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이디온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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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14년에 있었던 불가리아 제1제국의 운명을 결정지은 전투'''
1014년 7월 29일, 테살로니키 북쪽에 위치한 캄발롱구스 계곡의 클레이디온에서 동로마 제국의 바실리오스 2세가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사무일(Самуил, 재위 : 997~1014)의 군대를 격파한 전투. 이 전투로 681년 불가리아 제국 건국 이래 300년 넘게 이어져 온 불가리아-동로마 제국의 전쟁이 끝나고, 불가리아 제1제국이 멸망한다.
2. 배경
927년 시메온 1세(Симеон I, 재위 : 893~927) 사후, 불가리아 제1제국은 권력투쟁과 내부분열로 인해 쇠퇴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키예프 루스의 대공 스뱌토슬라프 이고레비치(Святослав Игоревич, 재위 : 945~972)가 불가리아를 침략[1] 해 당시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보리스 2세(Борис II, 재위 : 969 ~ 971)와 그의 동생 로만(Роман, 재위 : 977~991)을 포로로 삼은 후, 도읍을 키예프에서 당시 불가리아의 영토였던 페레야슬라베츠(Переяславец)[2] 로 옮겨 발칸 반도에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고 있었다. 당시 불가리아 지역은 동로마 제국과 중부유럽 지역 사이에 있는 교통의 요지라 사방의 문물을 모두 받을 수 있었기 때문.
스뱌토슬라프의 야망은 동로마 제국의 견제를 불러왔다. 콘스탄티노폴리스까지 몰려와 깽판을 치던 스뱌토슬라프와 키예프 루스의 군대는 당시 동로마 황제 요안니스 1세에게 격파되고, 동부 불가리아가 동로마 제국에 합병되었다. 이때 일시적으로 불가리아 총대주교가 강제 폐지되었고, 보리스 2세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압송되었다. 그러다가 976년에 자신의 동생인 로만과 함께 동로마 제국에서 탈출해 불가리아로 귀환하려 했지만 동로마 제국의 옷을 입고 있어 첩자라고 오해를 사 불가리아의 국경수비대에게 살해당하고, 오직 로만만이 불가리아로 귀환하여 사무일의 추대로 차르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로만은 미혼인데다 요안니스 1세에게 거세를 당한 상태였기에 그가 후에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혀 사망하자 사무일이 차르가 된다.
976년에 동로마 제국에서는 요안니스 1세가 죽자 바실리오스 2세가 제위에 올랐는데[3] , 986년에 아나톨리아의 반란을 뒤로 하고 불가리아로 원정을 떠났다가 소피아#s-2 부근에서 벌어진 트라야누스 관문 전투에서 참패한다. 그 후 989년에 크리소폴리스 전투에서 반란이 모두 제압되자, 내부의 적이 없어진 황제는 이제 불가리아로 창끝을 돌렸다.
1014년 7월, 바실리오스 2세가 직접 군을 지휘하여 불가리아로 다시 진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차르 사무일이 불가리아군을 이끌고 캄발롱구스 협곡에 성벽을 쌓아 진을 쳤다.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 본토로 빠르게 나아가기 위해서는 캄발롱구스에 있는 불가리아군을 격파해야 했다.
3. 그날
1014년 7월 19일에 불가리아의 차르 사무일이 이끄는 불가리아군과 바실리오스 2세가 이끄는 로마군이 캄발롱구스 협곡의 클레이디온에서 격돌했다. 초전에는 불가리아군이 협곡을 끼고 로마군의 공격을 잘 받아냈다. 그러자 바실리오스 2세는 니키포로스 시피아스에게 명령을 내려 벨라시차 산을 우회하여 불가리아군의 배후를 찌를 것을 명령했다. 니키포로스는 험로를 따라 불가리아군의 배후에 진출하는데 성공했고, 7월 29일 바실리오스 2세와 니키포로스는 불가리아군을 협공하여 방어선을 돌파한다. 사무일과 그 아들 가브릴 라도미르(Гаврил Радомир, 재위 : 1014 ~ 1015)는 근처에 있는 스트루미차로 후퇴하려고 했지만 로마군은 신속하게 추격에 나섰다. 악전고투 끝에 사무일은 가브릴의 용맹스러운 활약에 힘입어 간신히 혈로를 뚫고 도망쳤지만, 주력 부대는 대부분 죽거나 사로잡혔다.
