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1. 개요
Корё-сарам[1] / Российские корейцы / Этнические корейцы (러시아어)
고려인(高麗人)은 소련 붕괴 후의 구 소련 지역 전체에 거주하는 한민족이나 그들의 자손을 의미하는 민족 명칭이다. 약 50만 명의 고려인들이 러시아[2] 를 비롯해 중앙아시아[3] 를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남부 러시아의 볼고그라드 부근, 러시아 서쪽의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등의 발트3국과 캅카스에도 소수 고려인들의 공동체가 존재한다. 이들은 대부분 19세기 말에 러시아 제국령 프리모리예주(연해주)로 이주하였던 '재러 한인(혹은 재러 조선인)'에서 기원한다.
그 외에도 사할린섬에 사할린 한인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는데, 사할린은 한 때 일본 열도 본토로 취급받는 제5의 섬이었으나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망하면서 소련에 넘겨진 땅이다. 그리고 이 곳의 한인 이주민들은 일제강점기 때 당시 징용으로 사할린에 끌려갔다가, 종전 이후에 사할린이 소련으로 편입되는 과정에서 방치된 것이다.[4][5] 즉 사할린 한인들은 일제하 전시체제기에 시행된 강제동원 정책의 피해자이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고려인과 사할린 한인의 정체성은 아주 다르다. 사할린 한인은 재일 한국인의 그것과 비슷했으나 그들과도 냉전 시대의 분단 때문에 독자적인 정체성으로 남았다.
기존의 중앙아시아와 사할린 이외에도 프리모르스키 지방(연해주)에 또 다른 이주민 집단이 있는데 이들은 북한인 출신으로 소련 시절에 이주노동자로 왔다가 남은 사례이다.
2. 명칭
대한민국에서는 '러시아어로 카례이스키(Коре́йский)라고 불린다'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카례이스키'는 '한국의, 한국인의, 한민족의'라는 뜻의 형용사이다.[6] 원래 러시아어로 한국인과 한국 남자는 각각 '카례이치(Коре́йцы)'와 '카례이츠(Коре́ец)', 한국 여자는 '커리얀커(Корея́нка)'라고 부른다.
러시아 사람들 사이에서 중앙아시아와 러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계 그룹으로서의 고려인을 지칭할 때 흔히 불리는 말은 ''''카료-사람(Корё-сара́м)'''', 즉 '''고려사람'''이다. 고려인들 사이에서도 자신들을 이렇게 지칭한다. 여기서 '사람(сарам)'은 기존에 있던 러시아 단어가 아니고 한국어 단어 사람을 그대로 가져다 쓴 용어다. 마치 한국어권에서 한국에 거주하는 이주 러시아인을 가리켜 러시아어 그대로 '루스키예(Русские, 러시아 민족)'나 '로시야네(Россияне, 러시아의 국민)'라고 부르는 셈이다.
'고려인'이라는 단어는 비교적 근래에 생긴 표현으로, 고려인들의 중앙아시아 혹은 연해주 이주 역사에 비하면 생긴지 얼마 되지 않은 표현이다. 이전까지는 중국, 일본 등 다른 나라의 해외 동포들과 같이 그저 '조선인'이라고 했다. 이는 조선적 문서를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대한민국과 북한이 성립되기 이전인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 시기에 해외로 나간 동포들은 '한국인'이라는 표현 자체에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대한민국에서 '조선인', '조선민족' 등의 용어가 '한국인', '한민족' 등으로 대체되기 시작한 것은 분단 이후부터로 그 이전까지는 조선이란 표현을 더 빈도높게 사용했다.
분단 이후, 민단과 조총련을 세우면서 대립이 시작된 재일동포들과는 달리 재소조선인들은 냉전 시기에 공산권인 소련에 소속되어 있었고 북한이 공산권에 속해있었던 만큼, 당연히 북한에서 부르는 민족명칭을 따서 '조선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다가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의 정세가 급변하고 페레스트로이카가 이뤄지는 분위기 속에서 재소조선인들 사이에서는 대한민국과의 관계도 고려해 '조선인'을 대체할 중립적인 명칭의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렇게 '고려인'이라는 단어가 만들어지고, 1988 서울 올림픽 직전인 1988년 6월 전소고려인협회가 결성되면서 고려인이라는 명칭이 점차 퍼져나가게 된다.
이후, 1993년 5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소련 조선인 대표자 회의에서 정식으로 재소조선인의 명칭을 '고려인'이라고 부르기로 결정한다. 즉, '고려인'이란 표현은 이오시프 스탈린이 강제이주 정책을 시행했을 때부터 있던 표현이 아니라 1980년대 이후에 생긴 표현인 것이다.
고려인들의 입장은 그들 자신이 '조선' 사람도 아니고 '한국' 사람도 아닌 소련 사람이고 또한 자신의 언어와 문화도 한 세기 이상 지나는 동안 이미 남과 북과는 이질적인 소련의 특성을 많이 띠고 있으며 남쪽과 북쪽의 것과도 다른 자신들만의 특수한 독자적 특성을 이어왔으니 그 어느 쪽도 아닌 '고려인'이라고 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결국 고려인이라는 호칭은 한반도의 분열이 낳은 특수한 역사의 산물인 것이다.
어찌되었든, 이러한 표현은 성공적으로 정착하여, 현재 대한민국내에서 재러동포나 한국계 러시아인 같은 표현보다는 고려인이라는 표현이 많이 보이는 편이다. 이는 하나의 국가에 정착하여 살고 있어 '재일동포'나 '재미동포' 같은 표현도 자주 보이는 일본이나 미국과는 달리 고려인들은 1991년에 해체된 구소련의 구성 공화국에 분산되어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인 그룹'을 특정 국적으로 묶기 힘든 점도 한몫했다. 고려인들은 과거 소련 국토 내에 퍼져 살았고, 소련이 무너진 현재에는 러시아 국적이 아닌 고려인도 다수 있기 때문에 '한국계 러시아인' 같은 표현으로 뭉뚱그려 표현할 수는 없다.
