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사의 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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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시대에 그려진 그림. 나라현 후쿠이시 탄잔신사(談山神社)에 소장되어 있다. 목이 날아가는 사람이 소가노 이루카이고, 칼을 들고 소가노 이루카의 목을 치는 사람이 나카노오에 황자, 옆에 활을 들고 있는 사람이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안쪽에 있는 여성은 당시의 천황고교쿠 덴노다.
이 그림은 당시가 아닌 에도 시대에 그려진 그림이라 인물들의 복식이 헤이안 시대 풍으로 그려져 있는데, 사서에 따르면 해당 시대는 아스카 시대이다. 따라서 그림의 복식과는 전혀 다르다.
1. 개요
2. 배경
3. 과정
4. 결과
5. 의혹
6. 부연 설명
7. 매체에서의 등장


1. 개요


'''乙巳(いっし(へん'''
'''을사의 변'''
아스카 시대 고교쿠 덴노 재위기인 645년 6월에 나카노오에 황자가 당시 희대의 권신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해 소가씨 일족을 몰락시킨 정변. . 표문을 낭독하던 중 반전이 일어나 죽게 되는 과정이 로마 제국의 권신 세야누스의 처단과 유사하다.

2. 배경


고교쿠 재위기 643년 겨울 10월에 권신 소가노 에미시가 병으로 조정에 나오지 못하자 그의 아들인 소가노 이루카가 대신해서 국정을 주도했는데, 이루카는 당대에 명망 높았던 쇼토쿠 태자 계열의 세력을 몰아내고, 전임 천황이자 현 천황의 남편이었던 조메이 덴노의 장남이자 자신의 사촌인 후루히토노오에 황자(古人大兄 皇子)[1]를 천황으로 만들려는 음모를 꾸몄다. 그는 쇼토쿠 태자의 아들인 야마시로노오에 왕(山背大兄 王)을 견제하기 위해 11월 1일에 습격했다. 야마시로노오에 왕 일가는 이루카의 습격을 받자 자택에서 일가족이 모두 자결했는데, 일가의 죽음으로 쇼토쿠 태자의 직계 후손이 단절되었고, 살아남은 자손들은 방계였기에 황위 계승 자격을 잃게 된다.
이 일로 아버지 에미시는 앞으로 큰 반발을 살 것이라고 이루카를 질책했는데, 쇼토쿠 태자는 제17조 헌법 제정 등 정치적으로도 혁혁한 업적을 세워서 당시 사람들로부터 '성인(聖人)'으로 추앙받고 있었고 소가노 에미시의 동생인 소가노 토지코노이라츠메(蘇我 刀自古郎女)와 혼인하는 등(즉 소가노 이루카의 고모에 해당) 소가씨와도 인척 관계였기에 야마시로노오에 왕은 이루카에게는 사촌에 해당됐다.
방해자가 없어진 이루카는 그 위엄이 아버지보다 더욱 높았는데 도적도 그의 위세를 두려워해 길에 떨어진 물건을 줍지 못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자 이에 불만을 품은 나카토미노 카마타리 등의 반대세력은 이루카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기로 한다.

