 즉,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면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거대 여당과 제1야당과의 대결이었다.
한편, 정주영은 현대그룹의 재력을 바탕으로 통일국민당을 결성, 대선에 앞선 14대 총선에서 31석을 획득하며 제3당으로 부상했다. 마지막으로 꼬마 민주당 출신의 정치인 박찬종 역시 신정치개혁당 깃발 아래 출마하게 된다.

3. 과정



[image]
각 정당의 마스코트. 왼쪽부터 신정당의 종돌이, 국민당의 호돌이, 민주당의 토끼와 거북이, 민자당의 곰돌이.
당초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자당의 의석수가 크게 줄어들어 김영삼의 입지에 큰 타격이 온 상태였으나, 민자당내에서 김영삼을 위협하는 대권주자가 없어서 역으로 노태우를 압박하여 당권을 장악하였고, 결국 대통령 후보가 되는데에 성공했다.
제13대 대통령 선거가 각 후보의 지역을 기반으로 4개로 나눠진 모양인데 반해, 제14대 대통령 선거는 대체로 영남호남의 대결구도였다. 김영삼 후보의 지지기반은 3당 합당으로 인해 전통적 지지기반이었던 부산직할시경상남도(PK)에서 대구직할시경상북도(TK)까지 연고범위가 넓어졌다. 김대중 후보는 지지기반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한편 정주영은 자신의 연고지인 강원도와 더불어 충청도에서 지지를 보탰다.[3]
'신한국 창조'를 기치로 내세운 김영삼 후보 진영의 광고. '상도동의 새벽' 광고
'금요일엔 바꿉시다'를 기치로 내세운 김대중 후보 진영의 광고
'경제 대통령, 통일 대통령'을 기치로 내세운 정주영 후보 진영의 광고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1991년)김대중 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 민주자유당(현재 국민의힘) 친 노태우성향을 비판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미 30년전인 1992년 대선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후보 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강조
예전 선거에 비해 선거 기간 중 북한의 도발 등의 큰 사건은 없었지만, 이 때 지금도 지역감정의 악사례로 자주 회자되는 초원복집 사건이 있다. 해당항목 참조. 또한 민자당 측에서는 끊임없이 김대중 후보에게 용공론을 펼쳤고, 민주당 측에서는 김영삼 후보의 3당 합당을 비난하는 등 네거티브 선거 양상이 짙었다. 당시 여론조사를 보면 선거운동기간 내내 의외로 김영삼과 김대중이 초접전을 벌이고 정주영과 박찬종이 3-4위를 다투던 구도였지만 부동층이 위낙에 많아 선거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예측하기 힘든 상황이었는데 초원복집 사건의 역풍으로 영남권의 결집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면서 김영삼 후보가 김대중 후보를 8.2% 차이로 여유있게 제치고 당선되었다.
[image]
다음날 오전 8시 5분, 개표 92.7% 상황에서 당선이 확정되었다.
한편, 남장 정치인으로 유명해진 김옥선도 '무공약이 공약'을 내세우며 출마했다. 지키지 않을 바에는 안 하는게 낫다는 취지. 사실 정치적 경력으로 볼 때 "황당한 후보, 황당한 대선 공약"이라고 까긴 보기 어렵지만 결국 입에 오르내려지는 단골 소재가 되고 있다(...) 결국 김 후보는 0.4% 득표에 그쳐 6위로 낙선했다. 심지어 자신의 연고지이자 과거 지역구였던 충청남도 서천군에서조차 처참히 발렸다(...) 이미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무소속으로 3위 낙선했던 상태.

4. 결과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기호'''
'''후보명'''
'''정당'''
'''득표수'''
'''득표율'''
'''순위'''
'''당선여부'''
1
'''김영삼'''
''' '''
'''9,977,332'''
'''42.0%'''
'''1'''
'''당선'''
2
김대중

8,041,284
33.8%
2
낙선
3
정주영

3,880,067
16.3%
3
낙선



-
-
-
자격 반납
5
박찬종

1,516,047
6.4%
4
낙선
6
이병호[4]

35,739
0.2%
7
낙선
7
김옥선[5]

86,292
0.4%
6
낙선
8
백기완

238,648
1.0%
5
낙선
선거인수
29,422,658
투표수
24,095,170
무효표수
319,761
투표율
81.9%[6]

