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자벨 위페르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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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년 데뷔한 이래로 100편 이상의 영화와 텔레비전 제작물에 출연한 프랑스의 배우이다. 위페르는 총 16번의 후보지명으로 세자르 영화제(프랑스의 대표 영화제)에 가장 많이 후보지명된 배우가 되었고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1995)과 폴 버호벤의 《엘르》(2016)로 여우주연상을 두 번 수상했다. 1994년 프랑스 국가공로훈장(Ordre national du Mérite)을, 1999년엔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았다.
칸 영화제에서 《비올렛 노지에르》(Violette Nozière) (1978)와 《피아니스트》(2001)로 두 번 여우주연상을 수상했고, 또한 베네치아 영화제에서도 《여자 이야기》(1988)와 《의식》(1995)[2] 으로 여우주연상을 두 번 수상했다. 국내에선 베를린을 포함한 세계 3대 영화제에서 모두 여우주연상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나 베를린에서 받은 상은 여우주연상이 아닌 '예술 공헌상'이다. 국제적인 명성을 가진 다작 배우들 가운데서도 눈에 띄는 연기행보를 보이고 있으며 예순 중반에 가까운 나이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와 훌륭한 연기로 현재 활동중인 많은 여배우들에게도 좋은 롤모델로 손꼽힌다.
연기 스타일은 사실적이며 미니멀하고 차분한 편. 객관적인 캐릭터 분석과 정확한 계산, 절제된 연기 언어로 연기를 하는 배우다. 강한 카리스마와 개성을 보여주는 연기를 선보이는 메소드 연기자들이나 이자벨 아자니하고는 정반대이다. 때문에 지적이거나 차분한 여성 캐릭터의 비중이 높다. 물론 이와 반대되는 수다쟁이나 신경질적인 타입의 연기도 상당히 잘하는 편. 당장 베니스 영화제에서 두 번째 여우주연상을 안겨준 《의식》의 주인공 잔 역 역시 경박한 사이코패스 캐릭터였다. 특히 미묘한 감정 표현과 파괴되거나 뒤틀린 내면의 묘사에 매우 탁월한데, 대표적으로 《피아니스트》에서와 같은 영화가 있으며 여기서 가히 소름이 끼치는 경이로운 연기를 보여준다. 전후 현대 영화가 추구하는 연기 스타일과 잘 맞아떨어진데다 프로페셔널한 태도로 호감을 받아 빠르게 입지를 굳힌 편이다.
특유의 연기 스타일 때문에 냉정하고 미니멀한 서스펜스 영화로 유명했던 클로드 샤브롤이랑 궁합이 좋아 총애를 받았다. 심지어 샤브롤 영화를 분석하면서 스테판 오드랑 시기와 이자벨 위페르 시기로 구분하는 평자도 있을 정도. 당장 위에 언급한 여우주연상 수상작 중 세 편이 샤브롤 영화다. 샤브롤 말고도 미카엘 하네케하고도 자주 작업했다.
영어 연기를 잘하는지라 영어권 영화에서도 종종 볼 수 있다. 홍상수의 영화에서도 영어로 연기했다.
2. 생애
2.1. 생애 초기와 1980년대의 활동
이자벨 위페르는 1953년 3월 16일 프랑스 파리의 16구역에서 금고 제작업자인 아버지와 영어 선생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대인으로 그의 가족은 슬로바키아 프레쇼프 지역에서 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페르는 어머니를 따라 카톨릭으로 길러졌다. 그녀는 막내로 위에 오빠와 3명의 언니가 있으며, 언니인 카롤린 위페르는 연출가로 일하고 있다. 위페르는 파리의 교외 지역인 빌 다브레에서 자라났다.
어머니의 권유에 따라 어린 나이에 연기를 시작한 위페르는 파리에서 아역 스타가 되었다. 그녀는 후에 베르사유 음악원(Conservatoire à rayonnement régional de Versailles)과 파리국립연극원(Conservatoire national supérieur d'art dramatique (CNSAD))을 졸업하였다.
위페르는 1971년 《Le Prussien》이라는 작품으로 TV 데뷔를 하였으며, 1972년에는 《Faustine et le Bel Été》이라는 작품으로 영화 데뷔를 하였다. 1974년에는 프랑스 국내에서 외설적이라는 이유로 크게 논란이 되었던 《고환 (Les Valseuses)》에 출연하여 인지도를 크게 높였다.
