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자흐스탄/역사

 





카자흐스탄의 역사.
1. 개요
2. 고대
3. 중세 초
4. 중세 말
5. 근대
6. 현대


1. 개요


카자흐스탄의 역사를 다루는 문서. 카자흐스탄의 국토가 동서로 길게 광활한데다 실크로드 초원길이 지나고, 사방이 탁 트인 초원 지역이다 보니 예전부터 많은 민족문화교류하였다. 고대 도시의 대다수는 이 실크로드를 중심으로 밀집해 있다. 아무래도 카자흐스탄의 남부 지방들이 사막 지형이고 실크로드 주변에 큰 강이 많았고 또 경제 활동이 잦았기 때문이다.

2. 고대


고고학유물을 대략 살펴보면 1백만 년 전 구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이 지역에 살았고, 후대의 유목민 문화와는 다르지만 기원전 5천 년부터 이미 보타이(Botai) 문화라고 불리는 목축 문화가 나타났다. 기원전 1500년부터 기원전 1000년경까지는 '안드로노보', '베가지-단디바이' 문화 등 청동기 초기 문화가 발견되며 이들은 두 필 이상의 말을 연결한 전차와 짐마차를 썼다고 한다.
기원전 500년경에는 스키타이의 일부인 사카(saka) 부족이 알타이산과 우크라이나에 이르는 방대한 스텝 초원을 지배하였다고 한다. 이들은 카자흐스탄 초원 곳곳에 '쿠르간'이라는 거대한 봉분의 무덤을 건설했는데, 이 무덤들이 한국 신라돌무지덧널무덤 양식과 유사해 연구대상이 되기도 했다. 1969~70년 알마티 인근에 위치한 고분에서 발굴된 이들의 유물 ' 황금 인간'(The Golden Man)'은 카자흐스탄 최고의 고고학 유물이며, 현재 카자흐스탄의 국가 상징이기도 하다. 사카 부족의 인종은 유럽인에 가까워 이 시기의 카자흐스탄 영토에 살고있던 사람들은 유럽에 더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사카인들은 주변 지역으로 활발하게 진출해 아시리아이집트까지 침공하기도 했고 아케메네스 페르시아키루스 대제가 사카인과의 전투에서 전사하기도 했다.
이후 기원전 2세기에는 흉노 연맹이 몽골 초원에서 동부 카자흐스탄까지 확장하였으며, 이후 흉노와 연관성이 있는 에프탈족들이 남쪽과 서쪽으로 이동한 후에는 서력기원 550년부터 750년까지 지금의 카자흐인의 선조격인 튀르크계가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이때부터 본래 서쪽에서 온 백인의 인종적 특징을 많이 보였던 카자흐스탄 거주자들의 피에 동양인의 특징이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다.[1]

3. 중세 초


서기 568년 서돌궐의 카간 디자불로스 이스테미가 이 지역의 도시 타라즈Taraz에서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사절을 접견한 기록이 남아있다. 제마르코스Zemarkh와 소그드인 길 안내자 마니아코스Maniakh가 이끈 동로마 사절단은 사산 왕조에 대항한 군사 동맹을 체결하고 비단 무역을 더 원활하게 진행하기 위한 목적으로 방문했다. 타라즈는 국제 무역의 허브 중 하나로 튀르게시 부족 연맹의 수도 역할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의 카자흐스탄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중세에 인구가 가장 많았던 도시는 근교까지 합쳐 4만여명의 인구를 자랑했던 이스피자브(사이람)였다. 서기 7세기부터는 타라즈를 포함한 몇몇 도시에서 자체적으로 주화를 주조하기 시작했다.
카자흐스탄 일대의 황인종화는 새로 동방에서 등장한 쿠만 연맹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이루어졌다. 튀르크어 사전을 편찬했던 마흐무드 알 카슈가리는 6~8세기 이 지역에 정착한 소그드인들이 11세기 무렵에는 튀르크인들과 지속적인 통혼으로 상당한 수준의 상호 동화가 이루어졌다고 기록했다.
쿠만인들은 킵차크인(큽착인) 혹은 러시아 사료에서는 폴로베츠인이라고도 칭해졌다. 큽착이라는 말은 중세 튀르크어로 "신성한 나무"라는 뜻의 "쿠브 아착"에서 유래된 추정된다. 서기 8세기 무렵 알타이 산맥에서 유목을 하던 킵차크인들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유역에서 동쪽으로는 시르다리야 강 유역,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남부로 확장하였다. 실제로 쿠만인들은 구성이 매우 복잡한 여러 부족들의 연맹체로 구성되었는데 큽착인 외에도 동쪽으로는 시르다리야 강 유역의 오우즈 튀르크족과 카를룩족, 서쪽으로는 흑해 유역의 페체네그족이 포함되었으며, 오늘날 타타르인, 바시키르인, 추바시인의 조상에 해당하는 불가르족 등이 포함되었다. 이를 반영하던 흑해 유역에서 발견되는 쿠만인들의 조각상에는 황인 형질의 쿠만인과 백인 형질의 쿠만인이 모두 묘사되어 있다.