4.1. 지역별 결과


[image]
[7]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지역
'''민주자유당
김영삼'''
민주당
김대중
통일국민당
정주영
신정치개혁당
박찬종
전국
'''9,977,332
(42.0%)'''
8,041,284
(33.8%)
3,880,067
(16.3%)
1,516,047
(6.4%)
서울
2,167,298
(36.4%)
'''2,246,636
(37.7%)'''
1,070,629
(18.0%)
381,535
(6.4%)
부산
'''1,551,473
(73.3%)'''
265,055
(12.5%)
133,907
(6.3%)
139,004
(6.6%)
대구
'''690,245
(59.6%)'''
90,641
(7.8%)
224,642
(19.4%)
'''136,037
(11.7%)'''
인천
'''397,361
(37.3%)'''
338,538
(31.7%)
228,505
(21.4%)
84,211
(7.9%)
광주
14,504
(2.1%)
'''652,337
(95.8%)'''
8,085
(1.2%)
2,827
(0.4%)
대전
'''202,137
(35.2%)'''
165,067
(28.7%)
133,646
(23.3%)
64,526
(11.2%)
경기
'''1,254,025
(36.3%)'''
1,103,498
(32.0%)
798,356
(23.1%)
239,140
(6.9%)
강원
'''340,528
(41.5%)'''
127,265
(15.5%)
'''279,610
(34.1%)'''
56,199
(6.9%)
충남
'''351,789
(36.9%)'''
271,921
(28.5%)
240,400
(25.2%)
64,117
(6.7%)
충북
'''281,678
(38.3%)'''
191,743
(26.0%)
175,767
(23.9%)
68,900
(9.4%)
경남
'''1,514,043
(72.3%)'''
193,373
(9.2%)
241,135
(11.5%)
115,086
(5.5%)
경북
'''991,424
(64.7%)'''
147,440
(9.6%)
240,646
(15.7%)
124,858
(8.2%)
전남
53,360
(4.2%)
'''1,170,398
(92.2%)'''
26,686
(2.1%)
7,210
(0.6%)
전북
63,175
(5.7%)
'''991,483
(89.1%)'''
35,923
(3.2%)
9,320
(0.8%)
제주
'''104,292
(40.0%)'''
85,889
(32.9%)
42,130
(16.1%)
23,077
(8.8%)
호남 지역에서는 김대중 후보가 압도적인 표차로 승리했으며, 서울을 제외한 나머지 지역에서는 김영삼 후보가 승리했다.
서울특별시의 경우, 근소한 표차로 김대중이 이긴 것은 맞지만, 서울의 각 자치구별로는 표심이 매우 엇갈렸다. 중산층 이상이 많이 거주하는 강남구, 서초구, 송파구, 강동구용산구 등에서는 김영삼이 넉넉한 표차로 앞섰고, 호남 출신 노동자와 저소득층이 많이 거주하는 금천구, 관악구, 구로구 등 서울 서남부 지역과 변두리 권역들은 김대중에게 몰표를 던졌다. 그러나 이 때 당시는 강서구, 양천구가 김영삼의 손을 들어줬고 또한 정주영 후보와 박찬종 후보의 표차를 합치면 서울에서도 보수진영이 우세했다.

이는 20년 뒤 제18대 대통령 선거의 지역별 결과와 '''정확히 일치한다.''' 광역자치단체 표심 뿐만 아니라 시, 군, 구 등 기초자치단체들의 표심 또한 상당히 유사하다. 두 선거 모두 보수정당민주당계 정당의 양강 구도를 띤 것이 두 선거의 지역별 결과가 유사하게 나온 것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8] 즉, 양측 진영에서 여러 후보가 나와 지지층이 분열되고, 이로 인해 지역별 1위 후보가 뒤바뀌는 일이 14대 대선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18대 대선의 지역별 결과를 보고 싶으면 해당 항목 참고.