일본과 중국에서도 '고려인(高麗人)'이라고 하면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한민족 그룹을 지칭하는 표현으로 자리잡았다. 허나, 중국의 경우 소련과 함께 공산권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옛 명칭인 '러시아조선족(俄罗斯朝鮮族)'같은 표현도 종종 보이는 편이다.[7]
3. 역사
고려사람은 1860년대초무렵부터 연해주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사람들로부터 그 시초가 된다.[8] 1860년 아편전쟁의 결말로 베이징 조약이 체결됐는데 영국이 홍콩을 먹는 동안 러시아는 아무르 강 동쪽의 땅을 얻었다. 당시 조선인들은 삼정의 문란을 피해 중국 동북지방, 즉 만주와 연해주로 넘어갔는데 청과 러시아는 이 지역에 제대로 행정력을 발휘하지 못 했고 봉금령이나 출입금지령 등을 내렸지만 1880년대에 철폐했고 조선정부도 이들이 넘어가지 못 하도록 통제했지만 실패했다. 고종시대가 되면서 이미 연해주지역의 조선인모둠은 굳세졌고, 러시아정부도 청이 다시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도록 하려면 이 지역에 러시아에 충성하는 주민들이 늘어나야 한다는 점을 깨닫고, 청과 사이가 나쁘면서 교육열이 높아 러시아화가 용이한 조선인모둠을 지원하게 된다. 이 시기에 조선을 여행했던 영국여행가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연해주의 조선인들이 힘차게 살아가는 것을 보면 조선인들이 원래 열등한것이 아니라 그동안 조선정부의 폭정때문에 발전이 더뎠다는 것을 알 수 있다"라고 썼다.
1900년대초에는 러시아제국과 조선 모두 일제와 대립하였다. 하지만, 1905년, 러일전쟁이 종료되면서 일제의 요청에 의해 조선인을 배척하는 법을 제정하였고, 이로부터 조선인의 농장은 몰수되고 조선인 노동자는 해고되었다. 동시에, 러시아 제국은 조선의 독립운동을 위한 피난처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최재형 같이 러시아에서 엄청난 돈을 벌어 그 돈을 독립운동 자금활동에 적극 지원하고, 의병들 챙기는등 연해주에서 독립운동활동에 중추적인 역할하기도 했다. 참고로, 최재형은 안중근의사가 의거를 일으키는데 막후가 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은 시베리아와 연해주, 만주로 피신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연해주의 조선인들은 러시아 군에 입대해 독일군과 싸웠다. 당시 독일군에 포로가 된 조선인 러시아 병사의 육성이 독일 박물관에 녹음되어 남아있는데 조선인 부대의 군가를 들어보면 "을지문덕, 이순신처럼 열심히 싸워 베를린을 점령하여 러시아에 은혜를 갚고, 전쟁 경험을 살려 일본을 몰아내고 조선을 해방하자."라는 내용이다.참조바람 이후 10월 혁명과 동아시아에서의 공산주의의 성장과 함께, 시베리아와 연해주는 재소련조선인의 일본에 대항하기 위한 독립군 양성의 터전이 되었다.
1919년, 연해주에 위치한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모인 조선의 지도자들이 3.1 운동을 지원하였다. 이 마을은 군대의 보충을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1920년 4월 4일에는 적백내전 때 일본군이 '백군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신한촌으로 침략, 공격하여 수백 명이 사망하였다. 이를 '신한촌 사건' 또는 '연해주 4월 참변' 이라고 부른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주한 조선인들은 러시아 정교회를 받아들이는 등 러시아 문화에 잘 적응했다.
그러나 1937년 9월 중일전쟁의 개시와 더불어 연해주에는 여행 금지 조치가 내려졌고, 11월 새벽 갑작스럽게 고려인들은 시베리아 횡단 열차에 태워졌다. 이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수민족 이주 정책으로 연해주, 극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시켜 버린 것이었다. 그래도 양심은 있는지 강제 이주 전에 일방적이기는 해도 사전 통보를 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나름대로 해결책을 강구하려 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1944년의 체첸인들의 강제이주는 사전통보 없이 느닷없이 들이닥쳐 강제로 체첸인들을 끌고 갔다. 고려인이 일본의 첩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 명목이었다.[9] 여러 공동체의 지도자들은 추방되고 유배되었고, 이주 도중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강제 이주하는 과정에서 저항하는 이들을 사형시키기도 하고, 또 당시 대단히 열악한 교통 및 거주 여건 때문에 질병이나 굶주림 등으로 사망한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김경천, 김단야, 박진순 등 한국의 대표적인 재 소련지역 독립운동가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일제의 간첩'이라는 죄명으로 1937~1938년 사이 대숙청 시기 희생양이 되었다. 또한, 당시에 추진될려고 했던 고려인 자치지역도 결국에는 백지화되었다.#
그 결과 1937년, 고려인 17만 2481명이 스탈린 정권의 뜻에 따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했고(우즈베키스탄 7만6526명, 카자흐스탄 9만5256명), 1938년까지 4만 명이 사망했다.
강제 이주 당시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다. 연해주에서 고려인들이 다니던 학교의 교사/교수들 중에는 고려인이 아니어서 강제 이주 대상이 아닌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들은 자신들이 가르치던 고려인들을 그대로 떠나보낼 수는 없다며 이주를 자처해서 고려인들과 함께 떠났고, 중앙아시아 현지에서 계속 고려사람들을 가르쳤다. 이들이 카자흐스탄에서 세운 사범학교는, 오늘날,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대학교로 명맥을 잇고 있다. #
고려인이 중앙아시아를 벗어날 수 있게 된 것은 그로부터 수십년이 지난 후였다. 글라스노스트(고르바초프의 개방정책) 이전까지는 이주에 대해 발언하는것조차 금지되었으며 이에 대한 학술적 연구도, 기록도 아예 못했다. 고려인들이 살던 곳에는 우크라이나계를 데려와 이주시켰다.[10]
소련쪽에도 나름대로 변명거리가 있었다. 최근에 비밀해제된 당시 소련 NKVD문서에 의하면 당시 연해주지역에서 일제밀정들이 많이 활약했고, 고려인 중에서도 일제에 협력한 부역자들이 꽤 되었다고 나와 있으니[11] , 소련측이 이유없이 강제이주를 결정한 것은 아니다. 당장 일본군이 연해주에 쳐들어올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으니.
그러면서 이중적이게도 소련은 아시아를 유린하고 침략전쟁을 저지른 일본제국과는 스탈린의 소련이 모스크바에서 소일불가침조약(소일중립조약)을 체결하여 일제 식민지인 조선인에 대해서는 학살을, 일본제국에 대해서는 대등한 중립조약을 맺으며 약육강식의 소련의 이중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1941년의 소일중립조약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소련에게 큰 도움을 제공했다. 일본과의 중립조약 때문에, 소련의 극동지역은 소련의 서부전선에 1941년과 1944년 사이에 25만명의 병력을 제공할 수 있었다. 조약은 또한 소련이 미국의 무기대여법으로 자신들의 자원을 팔아먹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 동시에, 일본도 이 조약을 통해 큰 이익을 보았다. 미국과의 전쟁 동안, 일본은 소련으로부터 4천만톤의 석탄, 1억4천만톤의 목재, 5천만톤의 철, 천만톤의 어류 그리고 시베리아와 소련 극동지방의 금을 공급받았다. 소련과의 무역이 미국과의 전쟁중인 일본군의 전쟁수행에 큰 도움을 줬던 것이다. 소련-일본 중립 조약
또한 2011년 새로운 사실이 공개되었다. 고려인이 소련중앙정부가 소수민족에게 복리증진을 위해 지급하는 지원금을 중앙정부의 의도와는 달리 고국의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기 때문에 이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은 문서가 공개된 것이다. 그래서 소련측에서는 고려인들이 일본에 부역하는 것도 걱정되지만, 또한 이들이 독립운동을 지원해서 일본을 자극할까봐 아예 통째로 먼 곳으로 옮겨버린 것이다. 거기다가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농경에 유능한 고려인들을 이주시켜 성공적으로 정착시킨다면, 중앙아시아 지역 주민의 주류를 이루는 가난한 유목민들도 정착민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에 따라 이 지역의 행정력을 보다 극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소련 당국의 계산도 있었다.[12] 오늘날 중앙아시아튀르크민족들이 정주민화되는 데에는 고려인들이 크게 기여한 셈이다.
