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다이지
[clearfix]
1. 개요
일본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절. 일본 화엄종의 대본산이다. 한국에서는 동대사란 이름으로 유명하다. 일본 최대의 목조 건축물인 다이부쓰덴(大仏殿, 대불전)과 최대의 청동 불상, 그리고 거대한 정문인 난다이몬(南大門, 남대문)으로 이루어진다.[5] 그 밖에 자체 박물관과 대불전 뒤편과 동서편으로 이월당, 삼월당, 계단당 등 여러가지 부속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들도 대부분 국보나 중요문화재이고 일부는 특별한 기간이 아니면 공개하지 않는 곳이 있다.
1709년 화재로 소실되었던 다이부쓰덴을 재건한 뒤 약 200년간 세계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었으나, 현대에 와서는 스페인의 메트로폴 파라솔(Metropol Parasol), 미국의 틸라묵 항공 박물관(Tillamook Air Museum) 등 과거의 건축 기술로는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건축이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자리를 빼앗기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법당으로서는 다이부츠덴이 세계 최대 규모이다.
나라현 공식 홈페이지 설명에 따르면 동대사 건축에 신라출신 목수가 총감독을, 거대불상은 백제출신이 디자인했다고 하며, 사자 석상의 경우 중국 송나라 출신이 작업했다고 한다.1300년전 바다를 건너온 문화는 일본 각지역으로 퍼졌다.
2. 역사
[image]
창건 당시를 재현한 모형과 현재의 모습(아래)
도다이지는 733년 와카쿠사산 기슭에 창건되었다는 긴쇼지(金鐘寺)를 그 기원으로 하고 있으며, 크기로 유명한 다이부쓰덴은 758년에 준공되었다. 최초로 세워진 다이부쓰덴과 청동대불은 한국계 도래인[6] 들의 주도로 건립되었다. 기사
본래 도다이지는 쇼무 덴노가 구니(國)[7] 마다 세운 고쿠분지(국분사, 国分寺)[8] 의 수장으로 덴노 일족의 보살계를 수계하는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으나, 세월이 흘러 고쿠분지로서의 위상을 잃고 기능이 축소되었다.
원래 당나라의 영향을 받은 2탑 1금당식의 양식이었으나[9] 후에 2개의 거대한 목탑 등을 잃어버리고 지금의 형태가 되었다. 현재는 다이부쓰덴과 니가쓰도와 산가쓰도, 그리고 난다이몬 일대가 도다이지 경내이다. 과거의 위상은 다이부쓰덴 안에 있는 헤이안 시대의 도다이지 모형에서 약간이나마 찾아볼 수 있다.
다이부쓰덴은 화재를 두 번 입어 파괴되었다. 첫 번째 화재는 헤이안 시대 말기인 1181년 헤이시 정권이 난토(南都)의 승병들을 추포하는 과정에서 일어났는데 승병 진압을 띠고 난토로 파견된 다이라노 시게히라(平重衡)[10] 가 한밤중에 기습을 앞두고 "불을 밝히라(횃불을 가져오라)"고 한 것을 부하가 "전부 불태워라"로 잘못 알아듣고 절에 불을 놓은 것이 그만 온 경내로 옮겨붙어 절이 통째로 불타 버렸다고 한다.[11] 두 번째 화재는 센고쿠 시대 마츠나가 히사히데에 의해 1567년에 일어났다. 화재 2번 모두 승병뿐 아니라 당시 다이부쓰덴 안으로 몰려든 승려와 피난민들도 2천여 명에 달했는데,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면서 이들 모두 목숨을 잃었고 내부에 안치된 대불 또한 녹았다.[12] 현재의 다이부쓰덴은 1709년에 재건된 세 번째 금당이다.
현재의 다이부쓰덴은 헤이안 시대의 정면 길이의 1/3 규모로 축소된 것으로, 재정이 부족한 점이 가장 큰 원인으로 보인다. 이때 다이부쓰덴 가운데에 가라하후(唐破風)라는 반곡선 지붕을 만들어 헤이안 시대의 직선미가 훼손되었다. 축소되었다고는 하지만 정면 57.01 m, 측면 50.48 m, 높이 48.74 m에 달한다.[13]
참고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2번째 도다이지 다이부쓰덴을 본떠서 약간 더 큰 호코지 다이부쓰덴을 건립하였고, 이는 1592년에 지진으로 붕괴되었다.[14] 이후 1610년에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재건하였으나, 1662년에 역시 지진으로 파괴되었다(...)
