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브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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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Calabria
이탈리아 서남부의 지명으로 중심 도시는 카탄차로다. 장화의 코에 해당하는 반도 지역을 가리킨다. 인구는 1,947,000명(2019)이다. 비록 현재는 이탈리아어가 통용되지만 과거 그리스인이 주민의 대다수이던 역사를 반영하듯 그리스어 단어가 많이 남아있다. 동로마 제국의 역사를 훑어보면 이 지역이 자주 언급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낙후된 지역이며, 남부 이탈리아에 위치한 곳답게 이 곳 역시 마피아들이 득시글거리는 위험한 동네다. 이탈리아에서 악명 높은 마피아 조직들중 하나인 은드랑게타의 본거지가 바로 칼라브리아에 있다. 마피아와 지방정부의 유착이 매우 심하다. 이탈리아의 유명 축구 선수 빈첸초 이아퀸타도 이 곳 출신인데 그 역시 은드랑게타의 조직원 중 한 명이었으며 단순히 일개 조직원 정도가 아니라 고유한 코드네임까지 있을 정도로 간부급 인물임이 밝혀지면서 이탈리아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이탈리아의 마피아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알수 있는 사례중 하나다.
고대 로마 시대에는 칼라브리아가 장화 발등 지역이 아닌 장화 발뒤꿈치, 타란토 동남쪽의 살렌토 지방을 일컫는 명칭이었다. 현재의 칼라브리아 지방은 고대에는 브루티움이라고 불렸다. 이 지역 원주민이었던 브루티 족에서 따온 이름.
이탈리아라는 지명은 원래 이 칼라브리아의 남쪽, 장화 발부리 지역을 가리키던 말이다. 로마가 이 지역을 점령한 이후 점점 확장되어 반도 전체를 뜻하게 되었다.
2. 역사
마그나 그라이키아의 일부로서 고대부터 그리스인들이 대거 정착하였고 지금도 군데군데 남아있는 신전 유적이 그 흔적이다. 시칠리아의 아가토클레스와 에피로스의 피로스 대왕의 침공을 받기도 하였는데, 결국은 로마의 지배 하에 놓였다. 제2차 포에니 전쟁에서 한니발이 칸나이 전투에서 로마에게 압승하자 지역 주민들 대다수가 한니발 편을 들었고, 전쟁 말엽 한니발이 점점 불리해진 후에는 그의 본거지 역할을 수행했다. 한니발이 이탈리아 땅을 떠나기 직전 자신의 업적을 신전에 새긴 것도 칼라브리아의 크로톤에서였으며, 최후의 자마 전투에서 전멸한 한니발의 정예 상당수가 이 지역 원주민인 브루티 인들이었을 정도. 전쟁 이후 다시 로마의 지배 아래 놓였다. 서기 410년에는 로마를 약탈하고 북아프리카 원정을 준비하던 서고트족의 알라리크가 말라리아에 걸려 코센티아 (코센차)에서 사망하기도 하였다. 한편, 동고트 왕국 시대의 로마인 관료 카시오도루스도 이 지역 출신이다.
칼라브리아는 6세기 중반부터 1070년경까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아 정교회의 흔적도 남아있다. 동로마 제국의 나머지 부분과 달리 칼라브리아는 별다른 침공이나 내전을 겪지 않았다. 9세기-10세기에 아랍인들이 가끔 약탈한 정도가 전부일 뿐이었다. (그에 반하여 타란토 만 건너의 아풀리아에는 바리 토후국이 세워지기도 하였다) 평화와 안정이 지속되며 칼라브리아에는 스틸로를 중삼으로 비잔티움 성당과 수도원이 세워졌다.
11세기 말엽, 칼라브리아는 아풀리아, 시라쿠사 일대와 함께 시칠리아 왕국의 지배에 가장 완강히 저항한 지역 중 하나였다. 비록 결국은 진압되고 정교회 성당들은 가톨릭 성당이 되었지만, 칼라브리아는 시칠리아와 함께 북유럽과 레반트 간의 중계 교통로가 되며 십자군 전쟁기에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15세기 이후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레고리력을 만든 과학자 루이지가 이곳 출신으로 고장을 빛냈다. 이후 나폴리 왕국, 양시칠리아 왕국의 영토로 있다가 1861년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되었다.
2차 세계대전에서는 이 앞바다에서 칼라브리아 해전이 일어났다. 이 전투는 전함 간 최장거리 명중탄을 낸 전투로 기억되고 있다.
3. 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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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센차의 모습.
대체적으로 산이 많은 지형이다.
4. 주요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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