이주민들은 협력하여 관개시설을 설치하였고,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그 과정에서 이른바 '마르코프차(Марков-ча)'[13] 혹은 '고려식당근(Морковь по-корейски)'이라는 요리도 탄생했는데, 냉전체제해체이후 이것이 알려지자 '한국에는 한국당근이 없다'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14] 3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을 회복하였다. 또한 당시 고려인들은 소련 경제 시스템에서 전례를 찾아보기 힘든 상당히 독특한 형태의 임차농업 방식인 '고본지' 또는 '고본질'을[15] 통해 괜찮은 수입을 올릴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 임차농업 방식 덕분에 소련내의 한인들은 짭잘한 수입을 올릴 수 있었고 동시에 소련의 국가주도 농업이 내포한 총체적인 비효율성을 개선하는 효과도 함께 낳았다고 한다. 소련 한인들은 어떻게 ‘양파 밭의 제왕’이 되었나
현재도 고려인들은 농업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으며 한러수교 이후에는 한국에서 농업 기술들을 배워가거나 종자들을 러시아로 가져가서 크게 농장을 운영하여 성공하는 경우들도 있다고 한다. 러시아 우랄에서 한인 농사꾼이 짓는 수박 농사
고려말쓰기는 1937년부터 약 10년간 금지되었지만 그 후 금지가 풀려 고려말가르치기도 가능하게 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 한 사범대에서는 60년대까지 고려말학과도 있었다. 실제로 소련지역에서는 '레닌기치'라는 한글신문도 간행이 되었고, 고려말방송, 고려사람극장까지 있었다. 그러나 어디나 그렇듯이 이민 1・2세대는 고려말에 매우 능숙하고 3세대이후의 후손들 사이에서는 잊혀지고있는것이 현실. 그러나 신문따위를 통한 한국과의 교류에 힘을 쓰는 듯하고 나름 전통문화보존에 노력을 하고있다.
이주 후, 척박한 중앙아시아의 환경을 열렬한 교육열과 억척스러운 삶으로 극복, 러시아 소수민족 중 아르메니아인, 독일계 러시아인, 오세트인, 유대인 등등 다음으로 돈과 학식이 있는 민족으로 성장했다.
여담격이지만 7년뒤 강제이주당한 체첸인들과 고려인들의 이주 상황 역시 비교할 만 하다. 일단 고려인들은 일방적이나마 사전 통보를 받았으나 체첸인들은 어느 날 갑자기 소련군이 들이닥쳐 강제로 중앙아시아로 끌고 갔다. 같은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당한 처지라 이들은 서로 접촉할 수 밖에 없었다. 관련 자료가 희박하기는 하나 몇몇 자료에 의하면 고려인들과 체첸인들은 초기에는 충돌이 있기도 했지만 나름 잘 지냈던것으로 보인다. 당시 막 벼재배에 성공했던 고려인들은 체첸인들에게 할수 있는 한 온정을 베풀어주었다. 체첸인들은 산악민족이었기 때문에 농경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많이 뒤떨어져있었는데 이들에게 먹을것도 주고, 농사 짓는법을 가르쳐 주었고 아이들을 거두어 주기도 했으며 체첸인들을 품꾼으로 고용하기도 했다. 체첸인어르신들은 '그때 고려인들이 해준 개고기가 맛있었다' 라고 기억하기도 한다. 스탈린사후, 체첸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갈 때 소수의 고려인들도 그들의 권유로 카프카스지방으로 이주 하였다. 이곳에서 고려인들은 벼농사 대신 야채와 과일농사를 지었고 이들 덕분에 카프카스 지방의 야채와 과일 소비가 늘었다고 한다. 체첸인들도 과거 자신들을 도와준 고려인들에 대해서 자주 감사를 표했고 그래서 그런지 인종과 종교의 각축장인 카프카스에서 고려인들의 이미지는 나쁘지 않다고 한다.[16] 하지만 소련해체후 체첸 사태로 인해 고려인들의 삶의 터전도 파괴 되었고 다른곳으로 떠나는 고려인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90년대까지 카프카스에 거주하던 고려인 인구는 5만까지 늘었던 적이 있으나, 현재는 1000명 미만 남짓한 숫자만이 남아있다,
다만 느닷없이 끌려온 체첸인들은 니키타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게 되자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허가를 받아 대대적으로 고향으로 돌아가지만 사전 통보는 받았었던 고려인들은 소련이 붕괴될 때까지 대대적으로 연해주로 돌아갈 수 없었다.#, # 정확하게 말하자면 거주이전의 자유를 가지게 되었지만 이미 생활터전이 중앙아시아 일대에 묶여있던지라 대대적인 귀환이 힘들었던 것.
독소전쟁이 발발할 당시 고려인도 '소련 국민'으로서 참전하였으나, 그 규모는 크지 않다.# 여전히 고려인 집단을 신뢰하지 못한 스탈린의 의중 때문이었다. 고려인으로 중앙아시아에 끌려간 홍범도 장군이 독소전쟁에 참전했다는 야사가 고려인 사이에 있는데, 사실이 아니며 극장 수위로 일했다. 이는 의병과 독립군으로 큰 전공을 세운 홍범도를 존경한 고려인들이 만든 이야기로 추정한다.
고르바초프 시대에는 한소관계가 개선되면서 북한의 고위층이었다가 8월 종파사건 이후 소련으로 망명한 이상조, 강상호, 정상진 등 탈북 고려인들이 방한하여 북한을 비판하기도 했다.
