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1. 개요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1936년부터 1991년까지 소비에트 연방의 공화국이었다. 수도는 알마아타.
소련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가장 넓은 공화국이었다.
2. 상세
1920년 8월 26일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일부인 "키르기즈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라는 이름으로 성립하였다. 러시아 제국 당시 러시아인들은 카자흐인을 키르기스인, 키르기스인을 카라-키르기스인이라고 불렀는데, 거기서 나온 명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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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년 당시의 소련령 중앙아시아
1925년 카자흐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36년 12월 5일 소련의 공화국으로 승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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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까지도 카자흐인이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1930년대 농업 집산화 과정에서의 실책으로 대재앙에 가까운 극심한 대기근이 닥쳤고, 특히 카자흐인들에게 큰 피해를 주어 카자흐인들의 1/3 가량이 굶어죽고 인구의 수%가 대기근을 피하기 위해 중국, 이란, 아프가니스탄. 터키 등으로 이주했으며 그 결과, 1926년과 1939년 사이 카자흐인의 인구는 360만 명에서 230만 명으로 전체의 40%에 가까운 130만여 명이 감소하였다. 대기근 직전에는 카자흐인과 우즈벡인들의 인구수가 비슷했지만 대기근이 카자흐스탄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발생하는 바람에 카자흐인들의 인구가 우즈벡인들에게 크게 뒤쳐지게 되었다. 이후 카라간다, 예키바스투즈를 비롯한 굴라그가 카자흐스탄에 대규모로 설치되고, 인구벌충을 위해 고려인을 비롯한 소수민족들이 카자흐스탄으로 강제이주당하기도 하였다. 거기에다가 니키타 흐루쇼프의 주도로 1950~60년대에 처녀지 개간 운동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인을 필두로 한 많은 소련인들이 정착하여 카자흐 SSR에선 러시아인이 가장 많은 민족집단이 되기도 했다. 처녀지개간메달도 이 때의 산물.다만 카자흐인들의 인구증가율이 러시아인들보다는 높았던지라 소련 말기인 1989년에 카자흐인이 다시 제1민족집단이 되기는 했다.
1986년 카자흐스탄 서기장으로 이전의 카자흐인 출신인 쿠나예프 대신 러시아인인 콜빈이 임명되자 '젤톡산 사건'이라고 하는 반러시아 시위가 일어나기도 하였다. 이후 1991년 소련 해체와 함께 독립하여 카자흐스탄이 된다.
사실상 마지막 남았던 소비에트 연방이었으며 카자흐스탄의 독립으로 소비에트 연방은 이름만 유지할 뿐 영토 없는 국가가 되어버렸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