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스 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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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생애
2.1. 초기 생애
2.2. 1차 대전
2.3. 전간기
2.4. 2차 대전
2.5. 말년
3. 기타

'''Sir Keith Rodney Park, GCB, KBE, MC & Bar, DFC (1892.1.15 – 1975.2.6)'''

1. 개요


키스 파크는 뉴질랜드 출신의 군인으로 뉴질랜드 육군, 영국 육군 그리고 영국 공군 장교로 복무했다. 최종 계급은 공군 대장(Air Chief Marshal). 별명은 런던의 수호자(The Defender of London).

2. 생애



2.1. 초기 생애


1892년에 뉴질랜드의 템스에서 태어났다. 오클랜드의 킹스 칼리지에서 1906년까지 교육받았고 1911년에 뉴질랜드 육군에 입대하였다.

2.2. 1차 대전


1차 대전이 발발하였을때 그는 포병대대로 보내졌고 부사관으로서 갈리폴리 상륙작전에 참전한다. 1915년 7월에 소위로 임관하고 8월에는 영국 육군으로 전출된다. 1916년에 갈리폴리에서 떠나서 이번에는 솜 전투에 참전하게 되지만 10월에 작전 도중 부상을 입고 본토로 후송된다. 이후 왕립 항공 부대(Royal Flying Corps)로 보내지고 이후 48 비행대대에 소속된다.[1] 당시 탑승한 기체는 신형 브리스톨 F.2 전투기로 복엽복좌전투기였다. 1917년에 대위로 진급하였고 이후 소령으로 진급하여 48 비행대대를 지휘하게 된다. 전쟁기간동안 그와 그의 기총사수는 11기의 적기를 격추시키고 14기(공동 1기 포함)를 제어불능 상태로 만들었고 2번 격추당했다. 독일이 항복한 이후 그는 결혼했다.[2]

2.3. 전간기


종전 이후 영국 공군으로 전군되었으며 1919년에 영국 공군에 새로운 계급 체계가 도입되었을때 flight lieutenant로 계급의 명칭이 바뀌었다. 1919년부터 1920년까지 25 비행대대를 지휘하였으며 1922년에 영국 공군 참모 대학(RAF Staff College)에서 교육을 받게 된다. 1927년부터 1928년까지는 111 비행대대를 지휘하였으며 1928년부터 1929년에는 호른처치 기지(RAF Hornchurch)를 지휘하였고 1938년에는 공군 준장(Air Commodore)으로 진급하여 휴 다우딩 대장이 지휘하는 전투기 사령부의 참모장이 되었다. 다우딩의 지시에 따라 파크는 신형 단엽 전투기인 호커 허리케인슈퍼마린 스핏파이어와 레이더, 무선 통신장비의 효율적인 활용을 통하여 영국의 주요 거점을 적의 공습으로부터 지키는 것을 연구하게 된다.

2.4. 2차 대전


1940년 4월에 파크는 다시 진급하여 공군 소장(Air Vice Marshal)이 되었으며 제11그룹의 지휘관이 되었다. 11그룹은 적의 공습으로부터 런던과 잉글랜드 남동부를 지키는 매우 중요한 임무를 맡고 있었다. 11그룹 지휘관으로서 파크의 첫 실전 지휘는 됭케르크에 고립된 연합군의 병력이 탈출하는것을 보호하는 일이었다. 비록 연합군은 성공적으로 탈출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영국 공군은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다. 또한 여기서 파크는 Big Wing 전술이 형성하는데 시간이 많이 필요하고 제어하기 어려우며 비효율적이라는 전훈을 얻게 되었다. 그리고 영국 본토 항공전이 시작되었을 때 파크는 12그룹 지휘관 트래퍼드 리맬러리와 충돌하였는데 파크는 자신의 비행대가 독일 공군을 요격하는 동안 리맬러리가 자신의 기지를 지켜줄것을 요구했고 다우딩 또한 리맬러리에게 파크에게 협조할것을 지시하였으나 리맬러리는 이에 반발했고 나중에나마 이를 수용하지만 리맬러리의 직속부하인 더글러스 베이더가 제안한 대편대(Big Wing) 전술을 수용하였고 제때 대형을 이루지 못해서 11그룹의 기지를 효과적으로 방어하지 못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파크는 효율적으로 부대를 지휘하여 영국 본토 항공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파크와 다우딩은 리맬러리만큼 내부 정치에 시간을 할애할 수 없었고 이는 비판자들에게 좋은 먹이감이 되었다. 결국 파크, 다우딩과 리맬러리의 갈등으로 영국 항공전이 끝날 무렵 다우딩은 해임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파크는 23 훈련 그룹으로 전출되고 리맬러리가 파크가 지휘하던 11그룹을 지휘하게 된다. 1942년에 몰타 항공 본부(Air Headquarters Malta)를 지휘해서 몰타 항공전의 후반부를 지휘하였다. 1944년 1월에 공군 중장(Air Marshal)로 진급하였으며 영국 공군 중동 사령부를 지휘하였다. 6월에는 오스트레일리아 정부에 의해서 오스트레일리아 공군을 지휘하는것이 고려되었으나 더글러스 맥아더가 지휘관을 교체하기에는 너무 늦다고 반대하여 취소되었다. 1945년 2월에 파크는 동남아시아 연합 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3] 종전까지 임무를 수행했다.

2.5. 말년


파크는 1945년 8월 1일에 공군 대장(Air Cheif Marshal)으로 임시 진급하여 동남아시아 연합 공군을 종전 이후인 1946년 4월 30일까지 지휘하였으며 그해 12월 20일에 공군 대장으로 퇴역했다. 이후 민간 항공 사업에 관여하였는데 1947년에 호커 시들리사[4]를 위해서 아르헨티나와 항공기 판매를 협상하기도 했고 1948년에는 오클랜드에 본부를 둔 태평양 지점의 대표가 되었다. 1962년부터 1971년까지 오클랜드 시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1971년에 부인과 사별하였으며 1975년 2월 6일에 82세의 나이로 오클랜드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유해는 화장되어 오클랜드 하버의 공중에 뿌려졌다.

3. 기타


  • 런던의 워털루 플레이스에 그의 동상이 있다. 특이한 점이라면 조종복을 입고 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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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능한 지휘관이었고 중요한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당시에는 그렇게 인정받지 못했었다. 그래도 기념 동상도 있고 뉴질랜드에는 그를 기념하는 비행장도 있는걸 보면 영 인지도가 없는건 아닌 모양.
  • 상당히 미남으로 여겨졌다고 한다.
  • 오클랜드에 그의 이름을 딴 Sir Keith Park School이라는 특수학교가 있다. 해당 학교 홈페이지에 따르면 인근에 공항이 있어서 항공 관련 인물의 이름을 붙이는 경우가 많은데 이 학교는 파크의 자선을 기념하여 붙였다고 한다. 시의원으로 활동하는 동안 장애인을 도왔다고.
[1] 여담으로 그의 라이벌(?)이 될 트래퍼드 리맬러리도 정찰기 조종사로 솜 전투에 참여하였다. 재미있는건 리맬러리가 조종사가 된것도 이전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왕립 항공부대로 보내져서이다.[2] 결혼해서 2명의 자녀가 있었다.[3] 본래는 트래퍼드 리맬러리가 임명되었으나 가던 도중 비행기 추락으로 죽는 바람에 파크가 맡게 되었다.[4] 현재의 BAE Systems. 물론 각종 항공 관련 기업들의 통폐합의 결과물을 계승한거다.