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대 대통령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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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한 선거로 2002년 12월 19일에 실시되어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약 57만980표 차라는 근소한 차이로 꺾고 당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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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대 대선 만 2년 전의 2000년 연말 한겨레21 커버스토리 기사. 출처 경선 전 지지율은 2%에 불과했던 노무현은 대선 본선에서는 당시 최다 득표 수를 경신하고 당선되는 '''희대의 역전승'''을 거두며 제16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된다.
여담으로, 이 선거는 1987년 민주화 이래 처음으로 3김씨 중 어느 누구도 출마하지 않은 첫 대통령 선거였다. 김영삼 전 대통령과 김대중 전 대통령은 대통령 단임제에 따라 출마를 할 수 없었으며, 김종필 전 총리는 2002년 1월 15일 출마 선언을 했으나 이후 "내각제 추진할 후보를 돕겠다"며 대선 불참으로 입장을 선회하였다.
2. 배경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여당이 된 새정치국민회의는 전국 정당을 목표로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창당했다. 그러나 16대 총선에서 한나라당에게 석패하면서 위기가 찾아왔고, 대선 승리와 정권 재연장도 불확실한 상황이 된다. 당내에서는 이인제가 큰 인기를 얻고 있었다.
야당이 된 한나라당의 경우 16대 총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원내 1정당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고, 당시 한나라당의 총재였던 이회창은 유력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사실 한나라당의 경우 이회창 외에는 거의 대항마가 없을 정도였는데, 대쪽 판사의 이미지와 이미 대선에 한 번 도전했던 경력이 한몫을 하면서 사실상 이회창의 차기 대통령 당선이 기정사실화될 정도였다. 대선 여론 주자에서 40%가 넘는 지지율을 보이며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
3. 과정
3.1. 새천년민주당의 경선
새천년민주당은 지금까지 당원들만이 참여했던 대통령선거 후보경선을 최초로 "국민 참여 경선" 형식으로 바꾸었다. 당원 : 일반국민의 비율을 50:50으로 하여 2002년 3~4월 동안 각 광역자치단체를 순회하여 선거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른바 '''각본없는 16부작 정치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간의 주목을 끈다.
후보자
- 이인제: 경기도지사로 재임하다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패배한 뒤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뒤 국민신당과 새정치국민회의의 통합으로 김대중 정권에 합류했다.[1] 16대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제1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수도권과 충청권, 강원권 승리로 당시까지 민주당계 정당 역사상 최다의석을 확보하며 민주당의 전국정당화를 이끌었다. "피닉제"라는 개그 요소로 전락한 훗날과는 위상이 전혀 달랐으며, 이인제 대세론을 이끄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본선에서 겨룰 강력한 상대인 한나라당 이회창에게 여론조사 지지율이 계속 밀리던 상태였기 때문에 정권 연장을 희망하는 새천년민주당 지지층 입장에서는 '이 사람으로 정권 연장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일말의 불안감도 있었다.
- 정동영: MBC 앵커 출신으로 인지도가 높았으며, 당시 당내의 소장파였다.
- 김중권: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출신으로 김영삼 집권 이후 정계 은퇴했다가 김대중의 회유로 새천년민주당에 입당, 김대중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맡았다. 당시 노무현과 함께 영남권 후보로 분류되었다.
- 김근태: 노무현과 함께 거의 동등하게 여겨지던 개혁후보였으나 홀로 (다른 후보 대부분이 받은) 정치자금 수수를 양심선언하며 사퇴해버렸다. 김근태는 그 역풍을 맞게 되었지만 이것이 젊은 야권 지지층 사이에 정치개혁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면서 反권노갑, 反이인제 정서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 한화갑: 호남 출신으로, 당시 김대중의 가신 그룹(동교동계)으로 분류되었다. 김근태, 노무현과 연대 가능성이 있었으나 실제적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 노무현: "영남후보론"과 "이인제 정체성 문제"를 들고 이인제 후보를 맹추격했다.
- 유종근: 전북 도지사 출신.
경선 시작 얼마 전쯤부터 여론조사에서 다른 후보들이 이인제 턱밑까지 추격했고, 제주 경선 직전에는 이미 3자 (이인제, 노무현, 한화갑) 구도 혹은 2강 (이인제 노무현) 2중 (한화갑 정동영) 구도로 경선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었다. '이인제 대세론' 주춤, 2강 구도 뚜렷 이 기사에서 소개된 여론조사들은 대체로 이인제가 큰 격차로 1위를 하고 노무현, 한화갑, 정동영 3인이 각각 서로 득표차가 크지 않은 2·3·4위를 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실제 경선 결과에선 한화갑 후보가 이인제 후보를 3표 차이로 제치고 1위를 했다.
첫 경선지역인 제주도에서는 한화갑 175표로 1위를 얻는다. 근소한 차이로 이인제가 172표로 2위를 했고, 노무현과 정동영이 각각 3, 4위를 기록한다. 분명 한화갑 후보는 여론조사에서는 1위를 할 것으로 예측되지 않았는데, 제주도가 전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한화갑의 지역구와 가깝다는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두 번째 지역인 울산광역시에서는 노무현이 1위를 하며 선전을 했고 누적 득표에서도 이인제, 한화갑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선다. 정치적 기반이 영남이었던 노무현이 영남 지역인 울산에서 승리해야 다음 경선 지역이었던 광주에 가서 영남 출신 후보라는 강점을 어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무현 후보는 여기에 신경을 많이 썼다. 같은 영남권 후보였던 김중권 역시 2위로 선전했다. 이 경선이 끝난 직후 김근태, 유종근 후보가 사퇴한다.