소련이 붕괴된 이후, 러시아를 비롯하여 중앙아시아 및 기타 지역에 각각 다양한 분포로 퍼져있다. 타지키스탄이나 캅카스에 살던 경우 일부 고려인은 내전에 휘말려 고생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소련이 붕괴된 1991년 당시 이미 절대 다수의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해 한국으로 가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1993년에 러시아 최고연방회의가 강제이주 고려인들을 복권시켰으나, 대통령이 수차례 바뀌고도 사과나 보상대책을 한 번도 시행한 적이 없다. 옛 소련에 속한 독립국들 역시 과거 강제이주에 대한 책임을 회피했고, 당시 당사자들도 서서히 노령으로 사망하고 3세대 이후 젊은이들조차 강제이주 역사와 관련해서 아예 모르거나 '아픈 과거'라며 언급을 꺼리는 터라 강제이주 역사마저 잊혀지게 됐다.(참고)
4. 언어
들어보자
고려인들이 구사하는 한국어는 중앙아시아 한국어 혹은 고려말로 부른다. 하지만 세대가 갈수록 한국과의 인연이 점점 멀어지면서 구사할 수 있는 화자 수는 날로 감소하고 있다. 대개 고려인들의 고향은 함경도 지역이었기 때문에 크게 보면 중앙아시아 한국어는 동북 방언의 한 갈래라고 할 수 있다. 전체적인 틀은 동북 방언이나 육진 방언과 크게 차이가 없다. 다만 100년 이상 격리되었기에 현재 함경도 지역 방언들보다 더 옛스러운 말투들이 많다.
고려인들이 처음 이주한 곳이 러시아의 연해주였고 이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되었는데 당시 소련은 러시아어를 사실상의 공용어로 취급하고 있었다.[17] 그래서 고려인들도 차츰 러시아어를 쓰기 시작하면서 고려말 어휘에 러시아어에서 차용된 어휘들이 많다. 시간이 지날수록 고려인 후손들과 한국과의 인연이 점점 옅어지면서 현재 중앙아시아 한국어는 일부 노인들 정도나 구사할 수 있을 정도로 사멸 위기에 있으며 현재 대부분의 고려인들은 러시아어를 많이 쓴다.
비슷한 처지였던 중국의 한국계 중국인(조선족)들과 비교해도 한국어 화자 수가 크게 감소한 편인데, 한국계 중국인들은 냉전 시절에도 지리적으로 인접한 북한과 교류하면서 그나마 한국어의 존속 및 확대가 더욱 용이했다. 반면 중앙아시아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은 정치적인 문제는 물론이고 지리적으로도 남북한과 너무 멀어서 이러한 교류가 매우 적었다. 그래서 한국어 화자가 빠르게 감소한 것. 오늘날 고려인들이 배우는 한국어는 냉전 종식 이후 이어져온 남한과의 교류에 따른 영향으로 대한민국 표준어인 경우가 많으며, 그에 따라 젊은 고려인들 중 그나마 한국어가 유창한 이들도 대한민국 표준어를 쓰지 조상의 언어인 중앙아시아 한국어나 동북 방언을 쓰지는 않는다.
5. 무국적자 문제
소련 붕괴 이전의 고려인들은 출신지가 조선인이었다. 당시 소련은 다양한 국가들의 강제 연합체였기에 소수민족 배척이 적었으며, 이에 소련의 한 축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소련 붕괴 이후 정보 불충분, 서류 분실, 경제적인 문제 등으로 인해 많은 고려인들이 국적 취득 신청을 하지 못하였다. 이로 인해 과거 소련 지역에 현재 전체 고려인의 12%에 해당하는 약 5만의 무국적 고려인이 거주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은 교육을 비롯한 기본적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으며, 이러한 불이익은 그 자손들에게 그대로 이어지고 있는 실정.
무국적자의 자녀는 무국적자가 되며, 이 경우 혼인 후 배우자의 국적을 획득하는 방법이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거주하게 될 경우 무비자로 입국하게 되는데, 무비자 상태로는 경제적 생산활동에 제약을 받게 된다. 출처
우크라이나에서는 한국 대사관의 신분 증명이 있다면 자국 내 무국적 고려인의 국적 회복을 지원해줄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18]
6. 규모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과 연해주(블라디보스토크) 지역에 주로 밀집해 있다. 원래는 대부분 연해주에 살았지만 거의 다 강제이주당했고, 현재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은 중앙아시아에 갔다가 이주 제한이 풀린 뒤 다시 이주해온 것이다. 구소련 붕괴 후 중앙아시아 독립 국가들의 민족주의 성향이 강해지면서 외지인인 고려인들을 박대하고 자민족을 우대하는 경향이 커지자 그나마 고려인들에게 익숙한 지역인 연해주로 돌아오는 것. 러시아 측에서도 인구 증가에 도움이 되므로 연해주로 이주하는 고려인들에게 정착비를 주는 등의 지원을 하고 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연해주 지역으로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중국에 맞서 고려인들로 균형을 맞추려는 시도이고 그런 면에서 통일 한국을 통한 경협에 적극적인 입장이다.
구소련 때까지만해도 살기 나쁘지 않았던 우즈베키스탄이 독립 이후로 한 동안 경제적으로 사정이 나빠졌고 경제적인 혼란이 수습된 이후로도 사정이 그리 좋지 않은지라, 많은 고려인들은 삶의 질이 더 좋은 카자흐스탄, 러시아로 떠나는 추세다. 한국에 정착한 연해주 출신 고려인 영주귀국자들은 대부분 파주시 문산읍에 자리를 잡은 상태다. 파주에서는 매년 가을 사할린 어르신 축제가 열린다.
그 외에 사할린 섬에도 한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이는 과거 일제강점기 당시 탄광 지역에 강제징용당한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러일전쟁으로 얻었던 북위 50도선 이하 사할린의 탄광에 강제 이주당했다가 일제의 패망 이후 이 지역이 러시아령으로 회복되면서 고려인이 된 것이기 때문에, 이주 원인은 중앙아시아 고려인보다는 재일교포의 경우에 더 가깝다. 실제로 중앙아시아 고려인은 주로 한반도 북부 출신, 사할린 한인은 한반도 남부 출신이 많다고 한다. 사할린 한인 문서 참고.
7. 유명 고려인들
7.1. 군인, 정치인
- 김병화 - 구소련 집단 농장 지도자로, 척박한 사막을 한때 소련에서 제일 가는 생산력을 가진 집단 농장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공적으로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무려 2번 받고 4번의 레닌훈장을 받았다.
- 남일 - 소련군 참모장교를 하다가 돌아와 인민군 총참모장을 했다. 일설에 소련군 장교로 독소전, 베를린 공방전에 참전했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문서가 발굴되며 허구로 드러났다. 러시아 교사출신
- 뱌체슬라프 킴 - 흑해함대 부사령관을 지낸 제독.
- 세르게이 텐 - 러시아의 하원의원.