국제적인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레이스 짜는 여인 (La Dentelliere)》(1977)에서 연기하면서 부터였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신인여우상을 수상하였다. 1978년에는 클로드 샤브롤의 《비올렛 노지에르 (Violette Nozière)》에 출연하여 1978년 제31회 칸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1980년에는 《천국의 문》에 출연하여 처음으로 미국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지만, 영화는 흥행에 실패하였다(후에 저주받은 걸작이라고 재평가되기는 하였다).
1980년대의 위페르는 다소 수수께끼같고 감정적으로 거리감이 드는 캐릭터들은 연기하였다. 대표적으로는 《룰루》(1980), 《인생 (Sauve Qui Peut)》(1980), 《우리들 사이 (Entre Nous)》(1983), 《여자 이야기 (Une Affaire De Femmes)》(1988)[3] 등이 있다.
그런 한편으로 1987년에는 커티스 핸슨이 감독한 에로틱 스릴러인 베드룸 윈도우에 출연하며 다시 한 번 미국 영화계에 모습을 보였다.
2.2. 1990년대부터 현재까지의 활동
위페르는 1994년 할 하틀리의 《아마추어》에 출연하여 베드룸 윈도우 이후로 오랜만에 영어로 연기하였다. 1995년에는 상드린 보네르와 함께 클로드 샤브롤의 《의식 (La Cérémonie)》에 출연해 광적인 우체국 직원으로 열연하여 1995년 제52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과 1995년 제21회 세자르 영화제에서 각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샤브롤과의 협업은 계속되어 《사기 (Rien Ne Va Plus)》(1997), 《초콜릿 고마워 (Merci pour le Chocolat)》(2000) 등에 출연하게 된다.
2001년에는 미카엘 하네케의 《피아니스트》에 출연하여 피가학적 성향을 가진 피아노 교수로 열연한다. 여기서의 연기는 그녀의 필모그래피 상에서 가장 인상깊은 연기 중 하나로 꼽히며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2001년 제54회 칸 국제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다. 2004년에는 루이 가렐과 함께 《내 어머니 (Ma Mère)》에 출연하여 청소년 아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지는 중년의 여성으로 열연하고 더스틴 호프먼과 함께 데이빗 O. 러셀의 《아이 러브 헉커비스》에 출연하였다.
위페르는 프랑스의 연극 분야에서 최고 권위의 상인 몰리에르 상에 7번 후보로 오르는 등 연극 배우로서도 성공하였다. 대표적으로 2001년 파리 프로덕션의 《메데이아》, 2005년 오데옹 유럽 극장에서 공연한 헨리크 입셀의 《헤다 가블레르》 등이 있다. 2005년 후반에는 로열 코트 극장 프로덕션의 《4.48 Psychosis》로 미국에서 공연하였다. 2009년에는 뉴욕에서 《Quartett》을 공연하면서 연극 무대로 복귀하였다.
위페르는 칸 영화제에 여러 차례 사회자와 심사위원 자격으로 위촉되었으며, 두 번의 여우주연상 수상을 하였다. 2009년 5월 13일부터 5월 24일까지 열린 제62회 칸 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장으로 위촉되어 미카엘 하네케의 《하얀 리본》에 황금종려상을 수여하였다.
2012년에는 홍상수의 《다른나라에서》와 미카엘 하네케의 《아무르》에 출연하였다. 《다른나라에서》의 촬영을 위해서는 수행원도 없이 혼자서 가방 하나만 끌고 한국까지 날아와 인천국제공항에서 촬영지까지 갔다고 한다. 두 영화 모두 2012년 제65회 칸 국제 영화제 경쟁부문에 초청받았으며, 《아무르》는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다.
2013년에는 케이트 블란쳇과 엘리자베스 데비키와 공동으로 시드니 극단에서의 《하녀들》에서 주연을 맡아 공연하였다. 이 프로덕션은 2014년 8월 뉴욕의 링컨 센터 페스티벌에서 공연하기도 하였다.
