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봉쇄

 



1. 개요
2. 배경
3.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
4. 미국의 결정
5. 작전 개시
6. 결과
7. 다른 원인?
8.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독일어: Berlin-Blockade(Erste Berlin-Krise)
러시아어: Блокада Западного Берлина, Первый Берлинский кризис
영어: Berlin Blockade
프랑스어: Blocus de Berlin, Première crise de Berlin
1948년부터 49년까지 소련이 서베를린에 대해 단행한 전면적인 물자공급봉쇄조치. 의미를 확장하면 이 봉쇄조치를 무력화하기 위한 미국의 대규모 공수작전까지 포함한다.

2. 배경


독일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한 이래 4개 승전국들[1]에 의해 쪼개저서 분할점령 및 통치되고 있었다. 그 중 베를린은 소련 점령지역 한복판에 있었지만, 수도라는 특성상 역시 4등분된 상태였다.
그러나 2차 대전 말기부터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자본 진영과 공산 진영 간의 갈등은 1946년 이후로 극에 달하면서 날이 갈수록 첨예해졌다. 1946년부터 1947년에 걸쳐 소련 공산당의 물밑 작업하에 동독, 폴란드동유럽 전역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 동유럽 전체가 순식간에 공산화되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자본주의 진영 서방 국가들은 동유럽이 순식간에 공산화되자 크게 위기감을 느꼈다. 미국은 1947년 마셜 플랜을 바탕으로 하는 유럽재건부흥계획을 실시하였고, 영국과 프랑스는 전후 재건에 여념이 없는 상황 속에서 미국의 마셜 플랜을 지지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당시 독일, 그중에서도 양분된 베를린은 자연스레 자유 진영과 공산 진영의 경계를 이루게 되었다.
소련은 2차 대전이 끝나자마자 동독 점령 지역에 재빠르게 꼭두각시 사회주의 정당(SED)을 세운 후, 언론을 통제하고 자유주의 정당을 탄압하기 시작했다. 1946년 소련은 동독 지역에서 독자적인 총선을 실시했고, 언론 및 정치 탄압과 농촌 지역에서 선거 참여를 억압하는 상황 속에서 동독의 사회주의통일당(SED)이 근소하게 승리를 거두었고, 선거 직후 재산과 산업은 정부 소유가 되었다. 이로서 동독은 공산화가 되었다.
이에 서방 3개국은 크게 당황했고, 미국과 영국은 1947년 1월 1일부로 미군과 영국군 점령 지역을 하나로 통합시켰고 미군과 영국군 주둔 부대가 통합하여 서독을 관리하게 되었다. 이후 1947년 4월 독일의 전후 처리를 두고 4개국간 모스크바에서 외무상 회담이 열렸으나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1948년 하반기에 서독 지역에서 실시될 총선을 두고 미, 영, 프, 소간의 갈등과 대립은 더욱 첨예해졌다. 소련은 서독까지 먹을 요량으로 서독 지역의 사회주의 정당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고, 미, 영, 프 3개국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서독 지역에 마셜 플랜을 집행하여 자본주의 경제의 활성화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소련은 자신의 관할이었던 동독과 달리 서독은 관할이 아니었으므로 동독에서 실시했던 것과 같은 정치적 탄압 및 언론 통제를 서독에서는 실시할 수 없었고, 1948년 총선에서 서독 지역 사회주의 정당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해져 갔다. 서독까지 공산화 시키려는 야욕을 포기하지 않았던 스탈린은 이런 상황을 극적으로 타파할 방책을 모색하게 된다.
1947년 당시 소련의 GDP는 미국의 1/4에 불과하던 시절이었고, 아직 독소전쟁의 상흔을 완전히 재건하지 못한 시기였다. 게다가 소련이 원자폭탄을 개발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전면전은 당연히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때문에 스탈린은 전쟁을 대신해서 본보기로 서독과 서방에 충격을 줄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그것이 동독 한복판에 있던 베를린의 포위 봉쇄였다.