세 번째 지역이었던 광주광역시 경선이 최대 분수령이었다. 광주는 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이고 옛날부터 민주당에게 텃밭이었던 지역이기에 광주 경선에서의 승리는 그 상징성이 매우 컸다. 경선 전의 분위기는 광주가 홈그라운드였던 한화갑과 대세론 이인제가 각각 1, 2위를 차지할 것으로 예상됐었고, 누적 득표에서도 이들이 앞서갈 거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 변수가 발생했다. 지금까지의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의 어떤 후보가 나오더라도 상대 진영 후보였던 이회창을 이길 수 없는 것으로 나왔는데, 광주 경선 직전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vs 이회창 양자 구도에서 노무현이 이회창을 앞서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영화 노무현입니다에 따르면 이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한 언론은 문화일보였는데, 광주에는 문화일보가 들어오지 않아서 노사모는 광주까지 내려와서 신문을 직접 시민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뜻밖의 여론조사 결과와 당시 노사모[2] 들의 열성적인 지지 운동에 힘입어 결국 모두의 예상을 깨고 노무현이 1위, 이인제 2위, 한화갑 3위로 기록되며 누적 득표 1위 유지에 성공하게 되는 이변을 연출한다. 광주 경선의 대이변은 노무현 바람, 이른바 '''노풍(盧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광주광역시 민주당 경선 발표 동영상. 노무현의 지지 세력과 기성 민주당의 문화적인 괴리감을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1위라는 대이변을 일으킨 것은 그만큼 노무현에 대한 광주 지역의 기대가 컸기 때문이기도. 실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을 이길 가능성이 큰 것은 물론, '''5공 청문회 때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서 노력해온 행보를 광주시민들이 높게 평가했고, 대권후보로 받아들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네 번째, 다섯 번째 지역이었던 대전광역시와 충청남도에서는 예상대로 충청권 기반의 '''이인제'''가 노무현에 비해 4~5배 많은 득표율(67%, 73.3%)로 1위를 거둠에 따라 누적득표에서도 1위로 노무현을 제치고 크게 앞서나간다. 이로 인해 광주 경선에서 불이 붙었던 노풍이 잠시 주춤하고 이인제 대세론이 다시 탄력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한편 홈그라운드였던 광주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받았던 '''한화갑은 대전 경선 직후 사퇴한다.''' 리틀 DJ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로, 김대중의 비서 출신으로 옆에서만 무려 40년을 같이 지내왔던 인물이다. 김대중과 더불어서 호남의 가장 큰 맹주였던 인물인데, 아무래도 호남의 심장 광주에서의 예상치 못한 패배가 본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여섯 번째 지역 강원도는 대전/충남에서 다시 힘을 받은 이인제 대세론과 위기를 맞은 노풍이 맞붙는 두 번째 분수령이었다. 노무현 입장에서는 충청에 이어 강원 지역까지 이인제에게 질 경우, 호남, 영남 제외 '다른 지역에서의 확장성 부족'이라는 약점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어서 승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경선 직전에 '노무현은 빨갱이'라는 삐라가 살포되었는데, 노무현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인제 측이 벌인 짓이었다. 이에 노사모들은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면서 삐라를 떼어내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는 영화 노무현입니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시기 이인제는 노무현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색깔론을 사용했었다.
결과적으로 630 : 623, 단 7표 차이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한다. 누적 득표 1위는 여전히 이인제였으나 노무현이 따라붙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주춤하던 노풍이 다시 불붙게 되었다.
그리고 강원 경선 직후 노무현과 같은 영남권 후보인 김중권이 사퇴를 선언한다. 이인제 입장에서는 노무현과 같은 영남권 후보인 김중권이 레이스를 계속 해줘야 향후 영남 지역 경선에서 영남표가 분산이 될 텐데 김중권 사퇴로 인해 노무현이 영남표를 독식할 수 있게 된 것이기에 김중권의 사퇴가 결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중권 사퇴 직후 이인제 측은 경남 유세를 취소한 후 칩거에 들어갔는데 "노무현을 밀어주기 위한 플랜이 있는 것 아니냐?"며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탈당 뉘앙스를 간접적으로 내비친다.#. 다만 이후 후보 본인은 탈당 의사를 묻는 질문에 경선완주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영남을 기반으로 한 노무현이 선전을 하면서 노풍이 계속 탄력 받는 구도가 유지되었는데, 경상남도에서 약 4배 차이로 이인제를 크게 앞서며 1위를 기록했고, 정동영의 홈그라운드였던 전라북도에서도 정동영을 꺾으며 1위를 차지한다. 또한 대구광역시에서 노무현은 이인제를 두 배 이상 앞서며 1위를 차지하면서 마침내 기존의 누적 득표 1위였던 이인제를 제치고 1위를 탈환하게 된다.
인천광역시 경선에서 이인제 측은 충청도 출신들이 많이 사는 지역적 특성을 바탕으로 재역전을 노리며 노풍 차단에 나선다. 이 시기는 노무현을 향한 색깔론 공세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는데, 대표적으로 언론 국유화 논란과 장인 좌익활동 논란이 있었다. 경선 토론 당시 이인제는 노무현에게 '급진과격파'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같은 당내 후보에게 색깔론으로 공격하는 막장스러운 모습이었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정치적으로 적대관계나 다름없던 김종필 전 총리가 직접 이인제가 노무현 후보 장인의 좌익 이력으로 색깔론을 이슈화하자 '''"그런 것으로 비방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면서 이인제를 비판했다는 것이다.
게다가 상대 진영 후보였던 이회창을 비롯한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노무현에 대한 색깔론 공세에 앞장선다. 이회창 입장에서 영남이 정치적 기반인 노무현보다 본인과 정치적 기반이 같은 이인제가 본선에 올라오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할 것으로 봤기에 노무현을 공격함으로써 이인제를 도와주려는 측면이 강했다.