- 알렉산드르 민 - 소련군 대위. 보병 연대 지휘관으로써 총 9번의 독일군 공습을 격퇴하고 우크라이나 볼린 주 해방에 기여한 공적으로 고려인으로써 유일하게 소비에트연방영웅 칭호를 추서받았다.
- 알렉세이 초이 - 현 카자흐스탄 보건부 장관
- 올레그 초이 - 전투기 조종사 출신으로 수호이 설계국 수석 테스트 파일럿을 역임하였다. 주요 서훈 내역으로 러시아연방영웅이 있다.
- 올렉산드르 신 - 우크라이나의 정치인. 2010년부터 2015년까지 우크라이나 동부의 자포로제 시장을 역임했다. 당선 당시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소속된 친러 정당이었던 '지역당' 소속이었으나 유로마이단이 벌어지면서 2014년 2월 24일 당에서 축출당하고 사임을 종용받는다. 당시 친러 정당 소속이라면서 반 야누코비치 세력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유로마이단 세력의 지지를 얻은 그는 사임을 거부했고 1년 더 재임할 수 있었다. 이듬해 무소속으로 시장 선거에 출마하였으나 재선에 실패했다. 현재는 율리야 티모셴코 전 총리가 이끄는 조국당과 협력 관계(정당 가입은 하지 않은 것으로 보임)에 있다.
- 유리 파블로비치 엠 - 공수군 복무.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남오세티아 전쟁, 압하지아 전쟁, 체첸 사태 등 다수 참전하여 최종계급 소장으로 2011년에 전역하였다. 전역 후 통합 러시아당 소속의 국회의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주요 서훈 내역으로 러시아연방영웅이 있다.
- 허가이 - 북한 정권 수립 당시 소련파의 거물 정치인이었으나, 김일성에게 비판 받고 자살하였다.
- 홍범도 - 1911년 러시아 제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하였고, 후에 대표적인 고려인 지도자로 활동하다 1938년에 카자흐스탄 SSR로 강제이주당하여 그곳에서 수위장으로 말년을 보내다가 사망.
- 황동국 -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2년 9월 자원입대하여 대전차포병으로 참전했다. 천왕성 작전의 연장선상에 있는 로스토프-나-도누 해방전, 그리고 이후 폴란드 해방 작전에 참전.#
7.2. 기업인
- 블라디미르 킴 - 기업가. 광산업체인 카작무스의 회장을 역임했다. 2018년 포브스에 따르면 26억 달러의 재산으로 세계 부호 순위 766위에 올랐다.
- 타티야나 바칼추크 - 결혼 전 성씨는 김. 러시아 최대의 온라인 쇼핑몰인 와일드베리즈의 사장. 현재 러시아 최고의 여성 부호로 꼽힌다.
- 발렌틴 파크 - 러시아의 기업가. 연해주고려인연합회의 회장이고 국제고려인통일연합회의 회장이기도 했다. 남북한 사진을 넣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1#2
- 비아체슬라프 킴 - 카자흐스탄의 기업가. 카자흐스탄 최대의 은행인 카스피방크의 회장이다.
- 이고르 킴 - 러시아의 기업가. 러시아와 동유럽에 지점들을 두고 있는 다국적 은행인 엑스포방크의 회장이다.
7.3. 학술인
- 드미트리 페트로비치 킴 - 러시아의 제어공학 교수, 엔지니어
- 알렉산드르 키이로비치 킴 - 러시아의 컴퓨터 공학자, 모스크바 스팍 기술센터 대표이사[19]
7.4. 문화예술인
- 박유리 - 프로듀스 X 101의 참가자. 러시아 쿼터 혼혈이며 러시아 국적이었지만 현재는 한국으로 귀화했다.
- 빅토르 초이 - 고려인 아버지와 우크라이나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소련 가수.
- 변월룡 - 화가. 러시아어 이름은 펜 바를렌(Пен Варлен)이다.
- 비타 칸 -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 출신으로 러시아 쿼터 혼혈의 고려인이다. 2012년에 온스타일 에서 방영했던 이영진 진행의 헬로우 러시아에서 우승한 모델. 현재 런던, 뉴욕 등에서 활발하게 활동 하고 있는 현직 모델이다. 최근 한국 에이전시와도 계약하여 한국에서도 활동 중이다.
- 아나톨리 킴 - 카자흐 SSR에 출생하였으나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작가이다. 《푸른 섬》, 《연꽃》으로 인해 소련 문단에서 주목받은 바 있으며, 국내에 정발된 소설로는 《다람쥐》, 《아버지 숲》이 있다.
- 아나톨리 초이 - 카자흐스탄 출신인 MBAND의 멤버.
- 아니타 초이 - 러시아에서 활동하는 고려인 세 가수다. 위에 등록된 빅토르 초이와는 혈연관계가 없으며, 그저 초이라는 성씨를 가진 고려인 정치인과 결혼하며 성이 바뀐 케이스.
- 엘레나 안 - 러시아 여배우로 러시아+고려인 혼혈이다.
- 정추 - 카자흐스탄의 음악가. 러시아어 이름은 텐 추(Тен Чу)이다.
- 조명희 - 충청북도 진천군 출신의 문학인. 일제의 탄압을 피해 연해주로 망명하였다. 이후 신문과 잡지 편집을 통해 '망명 문단'을 주도하였고 교편을 잡아 후학을 양성했기 때문에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인물이다. 소련작가동맹(СП СССР)의 맹원으로 작품 활동을 이어갔지만, 1938년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과정 가운데 간첩 누명으로 총살형을 당했고 흐루쇼프 정권기인 1956년에 복권됐다. 러시아어 이름은 툐 멘히(Тё Мен Хи)이다.
- 폴리나 보구세비치 - 주니어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2017 우승자
7.5. 체육인
- 게나디 골로프킨 - 카자흐스탄 출신 복싱 WBA 미들급 세계 챔피언. 어머니가 한국인으로 알려졌으나 최근 인터뷰에서 한국인 외할아버지와 러시아인 외할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고려인으로 밝혀졌다.
- 넬리 김 - 소련의 고려인 2세 아버지와 불가 타타르족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체조선수. 단체전 2개를 합쳐서 1976 몬트리올 올림픽, 1980 모스크바 올림픽에서 금메달 5개를 땄다.
- 데니스 텐 - 카자흐스탄의 남자 싱글 피겨 스케이팅 선수. 2014 소치 동계올림픽 동메달리스트. 의병장 민긍호 선생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안타깝게도 2018년 7월 19일 괴한의 피습으로 향년 25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하였다.
- 막심 김 - 러시아 팀인 Empire의 도타 2 프로게이머. TI에도 진출한 적이 있는 선수다.
- 미하일 안 - 소련의 축구선수. 소련 U-23 대표팀 주장을 맡았고, A매치에도 출장했던 촉망받는 선수였으나 비행기 사고를 당해 26세의 나이로 요절했다.