3. 과정


카마타리는 호코지(法興寺)[2]에서 벌어진 타국(打毱) 경기를 이용해 조메이 덴노고교쿠 덴노의 차남인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접촉해 소가노 이루카를 암살하기 위한 계획을 함께 세우기로 한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협조자를 얻기 위해 이루카의 사촌이지만 반대파였던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 石川麻呂)에게 접근해 함께 일을 벌이기로 했으며 그의 차녀인 소가노 오치노이라츠메(蘇我 遠智娘)와 결혼한다. 카마타리는 사에키노 무라지 코마로(佐伯連 子麻呂), 카츠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아미타(葛城稚犬養連 網田) 등을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천거했다. 6월 8일에 나카노오에 황자는 이시카와마로에게 "삼한(三韓, 삼국)의 사신이 물품을 보내는 날에 상표문을 읽게 할 것이고 그 사이에 이루카의 목을 베겠다"고 했으며, 이시카와마로는 이를 수락했다.
12일에 고교쿠 덴노가 대극전(大極殿)으로 나아가자 나카노오에 황자는 그 곁을 모셨으며, 카마타리는 이루카가 의심이 많아 늘 칼을 차고 있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사람을 시켜 그를 속여서 칼을 풀게 했다. 이루카가 웃으면서 칼을 풀어놓고 무장을 해제하며 좌석에 들자 이시카와마로가 상표문을 읽었으며, 나카노오에는 위문부 사람들에게 명해 12개의 문을 모두 폐쇄해 왕래할 수 없게 했다.
위문부 사람들을 한곳에 모아 녹봉과 물품을 내리는 것처럼 하고, 나카노오에 황자는 긴 창을 들고 대극전에 숨어있었으며, 카마타리는 활, 화살을 들고 나카노오에 황자를 호위했다. 또한 암살 계획에 협력하기로 한 궁정의 호위관 아마노 이누카이노 무라지 카츠마로(海犬養連 勝麻呂)를 통해 상자 속의 두 자루의 칼을 코마로와 아미타에게 주면서 방심하지 말고 불시에 들어가 단칼에 베라고 명령했다.
코마로 등은 물을 마시며 밥을 삼켰지만 두려움에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아 토했으며, 이에 카마타리는 질책하면서 격려했다. 이시카와마로는 상표문을 읽는 것이 끝나감에도 불구하고, 코마로 등이 나오지 않자 두려워져서 땀을 흘리며, 목소리와 손을 떨었는데, 이루카가 이를 의심스럽게 여겨 어째서 그렇게 떨고 있냐고 묻자 이시카와마로는 천황 가까이에 있으니 황공해서 저절로 땀이 흐른다고 말했다.

(원문) 中大兄、見子麻呂等畏入鹿威便旋不進、曰、咄嗟。卽共子麻呂等出其不意、以劒傷割入鹿頭肩。入鹿驚起。子麻呂、運手揮劒、傷其一脚。入鹿、轉就御座、叩頭曰、當居嗣位天之子也、臣不知罪、乞垂審察。中大兄、見子麻呂等畏入鹿威便旋不進、曰、咄嗟。卽共子麻呂等出其不意、以劒傷割入鹿頭肩。入鹿驚起。子麻呂、運手揮劒、傷其一脚。入鹿、轉就御座、叩頭曰、當居嗣位天之子也、臣不知罪、乞垂審察。天皇大驚、詔中大兄曰、不知所作、有何事耶。中大兄、伏地奏曰、鞍作盡滅天宗將傾日位、豈以天孫代鞍作乎。(蘇我臣入鹿、更名鞍作)。天皇卽起、入於殿中。佐伯連子麻呂・稚犬養連網田、斬入鹿臣。是日、雨下潦水溢庭、以席障子覆鞍作屍。古人大兄、見走入私宮、謂於人曰、韓人殺鞍作臣、謂因韓政而誅。吾心痛矣。卽入臥內、杜門不出。

(현대어역) 中大兄は、子麻呂たちが入鹿の勢いに恐れて、巡るばかりで進まないのを見て言いました。「咄嗟(ヤア)!」すぐに子麻呂たちと共に、不意に剣で入鹿の頭肩を傷つけ、割りました。入鹿は驚いて、立ちました。子麻呂は手で剣を拭いて、一つの足を傷つけました。入鹿は御座(オモト=天皇の元)へと転んでたどり着いて、頭を床に叩きつけて言いました。「まさに嗣位(ヒツギノクライ=天皇位)に居るべきは天子です。私は罪を知らない。このようなことをするのは、何事があるというのですか!」天皇は大いに驚き中大兄に、「これはいったい何事が起こったのか」といわれた。中大兄は地に伏して申し上げました。「鞍作(クラツクリ)は天宗(キミタチ)を全て滅ぼして、日位(ヒツギノクライ=天皇位)を傾けようとしているのです。どうして天孫(テンソン)が鞍作に代わるというのでしょうか」(蘇我臣入鹿は別名が鞍作といいます。)天皇はすぐに立って、宮殿の中に入りました。佐伯連子麻呂・稚犬養連網田は入鹿臣を斬りました。この日に雨が降って、潦水(イサラミズ=出てきた水)が庭に溢れていました。席の障子(シトミ)で鞍作(クラツクリ=蘇我入鹿)の屍(カバネ)を覆い隠しました。古人大兄(フルヒトオオエ)はそれを見て、自分の宮に走って入り、人に言いました。「韓人(カラヒト)が鞍作臣(クラツクリノオミ)を殺した! 我が心は痛い!」 すぐに臥内(ネヤノウチ=寝室)に入って、門を塞いで出ませんでした。