난다이몬과 다이부츠덴의 건축 양식은 <대불양식(다이부쓰요)>으로, 각 시대마다 형태와 구조가 좀 다르며, 일본에서는 상당히 드물게 시도된 양식이다. 기본적으로 복잡한 구조가 인상적으로 다가오는 양식으로, 건물을 세우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한 흔적이 보인다고 할 수 있겠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대량식 구조지만, 엄청나게 큰 건물을 지탱하기 위해서 수많은 보와 포로 겹겹이 연결하는 등 갖은 방법을 다 동원했다. 심지어 후대에 건립된 다이부쓰덴은 일반적인 동양 전통 건축물에서는 쉽게 보기 힘든, 보를 대각선으로 설치하는 방법까지 동원되었다.[15][16] 난다이몬과 현재의 다이부쓰덴은 구조나 양식이 다소 다르며, 헤이안 시대의 다이부쓰덴을 추정할 때 주로 난다이몬의 구조를 참고하였다.
오늘날 우리가 관광하는 거대한 대불전 1709년 재건된 3번째 것으로, 이 세 번째 대불전은 과거의 대불전에 비해 크기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약 2천 톤에 달하는 기와의 무게 때문에 지붕의 처마가 조금씩 계속 처져가면서 처마의 라인이 울퉁불퉁하게 흐트러진다. 이를 막기 위해 1882년에 버팀목을 삽입하는 공사가 끝났지만, 그래도 무게를 버텨내지 못했다. 다이부쓰덴 정도의 커다란 목조 건축물에 대한 경험을 가진 목수가 그 시대에는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도 실패한 이유 중 하나였을 것이다.
[image]
메이지 시대의 다이부쓰덴. 지붕 좌우 아래에 버팀목이 있다.
결국 메이지 유신 이후 완전히 해체 수리하는 과정에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해체 수리를 담당한 건축가들은 유럽에서 교육을 받았던 사람들로, 많은 근대식 건축 재료와 공법이 사용되었다. 철골 트러스를 이용하여 지붕을 지탱하게 하였으며, 거대한 나무 한 그루로 이루어졌던 기둥들을 나무 여러 개를 합쳐 철물로 묶은 기둥으로 교체하여 강도를 높였다. 그리고 기와의 수를 줄여 지붕의 무게를 12% 감소시켰다. 이에 몇몇 사람들은 그냥 현대에 잘 개조된 현대 건축물로 보기도 한다.
2.1. 대불전 안의 볼거리
다이부쓰덴 안에는 높이 14.9 8m에 무게 452 t인 청동 비로자나불이 있다. 청동 대불 역시 여러 번 화재 등으로 부분이 녹거나 파괴되어 다시 제작되었지만, 상당한 크기기 때문에 일부분은 남아 이어져 왔다.
현재의 대불은 1691년에 완성된 것으로,[17] 불상의 하부는 처음 만들어졌던 부분이 남아있다고 한다. 특히 불상이 앉은 연꽃 대좌에는 창건 당시 법화경의 내용을 새긴 그림이 그대로 남아 있다. 거대한 손바닥에는 성인 16명이 올라갈 정도라고 한다.