2016년에는 평단으로부터 극찬을 받은 두 영화인 미아 한센-러브의 《다가오는 것들》, 그리고 폴 버호벤의 《엘르》에 출연하였다. 전자는 베를린 영화제[4] , 후자는 칸 영화제에서 첫 선을 보였다. 위페르는 두 영화로 세계 유수 영화제를 휩쓸었다. 공통으로는 전미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뉴욕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L.A.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였다. 특히 《엘르》에서의 연기로는 2017년 제42회 세자르 영화제 여우주연상, 2016년 제74회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 극영화 부문, 고담 독립 영화상 여우주연상, 인더펜던트 스피릿 어워드 여우주연상 등을 수상하였다. 수상 외에도 2016년 제89회 아카데미 시상식과 크리틱스 초이스 영화상에서 여우주연상 후보로 올랐다. 같은 해에 위페르는 크쉬슈토프 바를리코프스키의 연극 프로덕션의 《페드르》로 유럽과 뉴욕의 브루클린 뮤직 아카데미(BAM)에서 공연하였다.
3. 출연
'''너무 길어서 개별 문서가 작성되었다...''' 그만큼 엄청난 경력을 자랑하는 배우. 자그마치 약 '''45년'''이며 휴식기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다.
'''개별 문서로 이동'''
4. 수상
- 영국 아카데미 시상식 가장 촉망되는 배우상(1978)
- 베를린 영화제 은곰상(2002)[5]
-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2번 수상(1978, 2001)
- 세자르 영화제 여우주연상 2번 수상(1996, 2017)
- 유러피안 영화제 여우주연상 2번 수상(2001, 2002), 공로상 수상(2009)
- 골든 글로브 여우주연상 수상(2017)
- 프랑스 국가공로훈장(Ordre national du Mérite) 슈발리에(1994)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슈발리에(1999)
- 베네치아 영화제 여우주연상 2번 수상(1988, 1995), 특별사자상(공로상, 2005) 수상
- 프랑스 국가공로훈장(Ordre national du Mérite) 오피시에(2005)
- 레지옹 도뇌르 훈장 오피시에(2009)
- 보스턴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수상(2016)
- 플로리다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수상(2016)
- 인디펜던트 스피릿 어워즈 여우주연상 수상(2017)
- 인디와이어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수상(2017)
- 로카르노 영화제 공로상(2011)
- 런던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수상(2016), 공로상 수상(2016)
- 로스앤젤레스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수상(2016)
- 뤼미에르 시상식 여우주연상 4번 수상(1996, 2001, 2006, 2017), 공로상 수상(2016)
- 몬트리얼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2000), 공로상 수상(2008)
- 모스크바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1991), 공로상 수상(2008)
- 뮌헨 국제 영화제 평생 공로상 수상(2014)
- 전미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수상(2016)
- 뉴욕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수상(2016)
- 뉴욕 온라인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수상(2016)
- 팜 스프링스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2017)
- 러시아 영화 평론가 조합 여우주연상 2번 수상(2001, 2002)
- 샌디에고 평론가 협회 특별상 수상(2002)
- 샌프란시스코 평론가 협회 여우주연상 2번 수상(2002, 2016)
- 산 세바스티안 영화제 평생 공로상 수상(2003)
- 새틀라이트 시상식 여우주연상 수상(2017)
- 시애틀 국제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2002)
- 세인트 루이스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수상(2016)
- 스톡홀름 국제 영화제 평생 공로상 수상(2011)
- 밴쿠버 비평가 협회 여우주연상 수상(2016)
5. 평가
주 활동무대가 할리우드가 아니다보니[6] 연기경력과 명성에 비해 인지도는 낮은 편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에겐 듣보취급을 당하기도 하지만 연기경력, 수상경력을 종합하면 사실 비교할 만한 배우가 거의 없을 정도의 대배우다. 이동진 평론가도 자신이 진행하는 영화 프로그램에서 이자벨 위페르에 비교될 수 있는 유일한 배우는 메릴 스트립 밖에 없다고 얘기했을 정도다. 니콜 키드먼, 제시카 차스테인을 비롯한 수 많은 여배우들의 연기 롤모델로 손꼽히고 미카엘 하네케, 클로드 샤브롤을 비롯한 거장 감독들의 러브콜도 꾸준히 받는다. 영화를 새롭게 정의하는 결정적인 역할 연기로 유명하고, 지적이고 깊은 숙고 끝에 나오는 연기로 감정이입을 유도하는데 뛰어난 배우라고 평가된다. 그리고 이자벨 위페르에겐 할리우드 꼬리표 없이도 성공한 여배우라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6. 그 외
- 2017년 《엘르》에서 보여준 훌륭한 연기로 아카데미 시상식 여우주연상 후보에 지명되었다. 아카데미 시상식 전 열리는 수많은 비평가 협회에서 또 다른 여우주연상 후보였던 나탈리 포트만과 상을 거의 양분하다시피 받아 두 후보가 가장 유력한 여우주연상 수상후보였으나 막판에 전혀 예상치 못했던 엠마 스톤이 치고 올라와 결국 수상하지 못했다. 수상 결과에 대해선 논란이 상당히 있었다. 아카데미가 귀네스 팰트로, 제니퍼 로렌스 때 그랬던 것처럼 젊은 자국 백인 여배우를 밀어주기 위해 상을 준 것이 아니냐는 얘기도 나올 정도였다. 영화 평론가 이동진은 자신이 진행하는 프로그램 영화당에서 아카데미 상은 당연히 위페르가 받았어야했다고 얘기했다.