노무현은 이런 논란들에 대해 정면 돌파를 택했고, 인천 경선에서 그 유명한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라는 명연설을 선보인다. 정면 돌파가 효과를 발휘했는지 노무현은 이인제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하며 누적 득표 1위를 유지한다.
그리고 11번째 지역인 경상북도에서 노무현은 이인제에게 두 배 차이로 1위를 차지했으나, 12번째 지역 충청북도에서 충청권 기반의 이인제가 노무현에게 두 배 차이의 승리를 거두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했다.
하지만 13번째 지역 전라남도에서 노무현이 약 3배 차이로 1위를 차지하면서 승부에 쐐기를 박아버리자 이인제는 결국 사퇴하게 된다.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경선의 승부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남은 두 후보 노무현, 정동영은 마지막 지역인 부산광역시, 경기도, 서울특별시까지 모두 완주한다. 경기도에서 정동영이 1위를 하는 깜짝 선전을 했다. 사실 이때의 1위는 이미 후보 결정된 김에 완주해 주는 후보한테 한번 1등 시켜주자는 분위기 덕분이기도 했었다. 사실상 패전이 확정된 상황에서도 완주하는 모습이 '원칙을 지킨다'는 모습이 호감을 불러왔고, 비방과 네거티브를 지양하고 정제된 톤으로 비전과 정견을 발표하는 모습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1명 빼고 모두 다 사퇴해서 경선이 중간에 끝나버리면 흥행에도 악영향이고 모양새도 나빠지는데 1명이라도 남아서 끝까지 경선을 완료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준 사람이 많았다.[3]
물론 이전 경선에서 크게 벌어진 표차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부산/서울 경선에서 노무현이 크게 앞섰기에 새천년민주당 경선은 노무현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2002년 4월 27일. 서울 경선 직후 노무현 후보가 공식적으로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이 영상은 후보 수락 연설을 하던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다. 노래 제목은 김지하 시인의 타는 목마름으로. 참고로 2002년의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확정은 대선으로부터 7개월 하고도 20여 일 앞선 시기로서 역대 대선의 주요 정당 대선 후보 선출 시점 중 가장 빠른 것이기도 하다.
====# 결과 #====
3.2. 한나라당의 경선
한나라당에서도 새천년민주당과 같은 국민 참여 경선제도를 도입했다.
후보
- 이회창
- 최병렬: 마지막 관선 서울특별시장이자 4선 국회의원으로, 이회창의 정계은퇴 이후 한나라당 대표를 맡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사태 정국을 이끌었다. 물론 한나라당이 탄핵 역풍을 맞아 망할 위기에 처하자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공천도 못 받고 쫓겨난다(...)
- 이상희: 변리사 출신 4선 국회의원으로 노태우~김대중 정부에서 과학기술처(현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국가과학기술자문위원장 등 과학계에 몸담았다. 대선 출마 선언 때도 '과학경제 대통령'을 내걸었을 정도.
- 이부영: 꼬마 민주당 출신으로 한나라당 창당 당시 개혁 성향 그룹으로서 참가했다. 국가보안법을 반대했으며 부총재를 역임했으나 결국 2003년 열린우리당 창당에 합류하여 현재까지 쭉 민주당계 정당 소속인 인물.
한편 1998년 재보궐 선거로 정계에 입문한 박근혜 당시 의원은 2월 28일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4월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고 독자행보 혹은 이인제-정몽준-김종필 등과의 연대를 모색했으나 #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박근혜 의원은 한국미래연합이 2002년 6월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2002년 어록
3.3. 선거 구도
각 당에서 후보가 결정된 이후로 한동안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압도할 것으로 보였었지만 얼마 안 가 YS시계 사건, 김홍업 사건으로 지지율이 상당 부분 떨어져서 지지율 차이가 좁혀졌고 설상가상으로 선거일이 '''2002년 월드컵 한국 대 포르투갈전 하루 앞인''' 6월 13일에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투표율이 낮게 나오면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압승하여[4] 노무현 후보에게 타격을 주었고, 지방선거 이후로 지지율이 역전되어 한 동안 이회창이 다시 앞서는 형국이 되었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영남에서 광역단체장 한 석 이상 확보하지 못하면 당에 재신임을 묻는다고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영남에서 새천년민주당은 한 석도 얻지 못했지만 재신임을 받고 그대로 대선을 진행하였다.[5]
한편, 정몽준 후보가 2002 월드컵 유치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선 주자로 떠오르면서 대선 구도는 이회창 후보가 가장 앞서나가는 형태가 되었고 노무현 후보는 3위로 쳐졌다. 그리고 8.8 재보선에서도 새천년민주당이 패배하면서 이회창이 승기를 굳히는가 싶었지만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이 또 불거졌다. 이미 15대 대선에서 한 번 등장했던 문제였지만 징병 국가인 대한민국의 특성상 그 여파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선거 이후 '아들 둘 중 하나만 군대에 갔어도 대통령은 이회창이었을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그래서 대선 이후 한나라당의 최병렬 의원은 인터뷰에서 "병풍으로 인해서 부재자 투표, 즉 현역 병사들의 표심이 노무현 후보로 쏠렸다"라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 씨의 과거 이력과 수사관 자격 사칭[6] 혐의를 가지고 방어를 시도했지만 이회창 후보의 청렴한 이미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었다.[7] 게다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노사모[8] 등의 영향력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다시 지지율이 오르기 시작했다.
대선은 1강 2중 구도가 되었지만 여론조사에서 정몽준-노무현 양자 단일화 시에는 이회창을 꺾는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단일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민주당 주류의 김민석이 단일화를 성사시키고 당으로 돌아오겠다며 정몽준 캠프를 지원하러 갔고 당내 상당수의 세력은 후단협을 결성하면서 여권의 분열을 초래하고 단일화를 압박하기에 이른다.