- 알렉세이 김 -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출신의 그랜드 마스터 체스 선수. 2005년 대한민국으로 귀화하였다.
- 야코브 칸 - 러시아의 가라테 챔피언이었으나 2003년 11월 15일에 네오 나치인 6명의 스킨헤드에 의해 피살되었다.
- 코스챠 추 - 고려인 3세. 소련 복싱 대표로 활약. 프로 전향 후 WBC, IBF 슈퍼라이트급 챔피언에 등극. 현재 복싱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되었다. 전적은 34전 31승 25KO 2패 1무효.
7.6. 신고려인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나 CIS 국적을 취득한 한국인.
8. 정체성
고려인의 정체성을 특정하기는 어렵다. 개개인마다의 차이가 있기 때문. 현대 젊은층의 경우는 '''한국어를 전혀 구사하지 못하지만''', 자신의 민족이 고려인이라는 자각은 하고 있다. 사실 우즈베키스탄이나 카자흐스탄의 경우 여권에 민족명을 표기하므로 당연히 그럴 수 밖에 없다.
대부분 고려인들의 경우 모국어가 러시아어이다. 고려인들의 이름 역시 거의 모두 러시아식 이름을 사용한다. 따라서 외적인 정체성 면에서는 러시아인에 가깝다. 그러나 문제는 1991년 소련이 해체되고 각 연방 구성국이 독립하면서 더 이상 러시아어를 공용어로 쓰지 않는 점이다. 때문에 소련시절 관공서에 종사하던 고려인 상당수가 소련 해체 이후 쫓겨나는 등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고려인들의 외적인 정체성은 자의가 아닌 스탈린에 의해 형성된 것으로, 스탈린은 고려인의 정체성을 말살시키기 위해 한국어 사용 및 교육과 함께 학교 마저도 설립을 금지했다. 하지만 내적으로는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고 있는데 설과 추석에는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며 평소에는 김치와 함께 한국식 음식을 만들어 먹는다. 또한 자신들의 강제이주 역사와 독립운동의 역사를 기념하기 위해 위령탑과 기념비등을 세웠다.
현재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들 대부분은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 독립 후 새로 지정된 현지 공용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스스로를 러시아인에 가깝다고 생각하여 우월의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현지어를 배우기 위해 별로 노력하지도 않는다. 뭐 아직까지 이쪽 지역에서는 러시아어만 잘하면 생활에는 문제가 없기도 하고. 아니 오히려 일상생활에서는 러시아어가 더 중요하다.
또한 소련 해체 후 지역 민족주의가 대두하면서 여러 심한 차별을 받게 된 고려인 중에는 연해주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연해주를 자신이나 부모의 '고향'으로 여기는 노인들, 다른 곳에서 희망을 찾아보려는 젊은 고려인들 가운데 이런 경향이 있다고 하는데 이들의 정착을 지원하는 한국 사회단체의 지원상황이 다큐형식으로 한국TV에서 방송된 적 있다. # 비슷한 처지의 또다른 일부 고려인들은 러시아어 외에 카자흐어, 우즈베크어 등 현지 공용어를 배우는 경우가 존재한다.
고려인 젊은이들은 한국을 '할아버지의 나라' 정도로 여기고 있다고 한다. 한국어는커녕 고려말도 제대로 못하는 젊은이들이 부지기수. 그래도 다른 러시아 젊은이들이 "한국? 그게 어디있는 나라인가염?" 하고 말하는 것과는 달리 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인지는 하고 있다고 한다. 거기에 좀 노력을 한 후손들의 경우에는 한국으로 일하러, 혹은 유학으로 오는 케이스도 있다.
고려인들은 언어적인 측면 등 러시아 문화에 동화된 부분도 많지만 상술한 한국 당근을 비롯해 한국 요리의 식습관을 지켜나가고 있다. 우즈벡이나 카자흐스탄의 좀 큰 시장에 가면 분명히 어딘가에는 고려인 반찬 가게도 있으며 '''국시''' 같은 이름의 요리도 찾아볼 수 있다.[20] 단 고려인들의 한국 요리는 백여 년 전 옛날 스타일에 가깝기 때문에 지금 대한민국(남한)의 요리와 상당히 다르다. 게다가 고려인들의 한국 요리는 북부지방 베이스, 남한의 한국 요리는 중남부지방 베이스인데다 식재료도 중앙아시아의 상이한 식재료들로 만든 것이라 더욱 다르다. 가령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김치에는 구하기도 어려운(어려웠던) 젓갈을 거의 넣지 않으며 맵고 짠 맛도 덜하다. 그래서 요즘엔 우즈벡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많이 오는데 그 사람들이 우즈벡에 돌아간 후 주변에 사는 현지 고려인들에게 이런저런 한국 요리가 맛있더라, 오랜만에 먹어보게 한 번 만들어달라고 하면 정작 그 고려인들은 생판 처음 듣는 음식 이름이거나 시래기국, 국수 같이 이름은 같은데 막상 받아보면 완전히 다른 음식이라서 오히려 우즈벡 사람들이 당황해하는 사례가 많이 일어나고 있다. 만일 고려인들의 음식이 궁금하다면 안산역에서 멀지 않은 선부동의 땟골을 방문해보는 것도 좋다. 이 지역에는 고려인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있다. 거리에서 들리는 말도 거의 러시아어이고 간판의 글자들도 러시아어가 대부분이다.[21] 한국에서는 경기도 안산 땟골사거리의 우갈록과 서울 동대문 임페리아 마켓에서 고려인 음식을 맛볼 수 있다. 러시아 음식도 같이 판매하고 있는데, 국시(кукси), 닭고기해(кя хе), 피고자(пегодя), 편수(пянсе) 등이 고려인에서 유래한 음식이다.
고려인에 대하여 한국 미디어에서 그렇게 크게 다룬 것은 없다. 따로 자치지역을 가지고 있는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인구가 특별히 많은것도 아닌데다가 아무래도 고려인 3-4세대 즈음 되면 한국어를 구사하지 못해 현대 한국인 가운데 러시아에 익숙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다는 점도 있기 때문에 존재감이 약하기 때문이다 1995년에 까레이스키라는 고려인을 다룬 드라마는 있었고, 당시 MBC에서 제2의 여명의 눈동자를 꿈꾸면서 엄청나게 밀어주던 드라마로 드라마 자체는 그럭저럭 볼만했다는 평이었는데 하필이면 '''모래시계(드라마)'''와 장녹수에 밀려서 대차게 말아먹었다, 허영만의 만화 아스팔트 사나이에서 악역인 고려인이 나오는데 러시아에 진출하던 천마 모터스에 대하여 훼방놓던 라이벌 기룡 모터스에게 매수당했던 것. 주인공 이강토가 난데없이 한국인으로서 긍지도 없냐고 하자 이 사람은 "난 한국을 조국으로 여겨본 적도 없는데 뭔 소리야?"라고 응수하는데 극중 얼음물에 빠져 익사한다. 이를 두고 한국만화의 이해라는 90년대 책자에선 민족주의에 치우쳤다고 비판한 바 있다.