3. 소련의 서베를린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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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34 전차와 함께 베를린시를 완전히 둘러싸 포위하고 있던 소련군은 1948년 1월부터 독일 영미 점령 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는 열차를 멈춰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자 위기감을 느낀 미, 영, 프 3개국은 1948년 3월 7일 서독 경제를 통합하기로 결정했다. 그러자 소련은 3월 20일 베를린 소재 연합국 통제 이사회에서 탈퇴했다. 3월 25일 소련은 베를린과 서방 연합국의 점령지대 사이를 오가는 열차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서방 3개국은 6월부터 마르크화를 서베를린에서 통용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소련은 4개국 공동 베를린 행정위원회를 폐지했고, 이어 서방 3개국이 마르크화 통용을 발표한 6월 18일에 서베를린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와 철도를 봉쇄하고 소련 점령당국의 특별한 허가를 받지 않으면 통행을 엄금했다. 21일에는 미군의 군수물자 수송용 기차마저 회선시켰으며 22일 소련 점령지역에서 쓰일 새 화폐 오스트마르크화를 발표했다.
6월 24일부터는 최소한으로 이뤄지던 생필품의 공급마저 전면적으로 중단되었고, 동독 지역에서 서베를린으로 이어지는 송전선도 일제히 차단되었다. 당연하게도 이 모든 것은 이오시프 스탈린의 결정이었다.
스탈린이 보기에는 봉쇄는 매우 합리적이며 온건한 정책이었다. 재래식 군사력의 우위가 있다고는 하지만 아직 핵개발을 하지 못한 소련으로서는 서방과의 새로운 전쟁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지난 독소전쟁으로 2천만이 넘는 국민이 죽고 서부 국토가 초토화된 소련 입장에서 종전 3년 만에 더 벅찬 전쟁을 치른다는 건 선택하기 너무 어려운 문제였다. 그러나 향후 서방과의 관계나 독일 문제에 있어 연합국보다 우위를 차지할 필요성은 있었고, 때문에 서베를린을 봉쇄해 생필품과 전기의 공급을 차단하여 사람들을 서서히 굶겨 죽이는 평화로운(?) 대안으로 이를 관철하려 했다.
이로서 인구 200만의 대도시 서베를린은 졸지에 굶주리게 되었다. 당장 서베를린에 있는 물자는 36일치의 식량과 45일치의 석탄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봉쇄 소식이 알려지면서 시장에서 자취를 감추고 물가는 천정부지로 치솟기 시작했다.

4. 미국의 결정


봉쇄 사실을 통보받은 연합국은 매우 당황했다. 그러나 당시 프랑스와 영국 역시 본토에서 전쟁을 치른지라 모두 독자적으로 뭘 어떻게 해볼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기에 결국 연합국 진영의 맹주인 미국의 결단만을 기다려야 했다.
미국도 상황이 좋지 않다고 보고 있었다. 현지에 주둔하던 주독미군 군정청장 루시어스 클레이 장군은 무반동포와 전투공병을 수반하는 무장수송대를 베를린으로 보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후방의 생각은 달랐다. 백악관의 각료회의에서는 대부분의 각료, 심지어 국방장관 제임스 포레스탈합참의장 오마 브래들리마저 베를린 봉쇄를 피할 수 없으며 베를린에서 철수해야 한다고 진언했다.
여기에는 미국 역시 소련과 전쟁을 할 상황이 절대 아니라는 점이 감안되었다. 당시 서베를린을 포위한 소련군 병력만 50만이었고, 동독에 전개한 소련군 전체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 반면 미국과 영국은 종전 후 급속한 감군으로 병력 규모가 크게 줄어서 무력으로 봉쇄를 풀기 힘들었고, 무엇보다 서방 역시 소련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전쟁은 피하고자 했다.
대규모 공수작전이 대안으로 제시되었으나 일 평균 3,600톤[2]의 물자를 서베를린으로 공수해야 한다는 보고에 다들 좌절했다. 설사 공수작전을 감행한다 해도 필요한 물자를 충분히 공급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으며 수송기들이 중간에 소련의 방해를 받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미합중국 대통령 해리 S. 트루먼은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를린 공수 강행을 지시했다.

5. 작전 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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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세계의 C-54 조종사들에게 전한다. 지금 즉시 독일로 날아오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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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티스 르메이

