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 폰 에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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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rry Von Erich
1960년 2월 3일 ~ 1993년 2월 18일
188cm, 115kg
프리츠 폰 에릭의 넷째아들로, 본명은 케리 애드키슨(Kerry Gene Adkisson)이다. 한바퀴 돌아서 상대를 주먹으로 공격하는 토네이도 펀치(디스커스 펀치)와, 아버지의 기술인 아이언 클로를 주기술로 사용했다. 육상 종목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휴스턴 대학에 입학했지만 1학년 때 중퇴하고 프로레슬러가 된다.
케리 폰 에릭을 링네임으로 해 아버지의 단체 WCCW(WORLD CLASS CHAMPIONSHIP WRESTLING)에서 활동할 때 형인 케빈과 데이비드보다 스타성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당시 릭 플레어, 마이클 헤이즈와의 명경기들을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가 선정하는 올해의 경기 10위 안에 올렸다. 한편 친형제인 케빈 폰 에릭&마이크 폰 에릭과 함께 더 폰 에릭스로서 더 프리버즈[1] 와 대립해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에서 선정한 1984년 올해의 경기를 남겼다.
차기 월드 챔피언으로 유력했던 형 데이비드 폰 에릭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대신 도전해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1984년 5월 6일에 릭 플레어를 이기고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등극했다. 1986년 6월 4일에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는데, 이후 상태가 악화된 오른쪽 발목 아래를 의족으로 대체한다. 그 이후에도 AWA, 신일본 프로레슬링 등 여러 단체에 출전해 프로레슬러로서 좋은 기량을 선보이지만, 사고의 후유증으로 약물중독에 시달린다.
WWF에서는 텍사스 토네이도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며 WWF 섬머슬램(1990)에서 '미스터 퍼펙트' 커트 헤닉을 이기고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에 등극했다. 하지만 동생들이 연이어 자살하고, WWF와의 계약이 해지되었으며 마약을 소지한 걸 수차례 들켜 실형을 선고받는 등 불운이 겹치자 1993년 2월 18일에 권총으로 자살한다.
오토바이 사고 이전 1986년까지는 육상선수 출신 답게 신체능력도 뛰어났고 드롭킥도 높은 타점으로 잘 사용했으며 브롤러 타입으로써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토바이 사고 이후 그의 프로레슬링 인생은 제대로 꼬이기 시작하는데 몆차례의 수술에도 도저히 다리가 회복될 기미가 안보이고 심지어 엄청난 격통에 시달리게 되자 결국 오른쪽 다리를 무릎아래로 절단해야만 했다.
사고 이후 불굴의 의지로 재활하고 복귀에 성공했으며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당시 일반 프로레슬링 팬들은 케리 폰 에릭이 다리를 절단한 사실을 전혀 몰랐고 외부에 절대 알려지지 않도록 당시 단체에서 업계의 프로레슬러들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다고 한다. 케리는 이때부터 부츠도 무릎위까지 올라오고 환부가 안보이도록 솔이 달린 부츠를 신고 올라왔다. 사고를 당해 전과 같지 않은 상황이 처한 자신이 싫었는지 샤워할때도 양쪽 부츠를 절대로 벗지 않았다고 한다.