구도는 겉으로 보기에는 1강 2중으로 정몽준과 노무현이 팽팽한 것처럼 표현되었으나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대세 상승 중이었기 때문에 후단협 세력은 사실상 당내 후보를 비토하는 정몽준 지지세력이나 다름없었고 노무현의 당내 입지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또한 단일화 여론조사에서도 지속적으로 정몽준이 노무현에 근소우위를 보임에 따라 상황은 여러모로 정몽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당내의 차가운 외면이 대중들에게는 절차적으로 정당하게 선출된 공식 대선후보를 부당하게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노무현의 지지율도 반등하게 된다. 단일화 협상이 진통 끝에 포장마차에서 정몽준과 노무현이 소주 러브샷을 나누는 상징적인 제스쳐 이후에 3개 기관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단일화를 합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고 공식 후보등록일에 임박하여 후보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가 진행이 된다. 단일화 여론조사 중 일정 수준의 이회창 지지율이 나오지 않은 것은 한나라당 지지자의 역선택이라고 판단하여 배제하기로 한 사항까지 합의가 되었고,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정몽준을 앞서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노무현이 단일후보가 된다.
정몽준 측은 고심 끝에 결과를 승복하기로 하였으며 노무현의 서울 유세현장에 동행한다. 그러다 선거전날 명동 유세가 발단이 되어 정몽준은 노무현 지지철회 및 단일화 파기를 발표한다. 당시에는 정몽준 측이 지지철회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논란이 되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정몽준 측이 내각 구성에 일정한 지분을 요구했는데 노 캠프 측에서 확답이 없어 불만이 쌓이던 중 선거운동 마지막날 명동 유세에서 서갑원의 제안으로 추미애, 정동영 등이 유세차량 단상에 올랐고 노무현이 이들을 차기, 차차기 대권주자로 소개한데다가 정몽준을 향해 재벌개혁에 동참할 뜻이 있냐고 물으면서 정몽준 측의 심사가 완전히 뒤틀려버렸다는 것.
정몽준 측에서는 유세차량 내에서 양자만이 유세하기로 한 단일화 합의사항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민주당 측이 선거운동 마지막 날이기에 안일하게 생각해서 일을 벌였고 정몽준은 유세 후 이어진 회식에서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며 결심을 굳히고 쾌속으로 지지철회를 발표하게 된다.
비록, 선거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지만 결과적으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오전에는 한나라당 지지층이 우세했으나 오후의 인터넷 및 핸드폰 문자 투표독려에 따라 젊은 층의 물량공세(...)로 전세를 뒤집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선거관련자에게 전설로 회자되기도 한다. 영국의 언론 가디언은 이 점에 주목, 당선 소식의 제목을 "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 로그인했다.)으로 뽑았다. 노 대통령은 당시 출구조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축하를 받은 직후 "확정되면 깨워주게"하고는 한숨 푹 잤다는 패기를 보였다.(...)
사실 대선 하루 전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가 어떤 영향을 불러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민주당 지지자들의 결집과 무당파층의 표를 불러와서 노 후보가 승리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왜냐하면 지지 철회 소식을 들은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의 집앞으로 찾아가 문전박대와도 같은 상황을 당하는 장면이 대선 전날 방송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당시 이 장면에 울컥해하거나 안쓰러워서 무당파층도 노무현 찍으러 투표장에 갔단 사람들도 있었다.[9]
이 한 번의 판단미스로 인해 정몽준은 배신자로 찍혀버리고,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는 와장창 박살난다. '왜 배신했는가'에 대해서도 종로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정동영 의원을 밀어주는 듯한 발언과 모양새에 불편함을 느끼고 삐쳐서라고 밝혀서 소인배 이미지까지 추가해버렸다. 그리고 훗날의 버스비 70원 발언으로 서민의 아픔을 알리 없는 상속재벌로 인식이 박혀버리며 그나마 남은 이미지마저 완전히 날아가고...
지지 철회가 노 후보 쪽에 악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판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선거막판(공표금지기간)[10] 여론조사를 보면 이 기간 내내 노 후보가 이 후보를 적게는 5%, 많게는 10% 가까이 앞서고 있었는데(권영길의 지지율은 약 5% 내외였다) 실제 선거결과는 2.3% 차이에 불과했다. 즉 정몽준을 지지했던 중도 표가 지지 철회로 이회창으로 옮겨가 표차가 줄긴 했지만 그것이 대세를 바꿀 정도는 되지 못하였다는 것.(물론 권영길에서 노무현으로 옮겨온 표도 약간은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선거에서 지역구도는 대체로 완화된 대신에 세대구도가 강화되었다.[11] 또한 이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약 100만표(3.9%)를 득표하면서 3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조봉암 이후 대한민국의 진보정당의 대선후보가 얻은 가장 높은 득표수였다. 당시 3자 구도로 이루어진 대선후보 TV토론에서 권영길 후보는 그 유명한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기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대선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노동당은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3.2%의 정당득표율로 총 10석을 획득하면서 오랜 원내진출의 숙원을 이루게 된다.
