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로드 샤브롤
[image]
(2008년경)
Claude Charbrol
1930.06.24 ~ 2010.09.12
1. 개요
프랑스의 영화감독. 누벨바그 세대 감독으로 꼽히며 카예 뒤 시네마 평론가 감독 그룹 멤버 중 하나였다.
2. 소개
누벨바그 세대 중에서는 앨프리드 히치콕 광팬으로 유명했으며, 초기 두 편 이후 스릴러나 범죄, 미스테리 영화로 전환해 큰 성공을 거뒀다.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프랑스에서는 흥행 감독으로 입지가 있었던 편. [1] 상당한 다작가이기도 해서 생전엔 1-2년 꼴로 영화를 내놓는 감독이었다.
공공연연한 좌파인데다 루이스 부뉘엘 영향을 받아 초현실주의와 사회 풍자적인 블랙 유머 성향도 강하다. 부뉘엘 영화처럼 샤브롤 영화에서 부르주아는 조롱의 대상이며 좋은 꼴을 못 본다. (...) 중기에는 대놓고 초현실적인 블랙 코미디를 시도한 영화도 있을 정도. 반대로 이런 이미지와 달리 절절한 멜로드라마에도 소질을 보였다.
다만 정치적으로나 영화 언어적으로나 급진적이었던 장 뤽 고다르나 프랑스 영화의 체질을 바꾸려고 시도했던 프랑소와 트뤼포랑 달리 영화 어법적으로는 비교적 옛 미국/프랑스 영화 전통에 충실한지라 개성이 묻어가는 경향이 있다. 널리 알려진 일화로, 고다르의 네 멋대로 해라 시사회가 끝나고 에릭 로메르에게 '''고다르가 미쳤나 보다'''라고 말한 일화가 있다. 오죽했으면 평론가들 사이에서 샤브롤과 나머지 누벨바그 영화 감독들 간의 공통점은 '''앙드레 바쟁을 스승으로 모시며 미국 영화를 좋아하는 영화광''' 정도라고 말할 정도. 실제로 초기 대표작 몇 편을 제외하면 누벨바그 영화적인 느낌이 적고 오락성이 비교적 크다. 다작으로 인해 퀄리티 격차가 있었던 것도 한 몫한다.
누벨바그 영화 감독 중에서는 영화 산업의 생리를 잘 알았고 빨리 정착했던 인물. 자크 리베트처럼 조감독 경력이 있진 않았지만 [2] , 샤브롤은 영화가 돈이 없으면 성립할 수 없는 예술이라는걸 알았고 흥행작을 만들려고 고심했다. 또한 친척의 돈을 빌린 뒤 제작사를 차려 누벨바그 동료들을 도와주기도 했다. 전반적으로 누벨바그 감독 중에서는 작가적 에고가 비교적 덜했던 인물.
노년에도 왕성한 활동을 했지만, 2010년 타계했다.
3. 연출작
4. 기타
첫째 아들인 마티유 샤브롤은 영화 음악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90년대 클로드 샤브롤 영화 작곡 전담으로 참여하기 시작했다. 아버지 사망 이후로는 은퇴한 상태. 오드랑과 사이에 얻은 이복 아들인 토마스 샤브롤은 조단역 배우로 활동했으며 아버지 영화에도 출연하기도 했다.
페르소나로는 스테판느 오드랑 [3] 과 이자벨 위페르가 꼽힌다. 오드랑하고는 아예 연인 관계로 전 부인과 이혼후 재혼하기도 했으며 (1980년대 이혼한다), 위페르는 1978년 비오레트 노지에르로 만난 뒤, 오드랑을 대신해 후기-말기 페르소나로 자리잡기도 했다. 의식(영화)는 샤브롤과 위페르의 대표작으로 꼽힐 정도.
출생지는 파리였으나 성장은 누벨아키텐 시골 마을에서 했다고 한다. 본인도 파리지앵이었던 적은 없다고 밝힐 정도. 본인이 밝히길 사팔뜨기였으며 엄격한 가톨릭 가정 출신이다. 친가는 약사 집안인 전형적인 부르주아 가문였다고 한다. 다만 아버지이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부유함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때문에 어머니 입김이 강한 집안에서 성장했다. 아버지랑은 사이가 좋았지만 어머니하고는 데면데면했던 모양. 영화광이 된 계기는 영화관을 운영하던 삼촌의 영향이 크다고 한다. 출처
5. 참고 문헌
[1] 기복이 있었지만 100만-200만 영화가 여러개 있는 안타형 흥행 감독이었다. 돈 들일 일이 없는 영화를 만들다 보니 꾸준히 활동 가능했다.[2] 정작 리베트는 상업적으로 안 팔릴 영화를 찍었다는게 아이러니[3] 재미있게도 스테판느 오드랑은 샤브롤이 존경하는 부뉘엘의 대표작인 부르주아의 은밀한 매력에 출연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