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녀지 개간 운동
Освоение целнны
"소련 체제는 확실히 땅에서보다 우주에서 더 잘 나갔다"
브라이언 모이나한(Brian Moynahan)
1. 개요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집권 시절 행해졌던 대규모 농지 개간 운동. 그러나 대실패로 끝나고 흐루쇼프 본인의 실각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2. 배경
이오시프 스탈린의 뒤를 이어 새로이 소련의 서기장이 된 니키타 흐루쇼프는 하루 빨리 미국을 따라잡고 싶어 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이 통치하던 시기의 소련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이룩했지만 잉여 생산물을 극한까지 착취하여 모두 공업화에 쏟아붓는 가혹한 통치에다가 경공업의 미발달과 전후 후유증으로 인해 소비재가 부족했고, 특히 농업의 황폐화가 심각하여 농민들이 도시로 몰려가서 식료품을 사오는 웃지 못할 일도 벌어질 지경이었다. 스탈린 생전에는 아무도 이런 정책에 찍소리를 내지 못했지만 스탈린이 죽고 나서는 소련의 정치가들은 단순히 정치적 탄압을 중단하는 것 뿐만 아니라 이제 어느 정도 경제성장을 이룩했으니 인민들을 극한까지 수탈하는 정책을 중단하고 인민들의 욕구 충족에 더 힘을 기울여서 여유있게 먹고 살만한 나라로 만들어야 되지 않느냐는 생각을 했다. 이러한 생각은 게오르기 말렌코프와 라브렌티 베리야에게서 시작되었고 흐루쇼프도 마찬가지의 생각이었다.
흐루쇼프는 동료 경쟁자들과 함께 베리야를 처단하고 다른 경쟁자들도 대충 정리하자, 스탈린 시절 황폐화되었던 농업의 진흥을 위해서는 북부 카자흐스탄, 서시베리아, 북캅카스, 우랄 지역의 거대한 처녀지를 개간하는 것이 필수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해서 늘어난 곡물 생산량을 이용해 목초와 곡물을 가축들을 먹여 살리는 데 쓰기까지 한다면 소련의 식료품 부족 문제까지도 해결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무려 1,200만 헥타르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처녀지 개간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사실 이렇게만 본다면 그냥 무식하게 처녀지 개간작업만 밀어붙인거같지만 사실 농민들에게 지급할 임금과 연금을 늘리고 여권도 발급받게 만들어서 국내여행을 자유롭게 하는 등 2등 시민이나 다름없는 취급을 받은 농민들의 지위를 향상시켜 생산성을 높이는 작업도 병행했다. 즉, 처녀지 개간사업 자체는 농촌진흥계획의 일부였다. 물론 가장 신경쓴 사업이기는 하지만
3. 계획
흐루쇼프의 미개척지 개간 계획의 골자는 이랬다.
문제는 대표적인 C4 식물로서, 더운 지역에서 자라는 옥수수는 춥디 추운 소련에서 키우기에는 기후가 전혀 맞지 않았던 것. 흐루쇼프는 1959년 미국 방문 중에 아이오와 주의 드넓은 옥수수밭을 보고 크나큰 감명을 받아 옥수수에 심취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정작 '아이오와는 소련 땅 그 어느 곳보다도 남쪽에 위치하였다.'는 사실은 미처 인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1. 우선 소고기 생산을 늘려야겠다.
1. 그런데 소를 키우려면 사료가 어마어마하게 필요하겠지?
1. 그 사료는 옥수수로 때우면 된다!
1. ????
1. PROFIT!
4. 일시적인 성공
어쨌든 흐루쇼프는 이 계획이 파멸의 지름길이라는 것을 전혀 인지하지 못한 채 기차에 몸을 실었다. 국가적으로 이 사업을 팍팍 밀어줬기에 젊은 공산당원들과 러시아, 우크라이나에서 온 주민들 30만명 가량이 처녀지 개간 사업 예정지인 카자흐스탄, 시베리아, 우랄 지역으로 몰려들었다. 처녀지 개발계획에 5만대의 트랙터와 6000여대의 트럭도 투입하였고 주택과 도로같은 기초적인 인프라를 건설하면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나 농사에 미숙한 이들이 많았고, 상식적인 농학자들은 이곳은 원래부터 강수량이 부족하던 지역이라 휴경을 많이 하고 파종을 늦게 해야 한다고 말했으나, 엉터리 과학자인 트로핌 리센코는 조기 파종과 휴한기 없는 집약적 경작을 계속 주장했고, 날씨도 그리 좋지 않아서 1955년 농사는 대 실패로 끝나 버렸다.
하지만 흐루쇼프는 1년차의 실패에도 굴하지 않고 다시 한번 승부수를 걸었고 처음 시도때와 마찬가지로 대대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거기에다가 새로 정착한 공산당원들도 경험이 쌓였던 모양이다. 그리하여 1956년 농사는 소련 전역이 가뭄의 영향으로 흉작이었음에도 유독 흐루쇼프가 지원을 아까지 않았던 카자흐스탄에서만큼은 대풍년이 들어 '''당초 목표치 2000만톤을 3배나 뛰어넘는 엄청난 수확량을 거들어들이는데 성공''' 흐루쇼프는 이를 바탕으로 권력을 확고히 다지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여기에서 그쳤다면 흐루쇼프는 괜찮은 농업정책을 편 지도자로 남아있을 수 있었겠지만...