(한국어역) 나카노오에 황자는 코마로 등이 이루카의 위세를 두려워해 주저하면서 나오지 못하는 것을 보고 소리를 질렀다. 이에 코마로 등이 갑자기 뛰어나와 검으로 이루카의 머리와 어깨를 베자 그가 놀라서 일어났다. 코마로가 이루카의 한쪽 다리를 베자 이루카는 구르듯이 천황의 어좌로 가서 머리를 부딪히고 천황에게 "참으로 황위에 있어야 하는 건 천자(天子)이십니다. 저에게 죄는 없습니다. 이러한 일을 하는 건 대관절 무엇 때문입니까!"라고 사정했다.[3]

고교쿠 덴노는 크게 놀라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무슨 상황인지 모르겠다. 대체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나카노오에 황자는 땅에 엎드려서 대답했다. "쿠라츠쿠리(鞍作)가 천종(天宗, 하늘의 종족)을 멸망시키고 황위를 쇠하게 하고 있습니다. 어찌 천손(天孫)을 쿠라츠쿠리가 대신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4] 고교쿠 덴노는 이 말을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궁전으로 들어갔다.[5] 코마로, 아미타 등은 결국 이루카를 죽였다. 이날은 비가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정원에도 물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좌석을 가리는 데 썼던 장지문으로 쿠라츠쿠리 즉 이루카의 시체를 덮어가렸다. 고교쿠 덴노를 보좌하느라 바로 옆자리에 앉아있던 후루히토노오에 황자는 정변을 목격하자 자신의 궁에 달려들어가 사람들에게 말했다. "한인(韓人)[6]이 쿠라츠쿠리를 죽였다! 한인의 정략(韓政)으로 인해 죽은 것이다! 마음이 비통하다!" 그리고는 침실에 들어가 문을 닫고 칩거하였다.

'''《일본서기》 권 제24 고교쿠 덴노(皇極 天皇)'''

그런데 하필 사건이 벌어진 곳은 한반도에서 온 삼한의 사신을 영접하는 자리였기에, 삼한의 사신들은 외국의 권신 하나가 황자의 손에 죽어나가는 것을 본의 아니게 눈앞에서 목도(목격)한 꼴이 되었다. 여기서 후루히토노오에 황자가 뜬금없이 한인이 이루카를 죽였다고 말한 대목에 대해서는 해석이 몇 가지 있다.
  1. 나카노오에 황자가 사실은 한인이었다(!). 직역하면 이렇게 해석될 수 있지만 차라리 소가씨 일족이 한인이었을 가능성이 높으니 당연히 말이 안 되므로 별로 지지받지는 못한다.[7]
  2. 이루카는 한인의 정치를 행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즉 신라에서 외래문물인 불교를 도입하다가 기성귀족들의 등쌀에 이차돈이 살해당했던 것처럼 이루카가 도래인 세력과 친하게 지내며 외래문물을 도입하려 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라는 해석.
  3. 삼한의 사신들을 영접하는 자리만 아니었다면 이루카는 죽지 않았을 것이다. 일반적으로는 이 해석을 따르는 걸로 보인다.
  4. 삼한의 사신들은 모두 가짜였고, 사실은 한인들이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협조해 이루카를 죽이기 위해 위장했던 것이다. 즉 나카노오에 황자와 한인들이 모략을 꾸며서 이루카가 죽은 것이다.
  5. 최근 일본 사학계에서 제기되는 가설로, 나카노오에 황자를 도운 나카토미노 카마타리가 한인, 즉 도래인이라는 해석.
나카노오에 황자는 자신의 궁으로 돌아가 이루카를 죽인 것을 알렸으며, 이루카의 시신을 에미시에게 보냈다. 에미시는 아야노 아타이(漢直)[8] 등의 휘하 사람들을 소집해 갑옷, 무기 등을 갖추고 진을 치도록 했다. 나카노오에 황자는 장군 코세노 토코타(巨勢 德多)를 파견해 자신들이 거사한 이유를 알렸다.
이에 타카무코노 오미 쿠니오시(高向臣 國押)가 이루카 때문에 자신들도 주살될 것이라면서 쓸데없이 싸워서 처형될 필요는 없다고 하자 모두 칼, 활을 던지고 떠났으며, 13일에 에미시는 자택, 황가와 나라의 기록, 보물 등을 남김없이 불태우고 자살했다. 후네노후히토 에사카(船史 惠尺)가 재빨리 불에 탄 기록을 집어내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바쳤으며, 나카노오에 황자는 에미시와 이루카를 장사지내는 것을 허락했다.[9]