사고 이전의 브롤러 타입을 바탕으로한 스피디했던 모습은 간데 없어지고 복귀후의 그는 심각할 정도로 경기력이 떨어졌고 움직임도 사고전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느려져서 상대선수가 케리에게 맞춰줘야 했을 정도였다. 유튜브에서 케리 폰 에릭의 86년 이전 경기모습과 86년 이후 경기모습을 비교해보면 일반 라이트팬들이 보기에도 확연할 정도로 차이가 심하다. 심지어 제리 롤러와 경기때는 롤러가 운동능력이 쩔어주는 타입도 아니고 반칙을 섞은 얍삽한 스타일의 선수임에도 롤러와의 경기때 그 롤러보다 훨씬 움직임이 굼뜨다는걸 알수 있다. 거의 스탠딩 상황에선 더치 와이프 수준. 그러다가 위기에 빠졌을때 토네이도 펀치로 연타를 날리는게 유일한 옵션이었을 정도. 실제로도 당시 경기는 거의 롤러의 리드로 이뤄지다시피 했다. 또한 사고 이전에는 링으로 들어설때 매번 입장할때 링을 뛰어넘고 들어왔지만 오른 다리 절단 이후엔 그냥 링사이로 입장했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재기한듯 보였지만 사실은 절단수술 이후에도 극도의 통증에 시달렸고, 통증을 견뎌내기 위해 엄청난 양의 마약성 진통제와 심지어는 모르핀, 헤로인까지 복용하다가 마약에 중독됐다. 사고 이후 케리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지고 만다. 훗날 프로레슬링 팬들은 케리가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을 겪었던게 아니냐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 격통은 이 후 마약소지를 사유로 징역 선고까지 받고, 이로 인해 레슬링 업계에서 쫓겨나고, 이 후 자살이라는 최악의 결말로 이어지게 되었다. 안 그래도 폰 에릭 가문의 형제들이 한명만 제외하고 모조리 자살, 사고로 조기에 생을 마감하는등 가문에 저주라도 있는게 아니냐는 팬들의 말까지 나온 상황. 폰 에릭 가문 형제들중에서도 가장 재능이 뛰어났고 사고만 없었더라면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하며 은퇴뒤에도 레전드로 대우 받으며 WWE 무대에 초청도 받고 간혹 이벤트 매치도 뛰고 했을법 했건만 불의의 사고 한번이 인생을 꼬아버린 불행한 케이스.
Kerry Von Erich
1. 소개
1960년 2월 3일 ~ 1993년 2월 18일
188cm, 115kg
프리츠 폰 에릭의 넷째아들로, 본명은 케리 애드키슨(Kerry Gene Adkisson)이다. 한바퀴 돌아서 상대를 주먹으로 공격하는 토네이도 펀치(디스커스 펀치)와, 아버지의 기술인 아이언 클로를 주기술로 사용했다. 육상 종목으로 장학금을 받으며 휴스턴 대학에 입학했지만 1학년 때 중퇴하고 프로레슬러가 된다.
2. 커리어
케리 폰 에릭을 링네임으로 해 아버지의 단체 WCCW(WORLD CLASS CHAMPIONSHIP WRESTLING)에서 활동할 때 형인 케빈과 데이비드보다 스타성이 있다고 평가받았다. 당시 릭 플레어, 마이클 헤이즈와의 명경기들을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가 선정하는 올해의 경기 10위 안에 올렸다. 한편 친형제인 케빈 폰 에릭&마이크 폰 에릭과 함께 더 폰 에릭스로서 더 프리버즈[1] 와 대립해 레슬링 옵저버 뉴스레터에서 선정한 1984년 올해의 경기를 남겼다.
차기 월드 챔피언으로 유력했던 형 데이비드 폰 에릭이 젊은 나이에 요절하자 대신 도전해 팬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1984년 5월 6일에 릭 플레어를 이기고 NWA 월드 헤비웨이트 챔피언에 등극했다. 1986년 6월 4일에 오토바이 사고를 당하는데, 이후 상태가 악화된 오른쪽 발목 아래를 의족으로 대체한다. 그 이후에도 AWA, 신일본 프로레슬링 등 여러 단체에 출전해 프로레슬러로서 좋은 기량을 선보이지만, 사고의 후유증으로 약물중독에 시달린다.
WWF에서는 텍사스 토네이도라는 링네임으로 활동하며 WWF 섬머슬램(1990)에서 '미스터 퍼펙트' 커트 헤닉을 이기고 WWF 인터컨티넨탈 챔피언에 등극했다. 하지만 동생들이 연이어 자살하고, WWF와의 계약이 해지되었으며 마약을 소지한 걸 수차례 들켜 실형을 선고받는 등 불운이 겹치자 1993년 2월 18일에 권총으로 자살한다.
