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묘 황후
1. 개요
光明皇后
쇼무 덴노의 황후로 나라 시대 인물이다. 역사상 최초의 후지와라氏 황후이자 非 황족 출신의 황후다.
이름은 아스카베 히메(安宿媛)로, '고묘시(光明子)', '도산죠(藤三娘)'라고도 불린다. 한편 코묘 황후라는 칭호는 시호나 추존이 아닌 통칭으로써, 정식 존호는 '텐표오신닌쇼황태후(天平応真仁正皇太后)'다.
2. 생애
을사의 변과 다이카 개신을 주도한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아들이자 후지와라氏의 시조인 후지와라노 후히토와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県犬養三千代)의 딸로, 쇼무 덴노의 어머니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의 이복 여동생이었다.
어머니인 아가타노 이누카이노 미치요는 나라 시대를 연 겐메이 덴노로부터 귤나무 가지로 장식된 잔을 하사받아 타치바나氏(橘氏)를 사용했으며, 미치요가 전 남편인 미누 왕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인 가쓰라기 왕과 사이 왕은 타치바나노 모로에(橘 諸兄)와 타치바나노 사이(橘 佐爲)로 개명해 타치바나 씨족이 되었다. 즉 코묘의 아버지는 후지와라氏의 시조였고, 어머니는 타치바나氏의 시조인 셈이었다.
쇼무 덴노가 아직 황태자로 있을 때 혼인하였고, 요로(養老) 2년(718년)에 딸 아베 내친왕(阿倍内親王)을 낳았다. 진키(神亀) 원년(724년)에 남편이 천황으로 즉위하자 동시에 후궁(後宮)의 위계인 부인(夫人)의 호를 얻었다. 진키 4년(727년), 아들 모토이 왕(基王)이 태어났다.
그러나 진키 5년(728년), 황태자로 세워진 모토이 왕(基王)이 요절하고, 후사 문제로 나가야 왕(長屋王)이 역적으로 몰려 죽는 사건이 발생하는('''나가야 왕의 정변''') 등 조정은 어수선했다. 나가야 왕의 정변 이후, 덴표(天平) 원년(729년)에 부인 후지와라씨를 황후로 삼는다는 조가 내려졌다. 이는 '''황족 이외의 집안에서 황후가 나온 최초의 사례였다.''' 이는 후지와라씨(藤原氏)의 자녀가 황후가 되는 선례가 되었다.
모토 왕의 죽음으로 유일한 딸인 아베 내친왕이 황태녀로 책봉되었다. 이 태녀가 천황으로 즉위하고 난 뒤인 덴표쇼호(天平勝宝) 원년(749년) 이후 황후궁직(皇后宮職)을 '''시비추다이(紫微中台)'''라 개칭하였다. 시비추다이의 장관으로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藤原仲麻呂)가 임명되었다.
덴표쇼호 8년(756년)에 남편 쇼무 태상천황(太上天皇)이 붕어하고, 그 2년 뒤에 황태후의 칭호가 더해졌다.
덴표호지 4년(760년)에 붕어, 사호산동릉(佐保山東陵)에 묻혔다.
3. 기타
코묘 황후가 지은 와카(和歌) 4수가 《만요슈》(萬葉集)에 남아 전한다.
해당 와카는 만요슈 제8권 1658쪽에 있는 시다.당신과 둘이서 보는 것이라면 내리는 눈이 얼마나 즐거울까요.
황후는 서예에 뛰어났는데, 황후 자신이 몸소 베낀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王羲之)의 《악의론》(楽毅論)과 당나라 두정장(杜正蔵) 등 삼형제의 문집 《두가입성잡서요략》(杜家立成雑書要略)이 모두 쇼소인에 남아 전한다. 쇼소인에 기진되어 소장하게 된 물품 가운데는 신라의 승려 원효(元曉)가 지은 《판비량론》(判比量論)의 필사본도 포함되어 있다.
코묘 황후는 후지와라씨를 위해 움직였다고 하는 후지와라氏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또한 악의론[1] 에 남긴 남자를 능가할 정도로 힘 있는 필체에서 엿볼 수 있듯이 '도산로(藤三娘)'라는 별명이 있었다고 한다. 따라서 코묘 황후가 후지와라씨의 권세를 등에 업고 쇼무 덴노를 조종했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현대에는 해당 가설이 부정되고 있다.
코묘 황후는 불교에 귀의해 도다이지(東大寺), 고쿠분지(国分寺) 건립을 남편 쇼무 천황에게 진언하였다고 전한다. 또한 가난한 자를 구제하기 위한 시설 비전원(悲田院), 의료 시설인 시약원(施薬院)을 지어 자선 사업에도 힘을 쏟았다. 쇼무 태상천황 사후 49제에 유품을 도다이지에 기증했는데, 그 보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었던 것이 바로 쇼소인(正倉院)이다. 나아가 고후쿠지(興福寺), 호코지(法華寺), 신야쿠시지(新薬師寺) 등 많은 절을 짓거나 정비하였다. 황후는 자기 저택에 절을 짓고, 병들거나 가난한 사람들에게 구제의 손길을 뻗쳤으며, 스스로 '적선의 후지와라 가문'을 자칭했다. 이 절의 이름은 홋케메쓰자이노 데라(法華滅罪之寺:법화멸죄지사)로 '멸죄'라는 뜻이 담겨 있다.
쇼무 덴노는 자기 어머니인 후지와라노 미야코(藤原宮子) 부인(夫人)을 황후궁에서 만나려고 했으나 후지와라 씨족들에게 가로막혀 저지된 적이 있었다. 훗날 후지와라 4형제가 연쇄사를 맞이한 뒤 스스로 친정을 펼치고, 동시기에 오랫동안 집안에만 있던 후지와라노 미야코가 회복되어 밖으로 나오게 되었다고 한다. 즉 자기 어머니와 만나고 싶어한 남편을 위해 자기 언니이자 시어머니를 황후궁으로 불렀으나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에게 저지되었다는 것이다. 거기다 이들의 연쇄적인 죽음은 이들이 억울하게 죽음으로 내몬 나가야 왕이 원귀가 되어 저주해 죽인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쇼무 덴노가 백성들과 중들이 스스로 돈을 모아 만들었던 가와치의 치시키지를 보고 감동하자 도다이지 건설 후원을 맡고 절 건설을 제의한 것은 황후였다. 코묘 황후의 입장에서는 오라버니들의 연쇄적인 죽음과 나가야 왕의 저주 소문이 남 일 같지 않게 느껴졌을 것이다. 즉 자신의 선행으로 저주받은 후지와라 일족의 죄를 지우고 남편을 지키고자 했다는 것이다.
4. 가계도
[1] 전국시대 명장 악의에 의해 쓰인 책으로 해서의 대가 왕희지의 필사본이 유명하다. 코묘 황후는 이 책의 필사본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