2018년 12월 14일 한국외대 중앙아시아연구소가 개최한 포럼에서 고려인들의 정체성이 사라지고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고 통합단체를 출범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재한고려인 지원단체인 '너머'는 고려인들의 한국정착을 위해서는 한국어교육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고려인을 귀환자로 맞이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인해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 민족학교가 재정위기를 겪고 있다.#
소설가 김숙은 정착지서 쫓겨나 고통 겪는 고려인의 삶을 소설로 계속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사진작가 정성태는 고려인과 관련된 사진전시회를 개최하면서 강제이주 후 향수 간절한 고려인의 삶을 기록하기 위해 사진전시회를 개최했다고 밝혔다.#
9. 대중매체 속 고려인
9.1. 드라마 <까레이스키>
항목 참고
9.2. 하나안
감독 박루슬란이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 4세이다.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영화를 제작했다고 한다.
고려인 4세 '스타쓰(스타니슬라프)'의 인생을 바탕으로 한 내용으로 고아인 스타쓰는 주차장 관리일을 하며 불량학생들과 어울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학업의 끈을 놓지 않았고, 결국 꿈꾸던 마약단속 형사가 된다. 하지만 경찰서에서의 부정부패에 환멸감을 느끼고 그만두고 결국 자신이 마약중독자가 되어버린다. 어찌저찌 결국 마약에서 벗어나 영화 제목인 '하나안', 한국으로 가지만 그곳에서 다시 마약과 얽히게 된다.
고려인에 관한 내용보다는 마약과 방황, 부정부패에 관한 내용이 주를 이룬다. 남자주인공 또한 고려인 4세이며, 첫 영화작품이었다고 한다.
캐나다 토론토영화제에 초청되었고, 하와이 영화제 아시아 영화진흥기구상, 대만의 타이페이영화제 최우수 신인감동상 수상을 수상했다.
하나한 공식 SNS계정
9.3. 모바일 게임 소녀전선
안젤리아라는 고려인 캐릭터가 등장한다. 본명은 "안나 빅토로브나 최".
10. 오해
10.1. 중앙아시아의 황인들은 고려인이다?
한국의 인터넷에서는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등 중앙아시아 사람들 중 황인이거나 황인 외모에 가까운 사람들[22] 을 보고 고려인일거라고 섯불리 단정 짓는 경우가 은근히 자주 보이는 편이다. 가령 카자흐스탄의 배구 선수인 사비나 알틴베코바의 사진을 보고 고려인이 아닐까하고 추측하는 반응들은 물론이고[23] , 슬라브계 백인이 아닌 우즈벡인을 보고 고려인으로 단정 짓는 반응이 그 예시.[24]
이런 착각은 중앙아시아를 슬라브계 백인종의 세계로 단정짓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가령 한국 인터넷에서 소위 우즈베키스탄 미녀라고 떠돌던 사진들도 다수가 슬라브계 여성 사진인 것도 이런 오해를 부채질한다.[25]
그러나 현실은 일부 사람들의 착각과 전혀 다르다. 애초에 중앙아시아는 슬라브계 백인의 터전이 아니며 튀르크계 황인 또는 황백혼혈이 다수이다. 중앙아시아에서 보이는 유럽계 백인들의 정체는 19세기 이후인 제정 러시아, 소련 시절 중앙아시아로 이주해온 러시아인들과 소수의 우크라이나인, 독일계 러시아인, 폴란드계 러시아인 등의 후손이다. 이들은 중앙아시아 각국에서 소수민족이다. 물론 고대에는 슬라브계는 아니지만 같은 백인 인종인 이란계 유목민들이 중앙아시아를 지배했으나, 몽골 고원 및 만주 서부에서 지내던 튀르크인들이 지속적으로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면서 결국 오늘날처럼 타지크인 및 슬라브계 이주민들을 제외한 중앙아시아 주민 대다수가 튀르크계 황인 혈통이 된 것이다.
카자흐스탄 인구의 63%를 차지하고 있는 카자흐인은 튀르크계 민족이자 몽골계 혼혈로 전형적인 북방 황인종의 외형을 가지고 있다. 카자흐스탄 인구가 1850만명인데 고려인의 수는 10만명에도 못미친다. 키르기스스탄 역시 황인인 키르기스인 비율이 전 인구 중 68%다. '''고려인이 가장 많이 산다는 우즈베키스탄 역시 3000만명의 우즈베키스탄 인구 중 고려인의 수는 20만명에 못 미쳐 우즈베키스탄 전체 인구 중 1% 미만이다.''' 당장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나 이슬롬 카리모프의 사진만 봐도 잘 쳐줘야 황백혼혈 얼굴이다. 즉, 중앙아시아에서 보이는 황인들은 고려인이 아닐 확률이 압도적으로 높은 것이다.
물론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황인들의 외모는 엄밀히 말하자면 고려인 등 한국계보다는 옆동네인 독립국가 몽골의 할하인 등 몽골 제민족들과 더 비슷한 편이다. 몽골 제민족과 튀르크 제민족은 DNA상으로 매우 가깝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완벽한 황인 외모를 가진 원시 튀르크인인 카자흐인과 키르기스인은 같은 순수 황인 민족인 몽골 제민족[26] 을 닮았으며, 황백혼혈 튀르크인인 우즈베크인과 투르크멘인은 같은 황백혼혈 튀르크인인 위구르족과 외모가 비슷하다. 소련의 중앙아시아 공화국 5개 민족[27] 중 타지크인만이 유일하게 튀르크계 황인이 아닌 페르시아계 백인이다.[28]
11. 고려인 거주지 현황
12. 여담
현 카자흐스탄 내 고려인들은 한국의 후손이면서 카자흐스탄의 국민이라는 두가지 정체성을 지녔다고 한다.