3.4. 개표 과정
2002년 16대 대선 다큐 '그날'
개표 과정이 하나의 '''드라마'''라고 불릴 정도로 뜨거웠다.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출구조사에서 약간(KBS-미디어리서치 노무현 49.1% 이회창 46.8%, MBC-코리아 리서치 노무현 48.4%, 이회창 46.9% SBS-TN소프레스 노무현 48.2% 이회창 46.7%) 앞선 걸로 나왔다. KBS 출구조사에 따르면, 오전까지는 이회창 후보가 1~2%p 차이로 근소하게 우세했지만, 오후 1시 이후부터는 전세가 역전되어 노무현 후보가 계속 1~2%p 차이로 근소하게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부산광역시 동래구를 시작으로 개표가 시작되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여유있게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개표 30%가 될 때까지 한나라당 측은 환호, 민주당 측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예측과 달리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50%를 넘는 우세를 계속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 즉 수도권 지역의 개표가 시작[12] 된 개표 32% 쯤에 점점 상황의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개표 32~36% 구간에서 '''투표함 하나를 깔 때마다 1위가 뒤바뀌는''' 숨막히는 개표전이 벌어졌다. 그리고 수도권 지역의 개표가 더 빨라진 개표 40%부터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차는 10만표 안팎으로 크지 않았는데,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빨리 표차가 더 벌어지기를 바라고 한나라당에서는 빨리 재역전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피말리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21시 35분, 개표가 57% 진행된 시점에서 두 후보 간 표차가 18만 표를 넘어서자 노무현 후보의 당선 유력이 선언되었다.
노무현 후보가 강세를 보였던 수도권 지역 개표율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인 22시에 전국 개표율 68% 시점에서 두 후보 간 표차가 25만 표에 이르자 노무현 후보의 당선 확실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수도권을 뺀 나머지 지역의 개표가 마무리가 되기 시작한 개표 70%부터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여유있게 따돌리고 앞서나가면서 당선되었다.[13] 실제로,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표차가 수도권에서만 '''72만표'''였다. 최종 개표 결과 노무현 후보가 득표율 2.3%차, 득표수 570,980표차로 이회창 후보를 꺾고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4. 출구조사
한국이 고령화 되기 이전이고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출생한 저출산 세대들이 유권자가 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20대와 30대 유권자가 절반에 가까웠다. 이 선거 이후, 지역구도가 옅어지고 세대구도가 짙어지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5. 결과
5.1. 지역별 결과
[image]
5.2. 대선 격전지역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드라마틱한 선거답게 초박빙 접전 지역이 매우 많았다. 불과 '''수십 표''' 차로 순위가 갈린 곳이 3개나 될 정도다. 격전지역 중 서울특별시 용산구,인천광역시 동구와 남구, 강원도 평창군 정도를 제외하면 경기도, 강원도의 최전방 지역에서 노무현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앞섰고, 그리고 충청권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펀에 속하는 농촌지역에서 노무현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앞서면서 격전 지역이 되었다. 최전방 지역의 경우 2002년 당시 북한과의 화해 분위기로 민주당계 정당에 대한 거부감이 완화되면서 노무현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나마 승리할 수 있었으며 충청권의 경우 수도 이전 공약의 영향으로 노무현 후보가 압승했는데 전통적인 보수강세 지역에서도 접전 끝에 신승했다는 분석이다. 전국 시, 군, 구 단위에서 1, 2위 후보 간 표 차가 1,000표 차 미만인 곳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이 15곳이다.
- 충청북도 단양군 - 43표 차 노무현 승[15]
- 서울특별시 용산구 - 88표 차 노무현 승
-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 90표 차 노무현 승
- 강원도 화천군 - 312표 차 노무현 승
- 강원도 홍천군 - 419표 차 노무현 승
- 강원도 인제군 - 450표 차 노무현 승
- 강원도 양구군 - 556표 차 노무현 승
- 충청남도 청양군 - 601표 차 노무현 승
- 인천광역시 남구 - 620표 차 노무현 승
- 경기도 동두천시 - 621표 차 노무현 승
- 충청북도 영동군 - 736표 차 노무현 승
- 인천광역시 동구 - 748표 차 이회창 승
- 경기도 김포시 - 764표 차 노무현 승
- 강원도 철원군 - 780표 차 노무현 승
- 강원도 평창군 - 942표 차 이회창 승
6. 한나라당의 대선 불복과 재검표
선거 직후 한 온라인 게시판에 국정원에서 17년 동안 근무한 중견 간부라고 자신을 밝힌 이가 개표 조작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빙자한 대국민 사기극을 벌였다. 이는 사칭이었고, 실제로는 특수학교 교사로 밝혀졌으며 나중에 실형을 선고 받았다. 노무현의 표로 분리된 표 사이로 이회창의 표가 들어갔다는 것, 전자 개표기의 오작동, 개표 부정의 가능성 등의 내용이었다.
그후 이회창 후보의 팬클럽인 창사랑과 당원 200여명은 캠프 해단식을 점거하는 등의 항의시위 및 항의전화를 지속하였고, 한나라당이 이에 동조하여 결국 서청원 당시 한나라당 대표는 12월 24일 의원ㆍ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를 통해 '전자 개표 조작설'의 검증 작업을 하기로 결정, 당선무효소송을 내었다. 이에 2003년 1월 27일 전국 244개 개표소 가운데 40%인 80여 곳에서 대법원 관리 아래 헌정 사상 초유의 대규모 재검표(1,104만 9,311표)가 이루어졌다. 이 재검표에는 5억 원의 비용과 8,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재검표 결과, 이회창 후보의 표는 88표 늘었고, 노무현 후보의 표는 816표가 줄었다.