4.2. 예측 조사


'''한국갤럽 92년 대선 예측조사'''
출처
'''김영삼'''
'''김대중'''
'''정주영'''
'''박찬종'''
'''기타 후보'''
전체
'''39.5%'''
31.1%
15.7%
12.4%
1.2%
실제 결과보다
'''+2.5%p '''
'''+2.7%p '''
'''-0.6%p'''
'''+6.0%p'''
-
세대별
20대
22.2%
'''37.3%'''
20.7%
16.8%
3.0%
30대
'''31.5%'''
26.4%
22.4%
18.8%
0.9%
40대
'''49.0%'''
30.0%
10.5%
9.7%
0.7%
50대 이상
'''55.9%'''
30.9%
8.5%
4.4%
0.3%
성별
남성
'''34.2%'''
32.1%
17.8%
14.4%
1.5%
여성
'''44.5%'''
30.2%
13.8%
10.5%
1.0%
권역별
서울
31.3%
'''32.4%'''
19.0%
16.1%
1.3%
인천/경기
'''35.6%'''
28.2%
19.9%
14.8%
1.5%
강원
'''38.8%'''
22.4%
24.3%
14.5%
0.0%
대전/충청
'''39.5%'''
26.3%
21.5%
11.7%
1.0%
광주/전라
3.2%
'''88.1%'''
1.7%
5.7%
1.3%
대구/경북
'''66.4%'''
5.0%
17.7%
9.4%
1.4%
부산/경남
'''64.1%'''
12.3%
10.2%
12.4%
1.0%
제주
'''41.7%'''
28.9%
16.7%
10.6%
2.2%
학력별
초졸 이하
'''56.8%'''
31.8%
6.6%
4.5%
0.3%
중졸
'''47.8%'''
31.7%
11.7%
8.3%
0.5%
고졸
30.8%
'''31.5%'''
21.0%
15.6%
1.2%
대재 이상
26.7%
'''29.0%'''
20.8%
20.2%
3.3%
직업별
농/임/어업
'''44.0%'''
42.5%
7.2%
5.9%
0.3%
자영업
'''37.6%'''
27.5%
19.6%
14.8%
0.5%
블루칼라
'''33.5%'''
31.8%
18.7%
15.2%
0.8%
화이트칼라
27.6%
'''30.2%'''
24.1%
16.4%
1.7%
가정주부
'''47.8%'''
26.6%
14.2%
10.3%
1.1%
학생
11.0%
'''37.2%'''
14.7%
29.8%
7.3%
무직/기타
'''41.9%'''
30.3%
14.2%
11.4%
2.2%
87년대선투표별
노태우
'''55.4%'''
17.5%
17.5%
8.9%
0.7%
김영삼
'''52.0%'''
16.0%
14.5%
16.1%
1.3%
김대중
10.3%
'''68.2%'''
10.1%
10.4%
0.9%
김종필
'''38.1%'''
16.4%
30.2%
13.4%
1.9%

5. 여담


  • 영화 내가 살인범이다에서는 이 선거의 개표방송이 결정적인 증거가 되어 뜻밖의 반전이 이루어지게 된다. 자세한 내용은 해당 항목 참조 바람.
  • 부산경남의 보수정당 후보 득표율이 대구경북의 보수정당 득표율보다 높은 유일한 대선이기도 한데, 이는 YS의 지역기반이 부산경남이었기 때문이다. YS는 당시 부산경남에서 약 73%의 득표율을 보였는데, 이후로도 이 지역에서 이보다 높은 득표율을 기록한 후보는 없다. 반면 대구경북에서 YS의 득표율은 약 50%-60% 정도에 그쳤고 이는 민주화 이후 대선에서 보수정당 후보의 TK 득표율 중 두번째로 낮은 수이다. 이는 민정계 - 민주계 의원과의 권력 다툼이 벌어지고 YS가 민자당을 장악해가면서 대구경북지역에서의 反 YS 정서가 커져 정주영이 약 10%-20%가량 잠식했기 때문이다.
  • 1992년 대선에서 민주당(1991년)김대중후보는 농촌 유권자의 친 민자당(현재 미래통합당) 친 노태우성향을 비난하며 유권자의 책임을 지적했다. 이로 인해 그의 발언에 수긍하지 않는 청중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미 30년전인 1992년 대선때부터 계급배반투표의 논리가 공식적으로 쓰이기 시작했던 것이다.후보가 유세장서 유권자 비판 1992년 대선 김대중후보 표 잘못찍어 제 발등도 찍었다, 민주당 유권자 책임강조
  • 2017년 1차 경찰공무원 채용시험의 한국사 과목에서 이 대선이 나왔다. 정확히는 1980년대 후반~1990년대 초반의 한국사적 사건들을 나열하고 순서를 맞추는 문제인데 '제14대 대통령 선거'라고 나와서 이게 몇년도 대선인지 모르면 맞출 수 없는 문제였다.
  • 북한은 대선이 끝나자 북한 당 기관지 로동신문을 통해 ‘예상대로의 남조선 대통령선거’라는 논평에서 처음으로 김영삼후보의 대통령 당선에 대해 언급했다. 해외통신에 따르면 로동신문 논평은 미국의 지배와 간섭이 지속되고 있는 남조선에서는 다른 결과를 기대할 수 없으며 결국 미국이 원하는 대로 6공 민자당 정권의 연장이라는 구태의연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분석했다. 이 신문은 이런 전제에 따라 새로운 정치적 변혁을 요구하는 남조선 인민들의 염원과는 배치되는 결과라고 비난했다. 로동신문 논평은 또 민자당과 현 집권 당국이 거국 중립내각 등 인민 대중의 요구를 억눌러서 진정한 인사가 선거에 반영될 수 없었고 새 정권이 문민정권도 아니라고 못 박았다. 이 같은 북한의 태도를 5년전 당시 노태우 후보의 대통령 당선 직후와 비교해 보면 비난의 기조는 변함이 없었다. [9]