- 배우 줄리안 무어하고도 친한지 둘이 같이 찍은 사진이 자주 올라오고 서로에 대한 인스타그램 사진을 게시하기도 했다.
- 홍상수 감독과 3번 작품을 같이 했고 한국배우들과 함께 연기한 것은 연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편했다고 한다. 이때 남자 주연을 맡았던 유준상이 무릎팍도사에서 위페르와의 에피소드를 몇 가지 이야기 했다.
- 1982년에 결혼해 아들 둘, 딸 하나를 두고있으며 남편과는 오랜 결혼생활을 유지해왔다.
- 영화 감독 제임스 그레이하고는 애증의 관계다. 본디 클로드 샤브롤을 소개한 것 때문에[7] 친구 사이였으나 2009년 제62회 칸 영화제 심사위원으로 일하던 도중 모종의 이유로 대판 싸워서, 서로 절연한 적이 있다. 이게 카더라가 아니라 인터뷰 당시 그레이가 위페르를 '파시스트 썅년'이라고 공개적으로 디스해서 널리 알려졌다. 다만, 그레이의 2017년 인터뷰에 따르면 '파시스트 썅년'은 농담이었고, 위페르도 당시에는 화를 냈지만 지금은 화를 풀었다고 한다. 세월이 약이었던 모양. 잃어버린 도시 Z를 만들면서 위페르를 캐스팅하려고 했고[8] 위페르도 호의적이었으나, 결국 스케줄이 안 맞아서 결렬됐다고 한다.
- 이자벨 아자니와는 앙숙 관계로 1979년 영화 《브론테 자매》에 같이 출연한 것을 계기로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 도도하며 고고한 캐릭터를 매우 잘 소화하기 때문에 남성들로 하여금 부수고 싶은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연기에는 말할 나위없는 1인자. 덕분에 연기자로서 고평가를 받는 상당수의 작품에서 자주 폭행당한다.
- 2005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가브리엘》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공로상을 수상했고 2016년 칸 영화제에서 《엘르》로 여우주연상 후보로 거론되었지만 무관이었다.
[1] 이자벨 위페르와 로날 샤마와의 딸로, 어머니와 같이 배우로 활동하고 있다. 둘이 함께 《코파카바나》, 《닿을 수 없는》 등의 영화에 동반 출연하기도 하였다.[2] 같이 연기했던 상드린 보네르와 공동 수상.[3] 1988년 제54회 베네치아 영화제 여우주연상 수상.[4] 2016년 제66회 베를린 영화제 감독상 수상.[5] 여우주연상이 아니라 앙상블에 의한 특별상으로 수상한 것이다.[6] 사실 할리우드/영어권 영화에도 출연하긴 했으나 간간히 조역으로 나오는 쥘리에트 비노슈랑 달리 블록버스터라고 할만한 영화는 없다. 그나마 꼽으라면 천국의 문 정도 밖에 없다.[7] 샤브롤은 위페르를 자주 주연으로 기용했으며, 그레이의 우상이기도 했다.[8] 중후반부에 등장하는 집시 점쟁이 역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작중 비중 있는 여성 캐릭터가 니나랑 점쟁이 밖에 없는데, 퍼시 부인인 니나를 맡기엔 나이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