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시칠리아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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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세기 전반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왕국으로 수도는 나폴리였다.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이 합쳐 세워지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나폴리 왕국은 원래 시칠리아 왕국의 영토였으나 시칠리아의 만종 사건으로 분리되어 통칭 나폴리 왕국으로 불려 왔지만 공식 명칭은 시칠리아 왕국을 유지했기 때문에 양(Due)시칠리아 왕국이 된 것이다. 사르데냐 섬을 제외하면 영토가 현대에 남부 이탈리아로 분류되는 지역과 거의 일치한다.
1808년 조아킴 뮈라가 '양시칠리아 왕국' 의 국왕으로 세워지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몰락하면서 이전에 나폴리를 다스렸던 부르봉 왕가가 대신하여 양시칠리아 국왕이 된다.
리소르지멘토로 통일된 이탈리아의 여러 국가들 중 가장 큰 규모였으며 사르데냐 왕국 정도는 찍어누르는 인구와 면적을 가졌으나 농업 위주 경제와 높은 교회 소유 토지 비율, 높은 문맹율 등으로 내실이 빈약했기에 허무하게 무너졌다.
1860년 4월 시칠리아에서는 부르봉 왕가에 대한 마치니 파의 반란이 일어났으나 실패하였다. 그러나 5월 가리발디의 붉은 셔츠단 천여명(이른바 천인대라고 한다.)이 시칠리아 섬에 진격, 팔레르모(Palermo)를 점령하고 9월에 나폴리에 입성하였고 가리발디의 나폴리 점령에 호응해 나폴리로 남하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와 사르데냐군은 가리발디가 자신이 점령한 영토를 모두 국왕에게 바치면서 이탈리아 남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10월에 실시한 주민투표에서 압도적인 표차로 사르데냐와의 통합 결정이 나면서 양시칠리아 왕국은 사르데냐 왕국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국왕 프란체스코 2세는 가리발디가 나폴리로 진격해오자 나폴리 북쪽에 위치한 천혜의 요새인 가에타(Gaeta) 요새인 도망쳐 농성했으나 결국 대세를 버티지 못하고 1861년 2월 가에타를 포기하고 교황령으로 망명하면서 완전히 멸망했다.
2. 역대 국왕
- 페르디난도 1세(1816년~1825년)
- 프란체스코 1세(1825년~1830년)
- 페르디난도 2세(1830년~1859년)
- 프란체스코 2세(1859년~1861년)
3. 멸망 이후 왕가
프란체스코 2세의 이복 동생의 아들인 페르디난도 피오(Ferdinando Pio)가 1960년 사망하면서 두 계통(카스트로 계통, 칼라브리아 계통)으로 분열된다. 페르디난도 피오의 큰동생 카를로스(1870년~1949년)가 스페인의 공주 마리아 데 라스 메르세데스[3] 와 결혼하기 위해 1900년에 양시칠리아 왕위 계승권을 포기하였는데, 1960년 당시 생존해 있던 최고령 형제인 라니에리가 당주 자리를 계승하자 카를로스의 아들 알폰소가 60년 만에 양시칠리아 왕위 계승권을 다시 주장하고 나선 것이었다.
대부분의 유럽 왕실들은 카스트로 공작위를 쓰는 라니에리의 후손을, 스페인 왕실은 칼라브리아 공작위를 쓰는 카를로의 후손을 양시칠리아 당주로 인정한다. 현재 카스트로 계통의 당주는 카를로스(1963년~)[4] 고 칼라브리아 계통의 당주는 페드로(1968년~)[5]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