5. 결과
흐루쇼프는 2년차에 엄청난 대성공을 거두게 되자 이대로라면 권력기반을 다지는 수준을 넘어 미국과의 체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 밀은 자급했으니 고기생산을 대대적으로 늘리겠다면서 처녀지에서 생산된 곡물과 목초들을 바탕으로 겨우 3~4년 안에 소련의 버터, 우유, 육류 1인당 생산량에서 미국을 따라잡겠다는, 당시 소련으로서는 '''도저히 지킬 수 없는 약속을 하고 말았다'''. 당연하겠지만 축산 관련 전문가나 농민들, 관료들은 육류 생산량을 급속히 늘리기 어렵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진작에 이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이라고 봤으며 인민들마저 반신반의했다. 여하튼 육류생산증산작업은 대대적으로 진행되었고 흐루쇼프는 국가에 판매한 육류의 량을 세 배인 15만톤으로 늘리겠다는 약속을 지킨 라쟌 지역의 당 제1서기 알렉세이 라리오노프를 사회주의노력영웅으로 만들어 주었다. 물론 이건 거짓 결과였다. 그는 장부상 수치를 부풀리기 위하여 종자용 가축과 젖소를 도축장으로 보내고 농민들에게 소를 사서 되팔고 또다시 매입해서 목표를 달성했던 것이다. 라리오노프는 죄책감에 못 이겨 권총자살하고 만다."세계에서 가장 창의력 있는 마술사는 누구지?"
'''"물론 흐루쇼프지. 파종은 카자흐스탄에서 했는데 수확은 캐나다에서 하지 않나!"'''
이런 비극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흐루쇼프는 방미 중에 옥수수 농장을 방문해서 감명을 받았고 옥수수가 따뜻한 지역에서 주로 자라는 작물인 걸 간과한 채 나폴레옹과 히틀러도 추위로 쫓아내는 소련 땅에 옥수수를 심겠다고 나서면서 삽질이 추가되었다. 거기에다가 때마침 가뭄까지 겹쳤고, 더군다나 트로핌 리센코의 조기 파종과 휴한 없는 정책은 엄청난 잡초 번식을 초래했다. 그런데 그 많은 잡초들을 박멸하기에는 소련의 제초제 생산량이 턱없이 부족했다. 게다가 전문가들이 경고했듯이 가뭄으로 카자흐 처녀지의 표토가 죄다 말라 붙었고, 이 지역의 특징인 강한 바람이 그 말라 붙은 표토를 멀리 멀리 날려버려 600만 헥타르의 토지가 황폐화되었다. 흐루쇼프의 비장의 카드인 옥수수는 3400만 헥타르에 파종했으나 1/5에도 못 미치는 640만 헥타르에서 밖에 수확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관. 아무리 근성의 공산주의도 기후와 자연에 깝치면 어떻게 되는지 너무나도 잘 보여 주는 사례였다.
옥수수 경작 등의 삽질로 원래 소 사료로 애용되던 건초용 목초 수확량은 처참했다. 거기에다가 종자용 가축까지 먹어치웠으니 육류 생산량과 우유와 치즈 등 낙농품 생산량도 다시 급감하여 결국 미국 생산량을 뛰어 넘겠다던 낙농과 육류의 가격은 1.3배로 폭등하게 되었다. 이에 처녀지 계획이 실행된 곳 중 하나였던 북캅카스의 노보체르카스크의 분노한 노동자들은 "흐루쇼프를 갈기갈기 찢어 소시지로 만들자!"라고 외치면서 지역 당 본부로 행진을 벌였다. 이 행진을 잘 보기 위하여 아이들이 나무 위에 올라가 있기도 했는데 군대가 시위를 해산시키기 위하여 허공에 대고 경고사격을 했고, 그 때문에 눈 먼 총알에 맞고 죽는 아이들이 생기기도 하였다.
흉작의 결과로 소련은 모양 구겨지게 미국, 캐나다, 아르헨티나, 호주 등으로부터 곡물을 대량으로 수입해야 했고, 거기에다가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모양 구겨지게 대응하는 바람에 인민들의 지지도 크게 약해지고 자연히 당내에서 흐루쇼프에 대한 입지도 약해져 흐루쇼프는 당내 음모로 인하여 결국 1964년에 실각하게 된다. 위의 유머가 당시의 현실을 풍자한 것이다.
6. 여담
이 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것이 처녀지개간메달이다.
이를 계기로 다수의 러시아인들이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했기 때문에 카자흐스탄에서는 한 동안 러시아인이 카자흐인을 제치고 제1의 민족집단을 구성하기도 했으며 우랄과 시베리아 등지의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기도 하였다. 물론 이때 러시아에서 카자흐스탄으로 이주해온 러시아인들 가운데 상당수가 90년대에 카자흐스탄을 떠나기는 했다. 이 때는 러시아나 카자흐스탄이나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것은 똑같았던 데다가 카자흐스탄에서 자국어 진흥정책과 러시아어 배제정책을 펴자 평소에 카자흐어를 잘 안 쓰는 상당수 러시아인들이 카자흐스탄보다 러시아에서 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러시아로 귀환해서 한동안 카자흐스탄의 인구가 감소되기까지 했다. 물론 러시아로 돌아간다 해도 러시아도 사정이 그리 녹록치 않아서 다시 카자흐스탄으로 돌아온 사람도 있다. 카자흐스탄에서 여전히 러시아어가 준공용어급의 위치에 있다는 것도 한 몫하고 그래도 중앙아시아에서는 살만한 나라인 점도 있기 때문에...
그 외에도 국제적으로 영향이 있었다. 모스크바를 방문했던 마오쩌둥이 흐루쇼프가 미국을 따라잡겠다고 떠드는 것을 보고 경쟁심을 느껴서 자신들도 영국을 따라잡겠다고 외치는데 그 결과가 바로 '''대약진 운동'''이다. 흐루쇼프는 제 때 곡물 수입을 해서 기근이 일어나지는 않았지만 마오쩌둥은 자기 자존심 때문에 똥배짱으로 나가느라 미개척지 개간 운동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참혹한 결과를 초래하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