결과적으로 격차인 28만 6천 표에 훨씬 미달하는 0.00008%의 차이로 선거 당락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재검표 결과가 이렇게 나오면서 한나라당은 소를 취하했지만 톡톡히 망신을 사며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고, 서청원 대표도 사퇴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선동은 노무현 대통령의 임기 내내 사라지지 않았고, 16대 대선이 부정 선거였다는 내용의 흑색선전이 주요 일간지 전면 광고로 잊을만하면 한 번씩 등장하곤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10년 뒤인 18대 대선에서는 이렇게 선거불복으로 피해를 본 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인 민주통합당의 일부 지지 세력들이 선거 직후 부정 선거 의혹을 내세우며 수(手)개표를 주장했다는 것. 다만 문재인 후보나 당 자체(후신인 민주당(2013년) 포함)는 결과에 승복했다. 한편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은 2013년 국정원 여론조작 사건에 대해 야당 측에서 언급만 하면 바로 득달같이 대선불복이냐며 NLL 대화록 논란을 꺼내버렸다. 또한, 18년 뒤인 21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의 후신 미래통합당의 낙선인들과 극우 유튜버들이 부정개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16]
7. 병풍#s-4 논란
지난 대선과 마찬가지로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이 체중 미달을 받은 것이 문제가 되었다. 여기에 대해 김대업이라는 전직 부사관이 튀어나와 체중이 조작된 허위 진단서를 받아 병역 면제됐을수 있다고 주장하여 사건이 확대되었다. 수사 결과, 검찰 측은 대선 두 달 전 진단서 조작 의혹이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체중고의 감량을 통한 면제 의혹은 여전히 남아 이회창 후보에게 영 좋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이로 인해 이회창 지지자들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김대업 때문에 이회창이 대선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후 한나라당은 정식으로 재판을 청구하였고, 2005년 5월 대법원은 김대업과 오마이뉴스 대표 오연호 등이 지급해야 할 배상액을 확정함으로써 이 사건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2002가합40574 참조. 자세한 내용은 병풍 사건에서 볼 수 있다.
8. 특이사항
- 최초로 민주당계 정당에서 연속하여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사례가 되었다.
- 인터넷이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준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노사모는 인터넷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20~30대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넓혀나갔고, 인터넷 커뮤니티와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통한 투표 독려는 IT기기에 익숙한 젊은 층, 즉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이대의 유권자들이 결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국 노무현이 당선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이회창 후보 측에서도 뒤늦게 인터넷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했으나, 노사모에 비해 지나치게 어설펐고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켰다.
- 3당 합당 이후 보수화된 부울경에서 노무현은 민주당 간판으로 30% 내외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선전을 했다. 직전 대선 때와 비교하면 울산 15% → 35%[20] , 부산 15% → 30%, 경남 11% → 27%로 2배 이상 증가하였는데 전국적인 표차를 감안하면 부울경에서의 선전이 당락에 꽤 영향을 미친 셈. 당시 부울경에서 민주당 간판으로는 선거비용 보전선인 15% 얻는 것조차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다른 선거도 아니고 대통령 선거에서 경남 출신 노무현이 민주당 간판을 달고 나오면서 (비록 젊은 층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지지세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것.[21] 그리고 또 다른 민주당 약세 지역인 강원도에서는 무려 40%의 득표율로 선전하면서 지역감정 타파에 어느 정도 공헌한 것으로 평가된다.[22] 참고로 이 때부터 17대 대선을 제외하곤 부울경과 대구경북의 득표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23] 총선에서나, 대선에서나, 지방선거에서나. 이렇게 보면 노무현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김영삼 전 대통령[24] 만큼 한국 정치사를 크게 바꾼 인물인 것이다.
- 그러나 부울경 지역에서의 선전이 노무현 후보의 승리에 어느 정도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 대표적인 반례가 10년 뒤 치뤄진 18대 대선으로 이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는 부울경 지역에서 16대에서의 노무현의 성과를 뛰어넘는 40%에 달하는 득표율을 올렸으나 중부권(충청권, 강원도)에서 참패하고 수도권에서 무승부에 그치면서 박근혜 후보에게 108만여표 차로 패하고 만다. 노무현의 승리는 결국 중부권에서의 선전, 그리고 수도권에서의 압승이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봐야 한다. 충청권에서의 승리야 수도 이전 공약의 역할이 컸다지만 강원도에서 선전하고 (문재인 후보는 무려 62.0 대 37.5라는 큰 득표율 차로 패했지만 노무현 후보는 10% 정도의 득표율 차로 졌다.) 최대 승부처인 수도권에서 완승한 것은 새로운 정치, 그리고 남북화해, 반미라는 2000년대 초반의 사회적 분위기를 잘 활용해 돌풍을 일으킨 선거전략의 승리였다.
- 또한 최전방 지역인 인천광역시 옹진군,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원도 철원군, 강원도 양구군에서 각각 38%, 40%, 48%, 47%를 득표해 민주당계 후보가 받은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게다가 철원군, 양구군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이겼다. 그 뿐 아니라 경기도의 최전방이던 연천군과 포천시에서도 노무현 후보가 이겼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최전방에서 옹진군, 강화군, 파주시, 고성군 등 네개 지역에서 승리하는데 그쳤다. 이는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북한과의 화해 분위기로 인해 전방 지역 장노년층 및 젊은 군인들의 민주당에 대한 거부감이 약화되었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15년 뒤 19대 대선의 경우 문재인 후보가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에서 근소한 표차로 승리하긴 했으나 연천군과 포천시에서는 홍준표 후보에게 밀렸다. 접전이었던 16대와는 달리 문재인 후보가 전국 결과에서 큰 득표율 차로 압승한 선거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아쉽다면 아쉬운 결과였다. 2000년대 초반의 남북 화해 분위기가 노무현 후보의 최전방 지역에서의 선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3당 합당 이후 영남권의 일부 지역에서 민주당계 후보가 보수 후보를 처음으로 이긴 선거이기도 했다, 참고로 그 지역이 울산광역시 동구로 노무현 대통령이 42,803표를 받아 32,595표를 받은 이회창 후보를 무려 만 표 이상 앞섰다.[25] 공교롭게도 부울경에서 민주당계 후보가 당선되기 시작하는 시점이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라는 걸 생각하면 의미있는 기록이다.