4. 중세 말


이후 1218년부터 1221년까지 칭기즈 칸이 이 지역을 정복하였고 이후 킵차크 칸국, 차가타이 칸국 등의 지배에 들어갔다. 카자흐족은 본래 킵차크 칸국의 우즈벡 울루스에 속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아불 하이르 칸의 정책에 반대하여 뛰쳐나온 사람들[2]이다. 이들이 3개의 칸국으로 나뉘게 되면서 300년간 다른 지방 호족들을 흡수하여 봉건화된 카자흐 국가를 이루었으며 이는 18세기까지 이어진다. 지금의 카자흐스탄 지역의 대부분은 카자흐 칸국이 통치했고 지금의 우즈벡 지역의 칸국이나 러시아 등과 대치했다.
카자흐인들은 15~16세기까지 텡그리 신앙을 유지했던 것으로 보이며, 결국 낙슈반디야 교단과 야사비야 교단의 수피들이 텡그리 신앙을 모방한 형태의 이슬람 수피즘을 전도하면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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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카자흐 칸국의 중무장 기병과 경무장 기병 / 그림 Mikhael V. Gorelik

5. 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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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블라이 칸 (제위 1771~1781)
18세기 중엽에 봉건제후 간의 전쟁으로 약화된 이들 칸국은 준가르의 침입을 받고 1731년 러시아 제국의 보호를 요청하면서 본격적인 러시아와의 합병이 시작되게 된다. 18세기 말에는 아블라이 칸이라는 유능한 지도자가 내부 갈등을 통합하고, 청나라와 러시아 사이에 균형 외교를 펼치며 준가르 잔당들을 제압했으나, 아블라이 칸의 후임자들은 러시아 제국에 끌려다니게 되었다. 한 편 알마티, 일리 강 지역과 발하슈 호 동남부는 청나라의 준가르 멸망 및 점령으로 청나라 영토가 되었다.[3] 러시아는 카자흐 국경지역에 요새를 건설하고 오렌부르크 등의 소도시를 건설하는 등 서부 카자흐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였고 19세기 초에는 카자흐스탄 북부와 중부지역에 8개의 러시아식 행정구역을 두어 지배하에 두었다. 결국 1860년대에 이르면 반러시아 폭동 등에도 불구하고 카자흐스탄 전역이 러시아의 영토가 된다.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는 18세기 말부터 많은 러시아 타타르인들이 카자흐 족들이 사는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타타르인들이 모스크와 이슬람 학교를 짓고 나서야 이 지역의 이슬람 문화가 본격적으로 전파되었다 한다. 이전의 카자흐 유목민들은 명목상으로는 자신들을 무슬림으로 간주했으나, 혼례와 매장 풍습은 전통 튀르크 무속신앙 방식으로 행해왔던 것이다.[4]
이후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던 이들 지역은 1917년 러시아 혁명적백내전 기간 동안 소비에트 정권이 들어서게 되었고 키르기스 자치 공화국의 일부로서 편입되었다. 이후 1924년부터 추진된 민족 구성을 바탕으로 한 자치 공화국 구성 개편으로 1925년 4월부터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자치 공화국으로 명명되었다.
소련의 농업 집산화가 한창 이루어지던 1930년대 초반 아직 유목전통이 강하던 카자흐인들은 농업 집산화에 매우 격렬하게 저항했는데[5] 소련에서는 이들의 저항을 분쇄하기 위해서 일부러 대기근을 조장하여 1932~33년 사이에 전체 카자흐스탄 인구의 38~42%가 기아로 사망했다고 한다. 자세한 내용은 홀로도모르 참조 이후 러시아인들이 기근으로 사망한 카자흐인들이 자리를 메꾸기 위해 이주하면서 1936년 12월에 카자흐스탄은 소련의 구성 공화국으로 승격되어 카자흐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다.