고려극장은 카자흐스탄 정부의 지원 예산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문화정책 방향을 따라야한다. 1932년 연해주에 설립되어 2016년 카자흐스탄 정부로부터 아카데미 칭호를 받았다. 해외에서 설립된 한인 공연단체 중 그 역사가 가장 깊고 그렇기에 단원들 96명 중 대부분이 고려인이며 민족예술사의 산증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과거에는 고려인 4세는 재외동포법상 동포가 아닌 '외국인'으로 분류되며 이에 국내 장기 체류가 불가했었다. 2019년 6월까지 한시적으로 조치를 취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고려인 부모가 한국에 거주해야하는 조건이 있다. 그래서 고려인 4세가 개인적으로 한국에 거주하기 위해서는 단기방문 비자로 3개월마다 해당국과 한국 왕복을 반복해야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2019년 7월에 기존의 동포 3세대까지만 재외동포로 인정하던 법률이 개정되어 '''전체비속'''으로 확대되었다. '''고려인 4세, 5세도 법적으로 재외동포로 인정되어 한국 거주가 가능해졌다.''' 해당 뉴스
과거 정치적 성향의 유사성으로 공산주의인 친북성향이 존재했지만, 이후 대한민국 기업의 투자와 제품유입으로 친남한 성향이 강해졌다고 한다. 사실 연해주의 위치를 생각해 볼때 고려인들의 언어나 문화가 아무래도 북한쪽과 더 가까운 것은 사실이고[29] 그런 점이 친북성향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다 소련 붕괴 이후 오히려 대한민국에서 고려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며 이러한 반전이 일어났다고 볼 수 있다.
한러수교 30주년을 맞이해 우수리스크의 김 발레리야 고려인 민족학교 교장은 고려인들이 한러간의 가교를 잇고 있다고 밝혔다.#
13. 관련 문서
[1] 한국어 '고려 사람'을 그대로 음역한 표현이다. 강세를 살린 발음은 'Корё-сара́м [kɐˈrʲɵ sɐˈram\](카료사람)'에 가깝다.[2] 다수가 사할린 및 극동지방에 거주한다.[3] 그 중 대부분이 우즈베키스탄과 카자흐스탄에 거주한다.[4] 당연히 일본 땅이었던 사할린에는 일본인도 많았는데, 이들은 인구교환협정을 거쳐 99%가 철수했다.[5] 모 시사잡지에서 소련 붕괴 이후의 사할린 한민족 사회를 취재한 바 있는데, 이들은 이북 5도 출신이 많은 중앙아시아의 고려인들의 정착과정과 달리 대부분 영호남에 뿌리를 두고 있어서 분단 이후 북한 이주를 선택하기도 어려웠고, '''일본 제국주의의 앞잡이'''로서 재교육이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소비에트 정부가 중앙아시아에서 데려와 파견한 고려인들에 대해 왜인지는 모르지만 뿌리 깊은 원한이 있다고 한다.[6] 때문에 러시아어로 '대한민국'은 'Корейская Республика'로 번역하기도 한다.[7] 조선족 문서를 보면 알겠지만 중국어에서 '조선족'이라는 표현은 한민족계를 통칭하는 명칭이다.[8] 1863년이냐 64년이냐는 약간의 논쟁이 있다.[9] 원래는 유대인들의 이주계획이 잡혀있었지만 근성의 로비와 일본에 대한 위협 강조로 고려인들이 선택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실제로 당시 유대인과 고려인들은 지역경제권 문제로 마찰이 잦았다.[10] 그래서 연해주를 비롯한 극동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체 인구에서 우크라이나계의 비중이 의외로 적지 않다.[11] 당시 국제정세는 매우 험악했고 이로부터 2년 후에는 소련군-일본군이 대규모로 맞붙는 할힌골 전투가 벌어지는 등 소련이 과민반응을 보일 만한 정황은 있었다.[12] 예나 지금이나 떠도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행정에 있어 심각한 지장이 초래된다. 인구 파악, 조세 수취, 인프라 구축 등을 하는 데 난항을 겪기 때문이다.[13] '마르꼬프채'로도 알려져 있다.[14] 그러나 사실은 함경도에서 당근을 절여서 발효시킨 지(김치)가 원래 있었고 러시아에는 가까운 함경도 지역 사람들이 많이 이주하여 담아 먹었기 때문에 당근 지가 러시아와 동구권의 일상 음식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15] '고본'이란 여러 사람이 공동으로 하는 사업에 각자 내놓는 밑천을 뜻한다. '질'은 어떤 행위를 뜻하는 한국어 접미사다.[16] 2차 체첸전쟁 당시, 체첸반군들이 버스를 납치했는데 거기 타고 있던 두명의 고려인을 보고선 ''''소란을 부려서 정말 죄송하다''''며 정중하게 사과를 한 뒤 고려인들만 풀어주었다고 한다.[17] 소련엔 공식적으론 공용어 같은 건 없었다. 왜냐하면 소련은 만민평등을 지향하는 공산주의 국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형식적으로만 그런 것이고 실제로는 15개 구성국 중에서 러시아가 가장 면적도 넓고 인구도 많은 데다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가 곧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이기도 했기 때문에 사실상 러시아어가 공용어로 취급되었다.[18] 2006년 1월 4일에 방영된 KBS 추적60분에서도 무국적자 고려인에 대해 다룬 적 있었다.[19] 옐브루스 프로세서, ARM(CPU), 스팍(SPARC) 등 CPU 개발 회사[20] 참고로 이 국시를 다른 사람도 아닌 냉장고를 부탁해에 출연했던 요리사인 미카엘이 구현해낸 적이 있다. 정확히는 오리지널 그대로는 아니고 배운걸 주제에 따라 어느정도 응용한 것이긴 하지만.[21] 정부 주관으로 한 때 고려인들의 영구 귀국이 이뤄져 안산 지역에 집성 아파트촌 등이 생겼다. 다만, 이조차도 1세대 본인에 한정해 혜택을 준지라, 2, 3세대는 한국 국적을 얻지 못 하는 기가 막힌 사태도 있었다.[22] 카자흐인, 키르기스인 등.[23] 카자흐인이다.[24] 사실 생물학적으로 따지면 우즈베키스탄의 타타르계 무슬림들도 슬라브계 백인에 해당된다. 단지 우즈베키스탄 내에서는 주류 민족이 아닐 뿐.[25] 우즈베키스탄의 백인 대다수는 이란계 민족인 타지크인이다. 카자흐스탄의 백인 대다수가 러시아계인 것과는 대조적이다.[26] 모골인은 제외. 이쪽은 파슈툰인, 타지크인 등 아프가니스탄 현지의 백인 민족들과 지속적으로 혼혈되어 전형적인 중동계, 남아시아계 백인의 외모에 가깝다.[27] 카자흐, 우즈베크, 투르크멘, 키르기스, 타지크[28] 당장 타지크어도 어원이 비슷한 페르시아어를 소련 시절에 키릴 문자로 어느 정도 변형한 수준이다. 다만 우즈베키스탄과 투르크메니스탄에서는 라틴 문자로 타지크어를 표기하며, 아프가니스탄에서는 아랍 문자로 타지크어를 표기한다.[29] 언어도 동북 방언과 가장 유사하고 식문화도 이북 식문화와 유사하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