4. 결과


이 정변으로 소가씨는 일순간에 몰락했고 고교쿠 덴노는 갑작스러운 정변에 화가 나 생전 퇴위하여 황위는 나카노오에 황자에게 돌아가게 되었으나 카마타리의 조언에 따라 고교쿠 덴노의 동생인 카루 황자(輕 皇子)에게 양위하여 그가 코토쿠 덴노(孝徳 天皇)가 되었다. 그는 조카인 나카노오에 황자를 황태자로 세웠으며, 나카노오에 황자는 실권을 잡아 아베노 우치마로(阿倍 內麻呂)를 좌대신(左大臣), 이시카와마로를 우대신(右大臣), 카마타리를 내신(內臣)에 임명하고, 그 유명한 '''다이카 개신'''을 단행하게 된다.
정변 후 조메이 덴노의 장남이었던 후루히토노오에 황자에게도 순번상 황위에 오를 기회가 있었으나 거절하고 은거하였다. 당연한 게 그는 소가씨 쪽 파벌이자 유력한 황족이었기 때문에 정변이 성공한 순간 황위는 커녕 목숨을 보전하기도 힘든 처지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에 키비노카사노오미 시다루(吉備笠臣 垂)가 그가 모반을 꾀하고 있다고 밀고하였고, 나카노오에 황자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한다. 물론 그가 정말로 모반을 꾀하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고 역사상 흔히들 하는 계승 유력자 처단일 가능성이 더 높다.

5. 의혹


일본서기 연구 결과 일본서기는 중국인 혹은 중국식 한문에 박식한 자가 작성한 순한문체로 되어있는 부분과, 일본인의 언어습관이 강하게 남아있는 부분(왜습)으로 나뉠 수 있는데, 이 을사의 변과 다이카 개신 부분은 후자의 왜습이 가미된 어체로 작성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래서 이와 더불어 나카노오에 황자가 실은 고교쿠 덴노의 아들이 아니라 먼 친척이거나 아예 남이었지만 후대에 가필되면서 아들로 둔갑한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코토쿠 덴노 시절 나카노오에 황자가 그렇게 권력을 휘둘렀음에도 코토쿠 덴노 사후에 자기가 황위에 오르지 않고 굳이 고교쿠 덴노를 사이메이 덴노로 다시 즉위시켜 얼굴마담으로 내세운 후에 실권을 휘둘렀고, 사이메이 덴노가 죽은 이후에야 즉위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즉위하기 전 실권을 잡고 있었을 때나 즉위하여 덴지 덴노가 된 이후에도 백제 부흥군을 열심히 지원하는 등 사이메이 덴노 및 소가노 이루카의 정책과 크게 다를 것이 없는 일을 했기 때문에 그가 과연 이루카와 적대하던 인물이 맞는가라는 의문도 존재한다.[10]
여기서 오아마 황자(덴무 덴노)의 행적도 의문이 많다. 친동생이라지만 이 일에 관여하지 않았음에도 덴지 덴노 시절 태자가 되었고, 술자리에서 태자가 대왕에게 창을 던졌다는 기록이 있는 등 이 둘의 사이는 최악이었다고 한다. 고교쿠 덴노는 조메이 덴노와 혼인하기 전 다카무쿠 왕 사이에서 아야 황자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다카무쿠 왕이 소가씨 출신이고, 아야 황자와 오아마 황자가 동일 인물이라는 가설이 있다. 오아마 황자의 정체가 아야 황자라면 왜 이복형인 후루히토노오에 황자처럼 안 죽인 건지도 의문이다.