- 노무현 대통령은 제13대 대선부터 제17대 대선까지의 기록 중 역대 최다 득표 수를 기록하였음에도, 득표율 48.9%라는 수치만으로 보수 세력에게 반쪽짜리 대통령이라는 디스를 받았다. 과반, 즉 50%를 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제6공화국 이래 역대 대선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모두가 과반을 넘기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합리적이지 못한, 헐뜯기식 비난이었다. 이들은 이후 17대 대선에서 48.7% 득표율로 당선된 이명박 대통령에 대해서는 반대로 "국민 과반수가 선택한 대통령"이라는 찬양으로 일관하여 빈축을 샀다. 정작 이명박은 노무현보다 득표율도 0.2% 적었고 득표 수도 52만 표나 적었다. 이 선거에서 낙선한 이회창보다 고작 5만 표 정도 더 받았을 뿐이다. 또 17대 대선은 투표율도 겨우 63%로 매우 저조했기에 실제 유권자 대비 득표율로 따진다면 이명박은 30.5%, 노무현은 34.3%를 기록한 셈이 된다.
- 이 당시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경선에 참여한 후보들은 이후 파란만장한 정치 인생을 경험한다. 먼저 이인제 전 장관은 알다시피 국민중심당, 자유선진당 등 다양한 정당을 거쳐서 19대 총선 이후 신한국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으로 돌아갔고(2012년 10월) 그 후 2016년 20대 총선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종민(1964) 후보와의 리턴매치에서 낙선했다. 한화갑 전 의원 또한 탈당 후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하면서 민주당과의 연을 끊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2003년 9월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하고 2004년 5월 열린우리당에 입당했으나 당내 압박 끝에 임기중 열린우리당을 탈당(2007년 2월)하여 사망까지 당적 없이 생활하였으며, 김중권 전 의원과 유종근 전 지사는 무소속으로 총선 출마를 거듭한다.[26] 김근태 전 장관도 다른 민주당계 정치인들이 그랬듯이 탈당과 합당을 반복하다 민주통합당이 창당되고 나서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2011년 12월). 정동영 전 장관은 그나마 정치 생명이 긴 편에 속했는데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해 열린우리당을 창당하고, 다시 17대 대선에서 열린우리당을 탈당해 재구성한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후보가 되었으나 참패한 뒤 2009년 4월 전주 덕진 재보궐선거 출마를 위해[27] 민주당을 탈당해서 무소속으로 18대 국회에 복귀한 뒤 10개월이 지나서야 복당되었다. 이후 19대 총선에서 민주통합당간판으로 강남구 을에 출마하다가 낙선하고 새정치민주연합을 거쳐 2015년 1월 탈당하여 2015년 상반기 재보궐선거에 관악구 을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낙선하고, 이듬해 20대 총선을 앞두고 국민의당에 입당, 전주시 병 지역구에 출마해 후배 정치인인 더불어민주당 김성주를 밀어내고 국회에 복귀했다. 이후 국민의당 분당국면에서 민주평화당에 합류하였고, 총선을 앞두고 민생당 창당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2020년 21대 총선에서 김성주 후보와의 리턴매치에서 낙선하였다.
- 대선마다 진복기, 허경영 등 황당함으로 주목받는 군소후보가 하나씩 등장하기 마련인데, 해당 선거에선 김길수가 해당 타이틀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대선 포스터 중 승려복을 입은 눈에 띄는 후보로 정장을 입지 않고 승려복을 입어 무언가 있어보이는 비범함, 정교분리의 원칙은 쌈싸먹은 듯한 캐치프레이즈 등등으로 주목받는 데에는 성공해 이른바 '엽기 선거포스터'의 대명사로 짤방화되었고, 언론에서 특이한 선거포스터를 언급할 때도 빠지지 않는 사진이 되었다.
- 이 대선을 마지막으로 기표소 천막에서 궁서체가 사라졌다.
- 역대 대선 사상 최초로 선거 당일에 당선이 확정된 선거다. 보통 당선 확정은 새벽 1시 정도가 넘어가야 확정되는데 16대 대선에서는 오후 11시 26분에 노무현 후보의 당선 확정이 떴다. 당시 역대 가장 빠른 당선 확정이었다. 이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 기록이 경신된다.[28] 개표는 다음 날 새벽 3시 20분 종료.
- 2017년 제19대 대선과 더불어서 여당 후보가 기호 2번을 부여 받은 대선이기도 하다. 기호는 여당 / 야당에 따라 나뉘는 게 아니라, 국회에서의 의석 수를 따라 배정되기 때문인데, 여당이 1번이 아니라는 건 직전 총선에서 여당세가 부진했거나, 혹은 어떠한 이유로 탈당이 일어나 의석 수가 감소했음을 시사한다.[29] 19대 대선에서는 박근혜 탄핵을 이유로 여당이 아예 없었다고 보는 시각도 있겠으나 황교안의 존재를 생각하면 여당이 아예 없었다고 할 수는 없다. 물론 이번이나 훗날이나 법적으로는 모두 야당이었지만.