그 외에도 대불의 좌우에 허공장보살과 여의륜관음을, 대불 뒷편으로는 광목천왕상과 다문천왕상을 모셨다. 난다이몬에는 가마쿠라 막부 시대에 만들어진 금강역사 입상이 2좌가 있다. 또 다이부쓰덴의 명물로 구멍이 뚫린 기둥이 있는데, 이 구멍을 통과하면 1년치 액땜을 한다는 소문이 있다. 그래서 다들 시도해보지만... 아이나 몸이 작은 여자가 아니면 힘들다는 얘기가 있지만, 실제로는 약간 과체중의 성인 남성도 통과할 수 있을 정도의 크기이다. 조금 뚱뚱해 보이는데? 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거짓말처럼 쑤욱.. 까진 아니고 조금 힘들게나마 빠져나오긴 한다. 보통 체격의 성인이 들어가면 들어가면서 다리가 움직일 여유의 공간이 사라지면서 팔 힘으로 빠져나와야 한다. 따라서 팔 힘이 보통 이하라면 상대방이 반대편에 서서 팔을 당겨줘야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다. 들어가고 누군가의 도움 없이 스스로 나오기에는 체력이 받쳐 주지 않고서는 힘들다. 유튜브에서도 보면 반은 상대방이 반대편에 서서 팔을 당겨줘서 나온다. 참고로 구멍의 크기가 대불의 콧구멍 크기라는 이야기가 있다. (...)
대불전 앞마당에는 청동 등이 하나 서 있는데, 대개 모르고 지나가지만 국보다. 도다이지에서 몇 안 되는 나라 시대 창건 당시의 유물이다. 조각이 아름답고 글씨도 새겨져 있으니 유심히 보고 가자. 그 밖에 중문, 좌우 회랑, 대불전 좌우의 불상 모두 중요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국보들에 묻혀서 별로 빛은 못보지만...
3. 쇼소인(정창원)
[image]
도다이지 북서쪽 약 300 m 거리에 있는 오래된 창고. 한국에서는 정창원(正倉院)이라고도 한다. 검은 통나무를 쌓아(귀틀식) 만들어졌으며, 건물 전체가 지면에서 높이 들어올려진 모습이 특이하다. 이는 지면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피하기 위한 것으로, 고대에는 많은 건물들이 이런 식으로 지어졌다.
원래는 도다이사에 딸린 왕실 유물 창고로 지어졌는데, 창건연대는 729~749년으로 추정된다. 원래 쇼소인이란 도다이지의 쇼소인 말고도 여러 절에 여러 곳이 있었지만, 지금은 모두 없어지고 도다이지에만 1동 남았다. 긴 건물이기 때문에 3부분으로 나눠지는데, 북창 중창 남창이라고 나눠진다. 756년에 쇼무 덴노가 죽자 왕비는 그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숟가락을 비롯한 칼·거울·무기·목칠공예품·악기 등 애장품 600여 종을 49재(齋)에 맞춰 헌납하였다고 한다.
오랫동안 도다이지의 관리 하에 있었지만, 지금은 궁내청 정창원관리소의 관리 하에 있다. 소장품은 1년에 한번 가을에 나라국립박물관에서 열리는 전시회에서 선별적으로 볼 수 있으며, 건물은 궁내청 관리인의 지도 하에 멀리서 구경할 수 있다. 창고라 해서 작을 것 같지만, 거의 경회루만큼 크다.
역사가 굉장히 긴 왕실 유물창고로, 한국으로 치면 무려 삼국시대 시기의 유물들도 다수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 백제의 의자왕이 일본에 선물했다는 바둑판, 바둑알,[18]
- 아래에서 설명할 민정문서와 제2신라문서. 민정문서는 종이쪼가리 하나로 어마어마한 분량의 연구를 이끌어냈다.
- 매신라물해(買新羅物解) 문서. 신라에서 일본으로 수입한 물품 리스트.
- 신라의 악기인 신라금
- 정창원 비파
- 정창원 신라 유기그릇
- 정창원 신라 유기접시
- 정창원 신라 양탄자
- 정창원 신라 숟가락. 신라에서 수입한 이후 포장도 뜯지 않았다.
- 정창원 신라 인삼
- 정창원 신라 먹
그리고 일본 황실에서 적칠관목주자(赤漆欟木廚子)[19] 는 중요시하는 유물 중 하나인데 한반도에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제기됐다.#
아키히토 덴노의 맏손주인 마코 공주는 가쿠슈인 초등과 5학년 때 가족과 함께 정창원을 방문했던 일을 초등과 졸업 작문에 쓰기도 했다. 마코 공주는 정창원에서 둘러 본 유물들에 대해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하며, 미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드러냈다. 훗날 마코 공주는 국제기독교대학 교양학부 예술과학과를 졸업한 후 영국과 일본의 대학원에서 미술품 및 박물관학을 공부하였고, 박물관 연구원 등의 일을 하고 있다.