6. 부연 설명


일본이라는 국호나 천황라는 칭호는 나라 시대에 생겨났기 때문에 엄밀한 고증을 반영하자면 아직 아스카 시대인 이때는 국호는 '''야마토'''(大和/大倭), 군주의 칭호는 '''오키미'''(大王/女王), 왕후/황후의 칭호는 '''키사키'''(后/妃), 남자 왕족/황족의 칭호는 '''미코'''(御子), 여자 왕족/황족의 칭호는 '''히메미코'''(姫御子)가 된다. 그러나 백제의 왕을 가리키던 건길지 같은 칭호를 지금 와서 사용하면 아무도 못 알아듣는 것처럼 현지인인 일본인들에게도 이런 고대의 칭호는 너무 길고 어렵고 복잡하다. 그래서 현대인이 알아보기 편한 후대에 추숭된 칭호로 표기하였다.
고대 일본인의 인명, 그것도 상류계층의 이름이라 매우 복잡하다. 현대 일본의 인명과 다른 면이 상당히 많기 때문에 현대 일본인이라도 따로 배우거나 알아보지 않은 이상 이름의 구조를 알기가 힘들다. 또한 언어가 표준화된 현대와는 달리 고대인들의 지식이나 체계는 그렇게 엄밀하지 않았기 때문에 동일한 이름이라도 표기가 중구난방인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인명도 원문을 따르되 인지도나 표준적인 표기를 기초로 성씨는 성씨끼리, 이름은 이름끼리 붙여서 표기하였다.
먼저 고대 일본인의 성씨는 '''우지(氏)'''와 '''카바네(姓)'''로 구분된다. 이중 우지 부분이 현대의 성씨에 가까운 씨족명이었고, 카바네는 직책이나 가문의 등급 등을 나타내던 표지로서 표기시에는 포함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했으며 우지 뒤에 붙기도 하고, 이름 뒤에 붙기도 하였다. 우지도 곧이곧대로 성씨로 이어진 건 아니고, 세대가 거듭되며 촌수가 멀어짐에 따라 씨족 내의 구분을 위해 우지의 세부 구분을 표시하기도 했는데 주로 거주지의 지명이나 자택명, 직업, 조상의 별명 등을 붙여서 구분했다. 이런 경우는 우지의 세부 구분이 현대의 성씨로 이어지는 경우도 많았다. 이러한 표기들은 보통 조사 '노'를 통해 구분된다.
  • 야마시로노오에 왕(山背大兄 王): 오에(大兄)는 장남에게 주어지던 칭호로서 황위 계승 자격을 나타냈다. 쇼토쿠 태자의 장남이다.
  • 후루히토노오에 황자(古人大兄 皇子): 조메이 덴노의 장남으로 나카노오에 황자의 이복형에 해당한다.
  • 나카토미노 카마타리(中臣 鎌足): 원문에는 나카토미노 카마코노 무라지(中臣 鎌子連)로 표기되어 있으나 나카토미노 카마타리라는 이름으로 제일 유명하다. 여기서 나카토미(中臣)가 우지, 무라지(連)가 카바네, 카마타리(鎌足)/카마코(鎌子)가 이름이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는 '나카토미 카마타리(中臣 鎌足)' 혹은 '나카토미 카마코(中臣 鎌子)'가 된다.
  • 나카노오에 황자(中大兄 皇子): 나카노오에(中大兄)는 주로 차남에게 주어지던 칭호에 해당한다. 즉 나카노오에는 본명은 아니고 칭호이지만 워낙 유명하다 보니 거의 이 사람의 대명사로 쓰인다. 이름은 카즈라키/카츠라기(葛城)이다. 조메이 덴노의 차남이며 고교쿠 덴노의 아들이다. 후에 덴지 덴노(天智 天皇)로 즉위한다.