[1]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의 낙선에 가장 큰 원인. 경선불복으로 탈당해 독자 출마하면서 무려 500만 표나 분산 시켰다. 어찌 보면 김대중, 노무현 당선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2]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서 낙선한 뒤 재보궐로 당선 된 노무현 당시 의원이 2000년 16대 총선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14대 총선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처럼 또 낙선했는데, 이를 계기로 결성된 지지 단체다.[3] 이 때 얻은 호감이 후일 열린우리당 의장과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는데 주춧돌이 되지만 시간이 흘러 자신이 대권후보가 되기 위해서 노무현과 거리가 멀어졌고 혼탁한 경선을 보여주었다.[4] 그 것도 단순한 압승이 아닌 초 압승인 수준이다. 그 이전까지 제6공화국때 치러진 선거에서 한 정당이 전국 득표 과반을 달성한 예가 없었고 선거에서 압승을 거둔다해도 그 득표율은 40% 초반 정도의 수준이었다.[5] 훗날 문재인도 20대 총선 호남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당의 대결을 놓고 비슷한 약속을 한 적이 있고, 민주당이 패하긴 했지만 대선에 출마해서 승리하였다.[6] 이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밝히기를 김대업씨는 본인은 더 이상 이런 병역 비리가 사회 지도층 전반에 판치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어서 검찰 수사팀에 최대한 협조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사관들과 같이 병역비리에 연루된 의사들을 압박했는데 갑자기 담당 검사가 태도를 바꾸면서 자신이 팽당했다고 주장했다.[7] 감사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서면조사 및 전직 국방부 장관, 해군참모총장, 공군참모총장,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 등을 검찰 고발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면서 별명이 '대쪽'이었다.[8]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서 낙선한 뒤 재보궐로 당선 된 노무현 당시 의원이 2000년 16대 총선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14대 총선과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처럼 또 낙선했는데, 이를 계기로 결성된 지지 단체다.[9] 이때 진보 정당의 권영길 후보는 다소 손해를 봤다는 의견이 있다.[10] 당시에는 선거 24일 전부터 여론조사 공포가 금지되었다.[11] 사실 세대구도 자체는 13대 대선과 14대 대선, 15대 대선때도 어느정도는 작용했지만 13대 대선과 14대 대선때는 청년층의 표심이 反보수 성향이 강했을뿐. 표 자체는 김대중뿐만 아니라 타 야당후보에게도 골고루 나눠가졌던 탓에 노태우와 김영삼이 이를 충분히 극복할수있었고, 15대때도 김대중이 청년층들에게 많은 표를 얻었지만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었다.(사실 민주당 자체는 총선이나 지방선거에서는 청년층에게 표가 특출나게 잘나왔던 편이지만, 김대중은 대선에서 세대별로 비교적 편차없이 지지를 얻은 편이었다.)[12] 수도권 지역은 전통적으로 수도권 이외 지역보다 개표가 늦게 시작되고 늦게 끝난다.[13] 참고로 SBS는 당시 개표 62.4% 시점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확실 발표와 동시에 자체적으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선언했다.'''[14] 18대 대선 전까지 한 후보가 얻은 최다 득표수. 18대 대선에서 박근혜, 문재인 후보가 동시에 이 기록을 깼다.[15] 2017년 현재까지 시, 군, 구 단위 두 번째로 적은 표차다.[16] 홍준표는 이러한 음모론을 제기하는 극우 유튜버들과 미래통합당 낙선인들을 향해 2002년 대선 때의 경험을 언급하면서 사실상 개표조작 가능성은 없다는 의견을 페이스북에 올렸다.[17] 장교 출신이 아닌 일반병. 장교 출신 전임 대통령들은 모두 군사반란(정변)을 일으켰기에 제대로 된 군인 취급을 받기 어렵다. 그리고, 노무현은 병장이 아닌 상병으로 제대했는데, 그 이유는 베트남 전쟁 파병 다녀온 군인들이 전부다 병장을 달고 와서 병장 티오가 다 돼서 그렇다고 한다.[18] 이승만, 윤보선은 해방 당시인 1945년에도 70대, 40대라서 군대를 가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박정희는 장교 출신, 전두환, 노태우는 육군사관학교 출신이다. 김영삼은 현역병이 아니라 징집된 학도병 참전용사. 김대중, 이명박은 군대를 가지 않았고 박근혜는 여성이라 안 가도 문제 없다.[19]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까지는 노무현이 유일한 현역병 출신 대통령이었으나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결과 문재인이 당선되면서 유일은 아니게 되었다. 문재인은 병장으로 전역.[20] 현대중공업 회장으로서 울산에 정치적 기반이 확실한 정몽준과 단일화를 한 효과이다.[21] 여담으로 노무현은 부산 유세 때 "사자는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린 후 살아돌아온 강한 새끼들만 키워준다. 부산에서 여러 번 떨어뜨린 노무현이 이제 대통령 후보로 살아돌아왔으니 부산에서 키워달라."는 명언으로 부산 민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물론 부산 민심은 이회창 후보에게 3분의 2에 달하는 표를 몰아주었고, 노무현 후보는 서부산 지역에서 상당히 선전했지만 단 한 곳에서도 이기지 못했다.[22] 강원도는 15대 대선을 제외하면 민주당 계열에 30% 이상의 지지율을 보여주었다. 민주당 계열이 40%의 득표율을 선전한 대선은 동-서간 지역 감정이 시작된 6대 대선 이후 최초다.[23] 왜냐하면 이 대선을 기점으로 민주당의 호남 색채가 옅어졌고, 게다가 부산경남에 이주한 호남 출신 서민, 노동자 + 친노 + 청년층의 증가로 인해,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세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대구경북은 구미 정도를 제외하면 이주민이 적고 현지인들의 보수성향이 확고해서 당선권은 무리지만 시도의회 비례 한둘은 민주당이 잡기도 한다.[24] 대구vs광주(+부산)의 프레임을 대구+부산vs광주의 프레임으로 바꾸어 놓았다. 사실상 운동장을 기울인 인물.[25] 단일화를 했던 정몽준의 표를 흡수했기에 가능했다.[26] 다만 김중권은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였다.[27] 이때 정세균과 큰 갈등을 겪었다.[28] 17대 대선 당시 당선 확정 발표 시각은 오후 10시 48분.[29] 사실 이 대선 당시에는 공식적인 여당이 따로 없었는데, 왜나하면 김대중 대통령이 대선 몇개월 전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