정창원 보물들에 대한 한일 공동 심포지엄에 관한 기사. 사진 자료와 내용이 풍부하게 나와있다.
안에 있는 보물들에 대해 연구할 경우, 역사가 12번도 바뀔 수 있다고들 하지만 한국 학자는 물론이고 일본 학자들에게조차 연구를 잘 허락하지 않는다고 한다. 일본 정부와 보수적인 학자들은 고대사의 일본 황실과 연관된 것을 밝혀내는데 긍정적이지 않으며, 특히 한반도와 관련된 보물의 연구는 연구성과를 학계에 공개할 경우 일본에 득이 될 것이 많지 않다. 물론 민정문서나 정창원 신라 숟가락[20] 등 정당한 방식으로 입수해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는 유물들도 있지만, 일부 유물은 침탈 등 불법적 경로로 얻은 보물이란 사실이 연구 결과 공개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갈수록 과거사와 관련해서 악화되는 한일관계와 대한제국 고종의 것으로 여겨지는 두정갑 투구 등 한국관련 유물을 일부만 조금씩 공개했던 전례 등을 봤을 때 쇼소인의 보물들에 대한 한국학계의 전면적인 학술 연구가 시행될 가능성은 매우 적다고 할 수 있다.[21]
3.1. 신라 민정문서
이 쇼소인이 한국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것은, 삼국시대와 관련된 유물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8~9세기 신라의 지방 통치에 관한 중요한 자료인 신라 민정문서[22] 가 바로 이 쇼소인에서 발견된 것이다.
- 발견 경위 : 1933년에 도다이지 쇼소인 중창 소장의 유물을 정리하다가 손상되었었던 불경인 화엄경론(華嚴經論)의 표지를 수리하는 도중 그 안쪽에 붙였던 종이로 발견되었다. 다만 이 시기의 불경은 긴 비단이며, 그것을 대나무 등으로 만든 책갑이라는 표지로 말아 보관하는 형태이기 때문에 현대인이 쉽게 그 모습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아무튼 신라 민정문서는 불경의 포장지로 쓰였던 것.
다만 지금에 와서는 다른 기록들이 거의 없는 상황이라 이 민정문서의 사료적 가치가 아주 높아졌다는 게 아이러니. 그리고 이 민정문서는 아무래도 일본 화엄경론의 일부였기 때문에 결국 촬영 후 원상태로 도로 붙여 두었고, 지금은 사진본으로만 볼 수 있다.
4. 그 외
다이부쓰덴 동쪽으로 올라가면 니가쓰도(二月堂)와 산가쓰도(三月堂)가 나온다. 니가쓰도는 대불의 개안공양이 이루어진 752년부터 창건되었고, 십일면관음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는데 이 불상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비불이다. 홋케도(법화당法華堂)이라고도 불리는 산가츠도는 도다이지의 전신가람인 긴쇼지의 견색당(羂索院)으로, 불공견색관음을 본존으로 모시고 있다. 그 외에도 범천, 제석천 등 16개에 달하는 불상을 모시고 있었는데, 일부는 도다이지뮤지엄이 개관하면서 옮겨졌다. 2014년 현재 공사가 완료되어 다시 산가쓰도로 옮겨졌다.
도다이지를 잘 모르는 방문자들은 다이부쓰덴만 보고 나가버리는데, 니가쓰도와 산가쓰도도 중요한 건물이며, 오래된 역사를 가지고 있는 아름다운 곳이므로 한 번 방문하는 것이 좋다. 특히 니가쓰도에 올라가서 내려다보는 도다이지와 나라 시내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건물 자체뿐만 아니라 전망대이기도 하다.