4.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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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동로마 제국의 대승으로 끝났다. 로마군은 불가리아군 포로를 15,000명이나 포획했으며, 이로써 불가리아군의 주력은 대부분 와해되었다. 다만 이 전투로 불가리아가 끝장난 것은 아니었다. 바르다르 계곡을 완전히 점령하려면 스트루미차를 손에 넣어야 한다고 판단한 바실리오스 2세는, 테오필락토스 보타니아티스에게 스트루미차 주변의 요새와 성곽들을 정리하도록 하고 자신은 직접 스트루미차를 공격하기로 했다. 테오필락토스는 요새들은 손에 넣었지만 곧이어 가브릴 라도미르의 복병을 만나 대패하고, 테오필락토스 본인도 전사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가브릴 라도미르가 직접 창으로 테오필락토스를 찔러 살해했다고 한다. 이 전투에서 입은 손실이 적지 않았는지 바실리오스 2세도 스트루미차의 포위를 풀고 철군한다. 그러나 전투의 결과는 명백했다. 후속 전투에서 불가리아가 일격을 가해 로마군이 일시적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불가리아의 피해는 도무지 극복할 수 없을 정도였다. 포로가 1만 5천명이라면 전사자와 사상자, 도주 병력은 이보다 훨씬 많을 것이며, 사실상 불가리아 제국의 군사적 역량은 사실 클레이디온에서 거의 박살이 났다고 볼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야사에서는 바실리오스 2세가 '''불가리아군 포로 15,000명을 100명씩 150개조로 나눠서 99명은 두 눈을 모두 뽑아 장님으로 만들고 나머지 1명은 한 눈만 뽑은 뒤 애꾸 한 명이 나머지 99명을 인솔해서 돌아가게 했다'''고 전해진다. 이 일화로 바실리오스 2세에게 불가록토노스(불가르인의 학살자)라는 별명이 붙여졌는데,[4] 실제로는 과장되어 전해진 이야기라고 한다. 하지만 불가리아군이 15,000명의 병사를 포로로 잃은 것은 사실이다. 그 후 바실리오스 2세는 다 이긴 것이나 다름 없다며 일부 병력을 남겨두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회군했다. 불가리아의 사무일은 전투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사망했는데, 사실은 이 전투의 결과로 인해 충격을 받아 후유증으로 쓰러져 죽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 전투에서 용맹한 모습을 보인 가브릴 라도미르도 귀족들간의 내분에 휩싸여 암살당했고, 바실리오스 2세는 느긋하게 소모전으로 나가 불가리아를 정복하는 데 성공했다.
5. 영향
이 패배로 불가리아는 큰 타격을 입어 전투가 일어난 지 3년 후, 제1차 불가리아 제국은 동로마 제국에게 다시 공격당해 멸망했다. 불가리아에 남은 병력들은 바실리오스 2세의 명령으로 모두 불가리아 테마에 흡수되어 로마의 군대는 전쟁 전보다 더 늘어났다고... 인구 역시 불가리아의 인구가 편입되어 로마의 인구가 증가한다. 그리고 불가리아는 나중에 마누엘 1세가 죽고 동로마 제국이 쇠약해진 1185년에 독립할 때까지 170여년간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놓이게 된다.
[1] 첫번째 침략은 968년에 있었다. 당시 동로마 황제였던 니키포로스 2세가 불가리아를 견제하기 위해 스뱌토슬라프에게 금을 보상으로 내걸고 불가리아 침공을 유도했던 것. 스뱌토슬라프는 침공후 군사적 성과를 거뒀으나 페체네그족이 키예프를 침공하는 바람에 다시 돌아가야했다.[2] 현 루마니아 누파루(Nufăru), 당시 불가리아의 교역도시였다고 한다.[3] 단독 황제로 즉위한 것.[4] 그리고 근 200년 뒤 제2차 불가리아 제국의 차르 칼로얀은 '불가록토노스'라는 호칭에 대한 보복으로 스스로를 '로마녹토노스(Romanoktonos)', 즉 '로마인의 학살자'라고 일컬었으며 실제로도 이를 실행에 옮기고 다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