1948년 당시 미국 유럽공군사령관은 바로 그 유명한 커티스 르메이였다. 르메이 장군은 명령을 받고 위와 같은 말을 남기며 현장에서의 공수작전을 진두지휘했다.
르메이가 유럽공군사령관에 임명 되어 있었던 것은 베를린 시민들에게나 미국에게나 천운이었다. 우선 커티스 르메이는 이전에 미군의 폭격 교리를 한번 수정한 전적이 있는, 전략적인 면에서는 어디 가서 꿀리지 않는 인재였다. 둘째로, 당시 미군 또한 육군 항공대와 해군 항공대에서 공군이 분리되어 나온 참이었는데다 공군 인재 중에 실제로 폭격을 해 본 장성이 적었다.[3] 새로 분리된 군종의 서투름과 2차 대전 전후의 혼란 속에서 최고의 에이스 중 하나이자 최고의 전략가가 유럽에서 자신의 능력을 펼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행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비행기에서 무언가를 떨구는 데'''에는 이만한 인재가 없었다(...).
커티스 르메이는 여유가 있는 모든 수송기들의 증원요청과 함께 본국에 대형 수송기 C-54의 대규모 투입을 요청했다. 아울러 자기는 이런 대규모 수송작전에 소질이 없다면서, 태평양 전선에서 같이 종군하며 인도에서 중국으로의 항공수송작전을[4] 총괄 지휘했던 윌리엄 터너 장군을 적임자로 천거했다.
커티스 르메이의 요청을 받아들인 워싱턴은 가용 가능한 모든 수송기를 투입해 줄 것을 약속했다. 미군은 공군 뿐만 아니라 해군 항공대의 수송기까지 대거 동원했고, 종전 후 제309항공우주정비및재생전대에 보관 중이던 수송기들과 퇴역한 예비역 조종사들을 재소집한 데 이어 루프트바페 출신 정비병들과 조종사, 수송기들까지 싹싹 긁어모아 보내주었다.
작전 첫 날 실적은 C-47 수송기 32기를 동원해 고작 82톤을 옮기는 데 그쳤으나, 7월 1일 C-54가 투입되고 난 이후 7월 초가 되면 이미 미국의 1일 공중수송능력은 500톤으로 급증했고, 8월에는 일일 수송량이 1천톤을 넘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를 같이 하여 르메이가 전략공군사령관으로 영전하고 윌리엄 터너가 유럽공군사령관이 되면서 효율성이 빠르게 개선되었다.
새해가 되면서 미국의 충격적인 물량 공세는 소련을 당황시켰다. 베를린의 하늘을 통해 1월에만 171,000톤, 2월에 152,000톤, 3월에 196,223톤의 물자가 공수되었다. 이 수치는 3달 동안의 평균 일일 수송량으로 약 5,800톤으로, 베를린 시민들이 생활을 하고도 남아서 비축이 가능할 정도의 양이었다. 4월에는 부활절 이벤트로 하루만에 수송기 1,383 소티긴 13,000톤의 물자를 때려박는 쇼맨십까지 보여주었다.
공수 물자는 초기엔 식량석탄 등의 필수품으로 한정되었다. 하지만 몇몇 조종사들이 개인적으로 가져간 사탕이나 초콜릿 등을 손수건으로 싸서 공중에서 베를린에 떨어뜨렸고,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많은 조종사들이 사탕과 초콜릿을 낙하산으로 베를린에 떨어뜨렸다.[5] 그리고 공수작전의 후반기에는 아예 어린이들의 간식류를 포함해 담배, 커피 등의 기호품까지 수송기 소티를 할당해서 수송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공격 목적이 없는, 물자공급을 위한 수송기라고 하여도 적 영공에 수송기만 보내는 것은 당연히 위험한 일이다. 호위기 없이 수송기만 보낸다면 수송기는 그저 적 파일럿들의 격추수만 올려주는 훌륭한 먹잇감이 된다. 더구나 상대는 막 냉전을 시작한 소련(...). 물론 정말로 르메이가 아무 생각 없이 동독영토에 수송기에 물자만 실어 보낸 것은 아니다. 르메이는 수송기만 보내는 대신 르메이 스러운 플랜 B를 짜 놓았다. 그것은 바로 대공포나 전투기가 깔짝거리면 물자와 함께 실은 소량의 폭탄으로 '''폭격'''을 한다는 것. 다행스럽게도 스탈린 또한 물자 공급을 위한 수송기를 공격하는 것은 국제적으로 자살행위라는 것을 인지해서인지 3차대전의 도화선이 될 일은 일어나지는 않았다. 자기가 먼저 선빵 친 것도 있고.
이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자신이 서유럽의 급소를 찌른 것이 아니라 미국의 국력을 선전할 쇼케이스를 열어준 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차마 수송기를 격추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못한 스탈린은 결국 8개월만인 5월 12일 봉쇄령을 해제하였다.미국은 소련의 진의를 확실히 알지 못했으므로 공수작전을 5달 정도 추가로 진행하다가 10월 1일에 공식적으로 종료하였다.