대불전 입장료는 500엔. 난다이몬 안에 있는 뮤지엄(박물관)과 통합 입장료는 800엔. 뮤지엄만 관람하려면 500엔. 니가쓰도는 올라가 볼 수 있으며 따로 입장료는 없다. 산가쓰도는 2013년까지 공사중이어서 폐쇄되어 있었으나, 현재 공사가 완료되었고 내부에 들어가 불상을 보려면 500엔을 내야 한다. 그 밖에 승려들이 계(戒)를 받던 가이단인(계단원)도 따로 500엔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안에는 국보로 지정된 사천왕상이 있으나, 건물 자체는 별로 큰 가치가 없으므로 불상에 관심 있는 사람만 들어가보자.
그 외에 체험해 볼 만한 것으로, 난다이몬 밖은 나라 사슴공원으로 꽃사슴 패거리가 자유롭게 돌아다닌다. 사람을 그리 경계하지도 않아서, 만져도 그리 싫어하지도 않는다. 이 사슴들에게 줄 수 있는 센베를 파는 곳도 많은데 10개 정도를 100엔 내외에 구입할 수 있는데, 똘망똘망한 눈을 빛내면서 한없이 천진난만한 모습으로 쳐다보던 사슴들이 사람 뜯어먹는 몬스터로 변하는 지옥도를 체험할 수 있다.[24] 여름철에 뿔이 돋은 사슴이 삐져서 들이받으면 상당히 아프므로 적당히 알아서 도망치자. 사슴들이 많은 만큼 충분히 예상할 수 있겠지만 길 곳곳에 지뢰가 떨어져 있으니 신발에 봉변을 당하지 않으려면 알아서 잘 피해 걸어다녀야 한다. 수시로 치우고는 있으나 사슴의 수가 워낙 많아서...
근처의 역은 나라역과 킨테츠나라역이 있다. 거리상으로는 킨테츠나라역 쪽이 더 가깝다. 나라역을 이용할 경우 거리도 약 2.7 km로 제법 멀고 가는길에 오르막길이 조금 있어서 시간적, 체력적 여유가 충분하거나 금전에 쪼들리는 상황이 아니라면 택시를 이용하는 것이 좋다. 요금은 약 1천 엔 정도. 킨테츠나라역을 이용할 경우엔 거리가 약 1.6 km 정도로 더 가까워 도보로 가는것도 가능하다. 이쪽은 택시를 이용할 경우 기본요금인 680엔이면 갈 수 있다.
크기에서 비견될 만한 건물로는 교토 히가시혼간지에 있는 고에이도가 있다.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에서는 일본의 불가사의로 나왔다.
나라현에서 세 번째로 높은 '''건축물'''이다. 현재 나라현 최고층 '''빌딩'''은 미그랑스이다.
그리고 2017년 8월 8일, 도다이지 법화당 쪽에서 한글 낙서가 발견되어 수사에 들어갔다고 한다(...)도다이지 화당에 낙서 한글 같은 문자 현경 수사
5. 관련 문서
[1]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2] 현존하거나 이미 사라진 문화적 전통이나 문명의 독보적 또는 적어도 특출한 증거일 것[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여기 있는 난다이몬이 일본 건축물들과 비교하면 자못 다른 느낌이 있는데, 이는 현재 남아 있는 도다이지의 건물 중 유일하게 중국 송나라 양식을 그대로 따르는 유일한 건축물이기 때문이다. 원래는 전체가 송나라 양식을 본따 만든 건물이었지만 목조건물이다 보니 전쟁과 화재에 불타서 전소되었다. 현재 있는 절은 후대에 다시 세운 건물이다.[6] 주로 백제계 도래인들. 쇼무 천황의 명으로 도다이지 대불을 조영하는데 필요한 인력과 재력을 시주받는 역할인 권진(勸進)으로 임명된 사람이 백제계 도래인으로 왕인의 후손을 자처한 교기(行基) 스님이었고, 도다이지 불상에 입힐 금을 처음으로 일본 땅에서 찾아내고 조정에 바친 사람은 당시 무쓰노카미(陸奧守)를 맡던 구다라노고니키시 교후쿠(百濟王慶福)와 그이가 거느린 백제계 주금 장인들이었다(그때까지 일본은 금을 자체 생산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구다라노고니키시 교후쿠가 금을 발견한 것은 일본 최초의 금 발견이기도 하다).