  •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마로(蘇我倉山田 石川麻呂): 소가(蘇我)가 우지, 쿠라야마다(倉山田)가 우지의 세부 구분, 이시카와마로(石川麻呂)가 이름이다. 별칭이 많아서 표기가 매우 다양하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는 '쿠라야마다 이시카와마로(倉山田 石川麻呂)' 혹은 '소가 이시카와마로(蘇我 石川麻呂)'가 된다. 이름이 그냥 마로(麻呂)라는 설도 있는데 이를 기준으로 구분하면 소가노 쿠라야마다노 이시카와노 마로(蘇我倉山田石川 麻呂)가 된다.
  • 사에키노 무라지 코마로(佐伯連 子麻呂): 사에키(佐伯)가 우지, 무라지(連)가 카바네, 코마로(子麻呂)가 이름이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는 '사에키 코마로(佐伯 子麻呂)'가 된다.
  • 카츠라기노 와카이누카이노 무라지 아미타(葛城稚犬養連 網田): 카츠라기(葛城)가 우지의 세부 구분, 와카이누카이(稚犬養)가 우지, 무라지(連)가 카바네, 아미타(網田)가 이름이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는 '카츠라기 아미타(葛城 網田)' 혹은 '와카이누카이 아미타(稚犬養 網田)'가 된다.
  • 아마노 이누카이노 무라지 카츠마로(海犬養連 勝麻呂): 아마(海)가 우지의 세부 구분, 이누카이(犬養)가 우지, 무라지(連)가 카바네, 카츠마로(勝麻呂)가 이름이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는 '아마 카츠마로(海 勝麻呂)' 혹은 '이누카이 카츠마로(犬養 勝麻呂)'가 된다.
  • 아야노 아타이(漢直): 아야(漢)가 우지, 아타이(直)가 카바네이다. 아야(漢)씨는 도래인의 씨족으로서 야마토노 아야(東漢)씨와 카와치노 아야(西漢)씨의 두 종류가 있다. 야마토노 아야씨는 야마토노쿠니(大和國)에 기거하던 씨족이었고, 카와치노 아야씨는 카와치노쿠니(河內國)에 기반하던 씨족이었으므로 에미시의 휘하에 있던 인물은 야마토노 아야씨였던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야마토(東)와 카와치(西)가 우지의 세부 구분에 해당한다.
  • 타카무코노 오미 쿠니오시(高向臣 國押): 타카무코(高向)가 우지, 오미(臣)가 카바네, 쿠니오시(國押)가 이름이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는 '타카무코 쿠니오시(高向 國押)'가 된다. 원문에는 타카무쿠라는 훈이 달려있으나 후대에 등장하는 같은 씨족의 인물들은 거의 타카무코라고 불리고 있다.
  • 후네노 후히토 에사카(船史 惠尺): 후네(船)가 우지, 후히토(史)가 카바네, 에사카(惠尺)가 이름이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는 후네 에사카(船 惠尺)가 된다.
  • 아베노 우치마로(阿倍 內麻呂): 아베(阿倍)가 우지, 우치마로(内麻呂)가 이름이다. 아베씨의 카바네는 오미(臣)였기에 씨나 이름에 오미가 붙어서 표기된 경우가 많다. 표기의 바리에이션이 굉장히 다양하다. 현대 일본식 이름으로는 아베 우치마로(阿倍 内麻呂)가 된다.
참고 사이트 #1, #2, #3위키백과 일본어판