6. 결과


베를린 봉쇄는 대실패로 끝나고 오히려 미국의 가공할 경제력과 동원력만을 재입증해주고 말았다. 미국의 공수작전은 서방세계의 화려한 선전현장이 되었을 뿐이었다. 스탈린은 제대로 체면을 구겼고, 이후 죽을 때까지 미국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회피하였다.[6]
미국에선 이를 계기로 대소 강경파가 득세하기 시작했으며, 공수 기간 중 벌어진 1948년 대선에서 트루먼이 듀이에 대역전승을 거두게 되는 이유 중 하나로도 거론되고 있다.
베를린 봉쇄로 인해 서방 연합국 점령지구의 정치인들이 소련에 맞서 단결하면서 서독이 탄생하게 되었다. 동시에 서독 지역 내 사회주의 정당은 총선에서 참패하고 말았다. 서독에서 급진 사회주의 정당은 완전히 몰락했고, 일부 온건 사회주의 정당만이 살아남았으나 세력을 회복하는데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유럽 내에서도 소련의 위협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늘어나 포르투갈, 아이슬란드, 이탈리아, 덴마크, 노르웨이의 NATO 가입을 재촉했다.
베를린 봉쇄 기간 동안 연합국 공군은 총 27만 8228회의 비행을 통해 물자 232만 6406톤(미국 공군 178만 3573톤, 영국 공군 54만 1937톤)을 공수했다. 또한 공수 작전의 절정기에는 서베를린의 공항에 30초마다 수송기가 1대씩 착륙했고, 여기에 투입된 수송기 C-47, C-54들의 총 비행 거리는 1억 4800만km에 달하여, 이는 지구에서 태양까지의 거리와 맞먹는 거리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이 현대적인 항공교통관제가 발전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작전기간 동안 미국은 사고로 수송기 17기를 잃고 31여 명의 사상자를 내었고 영국은 8대의 수송기와 39명의 파일럿들을 잃었다. 아래 사진은 당시 공수작전의 무대였던 베를린 템펠호프 공항에 있는 사망자 위령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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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e gaben ihr Leben für die Freiheit Berlins im Dienste der Luftbrücke 1948/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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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은 베를린의 자유를 위한 1948~49년의 항공수송작전에서 목숨을 바쳤다.

작전무대였던 템펠호프 공항은 통일 이후 이용객이 급감하면서 2008년 폐쇄되고 철거를 시작했다. 그러나 공항 철거에 있어서도 베를린 공수 당시의 역사적인 의미가 있는 현장이라며 반대해 시민투표를 할 정도였고, 공항이 폐쇄되는 날 마지막으로 공항을 이륙한 이벤트 기체는 공수작전 당시 투입된 기체 중 하나였던 DC-3 수송기였다.

7. 다른 원인?


베를린 봉쇄 자체가 스탈린의 연막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스탈린은 베를린 봉쇄 개시 4일 후에 요시프 브로즈 티토코민포름에서 추방했는데, 베를린 봉쇄는 서구 열강의 관심을 유고로부터 베를린으로 옮기려는 수작이었다는 것. 이 주장에 따르면 스탈린은 베를린을 두고 서방과 대결할 생각도, 능력도 없었다. 엄밀히 말하면 민간인용 식량 수송기를 격추하는 행위부터 전 세계의 공공의 적이 되겠다고 선포하는 행위기도 했다.

8. 매체에서의 등장


  • 코드네임 팬저스: 콜드워라는 RTS 게임의 주 배경이다. 게임에선 물자 수송중에 소련군과 충돌이 일어나 전쟁으로 번진다는 내용이다.
[1] 미국·소련·영국·프랑스[2] 봉쇄 전에 도로와 철도를 통해 공급되는 물자의 양은 8,000톤이었으므로 이는 정말 최소한의 양이다.[3] 르메이는 '''사령관임에도 불구하고 선두기체에 탑승'''하여 폭격을 진두지휘 한 전적이 있다(...).[4]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서 물자를 수송했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손실이 나왔지만 육로가 차단당한 중국에 그럭저럭 물자를 공급해낸 작전이었다.[5] 이 행동을 처음 시도한 조종사인 게일 핼버슨은 공로를 인정받아 1974년에 서독 정부에게 훈장을 받았다. 이 이야기는 신비한 TV 서프라이즈 791회에서도 나왔다.[6] 한국전쟁의 경우 김일성이 48번의 거절에도 끈질기게 들이댄 결과 승인했고, 군사고문단과 항공기 파일럿, 전차 등 물자 지원을 제외하면 붉은 군대의 전면적 개입은 한사코 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