5.1. 대선 격전 지역


각 지방을 대표하는 맹주 간 대결답게 지역구도가 확고했지만 이런 지역주의에서 비교적 자유로운 수도권 지역과 충청도 지방에서는 김영삼, 김대중 양김이 치열하게 격돌했다. 시, 군, 구 단위에서 두 후보 간 표 차가 1,000표 미만이었던 지역을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 경기도 안양시 만안구: 43표 차 김영삼 승
  • 서울특별시 은평구 을: 107표 차 김영삼 승
  • 인천직할시 북구 갑[10]: 132표 차 김대중 승
  • 서울특별시 강서구 갑: 222표 차 김대중 승
  • 경기도 시흥시: 302표 차 김영삼 승
  • 서울특별시 노원구 갑: 311표 차 김영삼 승
  • 경기도 군포시: 517표 차 김대중 승
  • 서울특별시 중랑구 을: 755표 차 김영삼 승
  • 경기도 의왕시: 757표 차 김영삼 승
  • 충청남도 서산군: 789표 차 김영삼 승[11]
  • 충청북도 진천군: 886표 차 김대중 승
  • 제주도 서귀포시: 913표 차 김대중 승
  • 서울특별시 동작구 갑: 965표 차 김대중 승
이상 13곳이 이번 대선 격전지였으며 이 중 7곳에서 김영삼 후보가 6곳에서 김대중 후보가 승리하며 팽팽히 맞섰지만 결국 지역주의 구도에서 인구가 더 많은 영남을 먹은 김영삼 후보가 인구가 적은 호남을 먹은 김대중 후보를 앞서게 된 것으로 보인다. 안양시 만안구에서 기록한 표차는 10년 뒤인 2002년에 치른 16대 대선 때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타이 기록을 세웠다.

[1] [image] [2] 참고로 대한민국 제6공화국 체제에서 관보에 공고된 마지막 대통령 선거가 될 뻔 했는데, 그 이유는 이후에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대통령 선거'의 시행이 법정화가 되어 굳이 공고를 할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2017년 3월 10일 제18대 대통령 박근혜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에 의해 파면 당하고, 이후에 시행한 궐위로 인한 선거의 날짜를 공고하기 위해 황교안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이 같은 해 3월 15일에 대통령 선거를 25년 만에 공고하였다(대통령공고 제271호)[3] 하지만, 정주영 후보가 강원과 충청에서 상대적으로 강세였다는 뜻이지, 강원과 충청의 1위는 김영삼이었다. 선거 당시에는 JP가 민주자유당에서 나와 자유민주연합을 창당하기 전이라 충청도 지역 정당은 없었다. 다만 통일국민당은 훗날 신정치개혁당과 합쳐져 신민당이 되었다가 이후 자유민주연합으로 흡수되었다.[4] 변호사 출신의 후보로 15대 대선에도 도전했으나 무산되었다. 2016년 별세.[5] 사상 두 번째 여성 대선후보. 다만 지난 대선 당시 홍숙자 후보의 경우는 선거 이전에 등록무효처리 되었으며, 실제 투표로 이어진 경우는 이때가 처음이다.[6] 지역별 투표율은 광주가 89.1%로 1위. 가장 낮은곳도 78%가 나왔을 정도로 상당히 높았다.[7] 행정구역은 현재의 행정구역 기준이며, 1992년 당시와는 일치하지 않다. 예를 들어 도농복합시가 출범하기 전이라든가.[8] 물론 정주영 후보가 16%라는 상당한 득표율을 올리긴 했지만 어느 한 쪽의 진영에 속한다기보다는 성공신화를 가진 기업인 출신으로서 기존 정치를 불신하는 중도층의 지지를 받은 것에 가까웠다. [9] 1992년 대선결과에 대한 북한의 노동신문 논평북한, 대통령선거 결과 비난[10] 현재의 인천광역시 부평구 부평동, 부개동, 일신동, 십정동[11] 다만 정작 이 곳의 1위는 정주영 후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