7. 매체에서의 등장


  • 일본도 아니고 국내 드라마에서 가장 먼저 영상화가 되었다. 바로 1992년 KBS에서 방영된 KBS 대하드라마 삼국기이다. 이 드라마에서는 왜국을 백제의 제후국으로 설정한 까닭에 드라마의 갈등구조를 일본 독립파(소가노 이루카)와 친백제파(나카토미노 카마타리)로 설정했고, 소가노 에미시는 야심이 가득하면서도 상당히 노회한 정객으로, 소가노 이루카는 탐욕스럽고 급한 성정의 무장으로 설정했다. 거사 전날 수상한 무당들을 발견하는가 하면, 소가노 에미시가 꿈에 당시에 퍼졌다는 참요를 들으면서 자신의 운이 다했다는 것을 짐작한 것으로 나온다. 이외에는 실제 목이 날아가는 것 외에는 일본서기의 기록과 거의 동일한 전개로 연출한다.
  • NHK에서 방영한 드라마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2005)에서 을사의 변이 꽤 고증에 충실하게(픽션도 가미되긴 했지만) 묘사되었다. 도중에 깨알같이 연개소문의 정변이 언급되는 건 덤. 연개소문이 직접 언급되지는 않고 고교쿠 덴노가 소가노 이루카에게 하는 이야기를 통해서 '고구려에서 권신에 의한 정변이 일어나 왕실이 망했다'는 식으로 지나가는 식으로 언급된다.
  • KBS 대하드라마 대왕의 꿈에서 이 사건이 묘사됐는데, '삼한의 사신을 맞이하는 자리에서 변이 일어났다'는 일본서기의 서술을 따 와서 김춘추가 고교쿠 여왕을 만나는 자리에서 이 사건이 발생했다. 다만 김춘추가 일본서기 기록상 사신으로 간 건 647년으로 되어 있는데, 이 사건은 645년에 일어난 일이라 고증오류다. 이후 왜의 정변 소식을 접한 선덕여왕이 이 사정에 대해 묻자 알천이 "왜국의 태자가 난신적자들을 숙청한 대의명분이 있는 정변이니 곧 소요가 가라앉을 것"이라고 언급하는 장면이 나온다.
  • 나카노오에 황자와 카마타리는 함께 작당하여 이루카를 죽였을 만큼 이루카와 적대적인 관계였지만 픽션에서는 이들이 서로 BL적인 관계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다. 당장에 상술된 NHK 드라마 다이카 개신에서는 BL까지는 아니지만 가마타리와 이루카가 소꿉친구로 나오며, 이루카가 죽은 후 가마타리가 이루카의 시신을 붙잡고 우는 묘사가 나온다.
[1] 조메이 덴노의 아들이긴 하지만 고교쿠 덴노의 아들은 아니다. 즉 나카노오에의 이복형.[2] 법흥사, 현재의 아스카데라(飛鳥寺).[3] 즉 자신에게는 반역의 뜻이 일절 없었다고 항변한 것이다.[4] 쿠라츠쿠리노타로(鞍作大郎)는 이루카의 별칭이었다.[5] 즉 이미 막을 수 없음을 알기에 암살을 묵인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돌발상황에 화가 나 결국 천황의 자리에서 퇴위한다.[6] 카라히토(からひと) 혹은 카라비토(からびと)라고 읽는다.[7] 한인이 정변에 직접 개입했다는 해석을 토대로 묘사한 작품이 '덴지와 덴무-신설 일본서기-(天智と天武-新説・日本書紀-)'라는 만화로, 이 만화에서는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이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와 동일인물로 묘사된다(여담으로 이 만화에서는 의자왕귀실복신, 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도 등장한다).[8] 원문에는 그냥 아야노 아타이(漢直)라고만 나와있고 이름이 누락되어 있다.[9] 아스카데라 맞은 편에 소가노 이루카의 머리 무덤이 남아있다. 관련 영상[10] 다만 이건 백제계라는 게 정설인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뜻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다만 그의 아들인 후지와라노 후히토덴지 덴노의 사생아라는 게 정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