6. 현대


소련의 계획 경제 아래 카자흐스탄의 풍부한 광물 자원을 통한 상업의 발전과 집단농장화가 시작되었고, 1940년대 초가 되면 모든 농토의 97%가 집단농장화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대기근이 일어나 약 150만 명 가량이 사망했다. 특히 카자흐인의 경우에는 전체 인구의 1/3 가량이 사망하고 인구의 수%가량이 당국의 감시와 즉결 처분의 위험에도 기근을 피하기 위해 위구르, 터키, 이란, 몽골, 아프가니스탄 등으로 이주하며 카자흐인의 인구가 1926년 362만 명에서 1939년 237만 명으로 감소하는 대참사가 일어났다. 소련이 이러한 인구 손실을 메우기 위해서 러시아인들이나 고려인, 칼미크인, 크림타타르인들 등을 카자흐스탄에 이주시키면서 인구 비율 또한 역전되었다. 이 때 카자흐스탄의 집단농장화를 주도한 인물이 골로쇼킨이기 때문에 골로쇼킨 제노사이드라고 칭하기도 한다.[6] 1950년대 후반에 니키타 흐루쇼프 서기장은 미개척지 개간의 명분으로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리하여 1960년대 초가 되면 당시에 카자흐스탄이라는 국명을 달았음에도 930만 카자흐스탄 인구 중 43%가 러시아 인이고 29%만이 카자흐인이라는 통계가 나올 지경이 되었다.
소련 시절에는 역시 소련 밑이 아니랄까봐 소련의 핵실험이 이 나라의 세미팔라친스크 변두리에서 이루어진 슬픈 역사도 있다. 핵실험이 끝난 지 수십 년 뒤 핵실험지 주변에 사람들이 사는 마을의 참극을 KBS세계는 지금에서 취재한 적이 있는데, 핵실험 후 발생한 돌연변이들의 포르말린이 전시된 모습도 보여주어서 많은 이들의 밤잠을 이루지 못하게 만들었다.
이후 동구권 개방의 여파를 타고 1989년 공산당 서기장으로 선출되었던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1990년 4월에 대통령직에 올랐고 고르바초프와 더불어 가장 오랜 시간 소련 체제를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대세를 바꾸지 못하고 1991년 12월 16일 가장 늦게 소련으로부터 독립하여 12월 21일독립국가연합에 가입하게 된다. 지금도 카자흐스탄 인터넷 커뮤니티 등지에 들어가 보면 '아, 소련 시절이 좋았었지' 같은 글들이 넘쳐난다. 하지만 이러한 인식도 세대교체가 일어나면서 잦아드는 추세이다.
1992년에는 국제연합에 가입하였고 1993년에는 헌법을 채택하고 1995년에 개정하였으며 1997년 12월 10일에 수도를 아크몰라(현 누르술탄)로 이전했다. 여하튼 1990년대에는 나라 상황이 사실 좋은 것은 아니여서 한때 국가채무가 GDP의 400%에 이르고 러시아와 우크리아나를 휘저었던 올리가르히도 카자흐스탄에서 크게 문제되었다. 또한 러시아인들과 독일인들이 열악한 경제 상황으로 인해 대거 본국으로 귀환하면서 한때 인구가 줄어나갔지만 1990년대 중반에 초인플레이션 상황이 어느정도 수습되었고, 2000년대에 들어 반전되어 2000년부터 2007년까지 연 평균 10%의 경제 성장을 이루었고 중앙아시아에서 경제적으로 선두를 달리는 나라라는 타이틀을 달았다. 2007년 5월에 초대 대통령에 한해 연임제한규정을 철폐하는 것으로 헌법을 개정했다.
2005년에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91%의 지지율로 당선되었고 야당이 지리멸렬한 사태라 여당인 누르-오탄당의 정국주도가 이어지고 있다. 2010년 6월에는 나자르바예프 대통령과 그 가족에 대해 퇴임 후 면책특권을 부여하는 법안이 가결되었고 카자흐스탄 상, 하원에서 2011년 4월에 초대 대통령에 한해 2020년까지 임기연장하는 국민투표를 시행할 것을 가결했다가 서방의 강력한 항의로 무산되어 2011년 4월에 대선을 치루었는데 여기서 '''95.55% 득표율로 당선, 투표율 89.99%, 총 유권자는 920만 명이었다고.''' 이렇게 된 이유가 야당들이 충분한 선거기간을 주지 않았기에 불참 선언을 했기 때문이다. 다른 후보들은 2% 득표율도 넘지 못했다고 한다.
결국 4월 8일에 나자르바예프 대통령이 다시 취임하게 되었으며 2016년에 있을 대선에도 출마예정이라고 한다. 대통령 자신은 '''2030년'''까지 집권하겠다고 공언했는데 이렇게 되면 40년 집권이 되며, 역사상 6명밖에 없는 독재의 전당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이때가 되면 나이도 아흔이 될 듯.
2012년 1월부터 유라시아 연합 회원국이 되었다.
2014년 4월 트위터는 물론 휴대전화도 차단하려는 정부 방침이 논란이 되고 있다. 물론 시민들의 반대도 일부 있지만, 정부의 거수기에 불과한 의회가 이미 개정 법안을 모두 승인하고 대통령 서명만 기다리는 중이라 그대로 시행될 것으로 보인다.#
2016년 대선을 2015년 4월로 앞당겨 대선을 치렀다. 루블화 폭락으로 인해 2014년 2월 텡게 평가절하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또 해야 할 상황이 오자 '이제까지 대통령이 취임기간 동안 평가절하를 2번씩이나 한 경력이 없다. 새 대통령이 해야 한다.'며 조기대선을 시행한 것이다. 그리고 '''득표율 97.7%'''로 재당선.
2021년 1월 10일에 코로나19가 확산된 상황에서 하원 의원을 뽑는 선거가 실시됐다.#