3. 단 한 번의 불운
오토바이 사고 이전 1986년까지는 육상선수 출신 답게 신체능력도 뛰어났고 드롭킥도 높은 타점으로 잘 사용했으며 브롤러 타입으로써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오토바이 사고 이후 그의 프로레슬링 인생은 제대로 꼬이기 시작하는데 몆차례의 수술에도 도저히 다리가 회복될 기미가 안보이고 심지어 엄청난 격통에 시달리게 되자 결국 오른쪽 다리를 무릎아래로 절단해야만 했다.
사고 이후 불굴의 의지로 재활하고 복귀에 성공했으며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였지만 당시 일반 프로레슬링 팬들은 케리 폰 에릭이 다리를 절단한 사실을 전혀 몰랐고 외부에 절대 알려지지 않도록 당시 단체에서 업계의 프로레슬러들에게 입단속을 철저히 시켰다고 한다. 케리는 이때부터 부츠도 무릎위까지 올라오고 환부가 안보이도록 솔이 달린 부츠를 신고 올라왔다. 사고를 당해 전과 같지 않은 상황이 처한 자신이 싫었는지 샤워할때도 양쪽 부츠를 절대로 벗지 않았다고 한다.
사고 이전의 브롤러 타입을 바탕으로한 스피디했던 모습은 간데 없어지고 복귀후의 그는 심각할 정도로 경기력이 떨어졌고 움직임도 사고전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만큼 느려져서 상대선수가 케리에게 맞춰줘야 했을 정도였다. 유튜브에서 케리 폰 에릭의 86년 이전 경기모습과 86년 이후 경기모습을 비교해보면 일반 라이트팬들이 보기에도 확연할 정도로 차이가 심하다. 심지어 제리 롤러와 경기때는 롤러가 운동능력이 쩔어주는 타입도 아니고 반칙을 섞은 얍삽한 스타일의 선수임에도 롤러와의 경기때 그 롤러보다 훨씬 움직임이 굼뜨다는걸 알수 있다. 거의 스탠딩 상황에선 더치 와이프 수준. 그러다가 위기에 빠졌을때 토네이도 펀치로 연타를 날리는게 유일한 옵션이었을 정도. 실제로도 당시 경기는 거의 롤러의 리드로 이뤄지다시피 했다. 또한 사고 이전에는 링으로 들어설때 매번 입장할때 링을 뛰어넘고 들어왔지만 오른 다리 절단 이후엔 그냥 링사이로 입장했다.
이렇게 성공적으로 재기한듯 보였지만 사실은 절단수술 이후에도 극도의 통증에 시달렸고, 통증을 견뎌내기 위해 엄청난 양의 마약성 진통제와 심지어는 모르핀, 헤로인까지 복용하다가 마약에 중독됐다. 사고 이후 케리는 신체적, 정신적으로 완전히 피폐해지고 만다. 훗날 프로레슬링 팬들은 케리가 복합부위 통증 증후군을 겪었던게 아니냐고 추정하기도 한다. 이 격통은 이 후 마약소지를 사유로 징역 선고까지 받고, 이로 인해 레슬링 업계에서 쫓겨나고, 이 후 자살이라는 최악의 결말로 이어지게 되었다. 안 그래도 폰 에릭 가문의 형제들이 한명만 제외하고 모조리 자살, 사고로 조기에 생을 마감하는등 가문에 저주라도 있는게 아니냐는 팬들의 말까지 나온 상황. 폰 에릭 가문 형제들중에서도 가장 재능이 뛰어났고 사고만 없었더라면 오랫동안 선수생활을 하며 은퇴뒤에도 레전드로 대우 받으며 WWE 무대에 초청도 받고 간혹 이벤트 매치도 뛰고 했을법 했건만 불의의 사고 한번이 인생을 꼬아버린 불행한 케이스.
4. 여담
- 친딸 레이시 폰 에릭이 TNA에서 활동한 바 있다. 폰 에릭 형제들 중에서도 가장 뛰어났던 아버지와 달리 레이시의 실력은 아이캔디형 여자 레슬러들 중에서도 최악의 수준이었다.
5. 둘러보기
[1] 버디 로버츠, 테리 고디, 마이클 헤이즈로 구성된 패뷸러스 프리버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