[7] 이름은 거창하게 나라지만 결국 당시 정권의 하위 행정단위일 뿐이었다.[8] 일본 정권의 초기에 불교의 힘을 빌어 중앙집권화를 이루기 위해 전국 각지에 세운 국립 사찰들[9] 한국도 비슷한 통일신라 시기에는 사천왕사나 불국사 등 2탑식이 유행하였다.[10] 1157 ~ 1185.7.21.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5남이다.[11] 하필 불을 놓은 때는 음력 12월 겨울로 한창 건조할 때였으니 활활 타기 좋은 때였다.[12] 단, 마쓰나가 히사히데가 진짜 불을 질렀는지는 이견이 있다. 첫 번째 화재의 경우 화재가 있고 '''석 달 만에''' 다이라노 기요모리가 사망했고 단노우라 전투에서 헤이케가 패망한 뒤에 시게히라도 겐지군의 포로가 되어 난토로 호송, 분노한 승병들에 의해 처형되었다.[13] 높이가 46.4 m라는 자료도 있는데, 아마도 메이지 유신 이전에 치미(지붕 제일 위의 양 끝에 붙어 있는 큰 기와)가 낮았을 때의 높이로 추정된다. 예전 사진을 보면 지금 다이부쓰덴의 치미가 금색의 높은 것으로 바뀌었음을 알 수 있다.[14] 이때 히데요시가 "나라 지키라고 만들어놨더니 니 몸도 하나 못 지키냐." 외치며 불상에 대고 화살을 쏴버렸다나... [15] 그러나 유일한 것은 아니다. 중국에서는 이따금 볼 수 있는 방법. 애초에 도다이지 재건을 발원한 인물이 송나라에 유학한 경험이 있던 조겐(重源)이라는 승려로, 조겐이 중국에서 초청해온 진화경(陳和卿)이라는 장인이 다이부쓰덴 건립과 대불 복원에 크게 일조했다고 한다.[16] 여담으로 미나모토노 요시츠네와 무사시보 벤케이의 일화로 유명한 권진장(勧進帳)이 이때 도다이지 중건을 목적으로 시주를 하러 다니는 권진(勧進) 일행으로 위장해 히라이즈미로 도망 중이던 때를 배경으로 한다.[17] 다만 몸과 손 등의 제작시기가 다르며, 1691년에 완성된 것은 머리 부분이 다시 제작되어 나머지 부분과 합쳐진 시기이다.[18] 일본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 된 바둑 세트이다. 이 바둑판은 코끼리 문양 등 한반도에서 사용되지 않은 문양이라 중국이나 일본은 중국에서 제작된 바둑판이 백제를 경유해 왜로 들어왔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바둑판의 재질이 한반도의 소나무로 밝혀져 백제에서 제작된 사실이 확인됐다.[19] 불상·불경 등을 모시는 느티나무 궤짝[20] 이건 신라에서 수입한 후 포장도 뜯지 않고 지금까지 보관 중인 미사용 숟가락 묶음이다.[21] 한편 같은 궁내청 소속의 서릉부도 보유 도서의 목록을 전부 공개하고 있지 않다는 의혹이 있고, 필사본 화랑세기 떡밥도 여기서 시작되었다.[22] 신라장적(新羅帳籍), 신라 촌락 문서라고도 한다[23] 서양에서 자포니즘을 일으킨 원인이 된 우키요에 민화 역시, 당시 일본의 도자기를 수입해서 유럽에 가져다 팔던 무역선들이 도자기를 보호하기 위해 일본에서 폐지로 버려지는 우키요에 민화 복사본 폐지로 도자기를 감싸 운반해 갔기 때문이다.[24] 실제로 음식이 아닌 것도 주면 먹는다. 그래서 관광객이 주는 휴지 등을 먹거나 해서 병들어 죽는 사슴들이 꽤 있다고. 사실 안 줘도 종이류가 눈에 보이면 먹으려고 먼저 달려드는데, 예를 들면 자전거 바구니에 있는 나라 관광지도 같은 것도 빼앗아 먹는다. 참고로 이 사슴들은 지폐도 보이면 먹으려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