[1] 자세한 사례는 강거페체네그 문서 참조[2] 때문에 처음에는 우즈벡-카자흐인들이라 불리었다. 여기서 카자흐란 '도망자'라는 의미. 코사크 역시 카자흐에 어원을 둔다. 러시아 제국에서는 카자흐와 코사크를 구분하기 위해 카자흐를 뜬금없이 키르기즈라 불렀다. 진짜 키르기즈는 카라 키르기즈라고 부르고. 이는 1920년대까지 사용되었는데, 때문에 이슬람 백과와 같은 책에서는 키르기즈 항목에서 카자흐 국가의 역사를 간략히 설명했다.[3] 해당 영토 대부분은 19세기 중반 청나라가 야쿱 벡의 난으로 신장 지역의 행정이 마비된 틈을 타서 러시아 제국이 접수했다.[4] 꾸란을 "효과가 좋은 부적"이라고 생각하고 이슬람 수피승은 "외국물 먹어서 똑똑한 무당"으로 생각했다고 한다.[5] 어떤 정신나간 유목민이 자기 가축을 전부 이방인에게 넘기고 하루종일 더러운 목화 공장에 같혀서 일하고 싶겠는가?[6]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골로쇼킨은 훗날 스탈린의 눈밖에 나서 결국 처형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